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3-3. 행동 개시 (8)
"킁킁!!"
코를 벌름거리는 소리.
"킁킁! 킁카.... 후욱... 후욱..."
코를 줄기차게 벌름거리는 통에 비강의 점막이 끓는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무언가 냄새를 쫓고 있는 것 같았다. 주로 먹을 걸 찾는 들짐승들이 내는 소리지만 놀랍게도 코를 벌름거리며 나타난 건 사람이었다.
다만 멀쩡한 사람이라고 보기는 힘든 외관이었다. 눈은 흐리멍텅하게 떠서 초점이 제대로 안 맞았고,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의상도 정상인의 패션 센스와는 아득히 동떨어져서 아예 윗옷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살이 너무 쪄서 체형이 거의 구체에 가깝다 보니 맞는 윗옷을 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위생 상태는.... 언급하지 않는 쪽이 좋을듯하다.
"후욱... 후욱..."
비록 외관은 좀 덜떨어져 보이지만 엄연히 갈퀴날들 소속의 이리였다. 오거 반. 갈퀴날들 이리 중에서 괴력을 담당하는 자다.
"이히히... 이히.."
오거 반은 멍청한 웃음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져 있는 빵조각을 집어들었다.
"헤헤..."
아무 생각 없이 빵조각을 입에 넣은 오거 반이 또 다른 빵조각을 발견했다. 그는 뒤뚱뒤뚱 거구를 움직여서는 빵조각을 주워먹었다.
"헤헤, 맛있다."
오거 반은 땅에 쭈욱 늘어져있는 빵조각을 졸졸 쫓아가며 닥치는대로 집어먹었다. 그가 마지막 빵조각을 집은 순간 갑자기 그의 손이 바닥과 함께 얼어붙었다.
"우? 우우..."
오거 반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얼음이 여간 단단한 게 아니라 쉽사리 손이 빠지질 않았다.
"야. 뚱땡아. 위를 봐."
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소년 목소리. 오거 반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려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손이 바닥에 얼어붙은 비대한 몸집으로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오거 반은 소년이 말한대로 고개를 들어올려 위를 봤다.
와지끈!! 천장에서 뚝 떨어진 단단한 얼음덩어리가 오거 반의 머리 위에 제대로 떨어졌다. 오거 반의 육중한 몸뚱이가 풀썩 쓰러지자 쿵! 하는 소리가 울리며 바닥의 얼음이 깨졌다.
"쳇! 이런 놈이 내 상대라니. 이래서는 이겨도 도저히 자랑을 못하겠잖아!"
시엘 밀리우스가 쓰러진 오거 반의 머리맡을 알짱거리며 빈정거렸지만 오거 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제대로 대답할 정도의 언어 구사 능력이 없었다.
"헤헤."
쓰러졌던 오거 반이 어딘가 섬뜩한 웃음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오거 반이 움직일 때마다 발밑에서 쿵쿵 소리가 났고, 그의 두툼한 뱃살이 파도치듯 출렁거렸다. 거대한 비계덩어리라고 봐도 무방한 뱃살에는 튼살자국이 가득했다.
"세상에! 운동 좀 하라고! 그게 뭐야?!"
시엘이 기겁을 하며 외쳤다.
"야 뚱땡아! 너 도대체 어떻게 이리가 된 거야? 싸움은 고사하고 혼자서 뒤도 못 닦을 거 같은 놈이 말이야!"
오거 반이 시엘의 말을 못 알아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그래도 새하얀 시엘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설마 그냥 안 닦는 거야? 으.... 어우 세상에..."
시엘이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을 보고 느낀 감정은 조금 다른 의미의 공포였다. 포탄이 날아올 때나, 오물이 날아올 때나 둘다 똑같이 필사적으로 도망치게 되지만, 그게 똑같은 종류의 공포를 느껴서 그런 건 아니다. 지금 시엘이 느끼고 있는 공포는 오물 투척에 해당하는 공포였다.
"저기... 나 갑자기 토할 거 같아서 그런데, 우리 그냥 무승부인 거로 치고 끝내자 응? 내가 만든 빵 잘 먹었잖아? 빵값으로 퉁치고 무승부 어때?"
