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3-2. 압박 (9)
에반이 사감실에 들어서자 여느 때처럼 커피를 홀짝이고 있던 엘리아가 그를 반겼다. 엘리아의 책상 위는 기계 장치들로 가득했다. 사생들의 방에서 회수해온 꿈꿈 스퀘어 무더기였다.
"오셨군요."
"그거 다 스퀘어야? 모아놓고 보니 꽤 많네."
"사생들에게 공지해서 교체용 예비 기기까지 전부 다 회수했습니다."
"고생 좀 했겠어."
"고생은 제가 아니라 루밀리 양이 했죠. 당신이 조사를 위해 학원에 없는 동안 루밀리 양이 수고 좀 했습니다."
눈엣가시 같은 사감대리가 없으니 혼자 엘리아 옆에서 신났을 루밀리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혹시나 스퀘어를 숨기거나 하는 애들은 없고?"
"저는 아이들을 믿습니다. 진지하게 당부했으니 저를 속이면서까지 고집부리진 않겠죠."
"그래, 다른 룸메이트 애들은 다 냈는데 혼자 몰래 꽁쳐뒀다가 뚜뚜 거리면 꼴사납다는 거 지들이 더 잘 알겠지. 귀족이나 상류층의 체면이라는 게 이럴 때 만큼은 편리하단 말이야. 안 그래?"
"그나저나 사실인가요? V 하우스의 관리자들이 가져간 뇌파 센서들이 줄곧 이리들에게 넘어가고 있었다는 게."
"사실이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이 손으로 자백을 토해내게 했어. 이 스퀘어는 처음부터 이리들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고, 기숙사 애들은 이용당하고 있었어."
"방금 자백을 토해내게 했다 하셨습니까?"
"거친 방식을 써서 염려시킨 점은 미안해.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점잖떨고 있을 때가 아니야."
"사과하지 마세요. 당신은 옳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아이들을 지키는 것만 생각해주세요."
"너라도 내 편이라서 다행이야. 정말로."
"새삼 쑥스러운 말씀을 하시네요. 저는 당신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당신 편이였는데."
"솔직히 난 처음 널 봤을 때 여러 생각이 들었는데... 계속 지켜보니 네가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진심인 거 같거든. 신기한 일이야."
"흐음..."
엘리아는 말없이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마셨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붉은 버섯 그림이 그려진 머그잔은 검고 뜨거운 액체로 가득했다. 여전히 감미료를 대량으로 투하해서 본래의 맛이 남아나질 않은 커피였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엘리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그들이 와있습니다."
"V 하우스의 대표가 왔다고 했었지?"
"네. 본명은 밝히지 않고 그저 V라는 가명만을 알려주더군요. 그런데 이 사람. 사감인 제가 아니라 사감대리인 당신에게 용건이 있답니다. 이유는 짐작이 가긴 합니다만... 마음 같아서는 저희 학원은 이제 V 하우스에 용건이 없으니 물러가라고 하고 싶어도 당사자인 당신의 의견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잘했어. 어차피 네가 가라고 해서 그냥 갈 녀석들이 아니야."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할 거죠?"
"만나봐야지. 지금 응접실에 있지?"
"네.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 나 혼자 간다."
에반은 엘리아에게 뒤는 자신이 맡을 테니 사감 업무를 마저 하라고 했다. 그리고 응접실에 아무도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거듭 강조해서 부탁했다. 걱정하는 엘리아를 뒤로하고 에반이 기숙사 응접실에 들어서자 응접실 소파에 앉은 한 남자가 금칠한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덥수룩한 콧수염이 인상적인 얼굴이었고, 양옆에는 수상하게 생긴 두 여자가 서있었다. 그 두 여자는 저번에 센서를 가지러 왔던 관리자들과는 급이 다른 본격적인 살기를 두르고 있었다. 콧수염의 남자가 에반을 보며 살갑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루나칼립스 학원의 사감대리님. 제가 바로 V 하우스의 대표 사업자입니다. 편하게 V라고 불러주시죠. 오늘은 바쁜 가운데 이렇게 시간을 할애하게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대단히 죄송한 짓인 줄 알면 오질 말던가 했어야지."
