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3-3. 행동 개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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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화 〉3-3. 행동 개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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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화 〉3-3. 행동 개시 (1)
모든 실력은 누적된 경험에서 나오고 실전만큼 좋은 경험이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전이 아닌 모의 상황을 통한 훈련을 무시할 수는 없다. 기사단의 주둔지에는 검술 단련 및 대련을 위한 연무장이 있듯이, 수사 당국의 지하에도 수사관들이 격투술과 아티팩트 운용 능력을 단련하기 위해 사용하는 넓은 훈련장이 있다.
유리아 릴리스, 아라한, 시엘 밀리우스는 수사 당국의 훈련장에 찾아와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유성제 때 쓰는 경기장보다는 조금 작지만 그래도 두세 바퀴 달리면 숨이 찰 만큼 넓은 원형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유리아와 아라한은 훈련장을 둘러보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이고있었고, 시엘은 훈련장 벽 쪽에 나란히 늘어서 있는 운동 기구들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에반 플루토가 훈련장 안으로 들어오자 유리아가 그에게 물었다.
"수사 당국의 훈련장을 외부인이 사용할 수는 없을 텐데요."
"난 외부인이 아니니까 괜찮아. 내 지갑이 지폐는 얇아도 명함은 두둑하거든."
에반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뒤에 있는 수사관에게 말했다.
"훈련장 안을 촬영하는 녹화 장치는 모두 꺼둬. 나하고 얘들이 지금 여기 있다는 건 학원 측에서 모르도록 입단속 잘 해주고. 그리고 한바탕 날뛸 거니까 시원한 물도 좀 준비해놓고."
"알겠습니다."
유리아가 지적했듯이 외부인이 수사 당국의 훈련장을 사적인 목적으로 대여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안될뿐더러, 수사관에게 이래라저래라 요구할 수도 없다. 하지만 사전에 치안관 유티스로부터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줘라' 라는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에 수사관 입장에서는 에반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우리 애들이 좀 화끈하거든? 뒷정리 좀 잘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수사관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답한 뒤 훈련장 밖으로 나갔다. 수사관들의 아티팩트만 해도 난장판이 된 훈련장을 복원시키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아예 마법을 배우는 아이들이라면 얼마나 난리를 쳐놓을까? 뒷정리할 생각에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진 수사관은 설거지 앞의 에반과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수사관이 나간 뒤 에반은 세 사람을 자신의 앞으로 불러 세웠다.
"자, 즐겁고 신나고 행복한 수요일 체스부 정규 모임. 오늘은 특별히 이곳까지 나들이를 왔지."
"체스부의 기념비적인 첫 나들이 장소가 이런 땀냄새나는 지하라니. 게다가 루에리아 양도 이 자리에 없군요.아무래도 우리 동아리의 고문을 맡은 분이 고문의 의미를 다른 고문과 헷갈린 모양입니다."
아라한이 농을 던졌지만 에반은 사뿐하게 무시하고 자기 말을 이어나갔다.
"안타깝게도 프릴은 지금 바빠서 이 나들이에 참가하지 못했어. 어쩔 수 없으니 아쉬운 대로 여기 있는 인원들끼리라도 분발해서 친목과 화합을 도모하자고."
에반의 말을 들은 유리아가 손을 들고 말했다.
"친목도 좋고, 화합을 도모하는 것도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만, 이런 장소를 선택하신 걸 보면 놀자고 이곳에 저희를 데려온 건 아니시죠?"
"뭐 그렇지. 안 그래도 바쁜 학생들을 범죄조직 소탕 같은 데에 엮어놓고는 뭐 피크닉이라도 하자고 할까 봐? 지도원으로서 너희를 엄격히 지도하기 위해 이곳을 빌렸다."
"그럴 거라면 학원의 훈련장을 대여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굳이 여기까지 와서 바쁜 수사관들 일거리를 늘릴 필요가 있나요?"