"헤헤, 좆됐다."
"엉? 뭐 됐다고??"
오거 반이 바지에 달린 작은 주머니에서 주사기를 하나 꺼냈다. 시린지 커버를 벗긴 오거 반은 길고 굵은 주삿바늘을 곧장 자신의 팔에 꽂았다. 지방이 두텁게 쌓인 팔뚝에서 경이로운 속도로 정확히 혈관을 짚어냈다. 몸이 외워서 안 보고도 바로 바늘을 꽂을 수 있을 정도로 반복해온 게 분명했다.
"헤헤헤... 히히... 이히히히히!! 이히 헤헤헤!! 우후 우후후!"
주사기를 꽂은 오거 반이 미친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혈관을 타고 들어간 액체가 위험한 작용을 일으켜서 웃는 건지, 기분이 좋아져서 웃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기 때문에 일단 거리를 벌렸다.
꾸르륵!! 뚜둑! 뿌드드득!! 오거 반의 두터운 지방층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안그래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얼굴이 안면근육의 급격한 변화 때문에 더 기괴하게 찌그러졌다. 시엘은 비위가 상해서 더 멀찍이 떨어졌다.
"저게... 대체 뭐야??"
부글부글 끓던 오거 반의 몸뚱이가 부풀어 올랐다. 골격이 빠르게 확장되면서 덩치가 거대해졌고, 전신을 뒤덮은 비계 덩어리들을 뚫고 단단한 근육들이 솟아났다. 볼품없는 고도비만은 온데 간데 없었고, 3m를 가뿐히 넘기는 근육질의 거인이 나타났다. 압도적인 체격차를 자랑하며 우뚝 솟아난 오거 반이 시엘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시엘의 아버지, 설국의 다른 전사들, 심지어는 헥타논 보다도 훨씬 거대했다. 적어도 그들은 사람 중에서 비범하게 체격이 큰 축에 속하는 것이지만, 지금의 오거 반은 인체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오우거 혈청. 멸종된 종족을 부활시키기 위한 제국의 연구 부산물 중 하나가 이런 식으로 악용되고 있었다. 오우거는 뭇 종족 중에서 정점으로 꼽히는 근력을 자랑하는 종족이었다. 아그루스 고고학회가 주관한 멸종 종족 복원 프로젝트는 오우거의 강인한 육체를 완전히 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린 근본적인 원인은 자료 부족이었다. 그리고 자료 부족의 근본적인 원인은 인체 실험을 금지하는 제국의 법 때문이었다. 하지만 법을 무시하는 이리들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우거 혈청을 개발하기 위한 적합성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부적합자들이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거 반이라는 단 하나의 완성체가 나올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작들이 소각로에 던져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거 반 본인도 세지 못할 것이다.
"반칙이야! 난 키 크고 싶어서 온갖 맛없는 걸 꼬박꼬박 챙겨먹었고, 어깨 벌어지고 싶어서 별별 운동을 다 했지만 소용 없었단 말이야! 근데 너같이 운동 하나도 안하는 뚱땡이가! 노력도 안 하고 주사 한방이면 몸짱이 된다니 너무하는 거 아니야?!! 와 세상 억울해서 못살겠네 증말!!"
시엘은 좀 핀트가 어긋난 부분에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주사기 안에 든 혈청의 정체를 알지 못하니 그럴 수도 있지만 어지간히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모양이다. 그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면서 불합리하다고 소리쳤다. 물론 오거 반은 시엘이 무어라 외치건 들은 체도 안했다. 무승부 운운하던 시엘은 저놈을 혼내주기 위해서 제대로 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 모습을 하니까 이제야 제대로 붙어볼 의욕이 나는 걸?"
온몸 가득 두꺼운 근육이 찐 오거 반이 한없이 작아진 시엘을 내려다 봤다. 오거 반은 전투 자극 호르몬이 팍팍 분비되자 이 왜소하고 겁없는 하룻강아지를 당장이라도 으깨놓고 싶어졌다. 오거 반이 천장이 떠나갈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헤헤!! 넌 좆됐다!!"
