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3화 〉3-3. 행동 개시 (7) (83/88)


  • 〈 83화 〉3-3. 행동 개시 (7)

    "시발! 시발! 씨발! 씨이발!! 이 씨발 건방진 쥐새끼들이!!"

    갈퀴날들이 정비소로 쓰는 어느 외딴 빌딩에 욕설이 울려퍼졌다. V는 화풀이할 대상이 없어서 바닥을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나 걷어차며 성질을 부렸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도망친 시궁쥐떼가 다시 돌아오지도, 아무도 없는 백설탕 공장이 혼자 돌아가지도 않는다. 연구비 조달에 계속해서 차질이 생긴다는 사실 역시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그의 혈압만 올라갈 뿐이다.

    "대체 왜! 왜 얼마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풀리던 일이 자꾸만 이렇게 지랄맞게 꼬이는 거냐고 왜! 아 왜!!"

    V가 이렇게 혈압을 올리고 있으면 그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단 하나뿐이다.

    "헤헤, 좆됐다."

    "반!!! 닥치고 니 자리로 돌아가!! 애초에 여긴 뭐하러 왔어?!"

    V는 괜히 오거 반에게 성질부렸다. 오거 반은 V가 아무리 짜증내도 화내지 않고, 멍청해보이는 표정을 한결같이 유지한채로 그 육중한 거구를 뒤뚱뒤뚱 이끌고 밖으로 향했다. 허밋 쉘이 V에게 찬물을 한잔 권하며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이거 한잔 마시고 진정하셔요."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아니라해도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이미 손실된 사업장은 어쩔 방도가 없으니 그냥 잊고, 다가올 전투에 만전을 기하는 쪽이 그나마 손해를 복구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쉘,  말이 맞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봤자 나만 빡오르고 시간 허비할 뿐이야."

    "그렇죠?"

    "그래. 하지만 빡친단 말이야!! 그 망할 흉터 새끼!! 그때 폐공장에서 맥이 미트볼 기계에 넣고 갈아버리게 내버려뒀어야 했는데 시발 내가 왜 말렸지?! 시발! 시발! 씨발! 씨이발!!"

    V가  다시 악에 바쳐 소리쳤다. 허밋 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아. 웬일로 금방 평정심을 되찾나 싶더만 역시나..."

    그녀는 찬물 한잔을 그냥 V의 얼굴에 뿌려버렸다. 찬물 뒤집어쓴 V는 수염에 맺힌 물을 푸 불어서 털어내고 한숨을 푹 쉬었다.

    "머리  식히셨나요?"

    "그래 이 샹년아. 고맙다 싯팔."

    "이제 어떡하실 거죠?"

    "뭘 어떡해? 니가 다 말해놓고서는. 날려먹은 사업장은 나중에 복구하고 일단 발등의 급한 불부터 꺼야지. 그 다음에  좀 트이면 이제 그 시발 흉터 새끼를 잡아다가 수제 버거 만들 거야! 내 통수를 이렇게 거하게 치고도 조직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나?! 이 시발! 시발! 씨발...!!!"

    스윽. 허밋 쉘이 또 다시 찬물 한 잔을 집어들자 V가 뚝 그치고 조용해졌다. 분노 조절 장애를 치료한 V가 시가 담배를 입에 물고 심호흡을 한번 했다.

    "후우... 이게  그 NPC 놈이 초쳐놔서야. 그놈을 빨리 족쳐야 뭘 하든 말든 하지. 난 우므나티아 쪽에 연락 돌리러 갈 테니까 니들도 각자 정비 잘 하고 연장 손질 빤딱빤딱하게 해놔."

    "네."

    그때 지금껏 조용히 꾸벅꾸벅 졸고 있던 울프 론이 눈을 번쩍 뜨더니 어딘가를 맹렬하게 노려봤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이를 꽉  정도로 경계심을 바짝 곤두세우고 여기 저기 돌아봤다.

    "쟤 왜 저래? 어이, 론! 뭐해?"

    "....."

    "론!"

    "쉬잇....!!"

    울프 론이 V의 말을 끊으며 계속 무슨 소리를 쫓는듯이 귀를 쫑긋거렸다.

    "침입자. 있다. 움직인다."

    "뭐? 그럴 리가 있냐. 오자마자 맥이랑 쉘이 보안장치  작동시켜 뒀는데. 어디로 기어들어와도 바로 들킨다고."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정비소에 와서 숨어있었다."

