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3-3. 행동 개시 (2)
라쿠이르 수사 당국의 지하 훈련장. 이번에는 프릴까지 합류해서 체스부의 다섯 멤버가 모두 모였다. 에반 플루토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의자가 뒤로 넘어가기 직전까지 등받이에 기대서는 체스부 학생들이 작성한 과제를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심드렁해지는 에반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후한 점수를 받기는 물 건너간 모양이었다.
"에라이 진짜...."
혼자 불만 섞인 추임새를 넣던 에반이 다 읽은 과제를 정리해서 포개어 놓았다. 그리고는 딱 봐도 억지스럽게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미소 지었다.
"걱정 마, 얘들아. 난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망했구나. 체스부 학생들이 저마다 에반에게 질책을 들을 각오를 다졌다. 에반은 네 사람의 과제를 펼쳐놓고 한 사람씩 컨펌을 시작했다.
"유리아."
"네."
"뭐 먹기는 한 거니? 진짜 목숨만 딱 붙여놓을 정도만 먹는구나."
"소식하는 게 문제 될 게 있는지요?"
"건강에는 문제가 있지만 과제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 그런데..."
에반이 나머지 멤버들의 과제에 적힌 유리아에 대해 알게 된 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식사하고 오랬더니 정말 딱 식사만 하고 온 거야? 다른 애들 과제를 보니 '말이 너무 없어서 알게 된 점이 없다, 조용한 사람이라는 건 잘 알겠다, 주문할 때 빼고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묻는 말에만 단답으로 대답한다' 라는데. 대화를 나눌 생각이 아예 없나 봐?"
"마땅히 화제도 없는데 음식물에 침 튀기며 놀 생각은 없습니다."
"으이구 이 화상아! 화제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분위기를 이끌어야지, 네가 체스부 부장인데 부원들이랑 소통할 의사가 없으면 어떡하자는 거야? 사무만 잘 처리하는 게 능력인 줄 알아? 능력이라고 쳐도 능력만으로 공동체가 돌아갈 거 같아?"
"저라고 해서 항상 침묵을 지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소소한 화제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유리아가 자발적으로 목소리를 내서 말하는 때는 학생회 업무나 체스부의 작전을 위한 회의를 할 때, 그 외에는 에반이 놀려서 맞받아칠 때뿐이었다.
"후우... 그래. 그것도 뎀피돈의 부작용 때문인 거로 하자고. 그래도 다음부터는 뭔가 시도하려는 모습이라도 보이라고."
"알겠습니다."
"다음은 프릴."
"네!"
"고생했다."
"네...."
꽁꽁 얼어있는 분위기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썼던 게 과제에서 보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행복 회로다. 알게 된 점, 이야기 나눈 것은 거의 없는데 앞으로 기대되는 점은 온갖 행복한 상상의 나래로 가득하네. 뭐 정말로 네가 써놓은 대로 되면 좋겠지만 글쎄..."
프릴이 실망스럽게 축 늘어지자 그녀의 머리에 달린 리본도 화분의 꽃 마냥 같이 푹 시들었다. 다음으로 에반의 시선은 아라한에게 향했다.
"한."
"네, 지도원 님."
"굳이 붓으로 써야 할 이유가 있어?"
두꺼운 종이가 굵은 먹선으로 가득했다. 혼자만 서예를 해놓아서 이름을 안 써도 누구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안 될 이유라도 있는지요?"
"없지. 그냥 내가 읽기 불편할 뿐."
에반은 눈을 부릅뜨고 아라한이 적은 과제를 읽었다.
"식당까지 가서 먹은 게 삶은 달걀이라고? 뭐 상관없지. 무얼 먹을지는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니까. 오호. 꽤 열심히 다른 사람들을 관찰했네."
"그게 제 소양이니까요."
"근데 그런 녀석이 자기는 관찰 당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다른 애들이 너에 대해 뭐라고 썼는지 알아? '부채 때문에 표정을 못 보겠다, 꾀부리는 여우 같다, 하나부터 열까지 연기하는 것 같아서 진심을 알지 못하겠다' 이런 건데?"