"하하... 저희 사업에 있어서 기숙사의 고객님들은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저희도 쉬이 물러날 수가 없는 상황이죠. 그래서 저희 V 하우스 쪽에서도 몇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하는데..."
철컥! 응접실로 들어온 에반이 문을 걸어 잠궜다. 문고리 잠기는 소리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V와 그 옆의 쉘, 론의 표정이 흠칫하고 굳었다. 에반은 의연한 걸음걸이로 창문쪽으로 걸어가서는 블라인드를 쳐버렸다. 햇빛 한 줄기 들어올 틈 없이 블라인드를 치자 응접실 안이 어둑어둑해졌다.
에반은 V 앞에 껄렁한 자세로 앉아서는 다리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엘리아나 슈나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보는 눈 없고, 듣는 귀 없어. 이제 편하게 까놓고 말하자고."
에반의 태도에 V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감대리님? 무슨 말씀이신지....??"
"잘 찾아왔다고. 내가 니들 햄버거 가게에 쳐들어왔던 그놈 맞아. 다진 고기 공장을 털었던 동방인들도 내가 사주했고. 다 알고 왔잖아?"
단도직입적인 에반의 말에 V는 영업용 표정을 싹 거두고는 에반을 노려봤다. 주변에 선 두 이리들도 안쪽에 숨겨놓은 연장으로 손을 옮기고 있었다. 에반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테이블에 다리를 뻗어 올린 거만한 그 자세로 말했다.
"그래서? 어떡할래?"
금방이라도 송곳니를 드러낼 기세로 에반을 노려보는 이리들 때문에 응접실 안에 험악한 분위기가 돌고 있었다. 만약 에반이 조금이라도 공격적인 몸짓을 취했다가는 바로 흉기가 날아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에반은 세상 무서울 거 없다는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V가 에반에게 말했다.
"넌 누구냐? 뭐 하는 놈이지?"
"좀 전에 니 입으로 말했잖아. 사감대리님이라고. 기억력 딸려?"
V가 어이 없다는듯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 세상 어느 사감대리가 남의 장사판을 죄다 헤집고 다니나? 기숙사에 얌전히 틀어박혀서 애새끼들 세탁기나 고쳐주고 있어야지."
"난 S급 사감대리라 가능해. 그리고 니들이 말하는 그 장사판이라는 게 학원에 쳐들어와서 병약한 학생의 약을 빼앗거나, 사생들 뇌파로 더러운 뒷공작을 꾸미는 건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쓰겠냐?"
"너.... 어디까지 알고 있지?"
"글쎄. 몰라야 하는 것도 다 알고 있겠지."
스륵. 울프 론이 암기를 꺼내려는 소리가 들렸다. V는 에반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는 울프 론을 만류했다. 그리고는 화제를 돌려 에반에게 물었다.
"어느 조직 놈이냐?"
"학교법인 시리우스 교육재단 루나칼립스 학원."
"그거 말고."
"유한공사 No Problem Company."
"그런 거 말고!"
"아 그럼 뭐?!"
시치미 떼는 게 아니라 진짜로 뭘 더 말하라는 거냐는 어조였다. 그러나 연기력도 이리의 기본 소양이다. V가 에반의 답변에 눈에 띄게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무리 봐도 교직원 구실하려고 학원에 있는 건 아니야. 네놈."
"허이구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학생이나 다른 교직원들에게 오지게 쪼이고 있는데, 이제 하다 하다 니들 같은 이리 새끼들에게도 똑같은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우리 같은 이리 새끼들이라고? 그러는 네놈도 이리 출신이잖아."