    "그, 그게 무슨...?"

    "움직이고 있다. 발소리가 들린다. 맥의 거친 발소리도 아니다. 반의 둔탁하고 무거운 발소리도 아니다. 여럿이 겹친다. 냄새... 향수...!!"

    파팟! 울프 론이 이성을 잃고는 쏜살같은 속도로 뛰쳐나가 버렸다. V가 혀를 차며 쉘에게 말했다.

    "쟤는 또 왜 저러냐? 간식 좀 제때 챙겨주지."

    "오늘치 육포는 이미 다 먹였습니다."

    "근데 왜 저래?"

    "통제불능이긴 하지만 론의 직감은 확실히 뛰어납니다. 정말로 침입자가 미리 이곳에 매복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긴 너희랑 정비공 몇 놈 빼고는 아무도 모르는 곳이야."

    "가끔 급하게 물자 조달이 필요할 때 시궁쥐를 부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전달자는 입단속이 영 못미더우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흉터 새끼한테 심부름 시켰지."

    "그리고 그 흉터쥐는 도망쳤고요."

    "아."

    "심지어  흉터쥐는 예전에 폐공장에서  NPC를 만난 적도 있고요."

    "....."

    V는 정신 나가버린 거 같은 얼굴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반  새끼 어디 갔냐? 이번엔 진짜 좆된 거 맞는데 이럴 땐  없네."

    "제가 순찰을 돌고 다른 이들에게도 전달하겠습니다. 론이 금방 침입자를 찾아낼 거예요. 당신은... 아니, V님은 보안장치들을 확인해주세요."

    "하아, 시팔!! 느낌 안 좋아, 느낌  좋아!"

    V가 허둥대며 윗층으로 올라갔고 허밋 쉘은 복도로 나왔다. 긴 복도에 혼자 남은 허밋 쉘이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눈앞에 자그마한 무언가가 나풀거렸다.

    "꽃...?"

    장소에 안 맞게 아리따운 연분홍색 꽃잎들이 한들한들 흩날리며 허밋 쉘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꽃잎에 둘러싸인 허밋 쉘은 그 자리에 멈춰섰다.

    "이게... 무슨 장난질이지?"

    낡고 어두침침한 복도와 아름다운 꽃바람이 실로 부조화스러운 광경을 연출하자 허밋 쉘은 애써 당황스러움을 감추며 주변을 살폈다.

    "꽃 좋아하십니까?"

    "!!"

    흩날리는 꽃잎 사이를 가르고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허밋 쉘이 반사적으로 교전 태세를 취했다. 이윽고 한 동방인 소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곤룡회의 수장이자 체스부의 멤버인 아라한이였다.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이 달라도,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정반대여도, 계절의 순서가 거꾸로여도. 그럼에도 이역만리에서도 똑같이 피어나는 꽃 또한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게 당신은 아닌 모양입니다."

    "닥쳐."

    허밋 쉘은 적의를 감추지 않고 아라한에게 말했다.

    "죽은 용들의 사회에서 보낸 놈이냐? 갈퀴날들이 아무리 내부 문제로 골병을 앓는 상태라 해도 너희들에게 반격 못할 정도는 아니야. 그러니 하던대로 찻잔이나 쳐 돌리면서 뜬구름 잡는 구닥다리 시나 읊으라고."

    "저희는 죽은 용들의 사회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게 저희를 보낸 용은 어디에 잠들어 있는지는 몰라도 분명히 살아서 숨쉬고 있으니까요. 그 두렵고도 가증한 숨결을 모두에게 들려주면서."

    아라한이 자신의 은장도에 새겨진 곤룡 문양을 보여주며 말했다.

    "니가 어디서 왔는지는 상관  해."

    "이걸 보고도요?"

    아라한이 손짓하자 허밋  근처에서 나부끼던 꽃잎 몇 장이 합쳐지더니 작은 명함 한 장으로 변해서 허밋 쉘의 손으로 떨어졌다. 허밋 쉘이 명함을 읽어봤다.

    "허드렛일, 힘든 일, 궂은 일, 싫은 일, 위험한  모두 다 NPC에게 맡겨주십시오. 언제나 당신 곁에 있는 우리는 No Problem Crew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S급 NPC 에반 플루토...."

    명함을 읽은 허밋 쉘이 한층 더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아라한을 노려봤다.