"내가 장소 좀 빌려달라고 해서 행정부 애들이 빌려줄 것 같아? 내가 지갑에 명함은 두둑해도 그중에 이 학원 쪽 사람은 없다고."
"저나 루에리아 양에게 얘기하면 어렵지 않게 빌릴 수 있을 텐데요. 아, 저희 활동이 눈에 띄어서는 안 되니까군요."
"뭐, 일단 그게 가장 큰 이유긴 한데..."
텁! 아라한이 유리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유리아의 귀에다 대고 귓속말을 하는 시늉을 하며 들으라는 듯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유리아 양. 너무 그러지 마셔요. 수사 당국 쪽에 연줄 좀 있다고 자랑하고 싶어하는 건데 여기선 우리가 분위기에 넘어가 주도록 하죠."
아라한은 그렇게 큰 목소리로 말하고는 에반을 향해 영혼 없는 물개박수를 보냈다.
"역시 지도원님이셔요. 굉장해. 인맥이 넓은 점 동경하게 돼."
"어른을 놀리니까 즐겁냐?!!"
에반은 헛기침을 크게 한번 하고는 다시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시엘의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같이 서있던 유리아와 아라한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은근슬쩍 어디론가 새버린 것이었다.
"아 얘는 또 어디로 간 거야?"
"도.... 도와줘.... 켁!!"
훈련장 구석의 벽 쪽에서 다 죽어가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이 동시에 소리가 들린 쪽을 보니 시엘이 무리하게 벤치프레스를 시도하다가 무거운 역기에 가슴이 깔려서 바둥거리고 있었다. 에반이 한숨을 푹 쉬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가지가지 해. 넌 여기서 뭐 하냐? 지도원 님이 열심히 얘기하면 들어야지 그새 딴짓을 해?"
"켁!! 빨리 나 좀 도와줘..!!"
"잘못했다고 하는 게 먼저 아닐까?"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끙..."
시엘이 애처롭게 발버둥 치자 에반은 안쓰럽게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에반은 한손으로 역기를 잡고는 아령 들어 올리듯이 번쩍 들어 올렸다.
"넌 임마 좀 체급에 맞는 걸 골라라. 니 몸무게의 족히 두 배는 되겠다, 이거."
"뭐야?! 한손으로?!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힘이야?!"
"시끄러. 빨리 안 내려오면 이거 다시 얹어놓는다?"
"기, 기다려!!"
시엘이 벤치프레스에서 내려와서 유리아와 아라한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에반이 돌아오자 아라한이 다시 물개박수를 쳤다.
"역시 지도원님이셔요. 굉장해. 근력이 강한 점 동경하게 돼."
"그거 좀 그만해!!"
에반이 뻣뻣하게 당겨오는 뒷목 근육을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와아... 어쩜 이렇게 단합이 안 되냐? 진짜 얘들이 갈퀴날들한테 덤벼도 괜찮은가?"
에반은 지금이라도 단독 진입으로 작전을 고쳐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했지만, 자신의 역할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 프릴을 생각해서 참기로 했다. 에반은 더 이상 산만해질 틈을 주지 않기 위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은 실전을 대비해서 훈련을 할 거야."
"훈련이라면 학원에서도 실습 시간에 자주 합니다."
"그거랑은 엄연히 다르지. 그런 훈련은 결투식이기 때문에 룰이 있고, 반칙이라는 개념이 있잖아? 게다가 서로가 다치지 않도록 선을 넘는 짓은 금지되어 있고."
"당연하지 않나요?"
"당연하지.하지만 실전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그 당연한 선을 넘고 시작하는 거라고. 상대방은 너희들을 최대한 심하게 다치게 해야 하니까 온갖 반칙을 다 동원할 거야. 혹여나 너희가 패배한다면 죽거나.... 죽는 쪽이 훨씬 나은 꼴을 면할 수 없지."