그 말에 에반이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검지를 세워 V와 양옆의 허밋 쉘, 울프 론을 번갈아가며 삿대질을 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니들하고 나하고 동류로 보이냐? 모욕감을 주려는 거라면 훌륭한 시도였다."
"시치미 떼지 마, 이 젠장맞을 놈!! 카일하고 그 떨거지들을 내쫓은 것도 네놈이잖아! 그것도 아티팩트나 마법을 쓰지 않고 맨손으로 말이야!! 이래놓고도 자기는 그냥 지도원에 불과하다고 시치미 뗄 생각은 아니겠지?!"
"아 그니까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난 S급 지도원이라 가능하다고. 그리고 언성 높이면 본인만 손해일 텐데? 이 방이 그렇게 방음이 잘 돼있는 건 아니거든. 내가 미리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게 손을 써두긴 했어도...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큭!! 후우..."
V가 언성을 낮추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조금도 진전이 안 된 이야기를 마저 이어나갔다.
"똑바로 말하라고. 넌 어느 조직 놈이야? 청소부들이 보냈나? 교단 쪽인가? 아니면 북부 지역 조직이 아니라던가?"
"사람 말이 말 같지가 않나. 난 그런 조직에 속해 있지 않아. 속했던 적도 없고."
"야생이다 이건가."
"야생은 뭔 야생이야? 굳이 말하자면 악덕기업의 축생이라고 해야겠지."
"능청 피우지 마! 너도 이리잖아!"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지? 귓구멍 공사를 하다 말았나? 개통이 덜 됐나 본데 내가 마저 뚫어줄까?"
까드득! V가 신경질적으로 이를 갈았다. 양옆에 있는 두 이리들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한편 흉기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지금 눈앞의 에반이라는 상대는 처음부터 자신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태도에, 흉기를 가진 다수의 앞에서도 덮칠 거면 덮치라는 듯이 늘어진 자세를 하고 있고, 도발적이고 삐딱한 말투를 늘어놓고 있다.
그 모습이 언뜻 보면 무방비해 보이지만 분명히 무언가 준비해놓은 덫이 있어서 저렇게 자신들을 도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게 아니라면 에반이 보기에 자신들은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거나. 어느 쪽이건 이리들은 에반의 페이스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일단은 공격 태세를 무르기로 했다.
"크으윽....!"
V가 나음을 한번 내고는 에반에게 다시 말했다. 에반은 여전히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건성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카일이 가지고 있던 카그루. 그 카그루라는 건 이리들이 가진 인체 개조 중 가장 강력하고도 위험한 기술이야."
"그래서?"
"그래서라니?! 넌 그런 개조를 받은 놈을 맨몸으로 쓰러트린 거라고! 그렇게 되면 생각할 수 있는 건 딱 하나지. 어딘가에서 미친 마법사가 카그루보다 더 강력한 인체 개조 기술을 개발했다고."
"인체 개조 기술이라. 마냥 틀린 건 아닌 가설이네."
마냥 틀린 건 아닌 가설. 긍정이긴 한데 불완전한 긍정이었다. 에반이 모호하고도 의미심장하게 대답하자 V가 계속 추궁했다.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려면 후원이 필요해. 하지만 인체 개조같이 불법이고 떳떳하지 못한 기술을 연구하는데 투자금을 아끼지 않는 건 지하 경제의 주판을 두드리는 이리 조직들뿐이지."
"그래서 내가 어딘가의 조직에 속한 이리라고 판단한 거냐?"
V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에반은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잘못 짚으셨어. 난 니들이랑 동류가 아니라고."
"이 새끼가....!!!"
척! 안 그래도 모자란 인내심이 결국 한계에 달한 V가 벌떡 일어나 에반을 공격하려 했지만 허밋 쉘이 팔을 뻗어 그를 만류했다.
"V님, 더 이상 이 자의 배후 조직을 캐내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화제를 바꿔보도록 하죠."
"후우..."
