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3-3. 행동 개시 (3)
"아윽!!"
에반 플루토와 접점을 펼치던 시엘 밀리우스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철퍼덕하고 쓰러진 시엘은 거의 바닥에 닿는 것과 동시에 몸을 오른쪽으로 굴렸다. 쨍그랑!! 시엘이 쓰러졌던 곳에 에반이 던진 유리병이 떨어져 깨졌다. 신속하게 몸을 굴리지 않았었다면 유리병에 맞았을 것이다.
"하아... 하아..."
시엘의 숨이 턱 끝까지 차있었다. 몸이 처음처럼 잽싸게 일으켜지지 않는 걸 보니 슬슬 체력이 부족한 듯했다. 에반은 시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내가 좀 전에 가르쳐준 걸 잘 기억했구나. 잘했어. 앞으로도 그렇게 넘어지거나 쓰러지면 상대 쪽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기 전에 일단 옆으로 구르고 보도록 해. 분명히 쓰러진 널 향해 무언가가 날아오고 있을 테니까."
시엘이 주먹을 쥐고 에반을 똑바로 노려보는 한편 주변을 슬쩍슬쩍 곁눈질해 보면서 도구로 쓸만한 것이 있나, 도주 경로는 있나 살폈다. 에반이 그런 시엘에게 지적했다.
"눈알 굴리는 게 너무 티 나잖아. 좀 전에 쓰러졌을 때, 옆으로 구를 때, 몸을 일으킬 때. 그런 사소한 동작을 취할 때 시야에 스쳤던 주변 환경을 다 스캔해 뒀어야지. 이제 와서 가자미 마냥 눈알 옆으로 굴리면 이미 늦은 거야."
"하아.. 하아... 그런 게 가능해?"
타앗! 숨을 고를 틈을 안 주고 날아든 에반이 시엘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런 게 가능한 걸 프로라고 부르지."
"끅?!!"
시엘이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에반의 손목을 잡고 탈출 기술을 걸려고 했다. 그러나 에반은 시엘을 테이블 바 쪽으로 집어던져버렸다.
"아윽!! 으으..."
시엘이 내동댕이쳐지자 우당탕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에 진열되어 있던 양주병들이 우르르 무너졌다. 에반은 바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에반이 가까이 다가오자 무너진 찬장 밑에 축 늘어져있던 시엘이 벌떡 일어나서는 에반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거나 먹으라고!!"
시엘의 손에는 원형 훈련장의 운동 기구들 틈에서 몰래 슬쩍했었던 아령이 들려있었다. 시엘이 휘두른 아령이 정확히 에반의 머리를 가격하자 빡! 하고 묵직한 소리가 났다.
"오호. 훌륭한 시도다. 가산점을 주지."
에반이 시엘을 향해 엄지를 척 치켜올렸다. 시엘이 떨떠름한 얼굴로 아령을 내려놨다.
"근데 방심은 하면 안 되지."
퍽! 에반이 엄지를 치켜세운 손을 그대로 뻗어 시엘의 가슴팍을 밀듯이 쳤다. 시엘의 가벼운 몸집이 붕 떠서는 로비 중앙으로 나뒹굴었다.
"아윽!! 이게 대체 몇 번째야..."
"방심했으니 방금 받았던 가산점은 취소다. 뭐야, 아직도 누워 있네? 빨리 안 일어나?"
에반이 바에 널브러진 술병 하나를 집어 시엘이 뻗어있는 곳으로 집어던졌다. 바닥에 뻗어있던 시엘이 상반신을 벌떡 일으키더니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술병을 손으로 낚아챘다. 그리고는 에반을 향해 냅다 도로 집어던졌다. 에반은 시엘의 반격을 슬쩍 피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감탄했다.
"갈수록 점점 감이 좋아지는데? 취소했던 가산점을 다시 돌려주마."
"칭찬을 받고도 이렇게 안 기쁘기는 또 처음이네 젠장...!!"
"하하! 그거 너희 아버지도 나한테 했던 말이지."
에반이 쓰러진 시엘밖에 보이지 않는 훈련장을 둘러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야, 나머지 애들은 다 뭐 하냐? 시엘 혼자 이렇게 구르는데 비겁하게 미끼로 던져놓고 숨어 있기냐?"