"그것도 제 소양이죠."
"소양은 무슨 삶아먹을 놈의 소양이야. 하여간 잔망스럽긴."
에반이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아라한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에반의 시선이 시엘을 향했다.
"시엘."
"엉."
"후우..."
에반이 말하기 전에 한숨부터 푹 쉬고 시작했다.
"많이도 먹었다 임마. 덩치는 쬐깐한 게 무슨 놈의 밥통이 이렇게 크냐?"
"뭐, 뭐 어때?! 유리아가 조금 먹은 만큼 내가 더 먹었을 뿐이야! 그리고 그 정도 양이면 설국인 평균이라고!"
"너나 유리아나 똑같아. 같이 식사하고 오랬더니 진짜로 식사를 열심히 하고 왔네. 오죽 열심히 먹었으면 다른 애들이 써놓은 걸 보니 '너무 짜게 먹는다 소금 섭취량을 줄이는 게 좋을 것이다, 고기만 찾는다 야채도 골고루 먹어야 한다' 이런 거나 적어 놓았냐? 건강 문진표야?"
"아 그래도 뭔가 얘기하려고 했다고."
"그렇네. 그런데 프릴이 널 대하기 껄끄러워 하더나?"
"쫌 그렇더라. 아무래도 내가 남자라서 그런가 봐."
"골치 아프다 증말. 얘들을 어떻게 단합시키냐?"
에반이 과제 종이들을 던져버렸다. 종이 낱장들이 허공에서 한들거리며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점수다운 점수를 받은 과제였다면 받을 취급이 아니었다. 체스부 학생들은 자신들의 성적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채점방식은 중간이 없어. 합격이 아니면 죄다 낙제야. 그리고 당연히 이번 과제는 다 낙제다."
"쳇! 점수 너무 짜게 주는 거 아니야?"
"성적 이의 제기는 안 받는다. 이제 바로 다음 훈련으로 들어갈 거야. 갈 길은 멀고, 걸음은 굼뜨니, 앞으로의 일정이 바쁘다고."
에반이 훈련장의 문을 열고 멤버들을 안내했다. 훈련장 안에 들어온 멤버들은 곧바로 저번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번에 에반의 지도를 받았던 곳은 넓고 평평하고 탁 트인 원형 훈련장이었는데, 지금 멤버들이 발을 들인 곳은 술집을 연상케 하는 내부 구조에 복잡한 인테리어로 가득했다. 다양한 주류가 세팅된 바가 있었고, 의자와 테이블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층도 1층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동서남북에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하나씩, 총 네 개의 계단이 있는 복층이었다. 2층은 1층 로비를 내려다볼 수 있는 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었고, 룰렛을 비롯해서 온갖 종류의 사행성 오락기구들이 잔뜩 있었다.
"이게 다 뭐야? 훈련장이 아니라 휴게소를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아니. 훈련장 맞아."
"진짜로?!"
"그래. 애초에 말이야, 수사관들이 이렇게 끝내주는 부대시설을 누릴 만큼 처우가 좋을 리 없잖아."
에반이 다소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는 수사관들이 대 테러 상황 모의 훈련을 위해 사용하는 장소야."
"대 테러 상황 모의 훈련이요?"
"그래. 범죄 현장 덮치러 다니는 수사관들이 기사들처럼 1:1 대련만 해봤자 도움이 되는 것도 한계가 있잖아. 전에도 말했듯이 이리들은 정면 대결 구도를 피한다고. 그래서 린치 상황, 난투 상황 등을 상정해놓고 거기에 대응하는 훈련을 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지."
체스부의 멤버들이 훈련장에 흥미를 보이며 주변을 잘 둘러봤다. 명칭은 훈련장이라고 부르고 있어도 외관은 아무리 봐도 유흥주점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훈련을 한다는 거죠?"
"맞아. 너희들이 학원에서 하는 실습이나 유성제도 그냥 평평한 원형 경기장에서 하잖아? 실전에 있어서 지형 지물이나 상황이 얼마나 큰 변수로 작용하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런 평지 경기장은 지형 및 상황 응용 능력을 평가 요소에서 배제한다는 꽤나 큰 단점이 있어."