"이론 자체는 동의합니다만, 그래서 저희를 상대로 어떤 식으로 실전 훈련을 실시할 계획이신 거죠?"
"간단해."
에반이 유리아, 아라한, 시엘을 보고 한 마디 했다.
"덤벼라."
"...??"
유리아, 아라한, 시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는 에반에게 물었다.
"덤비라는 건...?"
"덤비는 게 덤비는 거지 달리 뭐가 더 있어? 지금부터 날 이리라고 생각해."
에반은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는 세 사람에게 손짓했다.
"너희가 배운 것, 아는 것, 자신있는 것, 할 수 있는 것 모두 동원해서 나를 이리라고 생각하고 공격해 봐. 미리 말해두겠는데, 난 너희가 힘조절을 해야하는 상대가 아니다."
에반이 말했지만 유리아와 아라한은 '네, 그러면 사양하지 않고 공격하겠습니다' 하고 넙죽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엘은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에반을 향해 마법을 쓰기 시작했다.
"뭘 망설이고 있어? 설마 저 인간이 다칠까 봐 걱정하는 거야? 난 걱정 안 해! 큰소리쳤으니 한 방 제대로 먹여줄 거라고!"
시엘이 손짓하자 그의 손짓에 응답한 얼음 결정들이 공중에 맺히더니 커다란 고드름이 생겨났다. 시엘이 허공에 팔을 휘두르자 크고 뾰족한 세 줄기의 고드름이 에반을 찌르기 위해날아들었다.
팍! 팍! 팍! 에반은 그 자리에서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손만을 써서 자신을 찌르려고 날아온 고드름들을 쳐서 깨뜨려버렸다.
"칫! 역시 이 정도로는 안 되겠지. 그럼 이건 어떨까? 이것도 손으로 막을 수 있을까?"
시엘이 아까랑 똑같이 허공에 고드름을 만들었다. 시엘이 손뼉을 짝 치자 고드름들이 깨지더니 예리한 얼음의 칼로 바뀌었다.
하지만 상대는 설국의 보배이자 눈보라를 일으키는 겨울의 창 우즈라스를 맨손으로 망가뜨린 에반 플루토다. 이번에도 조금 전의 고드름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듯이 손으로 얼음칼들을 쳐냈다. 손이 닿지 못하는 곳을 노리고 날린 칼날도 있었지만 에반은 구태여 피하지 않았다. 에반에게 적중한 얼음칼들은 그에게 어떤 흠집도 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깨져버렸다. 손으로 막는 것은 쇼맨십일 뿐 처음부터 방어나 회피를 할 가치도 없는 공격이었다. 시엘이 분하다는 듯이 혀를 차는 소리를 내더리 오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하압!!!"
시엘의 기합소리와 함께 무수히 많은 얼음의 칼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슬슬 시동이 걸린 시엘이 에반을 향해 팔을 휘두르자 그 많은 얼음 칼날들이 에반을 향해 쇄도했다.
딱! 에반이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그러자 탄지음이 울림과 동시에 기세 좋게 날아들던 얼음 칼날들이 모두 허공에서 멈췄다. 마치 그 부분만 시간이 멈춘 듯한 광경이었다.
에반이 검지를 세워서 유리아, 아라한, 시엘을 번갈아가며 가리켰다. 그러자 허공에 멈춰있던 얼음 칼날들이 명령을 들은 병사들처럼 뒤로 휙 돌아섰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부분이 세 사람을 향하게 했다.
"!!!"
이윽고 얼음 칼날들이 세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세 사람은 각자 흩어져서 황급히 몸을 날려 칼날 세례를 피했다.
"다들 괜찮아? 미안해, 나 때문에!!"
"아뇨,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닙니다."