에반이 큰소리로 외쳤지만 이미 시엘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에반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방을 맡고 있는 시엘이 이렇게 퍼질 때까지 체력 소모를 시키면 후방인 너희도 절대로 안정적으로 못 싸우거든? 시엘 체력 관리 제대로 못하면 너희들 한 번에 다 감점이라고. 아무튼 이제 슬슬 얘 탈락시킬 거니까 조금이라도 동료 의식이라는 게 있다면 뭐라도 해보는 게 어떨까?"
"이쪽이다!"
에반이 지친 시엘을 탈락시키려던 그때 2층 난간 쪽에서 유리아 릴리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이, 유리아. 시간을 버는 건 좋은데 이쪽이다 하고 외치면서 자기 위치를 까발리는 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
에반이 목소리가 들린 쪽을 보자 2층 난간에 기대서있는 유리아의 손에 검은 ㄱ자 모양의 도구가 쥐어져있었다. 훈련장 어딘가에 꼭꼭 숨겨진 히든 아이템인 권총이었다. 유리아는 이미 장전이 된 권총을 에반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자신을 향하고 있는 총구를 본 에반의 입이 떡 벌어졌다.
"...헐??"
탕!! 유리아가 방아쇠를 당기자 총성이 울려 퍼졌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유리아는 총을 쏴보는 것이 처음이다. 그녀는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큰 총성에 놀랐고, 처음 겪어보는 사격 반동에 또 놀랐다. 처음이라 어설픈 자세로 총을 잡았던 탓에 반동을 맛본 그녀의 손목이 얼얼하게 울려왔다.
게다가 사격이라는 것은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게 아닌 이상 초심자가 2층에서 1층으로 멀리 떨어진 목표물을 권총으로 명중시키기는 무리다. 에반은 유리아가 쏜 총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발로 인해 시엘이 다치는 일이 없도록 시엘을 커버하기까지 했다.
"오호?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에반의 타겟이 시엘에서 유리아로 옮겨갔다. 에반이 유리아를 쫓기 시작하자 시엘은 어떻게든 몸을 일으킨 뒤 가쁜 숨을 고르고 연장을 찾기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체력을 회복하고, 적당한 도구를 찾아서 유리아와 합류한 뒤 에반의 주의를 끌어야 한다. 계획을 세운 시엘이 호흡을 정돈하면서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한편 유리아는 자신을 노려보며 성큼성큼 걸어오는 에반을 다시 권총으로 겨누었다. 그런 유리아에게 에반이 한마디 했다.
"혹시나 모를까 봐 말해주는 건데, 수사관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아. 그거 모조품이 아니라 실탄이 장전된 진짜 총이다."
"..!!"
그 말을 들은 유리아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반동 때문에 손목이 시큰거려서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 혹여나 자신이 터무니없는 실수를 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정신적으로 몰리는 것에 익숙한 유리아라고 해도 아직은 총이라는 살상만을 위해 개발된 무기의 무게를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멀리서도 유리아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눈치챈 에반이 그녀에게 말했다.
"유리아! 뭐 하는 거야? 내가 뭐라고 말했지? 무슨 일이 있어도 망설이지 말라고 분명히 강조해서 말했을 텐데?!"
"그렇지만! 실수로 다른 부원들을 쐈다가는...!"
유리아는 권총을 내려놓으려고 하고 있었다. 에반이 소리쳤다.
"절대 그 총 버리지 마!! 왜 너는 항상 딱딱하게 굴다가 정작 강하게 나가야 하는 순간에만 무르게 변하는 거냐고?!"
에반의 일갈에 유리아가 흠칫하며 권총을 다시 고쳐 쥐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까처럼 과감하게 방아쇠를 당길 용기는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유리아의 머릿속은 자신이 오발 사격을 하는 바람에 피를 흘리고 있는 시엘, 프릴, 아라한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그런 두려움은 이미 망설임이 되어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을 미동도 못하게 묶어두고 있었다.
"웃기는 녀석이네! 총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위험한 악성 이명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동료들을 휘말리게 하던 녀석이 말이야!!"
에반의 꾸지람을 들은 유리아가 이를 악물고 권총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하지만 내면의 두려움과의 싸움에만 집중하고 있을 겨를이 아니었다. 에반이 유리아를 노려보며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탓! 에반은 계단 같은 걸 이용하지 않았다. 제자리 뛰기를 해서 2층 난간에 사뿐히 올라섰다. 층계 한 칸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유리아와 에반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에반은 난간에서 사뿐히 내려와서는 유리아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섰다. 유리아는 에반을 향해 총구를 겨눈 채 그가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두 걸음 물러서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쏴."