    "니가 바로 민찌 공장을 습격한 동방인 패거리의 수괴구나..."

    아라한은 대답 대신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우회적으로 긍정을 표시하면서도, 그렇다고 말로 직접 대답하는 것보다 상대를 화를 더 돋구는 반응이었다.

    허밋 쉘이 아라한을 향해 암기를 던졌다. 눈치 못챌 만큼 자연스러운 손동작에 쏜살같이 암기가 날아들었지만, 날카로운 암기가 허공을 나풀거리던 자그마한 꽃잎에 맞고 튕겨져나가 버렸다. 무수히 흩날리는  꽃잎들은 하나 하나가 전부 부적이다. 종잇장처럼 가볍지만 술자의 의지에 따라 강철처럼 단단해지기도 하는 술식이 걸려 있다.

    곧 꽃잎들 중 일부가 홀연히 독바늘로 변해 허밋 쉘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민첩한 움직임으로 바늘의 소나기에서 벗어났다.

    휘익! 챙!! 숨고를 틈도 없이 이번에는 예리한 은장도가 허밋 쉘의 얼굴 쪽으로 날아왔다. 허밋 쉘은 자신의 칼을 꺼내서 날아오는 은장도를 튕겨냈다. 튕겨져나간 은장도는 연분홍 꽃잎들로 파스스 흩어져 나부꼈다.

    척! 아라한이 손을 뻗어 허공의 꽃잎을 거머쥐자 꽃잎들이 은장도로 변했다. 자신의 은장도를 칼집에 집어넣고 거둔 아라한은 쥘부채를 펼쳐서 부채에 먹물로 그려진 뱀 그림을 과시했다.  섬연한 자태에서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넘어서 요사스러움 마저 느껴졌다. 허밋 쉘은 도발적인 어조로 아라한에게 말했다.

    "눈  예쁘게 뜨네. 어린 아가씨가 그런 여우같은 표정은 어디서 배웠어?"

    "원한다면 가르쳐 드릴까요?"

    "필요 없어."

    필요 없다는 짧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밋 쉘이 아라한의 눈앞에 날아들어 있었다. 허밋 쉘의 칼이 횡축으로 넓게 궤적을 남겼지만 아라한의 몸은 한 무더기의 꽃잎이 되어 흩날렸다. 허밋 쉘의 칼바람에 작은 꽃잎들이 한들한들 날아올랐다.

    "이게 전부냐? 요리조리 도망다니면서 꽃놀이 하는 게?"

    "좋지 않습니까? 기왕이면 칼부림 보다는 꽃놀이 쪽이 더 즐겁죠. 이런 곳에서 같은 동방인끼리 만나는 것도 드문 인연인데."

    "같은 동방인이라고??"

    허밋 쉘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같은 동방인이라는 아라한의 발언이 몹시 심기를 건드린 듯했다. 물론 아라한은 허밋 쉘의 심기를 건드릴 목적으로 말한 것이니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그냥 태어난 곳이 똑같다고 해서 하나로 엮지 말아줄래? 난 너와는 달라. 흐름이니 뭐니 하는 잠꼬대를 중얼거리는 꼰대들에게 통제당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제국의 이리들에게 통제당하고 계십니까? 조직의 쓴맛은 녹차의 떫은맛보다 방감(芳甘)한 모양이죠?"

    "마음대로 지껄이라고.  자유로워. 니가 순진하게 꼰대들한테 철저히 이용 당하고, 모든  빼앗기고 나서 '이것 또한 흐름이다, 섭리다' 따위의 자기 최면에 빠져있는 동안 나는 빼앗고 차지하고 쟁취할 거야. 그게 너같은 동방인하고 나같은 탈주자의 차이야. 알겠어?"

    "그래서 여태껏 무얼 쟁취하셨죠? 재물을 쌓으셨습니까? 명예를 얻으셨습니까? 내면의 평화를 이루셨습니까? 아니요, 범죄자들에게 놀아나며 손에 예토(穢土)만을 쌓을 뿐이죠. 탈주자라고요? 참으로 딱하군요. 진정 당신이 세상의 흐름에서 벗어나 자유롭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좁디좁은 우물의 한끝에서 다른 끝으로 돌아앉았을 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까득! 허밋 쉘이 이를 으드득 갈며 자신의 칼을 꽉 쥐었다. 그녀는 아라한의 도발에 말려들었다는 걸 알고도 이 언쟁에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말하는 모양새가 장로회 꼰대들이랑 소름돋을 정도로 똑같네. 동방이 아그루스 제국과 싸워서 이기려면 너같은 것들을 먼저 다 죽여놔야 해. 하나도 남김없이!!"