에반의 반격을 피해 몸을 날렸던 세 사람이 재빠르게 일어나서 태세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어느샌가 에반의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세 사람이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지만 통로가 모두 막혀있는원형 훈련장 어디에도 에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라한이 신경을 곤두세워서 흐름을잡기 시작했다. 좁은 곳에 동그랗게 고여있는 웅덩이나 다를 바 없는 원형 훈련장에 노도와 같이 거칠고 빠른 흐름이 누군가를 향해 치솟고 있었다. 그 흐름이 향하고 있는 곳은.....
"....?!"
턱!! 유리아 앞에서 불현듯 모습을 나타낸 에반이 한손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고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유리아가 허공에 뜬 발을 마구 휘저어대며 몸부림을 쳤지만 에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경동맥에 더욱 압박을 가했다.
"유리아!! 어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적당히 봐가면서 하란 말이야!!"
시엘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에반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한편 에반의 악력에 숨통이 조여오고 있는 유리아는 혼미해져가는 의식을 가까스로 가다듬고 자신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치치치치치.... 지지직!!
불쾌하게 신경을 긁는 노이즈가 훈련장 안에 울리기 시작했다. 악성 이명이었다. 유리아의 뇌에서 뛰쳐나온 듯한 우울한 잡음이 주변을 좀먹기 시작하더니 이내 잡음이 닿는 모든 영역에 폭발적인 물리력을 행사했다.
파앗!!! 그 강렬한 파동에 시엘과 아라한이 귀를 틀어막으며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뭐, 뭐야 젠장!!"
"그때 예배당에서도 봤던 흐름이군요. 이런 불쾌하고도 섬뜩한 흐름은 유리아 양 이외의 사람에게선 본 적이 없습니다. 대체 이 흐름은..."
에반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유리아의 몸이 반투명해지더니 불안정하게 점멸하는 여러 개의 잔상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신호가 끊어진 화면처럼 지지직거리던 유리아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잠시 뒤 유리아는 팟하는 소리와 함께 에반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다시 나타났다.
"유리아! 괜찮아?!!"
"하아... 하아... 남 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시엘이 에반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시엘이 두 손을 들어 올리자 깨끗하고 투명하지만 판금과 같이 견고한 얼음이 그의 두 손을 감쌌다. 시엘은 얼음의 관절부 이음새를 잘 가다듬어서 손가락 마디와 손목의 움직임이 불편하지 않도록 했다. 준비를 마친 시엘이 바닥에 손을 가져다 대자 훈련장 바닥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시엘은 마치 스케이트를 타듯이 빠르고, 유연하고, 변칙적이라 예상하기 힘든 궤도로 미끄러지며 에반과 거리를 좁혔다. 에반과 가까워진 시엘이 과감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미끄러운 빙판을 만들어 상대방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근접전으로 승부를 보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에반의 격투 실력은 시엘이 상정했던 것을 훨씬 아득히 상회했다.
휙! 휙! 에반은 미끄러운 빙판 위에서도 전혀 스텝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시엘의 주먹을 회피했다. 시엘이 힘껏 체중을 실어 휘두른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시엘은 주먹을 휘두른 힘을 그대로 축으로 삼아서 몸을 한 바퀴 돌리고는 에반의 어깨에 돌려차기를 먹였다. 지끈! 분명 발차기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는데 에반은 전혀 데미지를 입지 않았고 오히려 시엘의 다리가 더 욱신거렸다. 지금까지 에반이 시엘의 공격을 회피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시엘 쪽이 아프지 말라고 배려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젠장! 사람이야, 골렘이야?!"
시엘이 빙판을 타고 미끄러지며 에반의 발차기를 피했다. 에반이 발차기를 한 반대쪽 다리의 무릎을 살짝 구부리자 그 짧은 기회를 포착한 시엘이 탓하고 점프를 해서는 에반의 무릎을 밟았다. 그리고는 그 무릎을 받침대 삼아 한 번 더 높이 점프 해서는 두 다리로 에반의 목을 옭아맸다. 플라잉 트라이앵글 초크. 시엘이 한쪽 다리를 굽혀 에반의 목을 감싼 뒤 발끝을 반대쪽 다리 무릎 밑에 포개어서 에반의 목을 감싸는 작은 삼각형을 만들었다.