"흥미롭군요."
"그러면 방식은 저번이랑 똑같이 덤비면 되는 거야?"
"맞아. 똑같기는 한데, 다른 룰을 하나 더 적용할 거야."
"다른 룰?"
"그게 뭐죠?"
에반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가 잠시 무언가에 집중하자 훈련장 내부의 조명이 불안정하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이변을 느낀 시엘이 금방이라도 주먹을 내지를 자세를 취하고 주변을 경계했다. 유리아는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이질적인 이명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라한은 저번에 폐공장에서 느꼈던 압도적인 공포와 비슷하지만 느낌이 조금 다른 어두운 흐름을 감지했다.
정신을 집중하던 에반이 감았던 두 눈을 부릅 떴다. 그리고는 여러 겹으로 반향이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Yajerukia u agerhaimo urifulia!"
까드득!!! 짙은 어둠이 공간 전체를 덮치자 거대한 야수가 이빨을 가는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던 체스부의 멤버들이 조심스레 눈을 떠보자 아무 일도 일어나 있지 않았다. 달라진 점 없이 그대로인 훈련장의 풍경과, 다친 데 없는 자신의 몸을 본 체스부의 멤버들이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 룰은 적용됐어. 이제 덤벼라."
에반의 말에 체스부의 멤버들이 영문을 몰라 머뭇거렸지만 곧 시엘이 먼저 에반을 향해 마법을 쓰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쓰려고 하기 시작했다.
"어...?"
시엘이 허공에 대고 손짓했지만 원래대로라면 그의 지휘에 응답하여 맺히기 시작해야 할 얼음결정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시엘이 허둥대며 다른 마법을 쓰려고 했지만 고드름도, 얼음 칼날도, 빙판길도 생겨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하얗던 시엘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마법이.... 안 써져??"
그 말을 들은 다른 멤버들도 아까부터 자신들을 좀먹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다들 자신이 다룰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마법을 쓰려고 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작은 이변조차도 일으킬 수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허둥대는 멤버들을 보며 에반이 말했다.
"새로 추가된 룰은 마법 사용 금지다. 대신 나도 마찬가지로 마법을 쓰지 않고 신체 능력으로만 공격할 거니까 공평하지?"
"공평하다니요! 에반 플루토 씨 당신과 저희의 신체능력이 동급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래도 쪽수가 다르잖아. 4대1이라고."
"마법을 못 쓰는 어린 마법사가 넷 모여봤자 상대가 될 리가...."
"시끄럽고, 간다."
에반이 장난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멤버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다들 패닉에 빠진 가운데 시엘이 이를 악물고 두 주먹에 힘을 실었다.
"젠장! 해보자고!!"
시엘이 에반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어서 근접전을 벌였다. 시엘이 요령 좋게 에반의 주먹을 계속 피하다가 에반의 몸통 안쪽까지 파고든 뒤 양팔로 에반의 어깨를 붙잡고는 힘을 실어 에반의 상반신에 매달렸다. 그대로 물구나무 서듯이 머리가 바닥을 향하게 몸을 뒤집은 시엘이 두 다리로 에반의 한쪽 어깨를 옭아맸다. 그 상태로 윗몸 일으키기를 하듯 상반신을 일으키면서 에반의 견갑골과 어깨 관절을 온 체중을 실어 비틀었다. 유성제 때 이스민을 부상 입게 해서 화제에 오른 기술이지만 에반은 일부러 당해주고도 꿈쩍하지 않았다.
"관절기도 안 먹혀? 이게 말이 돼?!"
에반은 자신의 어깨에 매달린 시엘을 간단하게 떼어버린 뒤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윽!!"
시엘이 벌떡 일어났지만 에반이 그의 목덜미를 콱 잡아서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테이블에 짓눌러 고정시켰다.
"이거 놔!!!"
테이블에 고개를 박은 채로 에반의 손에 짓눌린 시엘이 온몸으로 저항했지만 에반의 손아귀는 흔들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스륵. 시엘은 자신의 바로 눈앞에 있는 커다란 유리 맥주병이 들어올려지는 것을 보았다.
