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3-3. 행동 개시 (4)
기숙사에서 샤워를 마치고 한결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프릴 루에리아는 체스부 부실로 향하고 있었다. 부실이 위치한 신 교사 건물은 기숙사 건물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수업이 끝난지 한참은 지났고, 해가 넘어간지도 꽤 됐기 때문에 어둑어둑해진 교정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프릴 역시 이런 시간대에 기숙사 밖을 돌아다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오? 프릴? 이런 시간대에 여기서 뭐 하는 거니?"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노신사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프릴이 뒤를 돌아봤다. 보안 지도원 윌터가 순찰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프릴이 꾸벅 인사하자 윌터는 온화하게 웃으며 프릴에게 다가왔다. 프릴은 옅은 미소를 짓는 한편 뒷걸음질 치면서 남자를 상대할 때의 안전거리를 유지했다.
"어디 외출하러 가니?"
"아뇨. 부활동을 하러 동아리 부실에 가고 있어요. 점호 시간 전에는 기숙사로 돌아갈 거예요."
"오오 그렇구나. 공부에 집중하느라 부활동 같은 건 안 한다던 프릴이 이런 시간대에 부활동을 하러 간다니. 어떤 동아리길래 흥미를 느낀 거니?"
"그... 그냥 체스부에요."
"체스부? 체스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렇네요. 하하. 어쩌다 보니..."
"어? 프릴? 여기서 뭐하고 있어?"
남학생의 목소리가 프릴과 윌터 사이에 끼어들었다. 시엘 밀리우스였다. 윌터는 시엘을 보자 평소에 루나칼립스 학생들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던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넌 누구냐? 여기는 여학원인데 이런 어둑한 시간에 뭐할 생각으로 당당하게 들어온 거지?"
"아저씨 오해하지 마셔. 난 그냥 부활동하러 온 거니까. 연합 동아리라고."
"연합 동아리? 하. 오르토스 쪽 사고뭉치구나."
"거 아저씨 참 너무하시네. 그냥 부활동하러 왔을 뿐인데 면박부터 주고 보고."
윌터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온도차를 보이자 당황한 프릴이 말했다.
"윌터 선생님, 시엘 군은 그... 좋은 사람이에요. 태도는 삐딱해 보여도 사실 상냥하고, 동료를 위해서라면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 멋진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경계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프릴의 말은 역효과를 일으켰다. 윌터는 프릴의 말을 듣고 더더욱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시엘을 쏘아봤다. 시엘은 윌터를 보며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프릴을 불렀다.
"가자, 프릴. 다들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네. 그럼 수고하세요, 윌터 선생님."
"뭐, 뭣이?! 설마 프릴 너, 저 녀석과 같은 동아리니?"
"네? 아, 네..."
"설마는 무슨 설마야? 웃기는 아저씨네."
프릴은 시엘과 약간의 거리를 벌려두고 서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란히 서있는 두 사람은 그림이 보기 좋았다. 키 차이가 크게 나지 않고, 둘 다 전체적인 이미지 컬러가 흰색이고, 머릿결은 깨끗한 눈이 내린 것 같은 은발이고, 양쪽 다 귀염상에 예쁘장하다. 윌터 입장에선 분했지만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윌터는 곱게 키운 딸내미를 어디서 굴러먹던 건지 모를 뼉다귀가 데려갈 때의 아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윌터는 거의 피를 토하는 심경으로 물었다.
"프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는 거지만. 그 녀석하고 그런 사이인 건 아니지?"
"네?!! 아니에요! 전 아직..."
"웃기는 아저씨네. 우리 학원 지도원보다 여기 지도원들이 더 이상한 거 같아."
프릴과 시엘은 그렇게 말하고는 윌터에게서 떨어져서 부실로 걸음을 옮겼다. 윌터에게서 멀어지자 더 이상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어서 확 조용해졌다. 프릴은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시엘과 걷고 있었고 서로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만 감돌았다. 말없이 계속 걷기만 하는 것도 뭣했는지 시엘이 먼저 프릴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말이야. 아까 했던 말 진심이야?"
"어떤 말이요?"
"나 칭찬했던 거 말이야."