"뭐, 뭐지? 저것도 일종의 하카라고 할 수 있나...?"
오거 반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시엘도 위축되지 않고 곧바로 전투 태세를 갖췄다. 시엘은 우선 오거 반의 움직임을 방해하기 위해 발밑의 바닥을 얼려 빙판을 만들었다.
"헤헤..."
콰쾅!! 우지직!! 오거 반이 한쪽 다리를 들어올려 발을 힘껏 구르자 바닥이 한번 들썩일 정도로 강력한 충격과 함께 빙판이 깨져버렸다. 깨진 빙판의 얼음 파편들이 높이 솟구쳐 올랐다.
"세상에...!"
얼음의 견고함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마치 살얼음 밟아 깨듯이 맨발로 박살을 내다니.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시엘의 얼굴보다 훨씬 큰 주먹이 시엘을 노리고 있었다. 쾅!! 시엘이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주먹을 피했다. 표적을 놓친 오거 반의 주먹이 바닥을 뚫어버렸다. 콘크리트 바닥이 주먹 한 방에 뻥 뚫려버렸다. 바닥에 생긴 구멍을 본 시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한대라도 맞으면 안 된다. 진짜 딱 한 번만이라도 공격을 허용했다가는 그대로 끝장이다. 아무리 단련된 맷집이라고 해도 일단 사람에게 맞으면서 길러온 맷집인데, 저건 좋게 봐줘도 사람 수준의 힘이 절대 아니다. 시엘은 근접전을 선호하지만 이번 만큼은 좀 치사한 방식으로 싸워야 한다고 판단했다.
시엘이 굵고 뾰족한 고드름의 창을 여러 개 만들어냈다. 휙! 시엘이 팔을 허공에 휘젓자 고드름 창들이 첨단을 오거 반에게로 향한채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오거 반은 날아오는 창들을 피할 만큼 민첩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모든 창들을 곧이 곧대로 다 맞았다. 하지만 오거 반의 근육이 어찌나 튼튼한지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젠장, 뭐냐고.... 쇳덩어리야?!"
"헤헤헤..."
오거 반은 고드름 하나를 두 손으로 집어들었다. 뚜둑!! 시엘의 고드름이 나무젓가락 마냥 간단히 반으로 부러졌다. 오거 반은 부러진 고드름을 시엘에게 집어던졌다.
"으왓?!"
시엘은 자신에게 매섭게 날아오는 고드름을 사라지게 했다. 고드름이 공기 중에서 흩어지면서 미세한 얼음 입자들이 생겨났다. 얼음 입자가 섞인 바람이 시엘을 훑고 지나갔다.
"씨!! 좀만 늦었으면 큰일날 뻔했잖아!!"
큰일 날 뻔했다고? 본인의 입으로 말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는 말이었다. 큰일은 이미 났다. 지금 자신이 쓰러뜨려야 할 적인 오거 반 자체가 시엘에게 있어서 큰일이었다. 체격차 부터가 이 모양이니 힘겨루기는 성립 자체가 안 되고, 고드름을 맞고도 생채기 하나 안 날 정도의 맷집이라면 시엘이 백날을 때리고 걷어차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저 무쇠근육으로 꽉찬 돌기둥에게 관절기나 초크를 써도 먹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신체 능력 차이가 압도적인 걸 넘어서서 완전히 일방적이었다. 겨울의 창 우즈라스라도 멀쩡했다면 뭔가 시도 해봤을 텐데 우즈라스는 진작에 망가져 버렸다. 지금의 시엘에게는 조금도 승산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이상하다. 하나도 안 무섭다. 이렇게 강한 상대와 대치하고 있는데도, 승산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시엘은 전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역시 그 인간을 상대하는 거에 비하면 별 거 없어보여."
에반 플루토라는 강자에게 몇번이고 부딪쳐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오거 반이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심리적 현상이었다. 물론 마음가짐의 차이일 뿐 오거 반이 정말로 약해진 것도 아니고, 시엘이 강해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멋모르고 설쳐서는 안 된다. 시엘은 그 점을 명심하고서 오거 반과 거리를 좁혔다.