"자, 잠깐!!"
쨍그랑!!! 에반이 시엘의 머리를 겨누고 내리찍은 유리병이 산산조각 났다. 시엘이 질끈 감은 눈을 떠보자 눈앞에 갈색 유리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시엘의 머리 옆을 내려찍은 것이었다. 에반이 시엘을 놓고 말했다.
"한 명 탈락."
탈락이라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에반이 잔상을 일으킬 만큼 빠르게 다음 타겟을 향해 쇄도했다. 눈 깜빡일 틈도 없이 프릴의 바로 앞으로 날아든 에반이 깨진 술병을 프릴의 얼굴을 향해 찔렀다.
"....!!"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었다. 날카롭게 깨진 유리가 프릴의 바로 눈앞까지 와있었다.
"두 명 탈락."
에반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음으로 유리아를 노려봤다. 유리아가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에반은 들고 있던 술병을 집어던졌다.
"아앗...?!!!"
그러나 유리아를 노려보던 시선은 눈속임이었다. 에반은 유리아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상태였지만 그의 손을 떠난 술병이 날아든 곳은 아라한 쪽이었다. 흐름이 막혀버려서 혼란스러워하던 아라한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날카롭게 깨진 술병이 옆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상태였다. 아라한은 놀란 나머지 벙찐 표정을 감추는 것도 잊고 있었다. 벽에 처박힌 술병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세 명 탈락."
에반은 혼자 남은 유리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유리아는 에반이 한 걸음 다가올 때 마다 두 걸음 뒷걸음치며 무력하게 떨 뿐이었다. 스륵. 에반이 유리아에게 다가오던 도중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금속 재질의 재떨이를 집어 들었다.
뒷걸음치던 유리아가 벽에 막혀서 더 이상 물러서지도 못하게 되었다. 휙! 에반이 금속 재떨이를 들어 올리자 유리아가 몸을 움츠리고 눈을 질끔 감았다. 에반은 재떨이를 든 손을 내려놓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명 탈락. 전원 탈락."
에반이 테이블 위에 재떨이를 아무렇게나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아직도 긴장이 풀리지 않아 경직된 표정을 하고 있는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겁주는 식으로 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난 훈련을 살살 시키는 법은 도저히 모르겠단 말이지."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다고!! 평소에 우리한테 뭐 쌓아둔 거라도 있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아무튼 감상을 좀 말해줄게. 일단 편하게 앉을까? 널린 게 의자인데 이러고 서있을 필요는 없지."
에반이 유리아, 프릴, 아라한, 시엘을 테이블에 편하게 둘러앉게 시킨 뒤 컨펌을 시작했다.
"우선 네 명이 전멸하는데 걸린 시간이 2분도 안 돼. 양치질 절반 정도 할 시간이면 너희들 넷을 보내는데 충분하다는 거야."
"그렇지만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던걸요."
"그래서?"
"네? 그래서라니요? 마법사인데 마법을 쓰지 못하면 싸울 방법이 없어요. 연약한 몸 밖에 남지 않으니까요."
"그래. 정확해. 그게 마법사들의 고질적인 취약점이야. 프릴 네가 말한대로 마법을 빼앗긴 마법사는 약해. 근데 말이야... 약해도 너무 약해."
에반이 눈을 부릅뜨고 네 명의 어린 마법사들을 쳐다봤다.
"기사들은 칼을 빼앗기거나 부상 때문에 거동이 불편해져도 당당하다고. 수사관들 역시 아티팩트를 잃는다고 해서 수사를 포기하지 않아. 그런데 말이야, 마법사라는 것들은 마법을 못쓰는 몸이 되잖아? 그럼 처음부터 마법을 쓸 줄 몰랐던 사람이랑 똑같아지는 게 아니라 훨씬 더 보잘것없고 비참해진다고! 질질 짜고, 울고, 겁쟁이가 되고, 폐인이 되어 방에 틀어박히고."