"아, 그거요. 네. 전 진짜로 시엘 군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요. 저희는 아직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니까 분명 제가 모르는 장점들이 더 있겠죠."
"참 긍정적이구나. 여튼 고맙다. 날 그렇게 생각해주는 사람도 있구나."
긍정적인 평가와는 별개로 안전거리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지만 시엘은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 4층 부실에 도착한 시엘이 부실의 문을 활짝 열자 안에는 유리아 릴리스와 아라한이 먼저 와있었다.
"여어. 빨리들 왔네?"
"그, 실례합니다..."
"어서오세요. 두분은 오는 도중에 만나셨군요."
"아라한 너는 숙소가 누르워 뒷골목 깊은 곳이니까 나보다 멀지 않아? 근데 나보다 빨리 왔네?"
"뒷골목까지 갈 필요가 없으니까요. 국제 교류 학관에는 유학생들 중 일부를 수용하는 기숙 시설이 있습니다. 거기서 씻고 환복하고 왔습니다."
"그렇구나. 난 외국인인데도 그런 시설이 학원에 있는 줄도 몰랐네."
"두분 어서 와서 앉으시죠."
시엘이 유리아 옆자리에 앉았고, 프릴은 아라한의 옆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아라한이 준비한 찻잔이 놓여 있었다. 에반 플루토를 제외한 멤버들이 모두 모였다. 고된 훈련을 마치고 학원까지 돌아오느라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시엘이 찻잔에 따라져 있는 따뜻한 녹차를 한쪽으로 밀며 칭얼거렸다.
"좀 시원한 거 없어? 안 그래도 갈증 나는데 이런 뜨거운 걸 마셔야겠어?"
"식혀서 드시면 되겠군요. 얼음을 만드는 게 특기잖아요?"
아라한이 시엘을 가볍게 놀렸다. 시엘은 입을 삐죽이며 책상에 엎어졌다.
"아으으으. 피곤하다. 씻고 나왔을 때 그냥 누워서 자버리고 싶은 생각이 어찌나 들던지."
시엘이 앓는 소리를 내자 유리아가 그에게 말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누르워에서 씻고 다시 학원까지 오느라 동선이 길어서 체력 소모가 더 크시겠죠."
유리아가 자신을 챙겨주는 말을 하자 책상에 엎어져있던 시엘이 벌떡 일어났다.
"아니야! 나 괜찮아! 완전 괜찮아!"
"정말로 다친 데는 없으신 건가요? 무리해서 내색하고 계신 거 아닌가요?"
"그런 거 아니야! 나 진짜 괜찮아!"
시엘이 호들갑을 떨었다. 유리아는 여전히 걱정하는 기색이었고, 프릴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아라한은 재밌는 구경을 하고 있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그건 그렇고 선생님이 늦으시네요."
"씻는 데 오래 걸릴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애초에 씻을 필요가 있나? 우리가 필사적으로 달려들어도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농락하더만."
"아까 저하고 시엘 군이 주문한 음식을 가지러 가셨나 봐요."
에반 플루토라는 화제가 던져지자 부실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입으로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네 명의 머릿속에는 정확히 똑같은 문장이 들어있었다. 슬쩍 부실 바깥을 내다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시엘이 네 명의 머릿속에 있는 그 문장을 입으로 뱉었다.
"그 인간은 대체 정체가 뭘까?"
시엘의 질문을 신호탄으로 해서 나머지 세 사람도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직설적으로 물어봐도 항상 대답을 회피하셔요."
"비밀이 한둘이 아닌 분이죠. 게다가 제가 아무리 들여다봐도 도무지 파악할 수 없어요."
"관절기도 안 먹혀, 조르기도 안 먹혀, 물리적인 타격은 아예 무시하는 수준. 내가 '그 인간' 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정말 인간이긴 한 걸까?"
"혹시.... 킬링 이터? 정체가 킬링 이터라서 초인적인 신체 능력을 가진 데다가 이리 조직에 대해 많은 걸 파악하고 있는 거 아닐지?"
"에이 설마요. 킬링 이터는 여자라고 추측되는걸요."
"추측일 뿐이잖습니까?"
"그래도..."
"킬링 이터일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수사관이랑 인맥이 닿는 분이 카그루를 쓰고 식인 행위를 하러 다닐 것 같지는 않네요."