    "재밌는 발언이군요. 설마 지금 자신의 행동이 동방을 위한 거라고 말할 생각인지요?"

    "그러는 너의 행동은? 스스로를 살펴보라고. 제국의 차별과 맞서 싸우는 시늉만 할  적당히 타협해 놓고서는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서 정신승리 하느라 바쁘잖아? 적어도 난 결과물을 보여줄 수 있어. 내 고향을 불태운 제국 놈들에게 고통을 안겨줬다고."

    "그것은 당신이 제국에게 안겨준 고통이 아닙니다. 당신 스스로가 일으킨 흙먼지를 당신이 전부 마시면서 홀로 영문 모를 뿌듯함에 도취해 있을 뿐이죠. 그 취기에서 뒤늦게 깨어났을 때 진정 고통스러운 건 누구겠습니까? 달라진  없는 제국? 돌이킬 수 없는 당신?"

    "더는 못 들어주겠네! 니 시체는 입을 찢어놔야겠어!"

    허밋 쉘이 칼로 섬뜩한 쇳소리를 내며 겁박했지만 아라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허밋 쉘이 양손 손가락으로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그녀의 신형이 점점 반투명해지더니 머지않아 완전히 투명해졌다. 투명해져 어렴풋한 실루엣만 일렁거리던 허밋 쉘이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추자 아라한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은형술. 쉘이 허밋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유이자 그녀가 암살 임무에서 두각을 보이는 원동력이다.

    흔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발자국도, 그림자도 뭣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팍 튀어나와서 아라한의 심장을 뚫어버릴지 알 수 없었다.

    소리? 아무리 감각을 끌어올려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은형술이라고 해서 몸만 감추는 것이 아니다. 발소리도, 칼을 거머쥐는 소리도, 몸을 움직이는 소리도 철저하게 감춰서 들리지 않는다.

    기척?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날카로운 칼끝이 경동맥 바로 밑까지 와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기척을 눈치챌 수 있다면 그것을 은형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단서 따위는 조금도 없는 상황에서 언제 어디에 칼날이 파고 들지 예측해야 한다. 불가능에 가까운데 실패하면 죽음뿐인 불합리한 순발력 싸움이었다. 그러나 아라한은 피할 곳을 찾지도, 도망칠 곳을 찾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명상에 잠긴 승려처럼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라한이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자 연분홍색 꽃잎들이 그녀의 앞에 몰려들더니 하나로 합쳐져서 꽃봉오리를 만들었다. 몽글몽글 춤추던 꽃봉오리가 활짝 펼쳐지자 한 송이의 연꽃이 피어났다. 종이로 만든 조화임에도 그윽한 향기가 복도 가득 퍼져 나갔다.

    챙강!!! 아라한이 별안간 부채로 자신의 목 뒷쪽을 막았다. 그와 동시에 칼이 부채와 부딪치며 큰 소리를 냈다.

    "뭣...?!!"

    놀란 허밋 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놀랄 틈을 내주는 건 이런 싸움에서 큰 실책이었다. 푹!! 아라한이 팔꿈치를 세워서 자신의 등뒤를 힘껏 찍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보였지만 갈비뼈를 찍는 감촉이 팔꿈치에 전해져 왔다.

    "컥?!!!"

    순간 흉강에 가해진 충격에 숨이 멎는 바람에 은형술이 풀려버렸다. 허밋 쉘이 가까스로 숨을 고르고는 아라한을 노려봤다. 아라한은 여전히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상태였다. 최대한 신경을 곤두세워서 집중하기 위함인 걸까? 아니면 어차피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하는데 굳이 눈을 뜰 필요가 없다는 걸까? 의도를 알  없었지만 허밋 쉘 입장에서는 자존심을 긁는 도발 행위임에 분명했다. 앞에 있는 연꽃도 재수없어서 밟아버리고 싶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저는 다음 공세를 받아낼 준비가 이미 되어있습니다."

    "씨...!!"

    아라한의 도발에 제대로 열받은 허밋 쉘이 다시 은형술을 써서 모습을 감췄다. 아라한은 여전히 감은 두 눈을 뜨지 않았다. 챙강!! 아라한이 자신의 명치를 부채로 막자  공격에 실패한 허밋 쉘이 모습을 나타냈다.

