〈 88화 〉3-4. 껍질인형 (1)
낡은 폐병원의 수술실은 조명을 꺼놔서 어둡고, 방치된 의료 기기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어서 몹시 음산한 풍경을 과시했다. 그러나 곰팡이 핀 병실 침대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스트레쳐카를 지나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바깥과는 대조될 정도로 복잡한 생명공학 장치들이 작동하고 있는 시설이 나왔다.
뚜, 뚜, 뚜. 스퀘어가 뇌파를 읽는 전자음이 일정한 주기로 울렸다. 수십 개는 달하는 단말기들이 저마다 바이탈 사인으로 심전도를 그리고 있었다. 의학에는 문외한인 사람이 봐도 이곳이 일반적인 의료 행위가 이뤄지는 공간이 아니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저벅저벅. 한 손에 수트케이스를 들고, 중절모를 눌러 쓴 이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리는 수많은 스퀘어들이 저마다 뚜뚜 소리를 내며 엇박으로 합창하는 광경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수트케이스를 내려놓고, 따뜻한 배양액으로 가득한 수조 앞에 섰다. 수조를 채운 배양액 밑에는 오염생물인지, 시체인지 모를 살덩이가 가라앉아 있었다.
"하루 종일 이 소리 듣고 있으면 정신병 걸리지 않나? 그 안에서는 소리가 잘 안 들리는 모양이지?"
이리는 수조에 대고 말했다. 첨벙! 찰랑찰랑! 배양액에 잠겨있던 살덩이가 수면 위로 솟구쳐 나왔다. 웅크리고 있을 때는 그저 하나의 살점 덩어리처럼 보였는데, 몸을 일으키니 팔다리 머리가 다 붙어있었다.
촤악! 살덩이가 수조 밖으로 걸어나오자 핏물이 섞인 배양액이 바닥에 뚝뚝 흘러내렸다. 살덩이는 의사 가운을 걸쳐 입었다. 가운은 조금 큰 사이즈라 헐렁헐렁 했다. 이리가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가운... 니가 입던 거 아닌가? 옷이 늘었을 리는 없고 네가 줄어든 거겠지. 왜 그렇게 몸뚱이를 작게 한 거지?"
"어쩔 수, 없다... 임의로, 체격을... 바꾸면, 모델의... 적합도가, 떨어진다."
성대가 제대로 붙어있지 않아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고, 목소리도 기분 나쁘게 긁히는듯한 소리였다. 가운을 걸쳐입은 살덩이가 주문을 외우면서 손을 뻗었다.
"나를, 먹여라... 뼈와, 살을... 내어라!"
살덩이에게서 엄청난 양의 마력이 방출됐다. 마력이 시설 안을 휩쓸고 지나가자 시설 안에 가득한 스퀘어와 바이탈 사인 단말들이 폭주했다.
뚜! 뚜뚜뚜! 뚜뚜뚜뚜뚜! 삐이이이이!! 스퀘어와 단말들이 급격한 이변에 다급한 차임벨 소리를 냈지만, 실험체들의 생명 활동이 연달아 멈추자 삐--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다가 모두 고요 속으로 가라앉았다.
실험체들의 생명력을 흡수한 살덩이에게서 피부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매끈한 피부가 온몸을 덮고, 은빛으로 찰랑거리는 보드라운 머릿결이 자라나고,
이목구비가 또렷이 자리잡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리가 말했다.
"여자네. 그것도 꽤나 어린 편인데. 니 취향인가?"
"형태는 껍질에 불과하다. 껍질에 집착하는 것보다 멍청한 짓은 없지."
성대가 완성되자 목소리가 술술 나왔다. 다만 어린 소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광기 어린 마법사의 우중충한 말투가 섞여 있어서 듣기 부자연스러웠다.
"껍질이 바뀌면 적응해야 할 점이 많군. 시야가 너무 낮아졌어. 근력도 형편 없고. 체력도 보나마나 저질이겠지."
"근력, 체력은 원래부터 저질이었잖아. 그래서, 새 몸은 마음에 들어?"
"확실히 예전 껍질과 비교해 보면 확연한 차이가 느껴져. 이 마력 순환, 그리고 활발하게 끓어오르는 회랑. 역시 내 적합도 분석은 틀리지 않았어."
"적합도니 뭐니 해도 예전에 계속 쓰던 그 몸도 여자였잖아? 역시 너 성별 바꾸는 성벽이 있는 게 맞지?"
"아가리 닥쳐."
"말 나와서 생각났는데 예전의 그 몸은 어디로 갔어?"
"예전 껍질이라면 유즈카를 말하는 건가? 이 시설 어딘가에 뒀다. 녀석은 아직도 자기가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더군."