엄청 쎄보이긴 하지만 완전히 무적일 리는 없다. 근력이 강한 대신 지구력이 딸린다거나,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되면 주사의 부작용이 나타나는 등 무언가 약점 하나 정도는 있을 것이다. 시엘은 최대한 헛공격을 유도하면서 약점을 찾아내기로 했다.
타다다다! 시엘이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오거 반이 주먹을 휘둘렀지만 시엘은 경쾌한 동작으로 주먹을 피했다. 오거 반의 주먹을 피한 시엘이 오거 반의 등 뒤로 이동했다. 오거 반이 뒤를 돌아봤지만 시엘은 이미 오거 반의 다리 사이로 휙 굴러서 빠져나간 뒤였다. 한바탕 농락당한 오거 반이 시엘을 짓밟아서 뭉개버리려고 했지만 발이 들어올려지지 않았다. 시엘이 오거 반의 두 발을 빙판으로 덮어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다행이다. 파괴력은 묵직하지만 동작이 크고 굼뜬데다가, 지능적이지도 않다보니 공격 패턴이 단순하기 짝이 없다. 시엘은 해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우우우!!!"
오거 반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면서 발버둥을 치자 단단한 빙판이 한번에 깨져버렸다. 시엘은 여전히 날파리처럼 주변을 알짱거리며 오거 반의 신경을 돋구는 중이었다. 오거 반이 자유로워진 발을 다시 들어올려 시엘을 짓밟으려 했지만 역시나 시엘이 잽싸게 굴러서 빠져나가는 바람에 맨땅만 밟았다.
"힘이 그렇게 세면 뭐할 거니? 때리질 못하면 아무 소용 없지!"
시엘은 혀를 삐죽 내밀며 오거 반을 도발했다. 오거 반은 열이 올라서 시엘을 잡으려 했지만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시엘을 잡기에는 오거 반의 움직임이 너무 둔했다.
"우우!! 우우우!!"
오거 반이 시엘을 눈으로 쫓는 걸 포기하고 그냥 주먹을 막 휘두르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훅! 훅! 훅! 이렇게 여기저기 마구 휘둘러대다 보면 한대 정도는 맞을 테고, 딱 한대만 맞으면 시엘은 계란 껍질 마냥 파사삭 깨져버릴 것이다.
쿵! 쿵! 쾅! 쾅! 오거 반이 미쳐 날뛰는 통에 테이블들이 마구 박살났다. 철로에서 탈선한 폭주 기관차 마냥 날뛰던 오거 반은 곧 숨이 차서 헉헉거리기 시작했다.
"후욱...!! 후욱....!!"
오거 반이 숨을 헐떡일 때마다 그의 거대한 콧구멍에서 대량의 공기가 빨려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오거 반은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이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주변 일대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잘 살펴보면 어딘가에 으깨진 시엘의 몸 조각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체를 찾기 전에 일단은 쉬고 싶었다.
"그거 하고 벌써 힘들어? 체력 진짜 저질이다."
오거 반의 바로 뒤에서 시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엘은 체스부의 민첩함을 담당하는 빠른 발이다.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 잦은 만큼 위험에서 빠져나가는 데에도 도가 텄다.
"빠른 것도 아니야, 정확한 것도 아니야, 오래가는 것도 아니야. 넌 진짜 장점이 뭐니?"
또 시엘은 체스부의 광역 도발을 담당하는 어그로꾼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말하는 거지만 시엘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 잦다. 발이 잽싸고 맷집이 튼튼하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죽었을 정도로.
"그거 알아? 동작이 너무 굼뜨다는 것도 문제고, 체력이 저질이라는 것도 문제지만 너의 가장 큰 문제는 그런 것보다도 훨씬 심각한 거야."
시엘은 오거 반에게서 도망치는 한편 그를 계속 끌고 다니기 위해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넌 멍청해. 진짜 진짜 멍청해. 그 주사의 부작용 때문에 머리가 나빠진 건지, 아니면 원래 태어날 때부터 모자라게 태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넌 멍청해."
