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3화 〉3-2. 압박 (7) (73/88)



〈 73화 〉3-2. 압박 (7)

이틀에 걸친 에반 플루토의 노력 덕분에 체스부의 부실은 그럴싸한 모습을 갖추었다. 에반은 체스부 부장 유리아 릴리스와 차장 프릴 루에리아의 서명을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어서 자재관리부를 탈탈 털었고, 그렇게 마련한 체스 용품들과 다기들을 선반 안에 가지런히 정리해놓았다. 테이블 위에는 알사탕과 커피 비스킷을 차려놓고, 낡아서 변색된 바닥의 카펫도 새것으로 바꿨다. 깔끔해진 부실을 보며 흡족하게 웃은 에반은 이내 자신은 할 일을 마쳤다며 부실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졸기 시작했다.

"숙소에서 누워 주무시는 게 낫지 않나요? 선생님."

프릴이 엎드려 자려고 하는 에반에게 물었다. 나른한 오후, 둘뿐인 부실, 조용한 분위기. 에반이 이미 반쯤 잠든 늘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땃쥐 모공만한 방에서 누워봐야 관짝에 들어간 기분 밖에 안 든다. 앞으로는 여기를 주로 이용하면서 냉난방비를 축내야 쓰겠어."

"하하..."

만일 지금 에반과 부실에 있는 사람이 유리아였다면 지금쯤 에반은 한바탕 잔소리를 들었겠지만, 프릴은 시덥잖은 농담을 받아줄 때의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는 것으로 그쳤다.

"그러는 프릴 너는 기숙사 방이 훨씬 더 넓고 쾌적할 텐데 왜 여기 있는 거야?"

"음. 용건이 있어서 한동안은 보는 눈이 있는 곳에서는 쉬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러냐?"

에반은 남들 보는 눈을 피해야 하는 그 용건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냥 부실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고개만을 살짝 들어 프릴 쪽을 봤다. 그녀는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만년필로 양피지 공책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뾰족한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엘리아의 사감실을 생각나게 했다.

"흐음."

프릴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손동작을 멈춘 그녀는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던 페이지를 뜯어버렸다. 쫙 하는 소리와 함께 뜯어져 나온 그 낱장을 책상 한구석에 올려놓았다. 그곳에는 이미 뜯어진 양피지 낱장들이 잔뜩 놓여있었다. 수북이 쌓여있는 낱장들을 보니 족히 수십 장은 뜯어낸 것 같은데 공책의 두께가 여전히 두꺼울뿐더러, 겉으로 보기에도 일부 페이지가 뜯겨져 나간 흔적이 하나도 없고 새것처럼 말끔했다.

잠시 뒤 신기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뜯어져나간 공책의 페이지가 꿈틀거리듯이 재생되기 시작한 것이다. 천천히, 그러나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시나브로 재생된 양피지는 곧 뜯어버리기 전보다 더 말끔한 새 양피지로 복원되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에반이 말했다.

"아티팩트네. 그 공책."

그러자 프릴이 반색하며 웃어 보였다.

"네. 재생성 양피지 노트에요. 아무리 뜯어내도 금방 복원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필기를   있어요. 그치만 노트에서 뜯어져 나온 낱장은 손상되면 복원이  되기 때문에 관리를 잘 해줘야 해요."

"게으른 학생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겠구나."

"이 만년필도 제 아티팩트에요. 잉크가 마르지 않는 특수한 카트리지가 들어있죠. 게다가 펜촉도 아무리 써도 절대로 마모되지 않아요. 이 만년필의 제작을 의뢰받은 펜시르 선배가 제 필체를 며칠이고 분석해서 펜촉의 본을 떴어요. 저만을 위한 세상에 하나뿐인 아티팩트인 거예요."

프릴이 자랑스럽게 자신의 만년필을 보여줬다. 검은 몸체에 금색으로 프릴 루에리아라는 서명이 새겨져 있었다.

"아티팩트를  개나 가지고 있구나."

"네. 하지만 동급생들은 거의 모두 실망하더라고요. 그냥 학용품일 뿐이라며 아티팩트로 인정 안 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렇겠지. 걔들이 보기에는 무기가 아니니까."

프릴이 섭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책과 만년필. 이론과 탐구에 대한 깊이 있는 학구열을 가진 프릴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아티팩트지만, 파괴력도 살상력도 전투력도 돋보이지 않는 물건이라 프릴 이외의 학생들은 준다고 해도  받을 법했다.

"같은 마법을 배우는 입장이라 해도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마법의 유용성을 전투에서만 찾는 이 풍조는 저랑 너무 안 맞아요. 열심히 공부를 하는 이유가 조금이라도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누군가를 다치게 하기 위해서라니. 그런 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기존의 재래식 무기들이 아무리 개량을 거듭한다 한들 결정적인 신무기 하나가 개발되면 모조리 무용지물이 되어버려. 제국의 눈에 마법이란 그런 신무기에 불과해. 아그루스가 어떤 크고 작은 희생도 불사하고 아민 제국의 영토에 닿고 싶어 하는 이유 역시 매한가지지. 일단 아민 제국의 영토에 닿기만 한다면 작금의 마법들 역시 모두 무용지물인 재래식 무기로 격하될 테니까. 너도 이 제국의 기득권자라면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닐 텐데?"