"그럼 앞으로 걔는 그냥 식용으로만 쓸 거야?"
"아니. 이제 고기는 그만 찍어낼 거다. 애초에 내 능력을 그딴 데에다 쓰다니."
"기사단 후원도 끊어지고, 설탕 공장도 개박살 나고 있는데, 이제 고기까지 안 만들면 무슨 수로 조직 운영 자금을 벌어?"
"그걸 왜 고민하고 있지? 내가 고작 조직 뒷바라지 따위나 하려고 이 모든 연구를 쌓아올려 왔다 생각하나? 이제 갈퀴날들과는 손 뗄 때가 됐어."
"진심이야? 아직 네 연구는 보완해야 할 부분이 산더미처럼 남아있을 텐데. 이 시점에서 조직을 통수치고 빠져나가도 괜찮겠어?"
"어차피 놈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나마 머리 좀 돌아가던 놈들은 진작에 그롬에서 거미들에게 죽거나 잡혀갔고, 당장 눈앞의 돈밖에 못 보는 멍청이들만 남았어. 그러니 이러고 라쿠이르 산골짝에 숨어서 부질없는 발악이나 하고 앉았지."
"무슨 의미야?"
"V는 이미 갈퀴날들을 버렸어."
"어... 그래? 하긴 놀랄 일도 아니지. 처음부터 이용하다가 버릴 생각으로 접근했을 테니까. 이 바닥 돌아가는 방식이 다 그렇잖아?"
"갈퀴날들은 아직도 V에게 버려졌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를 도우면 라쿠이르에 지부를 개척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어. 간절함이 지나치면 멍청함이 되기 마련이지."
"그렇다 해도 우리 역시 일단은 갈퀴날들 소속이야. 이대로 있으면 V한테 통수맞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그렇게 잘난 얼굴로 말하는 걸 보니 넌 다 계획이 있나보지?"
"어차피 버려질 거라면 내 걸 충분히 챙기고 버려지면 된다."
"그래서 뭘 챙겼는데?"
"몰라서 묻나? 이걸 봐."
그는, 아니 그녀는 자신의 두 손에 흘러넘치는 마력을 어느 실험체에게 내뿜었다. 흐물흐물한 곤죽 상태여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실험체에 마력을 불어넣자 곧 뼈가 솟아나고, 근육이 달라붙고, 피가 샘솟고, 살갗이 돋아올라 사람으로 변했다.
"이 힘! 이 능력! 이 마법! 그야말로 인형사의 정점! 아니, 나야말로 유일무이한 인형사다! 내 손으로 생로병사의 질서를 바꾸는 것도 머지 않았어."
여자 아이로 변한 살덩이는 자신의 연구 성과로 가득한 시설을 거닐며 말했다. 시설 안에는 수많은 실험체들이 배양액에 잠긴 채 둥실둥실 떠있었다. 징그러운 살덩어리에 불과하던 실험체들은 그녀가 옆을 지나가며 손짓하는 순간 그녀와 똑같이 생긴 여자 아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확실히 굉장하네. 다른 헥센테크 공학자나 마도사들도 이 정도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어. 네 말대로 의학과 생명공학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니겠지. 그런데 말이다... 그 인형술은 V가 가르쳐 준 생체 모방 이론 덕분에 완성할 수 있었잖아?"
"참조했을 뿐이다! 물론 V에게서 배우긴 배웠지!"
"좀 많이 참조했지. 하나부터 열까지 배우면서."
"하지만 기본적인 토대는 내가 평생 동안 연구해온 인형술이라고!"
"인형에 줄을 감기 위해서는 그 박사의 스퀘어가 필요하고. 스퀘어 없이는 그냥 고기일 뿐이니까."
"아까부터 왜 자꾸 시비걸지? 내 능력을 흠잡고 싶어서 안달이라도 났나?!"
"그런다고 내가 얻는 게 뭐가 있어. 난 그냥 네 능력이 아직 불완전한 부분이 많으니 과신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야."
"너야말로 이제 내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비록 완성 단계까지는 아직 갈길이 멀긴 하지만, 앞으로... 앞으로 조금만 더... 이제 인형술을 넘어서 '인류의 권능'을 쥐기까지 얼마 안 남았어."
"그래? 네가 곧 완성할 수 있는 걸 V가 아직 완성 못했다는 점은 이상하지 않아?"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지금 네가 자랑하는 그 힘, 그 능력, 그 마법. 네 모든 연구 성과가 사실은 전부 V의 계획대로 키워진 결과물이라면 어떡할래? 그렇다면 넌 V의 의도대로 이용당하고 있는 중이야."