에반이 말했으나 유리아는 여전히 긴 2층 복도를 따라 뒤로 물러서기만 했다.
"쏘라고. 어서."
"...."
유리아의 동공이 한자리에 고정되지 못하고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이토록 두려움 많은 아이가 그렇게 악독한 현실과 홀로 싸우고 있었다니. 에반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훈련 시간이다. 유리아의 고독과 불안을 이해해주는 건 훈련이 끝난 다음 할 일이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고독과 불안을 이해하기에 지금 훈련 동안 더더욱 모질게 나올 필요가 있다.
"못 쏴? 그래. 그럼 쏘지 마. 아무래도 실전에서 탈락자가 생긴다면 가장 먼저 탈락하는 건 네가 되겠지."
에반이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는 유리아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에반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우다다다 발소리를 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유리아에게서 떨어져!!"
발소리의 주인은 아니나 다를까 시엘이었다. 지금쯤 숨을 고르며 체력을 회복시키고 있어야 할 시엘이 그새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와서는 한 손에 면도칼을 쥐고 에반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하아압!!"
"숨도 안 차냐? 쬐깐한 녀석이 엔진은 좋은 걸 달고 있구먼. 그게 아니면 동기 부여가 너무 확실했나?"
에반이 유리아를 슬쩍 보며 그렇게 말했다. 시엘은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더라도 에반의 공격 타겟이 유리아가 되면 온갖 무리수를 둬가며 에반의 시선을 끌기를 반복했다. 어지간히도 유리아가 마음에 들었던 건가? 에반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는 유리아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서서 자신을 향해 질주하는 시엘을 맞이했다.
시엘은 체술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창 이외의 무기를 다루는 데에는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시엘의 칼은 눈에 훤히 보일 만큼 단순하고 직선적인 움직임으로 찌르고 들어왔다. 에반은 간단하게 공격을 피한 뒤 칼을 쥔 시엘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악력을 주었다.
"끄아아아악!!"
시엘은 손목에 엄습해오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손에 쥔 면도칼을 놓지 않았다. 에반이 살짝 힘을 더하자 손뼈가 손목에서 탈구되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격통이 밀려왔다.
"으아아아아아!!"
시엘이 괴로움에 더 크게 비명을 질렀지만 그럼에도 손에 쥔 칼을 놓지 않았다. 덩치 크고 근육질인 시궁쥐나 이리조차 에반의 악력 앞에선 맥없이 힘을 풀었는데, 가느다란 시엘의 손목은 칼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이 가해지면 가해질수록 더 힘껏 칼 손잡이를 쥐었다.
악다구니 근성 하나만큼은 정말 인정해줘야겠다. 에반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 시엘의 손을 반대편으로 돌려 꺾은 뒤 칼을 빼앗았다. 에반은 칼을 빼앗자마자 시엘의 목덜미를 붙잡아 도망치지 못하게 한 뒤 그대로 칼을 들어 올려 내리찍을 동작을 했다.
"이번에는 시엘, 네가 첫 번째 탈락자가 되겠...."
탕!! 그 순간 총성이 2층 복도를 가르며 울렸다. 에반의 뒤통수를 치고 떨어진 탄두가 바닥을 굴렀다.
"호오?"
에반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자 유리아가 에반을 향해 권총을 겨누고 서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조금의 떨림도 없는 눈동자가 에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철컥! 유리아가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탕! 유리아는 탄창에 단 한발의 탄환만이 남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에반을 쐈다. 에반은 그런 유리아를 보며 싱긋 웃었다.
"거봐. 한다면 할 수 있잖아?"
하지만 칭찬도 잠시. 곧바로 시엘에게서 빼앗은 면도칼을 고쳐 쥐고는 매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반은 우선 아직도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엘을 먼저 빠르게 정리하기로 했다. 에반이 시엘을 향해 면도칼을 겨누고 처형 모션을 취했다.
"자 우선 한 명 탈락...."
캉! 어디 숨어있다가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정도로 신출귀몰하게 움직인 아라한이 자신의 부채를 뻗어 에반의 면도칼을 막아냈다. 아라한의 부채는 지금 에반이 발동시킨 술식 때문에 마법을 쓰지는 못하지만 아티팩트 특유의 견고함마저 사라지지는 않았다.