"애초에 그 인간 정도면 카그루도 필요 없잖아."
"수사관 뿐만이 아니에요. 치안관 중에 선생님을 열렬히 따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에요. 자신이 치안관이 된 것은 전적으로 선생님 덕분이라면서요."
"파도 파도 미궁의 깊은 곳으로 빠져들어갈 뿐이군요. 훈련 때 저희의 마법을 완전히 봉인해 버린 그 기술은 대체 뭐죠?"
"모르겠습니다. 그 기술을 발동시키기 전에 아민어로 뭐라고 영창을 외웠었는데..."
"Yajerukia u agerhaimo urifulia. 억양이랑 강세법이 제가 알고 있는 아민어와는 좀 다르지만 발음만큼은 분명했어요."
"역시 루에리아 양이군요. 그 문장은 무슨 뜻인가요?"
"완전한 혼돈의 군림."
"완전한 혼돈의 군림? 그런 영창이 있었나요?"
"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교과서나 책에서도 본 적이 없고요. 애초에 주변 모든 술자들의 마법을 완전히 차단해 버리는 파격적인 효과를 가진 술식이 그렇게 짧은 영창만으로 발동될 수 있다는 것도 믿기 힘드네요."
"혹시 그 인간이 개발한 고유 술식 아니야?"
"제대로 된 고유 술식을 개발해서 그 논문을 학회에 발표하면 온 제국이 그 마법사를 인정하고 극진히 대접해줍니다. 그런데 수많은 마법사들이 무수한 실패만을 거듭해온 '술식 완전 봉쇄'를 고유 술식으로 개발했다? 온 제국에게 인정받고 떵떵거릴 수 있는 사람이 굳이 인력 업체에서 일하며 먹고사는 건 이상해요."
"대체 이 학원에 오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던 걸까?"
네 사람의 궁금증이 돌고 돌아서 다시 처음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물음표로 회귀했다. 그때 부실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에반 플루토가 궁시렁거리며 들어왔다.
"아아. 아까부터 자꾸 귀가 간지러운데 양손에 먹을 걸 들고 있어서 긁지도 못하고. 너희들 내 얘기 하고 있었지?"
에반의 양손에는 빨간 리본으로 묶인 피자 상자가 들려 있었다. 양손에 피자 한판씩 들고 그 위에 음료수까지 얹어놓은 상태로 균형을 유지하는 게 무슨 곡예를 보는 것 같았다.
"오다가 혹시나 싶어서 음료를 사길 잘했네. 하마터면 피자를 녹차랑 먹을 뻔했잖아."
"아, 선생님. 어서오세요."
"그래, 다들 와있었구나. 허이구. 훈련하느라 힘 빼고, 땀 빼고, 살 빼더니 안 그래도 작은 얼굴들이 또 반쪽이 돼있네. 얼른 이거나 먹자."
에반이 들고 온 피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유리아와 시엘이 피자 상자를 묶고 있는 빨간 리본을 푸는 동안 에반은 영수증을 보며 푸념했다.
"아니 이 동네는 대체 뭘 믿고 물가가 이렇게 비싼 거야? 있는 집 아이들 상대라고 너무 날강도 심보로 가격을 매긴 거 아냐? 피자 두 판에 4만룬이나 나올 줄은 몰랐다고."
"그런가요? 왕도 루니아 물가의 절반이네요."
"왕도 물가야 워낙에 살인적이니 논외로 치고, 그래도 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보통 그 정도 가격으로 받지 않나?"
"카무곤에 있었을 땐 이것 저것 푸짐하게 얹어도 한 판에 9천룬 밖에 안했다고. 하기야 설국에는 피자 같은 게 없으니까 넌 모르겠지. 그러니까 파인애플 얹지."
"뭐?! 또 날 놀리는 거야?!"
"없는 걸 없다고 하는 건데 그게 왜 널 놀리는 거냐? 피해망상 있어? 자의식 과잉이야?"
"아오! 또 그 패턴!"
에반과 시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리본을 풀은 유리아가 피자 상자를 열었다. 치즈가 굳지 않고 살아있는 노릇노릇한 피자에 베이컨과 웨지 감자가 듬뿍 올려져 있었다. 에반이 포테이토 피자를 보자마자 뒷목을 잡고 한숨을 쉬었다.