오거 반이 짐승 소리를 내며 시엘에게 주먹을 내리찍었지만 시엘은 몸을 날리며 공격을 피했다. 몸을 날렸던 시엘이 부드럽게 구르기를 하며 그 탄력으로 솟구치듯 일어났다. 그리고는 다시 오거 반을 자극했다.
"멍청하면 부지런해야 하는데 넌 내가 봤던 사람 중에서 제일 게으르다고. 몸을 만들었으면 격투술이라도 익혀둘 것이지, 격투술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스텝도 밟을 줄 몰라. 발차기도 쓸 줄 몰라. 잡기 기술도 쓸 줄 몰라,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측할 줄도 몰라, 아 몰라 그냥 다 몰라! 체력도 단련 안한 티가 팍팍 나고! 뭐 어쩌면 당연하겠지. 그냥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면 다 됐으니 단련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겠어?"
"후우! 후우! 쒸익... 씩!!"
"의외네. 이런 말 듣고 화날 줄은 알다니."
오거 반은 시엘의 말에 화가 났다는 게 얼굴로 다 드러났다. 지능은 떨어지지만 시엘의 도발을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그 도발을 듣고 자괴감과 열등감을 느낀다는 사실이 꽤나 괄목할 만한 점이었지만, 덕분에 시엘의 도발이 효과를 확실하게 발휘했다.
"예전에 누나가 내게 말했어. 전사는 힘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난 여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오늘 너 덕분에 아주 확실하게 이해했어."
시엘이 손가락을 힘껏 펼쳐 오거 반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
"넌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그냥 쓰레기야. 그 주사기에 든 게 너의 내용물의 전부라고. 알겠어? 이 쓰레기야! 멍청아! 뚱땡아!"
"우우!!"
제대로 뚜껑 열린 오거 반이 그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그 육중한 몸을 던져 시엘을 덥쳤다. 순식간에 거대한 그림자가 시엘을 뒤덮었다.
"어... 이런..."
저 몸뚱이에 깔리면 비온 뒤 길가에 나가면 흔히 보이는 납작하게 널브러져서 뱃속 내용물을 쏟아내고 있는 지렁이처럼 될 것이다. 시엘은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쳤다.
쿠쿵!! 오거 반이 온몸을 던져 바닥을 내리찍자 건물이 기우뚱해질 기세로 바닥이 떨리며 굉음이 울려퍼졌다. 직접 깔리는 건 면했지만 그 충격 때문에 공중에 붕 떠올랐다.
"으아아앗!!"
공중에 높이 떠오른 시엘이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에 처박혔다. 낙법 같은 걸 쓸 여유도 없었다. 부서진 테이블로 가득한 바닥 위를 뒹굴었다.
"아윽! 억! 끅?! 아야!"
시엘이 한 바퀴 구를 때마다 비명을 한 번씩 질렀다.
"아으으..."
시엘은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누워서 앓는 소리를 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에반에게 훈련 받았던대로 잽싸게 옆으로 굴러서 일어났다. 성난 오거 반이 시엘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우우우우!!"
시엘은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오거 반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거 반이 시엘을 잡아서 으깨버리려 했지만 시엘은 오거 반의 손아귀를 피했다. 시엘은 오거 반을 지나친 뒤 계속 달려나갔다.
"하압!!"
시엘이 향한 곳은 좀전에 오거 반이 몸을 던져 내리찍었던 곳이었다. 그곳은 바닥이 무너져 버리는 바람에 아래층으로 통하는 큰 구멍이 뚫려있었다. 높이가 꽤 높았지만 시엘은 주저하지 않고 구멍으로 뛰어내렸다. 뒤이어 쫓아온 오거 반은 주먹으로 바닥에 난 구멍을 내리쳤다. 바닥이 무너지면서 오거 반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구멍이 넓어졌다. 오거 반은 구멍으로 뛰어내렸다.
"우우우우!!!"
"어서와."
오거 반이 구멍으로 뛰어내리자 펼쳐진 것은 얼음가시 함정이었다. 먼저 1층으로 내려왔던 시엘이 뾰족하게 솟은 고드름들을 바닥에 잔뜩 깔아놨다. 오거 반의 몸이 빼곡한 고드름 위로 떨어졌다.