시엘은 그 상태로 상체를 눕히듯이 뒤로 젖혀 자신의 온 체중을 다해 에반의 경동맥을 압박했다. 남자 한 명의 체중이 상체와 경동맥에 집약적으로 가해지고 있는데도 에반은 뒤로 넘어가지 않고 꼿꼿이 서있었다. 시엘은 지금 자신이 조르고 있는 게 사람 목인지, 대리석 기둥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다. 이윽고 무거운 역기를 한손으로 들어 올리던 에반의 완력이 시엘을 떼어내서는 멀찍이 집어던져버렸다.
"아윽!!!"
시엘을 집어던진 에반이 주변을 둘러보니 벚꽃 꽃잎같이 생긴 연분홍색 종이 조각들이 공중에 나풀나풀 흩날리고 있었다. 누구의 기술인지 바로 눈치챈 에반이 아라한 쪽을 보자 그녀가 여우같이 날렵한 눈매를 치껴뜨며 부채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아라한의 손짓에 에반 주위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던 꽃잎들이 순식간에 마비독에 흠뻑 젖은 바늘로 바뀌었다. 반응할 틈도 없이 바늘들이 에반에게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유리아와 시엘은 가느다란 바늘이 에반에게 통할 리 없다는 얼굴로 지켜봤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바늘들은 에반 위로 무작정 퍼붓는 것이 아니었다. 두 눈, 입안, 콧구멍, 귓구멍 등 그의 신체 내부로 파고들기 위해 집요하게 달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반은 바늘의 세례가 멎고 나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입안에 들어왔던 독바늘을 퉷하고 뱉었다. 그리고는 다소 짜증 섞인 표정으로 귀로 들어간 독바늘들도 빼냈다.
유리아, 아라한, 시엘. 세 사람이 에반을 중앙에 두고 삼각형 대열로 둘러섰다. 세 사람은 에반을 보며 거리만을 유지할 뿐 더 이상 공격을 감행하지 못했다.
마법사 끼리의 대결은 개인의 마력량 차이, 응용 센스 차이, 경험치 차이 등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실 치열한 정보전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방이 주로 쓰는 마법과 자신 있는 전투 방식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는 절대적이다. 알면 아는 만큼 절대적으로 유리하고, 모르면 모르는 만큼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그렇기 때문에 유성제도 첫 출전일 때의 순위가 제일 높고, 출전을 거듭하다 보면 순위가 떨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한번 유성제에 출전하고 나면 사용했던 기술에 대한 정보와 그 파훼법이 전교생들에 의해 연구가 되기 때문에 주특기를 더 연마하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되고, 새로운 전술과 테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 가장 강력한 기술은 최대한 마지막까지 숨겨놓아야 한다는 책략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리아, 아라한, 시엘 이 세 마법사들이 보기에 에반 플루토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도 어두운 미지의 영역이었다. 마력량 차이고, 응용 센스고 뭐고 그냥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특수한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었고, 우월한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강할 뿐이었다. 그가 강하다는 것은 체스부의 모든 학생들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맞붙어보니 예상 가능한 범위를 아득히 벗어날 정도로 강했다. 이쪽에서 하는 공격은 통하지 않았고, 저쪽에서 하는 공격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뿐이었다. 그뿐이기 때문에 파훼법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하아.... 하아..."
전력을 다해 에반에게 부딪혔던 시엘이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하...."
유리아는 마법을 사용한 탓에 이명으로 지끈거리는 측두를 손가락으로 마사지했다.
"....."
아라한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동요하는 심경을 완전히 감추기에는 부족했다.
세 사람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셋이서 동시에 각자의 전력을 담은 일격을 퍼붓기로 했다.
"Миллыюсо!! Нахчта Хектан Краль Кахад Тожедаут!!!"