"하아... 진짜 이놈의 감자.... 이거 누가 주문한 거냐?"
"저, 저예요... 죄송합니다."
프릴이 잔뜩 움츠러든 채로 손을 들었다. 그러자 에반이 언제 그랬냐는듯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윌터조차도 한 수 배우고 갈 정도로 온화한 미소였다.
"아아, 포테이토 피자. 아주 좋아. 베이컨 넣어서 파슬리 솔솔 얹은, 무난하고, 호불호 안 갈리고, 실패하지 않는 선택이지. 훌륭해. 좋은 선택이야."
에반이 그렇게 말하고는 다른 피자 상자를 열었다.
"이 피자에는 직화 스테이크에 새우가 그득그득 얹어져 있었으면 좋겠네. 자 그럼 어디 볼까?"
에반이 피자 상자를 열었지만 직화 스테이크나 새우 같은 건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파인애플이 듬뿍 얹어진 피자가 그를 반겼다.
"으아아악!!"
에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머리를 감싸쥐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둔기에 맞고, 칼에 맞고, 총에 맞고, 바늘에 찔리고, 폭발에 휘말리고, 마법에 직격 당해도 아야 소리 하나 안 내던 그를 비명 지르게 한 것은 파인애플 피자였다.
"말해라. 이건 누가 주문한 거냐?"
에반이 묻자 시엘이 손을 들었다.
"아 그건 내가 시킨 거.... 으아아앗?!!"
에반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는 시엘의 멱살을 쥐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시엘을 마구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악마냐, 마귀냐, 아니면 둘이 만나서 악귀냐?! 굳이 이렇게 무난하지도 않고, 호불호도 심하게 갈리고, 실패할 확률이 높은 선택을 해야지 속이 후련했냐?! 대체 왜!! 피자에 파인애플을 넣는 거야? 대체 머리가 어떻게 되면 파인애플을 화덕에 익힐 생각을 하는 거냐고?!"
"으아! 으아! 으아! 이거 놔!! 피자에 파인애플 넣는 게 뭐가 어때서?! 불에 구운 파인애플도 꽤 맛있거든?!"
"그렇겠지. 설국은 하도 추우니까 일단 뭐든 불에 익혀 먹고 보겠지 안 그래?"
"뭐?! 이번에는 나 놀리는 거 맞지?!!"
"그래, 놀리는 거 맞다 이 녀석아!"
에반과 시엘이 투덕거리는 동안 아라한이 유리아와 프릴에게 말했다.
"저 둘은 내버려 두고 저희끼리 먹도록 할까요."
"그러는 게 좋겠군요."
"잠깐?! 기다려 나도 먹을 거야! 젠장 이것 좀 놓으라고!"
"어허! 너희들! 돈 낸 사람보다 먼저 집어먹는 건 못 배운 짓이라고!"
한창 투덕거리던 시엘과 에반도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앉았다. 그 뒤로는 언제 그렇게 소란스러웠냐는 듯이 조용히 피자를 나눠 먹었다.
유리아와 프릴은 피자 한 조각을 접시에 덜어서 나이프로 작게 썬 다음 포크로 찍어 먹었고, 아라한은 위생장갑을 낀 손으로 집어서 먹었고, 에반과 시엘은 그냥 맨손으로 집어먹고 손가락에 묻은 소스까지 쪽 빨아서 마무리했다. 겸상을 하면 상대방에 대해 상당히 많은 걸 알 수 있다는데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다들 먹으면서 들어. 오늘 했던 훈련에 대한 내 감상을 말해줄 테니까."
에반이 체스부 멤버들에게 말했다.
"우선 훈련 동안 나는 총 26번 단단한 물건에 머리를 가격 당했고, 37번 날붙이에 찔리거나 베였고, 12번 골절이나 탈구 수준의 부상을 입을 만한 공격을 당했고, 바늘에 눈을 찔리고, 총에도 맞았고, 마지막에는 가스 폭발에 휘말렸다."
에반은 멤버들의 유효타 시도를 잊지 않고 다 세서 기억해두고 있었다. 훈련의 순간을 회고한 에반이 멤버들에게 말했다.