와장창!! 오거 반에게 깔린 고드름들이 산산조각 나서 무너져 내렸다. 오거 반은 난폭하게 포효하며 주변에 남아있는 고드름들을 다 부숴버렸다. 나름 회심의 반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찰과상 하나 입히지 못했다.
"진짜 튼튼하네.... 젠장. 이제 더 이상 얼음을 만들면 몸에 무리가 갈 텐데. 저런 놈을 대체 무슨 수로 공격하지?"
부지런히 머리를 굴려 작전을 짜던 시엘이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았다.
"잠깐? 내가 굳이 쟤를 공격해야 하나?"
시엘의 얼굴에 장난기가 돌아왔다. 시엘은 오거 반에게 말했다.
"있잖아, 내가 이것 저것 시도해봤지만 역시 너한테는 아무것도 안 통하거든? 그러니까.... 나 그냥 안 할래."
"헤....??"
일반적인 지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시엘의 말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려 할 것이다. 혹은 시엘의 꿍꿍이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아예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하지만 오거 반은 그냥 시엘의 말을 해석하지 못했다는 정직한 반응을 보였다.
"나 안 할 거야. 솔직히 하기 싫을 수 밖에 없잖아? 내가 뭘 해도 너한테 안 통하는 걸. 그러니까 그냥 안 할래. 하기 싫어."
마치 자기가 불리해지자 잔뜩 토라져서 놀이를 엎어버리는 어린 아이 같은 태도였다.
"어차피 내가 너랑 싸워서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 그냥 도망만 잘 다니면서 기다리면 언젠가 그 주사의 약효가 다 떨어질 테지? 어디 약발 떨어지기만 해봐! 너의 더러운 비계덩어리를 걷어차 주겠어!"
시엘이 그렇게 말하자 오거 반이 웃으면서 자신의 바지에 달린 주머니를 열어보였다. 주머니 안에는 오우거 혈청 주사기 여유분이 여섯 개 정도 더 있었다.
"어.... 이런."
"헤헤, 넌 좆됐다."
저 주사들을 다 쓸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버틸 수 있더라도 시간을 너무 많이 소모할 것 같다. 상관 없지 않을까? 버티고 있다보면 다른 애들이 와서 도와주겠지.
잠깐. 다른 애들이 와서 도와준다고?
'시엘 군? 다들 자기가 맡은 상대를 쓰러뜨렸는데 시엘 군 혼자서 못 이기고 있는 건가요? 그것도 저런 약쟁이 뚱보를 상대로요?'
'어머나, 어디선가 답도 없이 꽉 막힌 흐름이 느껴져서 구하러 와봤는데... 밀리우스 군의 흐름이었군요. 뭐 사실상 흐름이 아니라 정체라고 보는 게 맞겠지만.'
'시엘 밀리우스.... 역시 당신은 도움이 안 되는군요. 가서 과자나 만드십시오. 당신은 체스부에 필요 없습니다.'
"싫어!!! 안 도와줘도 나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시엘은 혼자서 온몸을 뒤틀며 마구 소리쳤다.
이렇게 된 이상 체급 차이고 뭐고 다 무시하고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시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저놈을 쓰러뜨려야 했다. 쓰러뜨릴 방법이 있는가 없는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시엘은 전사이자 자존심 센 남자로서 물러설 수 없는 싸움에 직면한 것이다.
시엘은 오거 반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오거 반은 그런 시엘을 반갑게 맞이하기 위해 발을 들어올렸다. 꿍!! 오거 반이 발을 힘차게 구르자 바닥이 뒤흔들릴 정도로 강한 충격파가 일어났지만 시엘은 타이밍 좋게 뛰어올라서 충격파를 피했다. 곧 공중에 뜬 시엘을 향해 오거 반의 주먹이 휘둘러졌지만 시엘은 기교섞인 몸동작으로 오거 반의 주먹 위에 올라탔다.