부채로 면도칼을 막아 시엘을 구한 아라한은 그대로 자신의 몸을 던져 에반을 끌어안은 채로 난간을 넘어 떨어져 버렸다. 아라한의 투신에 휘말린 에반은 그녀와 함께 1층 로비로 곤두박질쳤다. 2층에서 1층까지의 높이가 큰 부상을 입을 만큼 높지는 않지만 과감한 동반 투신의 여파로 우당탕하는 화끈한 효과음이 울렸다. 에반이 그대로 몸을 굴려 아라한을 바닥에 눕히고 그녀의 목을 두 손으로 잡은 뒤 말했다.
"자신이 희생양이 되는 작전은 되도록 삼갔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아라한은 희생양이 될 생각이 없었다. 무언가를 오물거리며 수상한 입운동을 하던 아라한의 입안에서 무언가가 나왔다. 원형 훈련장에서 쓰던 바늘이었다. 앞니 사이에 바늘을 잘 세워서 끼운 아라한이 에반의 안구에 대고 바늘을 쏘듯이 뱉었다. 눈에 바늘을 직격당한 에반이 눈꺼풀 사이에 낀 바늘을 빼서 버리며 말했다.
"훌륭하다."
진심으로 아라한을 칭찬한 에반은 잠시 뒤 아직도 손에 쥐고 있는 면도칼을 아라한에게 향하며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어이! 이쪽 보라고! 지금 우리에게 등을 보인 거야?"
시엘이 깐족거리는 목소리로 에반을 도발했다. 에반이 뒤돌아보자 시엘 옆에서 유리아가 에반을 향해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녀의 탄창에는 아직 한 발이 남아있었다. 유리아의 준비성에 내심 감탄한 에반이 그들의 꾀에 넘어가 주기 위해 아라한을 내버려 두고 유리아와 시엘로 타겟을 바꿨다.
풀쩍! 에반이 그 자리에서 점프해서는 초월적인 도약력으로 2층에 착지했다. 에반이 그 멀찍한 거리를 무시하고 점프 한 번만으로 순식간에 자신들의 앞까지 와버렸지만 유리아와 시엘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에반이 2층에 올라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타닷하고 달리더니 둘이서 동시에 난간을 넘고 1층으로 뛰어내려 버렸다.
"허?"
에반은 망설임 없이 1층으로 몸을 내던진 유리아와 시엘을 내려다봤다. 시엘이 공중에서 유리아를 붙잡고는 그녀의 몸을 위로, 자신의 몸은 아래로 향하게 해서 바닥에 먼저 떨어져 유리아를 보호하는 쿠션이 되었다.
"꺼흑?!"
"어엇?! 시엘 군?! 괜찮으신가요?"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대체 왜 그러신 거에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다칠만 한 행동은 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 그렇게 가벼운 것도 아닌데.... 허리 괜찮으신가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나요??"
"괜찮아, 괜찮다니깐. 그리고 너 엄청 가볍다고."
시엘이 애써 허세를 부렸지만 유리아는 그런 그가 부상을 입은 곳은 없나 여기저기 살펴봤다. 그런 그 둘에게 아라한이 한 마디 했다.
"두 분 보기 참 좋습니다만 지금은 오붓한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닌 것 같군요."
그 말을 들은 유리아와 시엘이 2층에 있는 에반에게 시선을 보냈다. 에반은 세 사람의 임기응변을 칭찬하는 박수를 보내고는 자신도 1층으로 뛰어내리기 위해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때.....
탕! 또 한 번 총성이 훈련장 안에 울려 퍼졌다. 총성을 들은 시엘과 아라한이 유리아를 봤지만 그녀가 쏜 것이 아니었다. 총성이 들려온 곳은 1층 로비, 당구대가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프릴 루에리아가 권총을 겨누고 서있었다. 에반이 실소를 토했다.
"아니 원래 총 찾는 게 엄청 어렵다고 들었는데. 얘들이 잘 찾는 거야? 수사관들이 대충 숨기는 거야?"
줄곧 기회를 노리고 있던 프릴이 손에 힘을 꽉 주고 권총을 연사하기 시작했다.
탕! 탕! 탕! 탕! 프릴도 탄창에 단 한발의 탄환만이 남을 때까지 방아쇠를 당겨댔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다. 이 정도로 먼 거리를 권총으로 맞추는 것은 숙달되지 않은 일반인의 사격 실력으로는 역시 무리다. 프릴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왜 자신이 1층으로 뛰어내려와서 거리를 좁힐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에반은 곧 프릴이 노리던 피사체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피시이이이이.... 가스가 새는 소리가 에반의 귀에 들려왔다. 프릴이 노린 것은 2층 복도 천장을 따라 뻗어있는 굵은 난방용 가스관이었다. 굵기가 꽤 되기 때문에 정교한 에임이 아니더라도 적당히 쏘면 맞출 수 있었다. 총에 맞아 구멍이 난 가스관에서 가스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봐! 우리 훈련 시키느라 고생 많으니, 술이라도 한잔 해!"