에반의 말에 공감한 체스부 멤버들 표정이 심각해졌다.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유리아, 평소에 그렇게 나를 구박하던 위세는 어디로 가고 겁쟁이가 된 거지? 한, 흐름을 읽지 못한다고 해서 그 자리에 고여서는 썩기를 기다리는 물웅덩이처럼 되면 안 되지. 프릴, 실전에서도 상대가 네 안전 거리를 존중해줄 거라고 생각해? 시엘, 무작정 들이대지 말고 불리한 입장일 때는 뭐라도 들고 싸울 생각을 하라고."
에반은 숨돌릴 틈도 없이 지적을 늘어놓았다.
"프릴. 마법을 쓰지 못하면 싸울 방법이 없다고? 그럼 곱게 손 놓고 상대방에게 자기 운명을 맡기려고? 싸울 방법이 없는 게 아니야. 싸울 방법을 찾는 능력이 없는 거지."
"네..."
"그런 의미에서 시엘. 네 자세는 훌륭했다. 상대가 내가 아니었다면 충분히 통했을 거야."
"쳇! 결국 안 통했잖아."
시엘은 입으로는 빈정거렸지만,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지라 쑥스러워서 똑바로 앉지 못하고 꼼지락거렸다.
"이 결과가 나온 데에는 분명한 원인이 있어. 너희는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는 게 아직 너무 굼뜨다는 거야. 그런데 말이다. 실제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대책을 세우는 것. 그걸 두 글자로 줄여서 실전이라고 하잖아?”
“실전…”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상황을 파악했으면 재빠르게 그에 맞는 대책을 세워야지. 어째서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지 원인을 파악하고, 그 원인을 제거해서 마법을 되찾을지, 아니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로 상황을 극복할지. 뿐만 아니라 대책을 세우고 행동으로 옮기는 동안에는 주변의 사물과 지형,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요소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해. 실전 능력이란 바로 그 재치와 감각을 가리키는 말이다."
에반이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해주자 체스부의 멤버들은 주변을 둘러봤다. 에반이 가르쳐 준 것을 명심한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자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리병, 금속 재떨이, 당구 큐대, 접이식 간이 의자, 철제 파이프관 등 급할 때 무기가 될만한 물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실전에 임할 때는 최대한 빨리 상황을 파악해. 그리고 머리가 생각하는 중에도 몸을 바쁘게 움직여. 마법 외에서도 방법을 찾아내는 안목을 꾸준히 길러.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절대 망설이지 마."
체스부 멤버들은 에반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명심해 뒀다. 에반이 멤버들에게 살짝 웃으며 말했다.
"물론 실전에서 너희가 어떤 적을 상대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 장담할 수 있는 건 나보다는 약할 거란 말이지. 그러니까 훈련 때 나에게 어떤 시도도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어. 일단 뭐든 나에게 한번 써보고 조금 보완하면 웬만한 상대에게는 먹힐 거야. 보면 알겠지만 나는 어지간한 물리적 충격으로는 절대 다치지 않아. 그러니 내가 다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일절 집어치우고 훈련 동안에는 나에게 어떤 도구든 다 휘둘러 보라고."
"괜찮은 건가요?"
"당연히 괜찮지! 난 절대로 다치지 않아. 이런 걸로 다치면 험한 세상 무서워서 어떻게 살겠어?"
보통은 다치기 때문에 이 험한 세상이 무서운 게 정상인데. 체스부 멤버들 네 명의 머릿속 생각이 한 순간 정확히 일치했다. 에반이 앉아 있는 멤버들을 일으켜 세웠다.
"자, 원래 처음은 항상 당황스러운 법이지. 다시 해보자고. 이번엔 좀 잘 버텨봐."
에반이 씨익 웃자 또 다시 아까와 같은 그림자가 훈련장을 뒤덮기 시작했다. 유리아, 프릴, 아라한, 시엘. 네 사람이 일어나서 에반을 노려보며 자세를 잡자 짙은 그림자가 네 사람을 덮쳤다.
까드득!! 그림자가 덮쳐오며 울려 퍼진 이빨 소리와 함께 훈련이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