    "젠장! 대체 어떻게?!!"

    허밋 쉘이 다시 은형술을 쓰고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아라한은 지그시 감은 두 눈을 뜨지 않았다. 시야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깊은 어둠뿐이지만 상관 없었다. 보이는 것을 더듬어봤자 소용 없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쪽이  유익했다.

    챙! 왼쪽 어깨를 관통하려는 칼을 막았다. 허밋 쉘은 재빨리 아라한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뒤 기척을 지웠다. 허밋 쉘은 이번에는 높이 뛰어 올라서 아라한을 향해 수리검 다발을 던졌다. 허밋 쉘의 위치도, 날아가는 수리검도 은형술로 감춰져 있었다. 하지만 아라한은 기다리고 있었다는듯이 부채를 펼쳐서 휘둘렀다. 거센 풍압에 날아오던 수리검들이 튕겨져 나가며 모습을 나타냈다. 여전히 몸을 숨긴 상태인 허밋 쉘이 빠르게 몸을 굴리며 아라한의 발목을 잘라내려 했다. 스윽... 빡! 아라한은 허밋 쉘이 노린 쪽의 발을 살짝 들어올려 참격을 피한  그대로 다리를 뻗어 허밋 쉘의 얼굴을 걷어찼다.

    "....?!!"

    은형술이 해제된 허밋 쉘이 바닥을 데굴데굴 뒹굴었다. 잽싸게 몸을 일으킨 허밋 쉘은 발차기에 맞고 지끈거리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 날 볼 수 있는 거지?!!"

    "보이지 않았으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애초에 저는 눈을 감고 있었잖습니까? 기척도, 소리도 확실하게 지워졌습니다. 즉, 은형술에는 그 어떤 결점도, 하자도 없었다는 말이죠."

    "그럼 대체 무슨 수로 공격을 막은 거야!!"

    "카일이였던가요? 그 자의 공격은 읽을  있어도 속도를 따라가질 못해서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그에 비해 당신은 빠르지도 않고, 교묘하지도 않아서 읽기 편합니다."

    "읽는다고?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데 무얼 읽는단 말이지?!"

    "무엇을 읽냐고 물으셨습니까?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들 중에는  수 없어도, 들을 수 없어도, 느낄 수 없어도, 분명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당신도 동방에서 태어난 자라면 익히 들어봐서 알잖습니까? 흐..."

    "흐름!!! 제발 그놈의 흐름 타령 좀 집어 치우라고!!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어서 이젠 지긋지긋해!! 난 동방에 있을  반평생을 바쳐 수련을 했어도 흐름이 뭔지 알지도 못했고,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았어!! 그런 잠꼬대 따위에 몰두해서 인생을 낭비할 정도로 한가하다면 칼을 쥐는 게 훨씬 확실하다고!!"

    격분한 허밋 쉘이 자신의 칼을 고쳐 쥐었다. 아라한은 두 눈을 감고 있어서 허밋 쉘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엄청 열받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은 느낌으로 알  있었다.

    "흐르는 물을 칼로 베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웃기지 마! 너같은 애송이 하나 토막내지 못할 정도로 무디진 않아!"

    허밋 쉘이 또 다시 수인을 맺자 그녀의 주변에 세 개의 분신이 나타났다. 분신들은 키, 얼굴, 체격 같은 신체적인 부분 뿐만이 아니라 인기척이나 느낌 같은 추상적이고 미묘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본체와 똑같았다.

    "어디 그 잘난 흐름으로 이것도 한번 읽어봐."

    스르륵. 허밋 쉘과 세 개의 분신이 은형술을 써서 동시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곧장 아라한에게 달려들지 않고 여기 저기 동선을 뒤섞으면서 혼란을 야기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아라한이 눈꺼풀에 힘을 줬다. 침착하자. 머리를 굴려서는 안 된다. 귀를 쫑긋 세워서도 안 된다. 숨을 죽여서도 안 된다. 육체의 생각과 감각은 오히려 방해가 되니 최대한 억눌러야 한다. 아라한은 눈꺼풀에 살살 힘을 풀고 오로지 흐름에만 집중했다.