"그렇다면 실수했다는 걸 깨닫게 해주면 그만이다. 나같은 놈을 키운 건 실수였다고, 나같은 놈을 목줄로 묶어둘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실수였다고 깨닫게 해주면 돼. 이미 내 연구가 이 정도로 진척됐으니 이제 와서 날 처리하려 해도 늦었어."
이리는 그 답변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중절모를 눌러 썼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행운을 빈다고."
"충고 참 고맙네!"
"별 말씀을. 아 그런데... 이제 새로운 몸도 생겼으니 호칭을 바꿔야 하려나? 앞으로 어떻게 불러줄까?"
이리가 호칭에 대해 질문하자 그녀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살덩이 상태로 잠겨있었던 수조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조를 가득 채운 배양액을 들여다보자 수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춰보였다. 부드러운 은발과, 귀여운 인상, 맑지만 힘있는 눈동자가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프릴 루에리아. 앞으로 나는 프릴 루에리아다."
"아무리 적합도가 높다 해도 그렇지 휴영의 공작가 장녀라니. 제정신이 아니네."
"우므나티아에서 온 네가 제정신 같은 소리를 할 입장인가?"
"하긴 그렇네. 부정 못하겠다."
중절모를
쓴 이리가 큭큭큭 웃으며 즐거워했다.
"아무튼 프릴, 중요한 보고가 있어."
"뭐지?"
"켄의 정비소가 습격당했어. 허밋 쉘, 패티 맥, 울프 론, 오거 반... 전부 당해서 수사관들이 신병을 확보한 상태야."
"켄은?"
"네 명이서 혈투를 벌이는 동안 빠져나가려 했던 모양인데... 죽었더라."
"쓸모없는 새끼. 입만 살아서 거들먹거리더니 결국 그렇게 가는군."
"수사관들 표현을 빌리자면 '살해 방식이 매우 투박하고 신사적이지 못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시궁쥐들에게 보복당한 거로 추정된다' 더라."
"알만하네. 그저 흔한 뒷골목의 일상이잖아."
"듣고나니 뭐 드는 생각 없어?"
"드는 생각? '너도 그 꼴 나기 싫으면 처신 잘해라' 이런 의미로 묻나?"
"아니, 아니. 걔들이 없으니까 이 병원 지키는 애들이 통제가 안 되잖아. 거의 절반 이상의 시궁쥐들이 이탈했고, 이리들도 꽤 많이 통수치고 내빼버린 상황이야."
"쥐새끼들이니, 이리들이니 그런 하찮은 놈들에게는 관심 없어."
"하지만 맥스패티 직영점도 털리고, 다진 고기 공장도 털리고, 이젠 켄의 정비소까지 털렸어. 만약 이곳에 대한 정보가 새어나갔다면 다음 타겟은 여기가 될 가능성이 높아."
"여기는 사람들 보기에는 그냥 장사 잘 안 되는 병원일 뿐이야. 정보가 새어나갈 일이 뭐가 있다고."
"혹시 모르지. 켄 그 놈이 죽기 전에 여기 위치를 불었다던가. 어쨌거나 만약에 네 연구가 완성되기 전에 여기도 공격당한다면 그때는 네가 알아서 막아내야 해. 나는 우므나티아에 일이 있어서 도와주질 못하니까."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어. 네 도움도 필요 없고."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그래도 충고 한 마디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말해봐."
중절모를 쓴 이리는 프릴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다. 명함에는 S급 NPC 에반 플루토라고 적혀있었다.
"갈퀴날들이 털릴 때마다 현장에서 발견된 명함이야. NPC긴 한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루나칼립스 학원의 기숙사감 대리로 일하는 중이더라. 최근에 카일이랑 그 밑의 이리들이 루나칼립스 학원에서 사고 좀 쳤던지라 그 사감대리가 직접 나서서 보복하는 중인 모양이야."
"사감대리 업무중에 이리 조직을 상대로 보복하고 다니는 일도 있었나? 명문 학원의 위용인가?"
"뭐 중요한 건 네 연구를 방해받지 않으려면 이 사감대리의 동태는 잘 주시하고 있어야겠지? 영감한테 지령 좀 내려두는 게 좋을 거야."
"아, 그 늙다리... 나이 먹고 생색만 늘었는지, 하는 일에 비해 달라는 게 하도 많아서 귀찮은데."
"귀찮아도 어쩔 수 없지. 사람 하나 심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그럼... 잘 해보라고."
중절모를 쓴 이리는 유쾌한 손짓으로 인사를 건네고는 수트케이스를 들고 나갔다. 이리가 나가자 혼자 남은 인형사... 프릴 루에리아는 사람으로 가득하지만 생명은 없는 모순된 공허속을 거닐었다. 배양액에 잠겨있는 수많은 실험체 프릴들이 양수 속의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서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