시엘이 에반을 위협하는 자세로 서서 우렁차게 하카를 외쳤다. 그렇게 시엘이 시선을 끄는 동안 유리아는 주머니에서 투명한 액체가 든 작은 플라스틱 용기를 꺼냈다. 유리아가 용기에 든 액체를 잘 섞이게 흔들자 무색투명하던 액체가 보라색 빛을 내기 시작했다. 유리아가 용기에 달린 손잡이를 당기자 주삿바늘이 솟아났다. 유리아는 자신의 팔에 바늘을 꽂은 뒤 보랏빛 액체를 남김없이 다 주사했다. 아라한은 자신의 상의 저고리 안쪽에 고이 숨겨져 있던 은장도를 꺼냈다. 엄지를 튕겨 칼집을 벗기자 은장도의 칼날이 모습을 나타내며 반짝였다.
시엘의 손에서 시작된 차디찬 바람이 점차 거세지더니 이윽고 모든 것을 얼려버릴 만큼 거친 눈보라가 소용돌이치며 에반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유리아가 손짓을 하자 또다시 악성 이명이 일어나더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이즈의 창이 솟아나 에반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라한이 에반을 향해 던진 은장도에서 빛나는 곤룡 문양이 생겨나더니 은장도가 불꽃을 품으며 폭발했다. 잠시 뒤 은장도를 불씨로 삼은 거센 불길이 날개를 펼치며 새의 형상을 취하고, 화려하게 날갯짓 하며 에반을 향해 쇄도했다.
세 사람의 공격이 거의 동시에 에반을 덮쳤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훈련장을 감싸고 있는 결계가 반응을 보일 만큼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뭐... 이쯤 해둘까?"
"...!!"
쓰러뜨릴 수 있다는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좋으니 유효타를 입힐 생각으로 공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반은 세 사람이 화력을 다한 집중포화를 맞고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덤덤하게 연기를 헤치고 걸어 나왔다.
"일단은 다들 수고했다. 처음인데도 다들 적극적으로 참여해줬네. 자 그럼 이제 내 감상을 말해주자면...."
에반이 숨을 고르고 있는 유리아, 아라한, 시엘을 번갈아가며 한 번씩 보고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대로면 니들 싹 다 낙제야."
세 사람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단 한 번도 유효타를 입히지 못했으니 좋은 점수를 기대할 수 없는 건 당연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정색을 하며 낙제라고 말하니 충격받을 수밖에 없었다.
"쳇! 우리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근데 유효타가 전혀 안 들어가는데 어떡하라는 거야?!"
"유효타? 나한테 타격을 입히는 건 애초부터 채점 항목이 아니였어."
"뭐?"
시엘이 따졌지만 에반은 단호한 목소리로 컨펌을 시작했다.
"내가 훈련 시작하면서 너희한테 뭐라고 말했었지? 나를 이리라고 생각하라 했지? 그러면 너희가 이리를 상대할 때는 어떻게 할지 고민했어야지. 그래야 실전 훈련의 의미가 있잖아?"
"댁을 이리라고 생각하고 덤비면 뭐가 달라져?"
"뭐가 달라지나 보는 게 훈련의 목적이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이제부터 알아야지. 앞으로 싸우게 될 상대가 이리들이라면 이리들에 대해서 알아야하지 않겠어?"
에반이 검은 장갑을 탁탁 털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실 이리라는 놈들은 말이야. 아무리 중견급으로 꼽힐 정도라 해도 정면 승부로는 수사관에게 밀린다. 그래서 보통 이리들은 싸울 때 결투 구도를 피하는 습성이 있어. 함정을 파놓고, 자기 구역으로 끌어들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상식을 벗어나는 온갖 수법으로 약점을 파고들지. 그래야만 수사관의 강점인 정면 돌파에 대응할 수 있거든. 그렇다면 수사관 만큼의 전투력도, 노련함도 없는 너희가 정면 돌파로 이리들의 교활함을 파훼할 수 있을까?"