    규칙이 있는 듯 하면서도 무작위적인 동선들이 마구잡이로 섞이는 흐름이 느껴졌다. 찌를 기세로 퍼뜩 다가오다가도 휙 빠져버리면서 아라한의 심기를 흐뜨려 놓았다. 어느 것이 본체의 흐름이고, 어느 것이 분신의 흐름인지도 구별이 쉽게 가지 않았다.

    "....!"

    포착. 아라한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를 포착했다. 감았던 눈을 번뜩 뜬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수리검을 잽싸게 주웠다. 좀전에 허밋 쉘이 던졌던 물건이다. 아라한은 몸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자신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오는 흐름을 향해 자신있게 수리검을 들어올렸다.

    안타깝게도 오른쪽에 있는 것은 분신이었다. 허밋 쉘이 본체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특별히 신경써서 조종했던지라 보기좋게 넘어가 버렸다. 어리석은 녀석! 아라한의 정면에 있던 허밋 쉘은 들리지 않도록 속으로 아라한을 비웃고는 한 번에 숨통을 끊기 위해 달려들었다.

    눈속임. 어리석은 녀석이라고 비웃음을 당해야 하는 건 아라한이 아니였다. 아라한은 이곳에 오기 전에 에반 플루토의 훈련을 통해 배워둔 것이 있다. 분명 아라한은 오른쪽을 보고 있었고 분신을 향해 수리검을 던지는 듯 했지만, 아라한의 손을 떠난 수리검이 날아든 것은 본체 허밋 쉘 쪽이였다.

    ".....?!!!"

    보란듯이 눈속임에 당한 허밋 쉘이 불의의 기습을 받고 태세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러 자신의 얼굴에 날아온 수리검을 튕겨냈지만 아라한은 거기에 걸리는 시간까지 이미 계산해뒀다. 허밋 쉘의 칼이 수리검을 막는 사이에 몸통 바로 앞까지 파고든 아라한이 손을 뻗었다.

    푹! 가늘고 예리한 표재성 통증이 어깨에서 느껴졌다. 허밋 쉘이 통증이 느껴진 자신의 어깨를 보자 마비독 바늘이 꽂혀있었다.

    "끄으윽?!! 으윽.... 너.... 이 요괴같은 여우년이...!!!"

    바닥에 쓰러진 허밋 쉘이 아라한에게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미 온몸에 퍼진 마비독 때문에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곤룡회의 수행자 중에는 은형술이 특기인 아이도 있습니다. 그 아이의 은형술 또한 제가 단련시켰습니다. 대처법을 모르는 제국인들 상대로는 통했을 당신의 수법은, 진짜 정통한 동방인 앞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아아악!! 널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버릴 거야!!"

    허밋 쉘은 말을 듣지 않는 온몸을 마구 비틀어대며 고함쳤다. 아라한은 그런 허밋 쉘에게 마비독 바늘을 몇개 더 꽂아줬다.  정도 양의 독이면 서서히 목소리도 못 내고, 눈꺼풀도 들어올리지 못할 만큼 몸이 굳어갈 테고, 족히 사흘은 있어야 완전히 해독될 것이다.

    "....."

    아라한은 자신이 만든 연꽃을 주워들고 복도를 떠났다. 싸움이 끝나고 긴장이 좀 풀리자 억눌러뒀던 잡생각이 머릿속에 밀려들어왔다. 아라한은 자신의 품에 들린 연꽃을 내려다 봤다.

    연꽃은 연못밑의 진흙에서 싹을 틔우지만 물밖으로 나와 수려한 꽃을 피워낸다. 사람도 더러운 세상에서 태어나지만 고결한 존재가  수 있고, 반대로 진흙탕의 일부가  수도 있다. 뒷골목에서도 남루한 군자가 여래의 이치를 깨달을  있으며, 반대로 고귀한 혈통이라 해도 얼마든지 야차와 결탁하여 수라도(修羅道)에 떨어질 수 있다.

    문득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자신이 아그루스 제국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에 몸을 맡긴다면, 큰 흐름 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결과를 우선시하고 칼을 헤프게 쓴다면.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말로도 저 자와 똑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색에 잠기는  평온한 일상을 되찾은 뒤로 미뤄두자. 그때가 되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선배와 이야기를 나눠보자. 지금은 지금의  일이 있으니 거기에 집중하자. 아라한이 애써 머릿속을 정리했다.

    휙! 아라한이 연꽃을 위로 던져올리자 커다란 연꽃이 다시 작은 꽃잎들로 나뉘어져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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