허밋 쉘이 제안하자 V는 씩씩거리면서 다시 앉아서 숨을 골랐다. 분노 조절 담당자를 따로 데리고 다니는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에반이 피식 웃었다. 그 웃는 얼굴에 V는 눈을 부라리다가 곧 소용없다는 걸 알고 화제를 바꿔 질문했다.
"이 학원에 루에리아 공작가의 공녀와 백화 상회의 회장 딸이 학생으로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이번에 그 둘이 갑자기 손잡고 우리 조직에 타격을 입혔는데 다 네놈이 뒤에서 뭔가를 꾸며서겠지?"
"뒤에서 뭔가를 꾸민다고? 생각이 참 지들 같은 방향으로만 돌아가는구나."
"능청 떨지마! 네가 아직 어린 학생인 그 둘을 가스라이팅해서 이용한 거잖아! 내 말이 틀렸나?!"
"애초에 말이야. 니들 말대로 루에리아 공작가 공녀에 백화 상회 회장 딸, 이런 애들이 학생으로 있는 학원을 건들면 이 정도 후폭풍은 각오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네가 관여한 게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말 돌리지 말고 그것만 딱 대답해!!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V가 버럭버럭 소리쳤지만 에반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그걸 왜 말해줘야 하는 거지?"
"뭐라고?!"
V가 살기를 담은 시선으로 노려봤지만 에반은 그렇게 노려봐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도 그럴게. 아까부터 계속 니들만 일방적으로 나한테서 뭔가를 캐내려고 하고 있잖아? 내가 왜 일하다 말고 불려와서는 니들이 묻는 대로 꼬박꼬박 대답해줘야 하지? 이쪽도 뭔가를 물어보게 해줘야 대화를 할 의향이 생기지 않겠어? 엉? 상호 존중! 협력! 안 그래?"
테이블에 다리를 쩍하니 올려놓고 반쯤 기대 누운 불량한 자세로 상호 존중이니 협력이니 말하는 에반의 뻔뻔함에 V는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요구 사항 자체는 일리가 있었기 때문에 침착하고 에반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그래서? 네놈이 묻고 싶은 건 뭐지?"
"백화 상회의 공주님이 좀 특이한 지병을 오래 앓아서 몰래 몸보신 하시는 건 알고 있겠지? 근데 그건 학원 내에서 지극히 일부에게만 알려진 극비라고. 이제 뒷말은 굳이 다 안 해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겠지?"
"우리 쪽과 내통해서 약물에 대한 비밀을 팔아넘긴 박쥐 교직원이 누군지 알려달라고?"
에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V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난 모른다. 같은 갈퀴날들이라고 해도 간부들마다 추진하는 프로젝트가 다 다르고, 간부들끼리는 서로 남의 프로젝트에 간섭하지 않는 게 우리들 방식이라고. 약물은 내가 관여한 게 아니야. 카일하고 그 떨거지들도 내 라인이 아니고."
"그러냐? 음... 구라 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믿으라고 강요는 안 해. 피차 네놈이나 우리나 신뢰 관계를 구축하려고 이러고 앉아있는 게 아니니까. 구라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버려 둘 거야."
"아 근데 이걸 어떡하냐? 그쪽에서는 나한테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나한테 빼가기만 하려고? 양심은 어디다 팔아 드셨나?"
"이리한테 양심 같은 걸 기대하는 건가?"
"그러게. 내가 한 말이지만 내가 생각해도 웃기네."
에반은 한바탕 이리들을 비웃어준 뒤 이제는 아예 잠을 청하려는 자세로 소파에 기댔다. 에반이 지그시 눈을 감자 V가 욕설을 뱉으려고 했지만 그전에 에반이 먼저 말했다.
"니들이 더 잘 알겠지만 정보라는 건 무기고, 무기는 돈이 되잖아? 주는 게 있어야 돌아오는 게 있지. 아무것도 먹여주는 게 없으면서 맨입으로 정보를 제공해달라 이거야?"