"아마... 없습니다."
"그게 각자의 방식이라는 거야. 이리들은 사회의 모순과 인간의 욕망 틈새에서 비롯되는 교활함, 수사관은 범인을 초월하는 굳센 행동력, 기사단은 유구한 전쟁의 역사와 함께 축적해온 지휘 체계. 전문가도 아닌 너희가 이런 방식을 취해봐야 전문가들 만큼 실전 효율이 나올까?"
"아닙니다."
"그러면 너희는 어떻게 해야할까? 체스부가 취해야하는 방식은 뭐라고 생각해?"
세 사람은 에반의 질문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셋이서 잠깐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부장인 유리아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협동인가요?"
"그래. 단결력이다. 그게 너희가 취해야 할 방식이고, 갈고 닦아야 할 무기다. 지금까지 제국,설국, 동방 이 셋으로 나뉜 세계가 단결에 성공한 사례는 없었어. 그런 의미에서 너희의 단결에서 나오는 시너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 그런데... 너희들을 상대하면서 1:3 대치 구도라는 느낌이 진짜 요~만큼도 안 들었던 거 알아? 다수를 동시에 상대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세 사람은 아무 반론도 하지 못했다.
"한. 내가 유리아를 덮치려 할 때 왜 유리아에게 조심하라고 알려주지 않은 거지? 네가 읽을 수 있도록 일부러 대놓고 거친 흐름을 일으켰는데?"
"그, 그건..."
"시엘. 내가 유리아의 목을 조를 때 왜 소리만 빽빽 지르고 있었지? 실전에 임할 때는 상대가 누구건 일단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기본으로 깔아둬야지."
"큭! 유리아가 다칠까 봐 그랬던 거야..."
"유리아, 악성 이명을 쓸 때는 동료가 최대한 휘말리지 않도록 조절해야지."
"네...."
"유리아하고 한 너희 둘. 시엘이 근접전을 벌이는 동안 왜 아무도 엄호를 하거나 보조해주지 않았던 거지?"
"방해될까 봐..."
"시엘. 빙판을 만들어 움직임을 방해한다는 건 좋은데, 동료들 움직임도 방해하고 있었던 건 생각 못 했나?"
"으으..."
"한. 흐름을 읽어 상대방의 공격을 예측할 수 있는 네 초인적인 감각과 곤룡회를 통솔하며 쌓아온 책략은 팀 보조에 아주 탁월해. 하지만 중요한 패는 자기 소매 밑에 다 꽁쳐두고 입 싹 닫는 성격이니 보조를 전혀 못하고 있어. 잊지마, 네 옆에 있는 그 애들은 너의 동료다. 앞으로도 동료들 곁에서 계속 그 부채로 입 닫고 있어 보라고. 그러다 결국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네 눈으로 직접 봐야겠지."
"...."
"유리아. 노파심에 부탁하는 건데. 앞으로는 절대로 누가 보는 앞에서 뎀피돈을 쓰지 마. 만약에 정 써야만 한다면.... 목격자를 한 명도 남기지 마. 내 말 이해하지?"
"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이서 썼던 합체기도 영 부실해. 서로의 능력을 보완하며 시너지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서로 충돌하고 방해하면서 위력을 상쇄하고 있다고. 너희가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증거겠지."
에반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과제가 있다. 이번 주 중으로 프릴까지 포함해서 넷이서 함께 식사하기. 어딜 가서 뭘 먹을지는 너희들 마음이다. 다만 식사하고 나서 서로에 대해 알게 된 점, 이야기 나눴던 것, 앞으로 기대되는 것 다 써서 나한테 제출해. 과제도 제대로 안 하고, 내 훈련에서 계속 낙제하면... 너희는 아직 실전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할 거야. 알겠냐?"
세 사람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에반 플루토의 냉혹한 1차 지도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