시엘이 에반의 시선을 끄려는 듯 소리쳤다. 칙! 화르륵!! 프릴의 손에는 테이프로 방풍 성냥을 고정시킨 술병이 들려있었다. 그녀는 방풍 성냥에 불을 붙였다.
"호오..."
"감탄은 일단 맛보고 나서 하라고! 내가 프릴에게 설국 전통 레시피를 알려줬으니까!"
브나자루카 칵테일(Коктейль в Hазарука). 직역하면 '제국에게 권하는 칵테일'. 이름은 칵테일이지만 사실은 도수 높은 설국 전통주 몇 종류와 난로 등유를 섞어서 만든 화염병이므로 마시면 안 된다.
집에 술과 난로 기름을 쌓아두고 사는 설국인이라면 누구나 대량 생산할 수 있는데 위력까지 걸출하기 때문에, 얼지 않는 전차만 믿고 진격하던 제국군 원정대가 고작 지나가던 설국 민간인들에게 궤멸당하게 만든 역사가 있다.
프릴은 나머지 부원들이 시간을 끄는 동안 정성껏 준비한 칵테일 한 병을 에반이 있는 쪽으로 힘껏 집어던졌다. 현장에서 급조해서 불완전하더라도 상대가 가스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화력은 보장이 됐다. 에반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사제 화염병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한마디 중얼거렸다.
"역시 명문 학원 학생들. 머리 굴리는 속도 만큼은 전문가구나."
콰아아앙!! 화끈한 폭발이 일어나더니 에반의 몸이 두터운 화염구름에 휘말렸다. 목재로 된 2층 난간이 우지끈 무너지고 불이 붙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시도는 좋았지만 상대는 에반 플루토였다. 화염구름을 뚫고 나온 에반이 엄청난 속도로 질주해서는 시엘을 덮쳤다.
파앗! 눈깜짝할 사이에 나타난 에반이 자신을 덮쳤으나 시엘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에반의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고는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서 에반의 몸통을 자신의 양쪽 다리로 옭아매 고정시켰다. 스륵! 에반의 목덜미 바로 뒤에 은장도가 맞닿았다. 철컥! 철컥! 에반의 양옆에서 유리아와 프릴이 끝까지 남겨뒀던 최후의 한 발을 장전하고 그의 관자놀이를 겨누었다.
"....."
에반이 씨익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짧게 한 마디 했다.
"잘했어. 여기까지 해둘까?"
에반이 그렇게 말하자 그제서야 긴장을 풀은 체스부 멤버들이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하아..."
"으으.... 죽겠다 증말..."
시엘은 에반의 상체를 묶고 있던 자신의 두 다리를 풀고는 그대로 大 자로 뻗어버렸고, 유리아와 프릴은 손에 들고 있는 권총의 탄창을 빼버린 뒤 바닥에 던졌다. 아라한은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열을 좀 식혔다. 에반은 그런 체스부 멤버들을 격려하며 말했다.
"이야 그래도 정말 놀랍네. 아무것도 못하고 어버버하다가 2분도 안 되서 전멸하던 녀석들이 몇 번만에 이렇게까지 발전하다니 말이야.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어."
몇 차례고 반복된 훈련에 지칠대로 지친 멤버들에게는 반응할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좋아. 이번 훈련 결과는 꽤 만족스럽다고. 이제 마법을 써도 좋아."
에반이 그렇게 말하자 막혔던 회랑이 다시 활성화 되어 마력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몸이 지칠대로 지쳤는데 회랑을 달궈서 마력을 소모할 여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각자 돌아가서 씻고 바로 부실로 모이자. 배고플 테니 뭐라도 먹으면서 본격적으로 갈퀴날들을 어떡할지에 대해 얘기 해보자고."
"낙제하면 안 데려간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렇다는 건 저희들 합격했나요?"
"어설프긴 하지만 그래도 준수한 성장폭이야.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이번에는 너희들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어."
에반은 지쳐서 앉아있는 멤버들에게 공지했다.
"자, 땀 많이 뺐으니 돌아가서 좀 씻고, 부실로 오도록 해. 격려 차원에서 먹을 건 내가 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