휘리릭! 시엘이 공중제비를 몇 바퀴 돌며 오거 반의 등 뒤에 착지했다. 오거 반이 시엘을 잡으려 했지만 시엘은 또 다시 오거 반의 가랑이 사이로 앞구르기를 해서 빠져나갔다.
"훗! 이거 좀 보라고."
시엘의 손에 오우거 혈청 주사기가 들려있었다. 오거 반이 자신의 바지를 내려다 보니 대체 어느 틈에 손재주를 발휘한 건지 바지에 달린 주머니가 열려 있었다. 시엘은 주사기의 시린지 커버를 벗겼다. 오거 반의 표정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아까에 비해 덜 멍청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당황하거나 화난 것을 의미하는 표정이었다.
"너 좆 된다."
"나도 알아. 내 걱정하지 마. 내가 맞으려는 거 아니니까."
시엘이 주사기를 고쳐쥐고는 다시 오거 반을 향해 돌진했다. 오거 반의 주먹을 피한 시엘이 폴짝 뛰어올랐다. 시엘이 착지한 곳은 오거 반이 주먹을 휘두르느라 뻗었던 팔 위였다. 두꺼운 근육으로 덮인 팔 위를 내달린 시엘이 오거 반의 얼굴을 향해 몸을 던졌다.
"우우!!"
"가만히 있어!! 쫌 따끔할 거니까!"
시엘은 양쪽 다리로 오거 반의 목을 휘감고 자신의 온 체중을 실어서 고정했다. 사람의 목이 아니라 돌기둥을 다리로 휘감은 것 같았다. 이렇게 단단한 근육으로 뒤덮인 오거 반의 몸에 주삿바늘 같은 게 들어갈 자리가 있느냐?
놀랍게도 있다. 시엘은 오거 반의 눈과 눈꺼풀 사이에 있는 촉촉하고 물렁한 연분홍색 점막에 주삿바늘을 꽂아넣었다. 그리고는 오우거 혈청을 남김없이 주사했다. 주사를 다 놓은 시엘은 오거 반의 몸에서 내려와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우우... 우욱...!! 으어어어!! 어어!!!!"
정량 이상의 오우거 혈청을 과도하게 투여한 댓가는 곧바로 오거 반의 몸에 나타났다. 오거 반의 근육이 억지로 부풀어 오르고 뒤틀리기 시작했다. 안면 근육도 경직과 이완을 불규칙적으로 반복해서 기괴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어어으어으!! 우으으윽!!"
온몸을 비틀며 경련으로 괴로워하던 오거 반이 그대로 쓰러졌다. 쿵!! 육중한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지자 얼음조각들이 높이 튀어오를 정도로 큰 충격이 일어났다. 시엘은 쓰러진 오거 반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런 몸을 이 정도로 밖에 못 쓴다니. 차라리 나한테 주는 게 어때? 내가 너보다는 더 잘 쓸 것 같은데."
내가 이런 거인이였다면 당장 설국으로 돌아가서 헥타논 놈에게 주먹 맛을 보여줄 수 있을 텐데. 시엘이 그렇게 복수심을 갈무리하고 있는데 푸시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오거 반의 강철같은 근육들이 다 빠져버리고, 다시 튼살 자국으로 가득한 물컹한 지방들이 온몸을 덮었다. 흐물거리는 비계덩어리를 본 시엘이 기겁을 했다.
"방금 한 말 취소야!! 절대로 안 받을 거니까 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시엘은 만약을 대비해서 오거 반의 바지 주머니에 있는 오우거 혈청 주사기들을 꺼내서 단 하나만 남기고 다 부숴버렸다. 시엘은 남은 오우거 혈청 하나를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챙겨 넣었다.
"이런 위험한 물건은 그 인간이 잘 알고 있으니까 보여주면 뭔가 더 알아내겠지?"
시엘은 혹시라도 이 오우거 혈청이 에반 플루토의 추리에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수로라도 바늘에 찔리지 않도록 시린지 커버가 벗겨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잘 챙겼다.
"거봐! 나 혼자서도 이렇게 잘할 수 있잖아! 이래도 내가 체스부에 필요 없어?!"
아무도 뭐라하지 않았는데 시엘은 또 혼자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