"너무하는 거 아니니?!!"
"어떤 도구든 다 휘두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렇긴 한데.... 다치면 어떡하나 걱정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절대로 안 다치니까 걱정은 일절 집어치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렇긴 한데.....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총으로 쏘고 화염병까지 던지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절대로 망설이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긴 한데.... 나한테 치명상을 입힐 시도를 하는데 거부감을 느끼는 기색이 전혀 없으니 역시 좀 그래."
"거부감을 최대한 없애는 것이 이번 훈련의 목적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렇긴 한데...."
"저희들 잘한 거네요?"
"그렇긴 한데... 잘한 게 맞는데 말이야... 역시 칭찬하자니 기분이 이상하단 말이야."
에반이 중얼거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몇 마디 덧붙였다.
"아무튼 나야 다치지 않으니까 별 거부감 없이 공격을 시도한 거겠지만, 실전에서는 상대방이 다칠 거란 말이지? 근데 자기가 한 공격 때문에 상대방이 비명을 지르고 피를 쏟는다면 당연히 너희는 평정심이 깨질 거야. 하지만 너희가 별생각 없이 배우는 마법이라는 게 실상은 총칼보다도 위험한 거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필요에 따라서는 냉혹한 마음을 먹으라고."
"뭐랄까 지금 우리 킬러 훈련을 받는 거 같은데?"
"누가 피도 눈물도 없는 킬러가 되라고 했니?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냉혹해질 필요가 있다는 의미로 말하는 거야.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안전한 곳에서 얌전히 공부만 할 생각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그런 순간이 올 테니 정신 바짝 차리라고."
멤버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은 훈련의 컨펌을 마치고 포테이토 피자를 한입 베어 물었다. 큼직한 감자 때문에 지겨운 맛이 났지만 아무렴 파인애플 피자를 먹느니 감자가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아 맞다. 유리아, 이번에 기사단 주둔군이 빨대 꽂으려던 상회들 다 쳐냈다며?"
"쳐내다니요? 사안이 사안인 만큼 다소 단호한 운영 전략도 불사했을 뿐입니다."
"그걸 바로 쳐낸다고 한다 이 영악한 아가씨야. 아무튼, 잘했어. 아마 주둔군 그 놈들이 더러운 짓거리 한 게 갈퀴날들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거다. 계속 쪼들리게 하다 보면 또 뭔가 뱉을지도 모르니 앞으로도 유심히 지켜봐야 해."
"네. 백화의 재산과 호의를 이리들에게 가져다 바친 댓가는 결코 가볍게 치르고 넘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갈퀴날들을 공격한다 하셨는데... 누구를 공격해야 할지 아직 모르지 않나요?"
에반은 V가 남기고 간 약도를 책상 위에 올려놨다.
"갈퀴날들의 거점 중 한 곳이다. 꽤나 비중있는 간부가 똬리를 틀고 있을 곳이지."
갈퀴날들은 핵심 세력의 대부분을 그롬에서 잃었고, 잔존 세력들을 모아 라쿠이르 지부 개척에 사활을 걸었다. 그런 와중에 회생이 걸린 주요 자금 수급처들마저 갑작스럽게 줄지어 박살나버리니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급한 불을 끄기 위해 가장 만만하다고 생각한 에반 플루토를 본거지로 끌어들여 처리하겠다는 치명적인 오판을 내리고 만 것이다.
"상대가 누구건 최대한 곤란할 때 싸움 걸어야 내 승률이 더 올라가지 않겠어? 그러니 이렇게 압박해서 곤란한 일을 자꾸 만들어줘야지."
에반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는 눈빛으로 쪽지를 팔랑거리며 말했다.
"그러면 이제 그 지도에 나와있는 거점을 공격하나요?"
"아직이야. 이건 덫이다. 알고 밟는 덫. 성대하게 환영해주기 위해 병력을 모아놨겠지. 그러니 진입하기 전에 미리 병력을 줄여놓을 필요가 있어. 일선 지휘관 포지션인 말단 간부 이리들 위주로 해서."
"어떻게 유인해 내는데?"
"느긋하게 기다려. 계속 압박하다 보면 급한 녀석들은 알아서 찾아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