에반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듯한 어조로 말하자 V가 표정을 고치더니 금칠한 이가 드러나도록 씨익 웃으며 에반에게 말했다.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우리라고 해서 너에게 아무것도 먹여줄 게 없을 리가 있나? 흥미가 솟을만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지."
"내가 흥미를 느끼게 하려면 보통 자극으로는 안 될 텐데?"
"우리 같은 이리들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이리들 머리에서 나온 발상이 과연 보통 자극이겠어?"
"흠. 어디 한번 보여줘 봐."
V가 아까보다도 이가 더 훤히 보이게 웃으며 자신의 지갑을 꺼냈다. 그가 지갑에서 꺼낸 것은 어딘가의 위치가 메모된 약도였다. 에반은 능청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게 뭔데?"
"사감대리 형씨. 사람이 몇 살까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나?"
"뭔 뜬금없는 소리를 하고 앉았어?"
"흐흐흐! 우리가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는지 상상도 못할 테지. 들으면 분명 놀라 자빠질걸?"
"안 들려줄 생각인 애들이 꼭 그런 식으로 허세 부리더라. 그래서 이 주소는 나한테 왜 줬는데?"
"와보면 알게 되겠지."
"그럼 안 가고 그냥 모르련다. 내가 아쉽냐? 니가 아쉽지."
에반이 약도를 다시 V쪽으로 밀어버리려 하자 V가 만류했다.
"아니, 아니, 이거는 모르고 넘어가면 아쉽다고, 내가 보증하지."
"여기로 오면 내가 얻게 되는 게 뭔데?"
"그건 와서 얘기해 나가야지. 맞춤형 주문 제작 서비스거든. 마음에 안 드는 사람 하나를 바꿔칠지, 마음에 드는 사람을 개인 소장할지. 어때? 벌써부터 솔깃하지 않나?"
"아니, 벌써부터 따분한데."
"개인주의인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할지에 흥미가 없다면,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메뉴도 있지, 아 당연히 있어."
"내가 암만 감자나 까먹으면서 팔자 험하게 살아도 너같은 이리 새끼가 참견해 줄 필요는 없거든?"
"참견이라니, 사감대리 형씨. 댁이 어디서 무슨 개조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개조 하나 믿고 천년이고 만년이고 살 거 같아? 때 되면 낡고, 수틀리면 뒤지는 거야."
피식! 에반이 코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 소리가 V의 귀에는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니들은 천년이고 만년이고 살 자신이 있다 이거냐?"
"아 자세한 사업 얘기는 사업장에서 하자니깐."
"그래. 그래야겠지."
"흠? 이제야 흥미가 생겼나?"
"흥미고 자시고 이 상황에서 너희 사업 얘기에 장단 맞춰주지 않으면 죽자고 싸울 일 밖에 더 생겨? 안그래도 니 옆의 둘은 당장이라도 칼부림 치려고 벼르고 있잖아. 근데 학원 안에서는 애들 보는 눈도 있으니 피 볼 일 생기기는 싫거든?"
"영역 바깥에서 일 저지르기 싫어하는 건 이리들도 피차 매한가지다. 특히나 눈에 띄기 쉬운 이런 양지에서는 더더욱. 그러니 일단 한번 와보라고. 마음에 들도록 입맛에 최대한 맞춰 줄 테니까. 원래라면 아무한테나 알려주지 않는 대외비인데 특별히 내가 선심 쓰는 거야. 그러니 구미가 당긴다 싶으면 이쪽이 성의를 보인 만큼 협조적으로 나와 달라고."
"음. 좋아. 그렇게 하지."
V는 두 이리들을 데리고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V가 나가고 난 뒤 응접실에 혼자 남은 에반은 V에게 받았던 약도를 꺼냈다. 약도에 표시된 주소는 어딘가의 병원이었다. 약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에반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슬슬 준비해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