"학문은 학문이고 무기는 무기에요. 전쟁과 탐구는 철저히 분리시켜야 해요."

"그게 가능하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당장에 네가 가진 그 아티팩트들도 어설픈 군용 아티팩트들 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무기가 될 수 있어."

"무기요?"

"그래. 조금만 철들면 다들 안다고. 펜이 어지간한 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에반은 자신의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라비나를 떠올렸다. 라비나는 에반에게 내줄 시험이나 과제가 없는 시간 동안에는 프릴처럼 항상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고, 아무도 없는 어둡고도 고요한 지혜의 방주 속 금기 도서관에 홀로 앉아 깃털펜을 쥔 손으로 두루마리를 채워나가며 그녀만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라비나는 단 한 번도 칼을 쥐어본 적이 없지만, 평생을 전사로 살아온 에반은 그런 그녀에게 몇 번이고 난도질을 당해 일어설 힘도 남지 않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지는  일상이었다. 에반은 그때처럼 난도질 당해도 좋으니 다시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사무쳤지만 헛된 그리움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헛된 그리움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요?"

"생각? 내가 생각이라는 걸 하는 사람으로 보이니?"

에반은 멍하니 앉아있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프릴에게 능청스럽게 말했다.

"선생님은 저번에 제게 체스부에 들어온 이유에 대해 물어보셨죠."

"어. 개인적으로 알고 싶은 게 있어서라고 했지. 체스부에 들어오면 그거에 대해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뭐, 솔직히 엉뚱한 번지수에서 봉창 두드리고 있다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거야  마음이겠지."

"엉뚱하지 않아요. 제가 체스부를 통해 자세히 알고 싶은 건 하나 더 있으니까요."

"많기도 하네. 그건 뭔데?"

"선생님이요."

턱을 괴고 앉아서 눈을 감고 있던 에반의 눈이 번뜩 뜨였다. 그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프릴을 향해 물었다.

"나?"

"네. 유리아 양이 동아리를 결성할  고문으로는 선생님을 지목했잖아요. 그래서 체스부에 들어가면 선생님에 대해 자세히 알 기회가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러니까 내가 가진 지식이나 정보 말고 그냥 나에 대해서?"

"네. 선생님이요."

"아니, 나 같은 걸 자세히 알아봐야 무슨 살림살이에 보탬이 된다고?  시간에 차라리 밖에 나가서 이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향하는 걸까 자세히 알아보는 쪽이 더 유익하겠다."

"선생님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봤을 때 선생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거든요? 딱히 무기나 아티팩트를 가지고 다니는 것 같지는 않으신데 카그루로 무장한 이리를 일방적으로 농락하고, 이리 조직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계시고, 아민어도 할  아시고, 치안관이랑 연줄도 있으시고. 일반적인 기준에서 봤을 때 이미 평범의 영역은 한참 벗어났어요. 그런데 비밀도 많으셔서 과거사 같은  물어보면 안 알려주시는 것도 많고. 이쯤 되면  호기심이 동하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어허 왜 이럴까? 난 그냥 퇴물일 뿐이야. 딱 보면 모르겠어? 얼굴에 퇴물이라고 쓰여있잖아."

"주인이 안 꾸며서 그럴 뿐 얼굴 자체는 괜찮은데요? 주말에  화장과 머리 다듬기를 담당하는 시종의 손을   빌려볼까요?"

"아아... 날 좀 내버려 둬.  네가 관심을 가질 만큼 재밌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 시간에 아민어나 마저 공부해."

"네, 그럴게요. 그러니까 가르쳐 주세요."

프릴이 책상 위에 잔뜩 뜯어놨던 낱장들을 에반에게 보여줬다. 자세히 보니 지금까지 프릴이 열심히 필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그루스 문자가 아니라 아민어 문자였다. 에반이 기대감으로 가득  프릴의 눈을 보았다. 귀찮긴 하지만 반짝반짝 눈빛을 보내는 저 얼굴이 실망으로 추욱 쳐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에반은 한숨을 쉬며 손짓을 했다.

"가져와 봐."

"네!!"

에반은 프릴이 필기해 놓은 아민어를 찬찬히 읽어봤다. 마법을 발동시키기 위해 필요한 원소 영창을 아민어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대다수의 문장들이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무슨 문장을 번역하려고 했던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가 됐다. 에반은 멀찍이 떨어져 앉은 프릴에게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자신 없으면 짧은 문장을 쓰도록 해. 아직 un, irid, un irid   계사(系詞)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격 활용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무리해서 계사를 많이 써봤자 문장만 불친절해진다고."

"네!"

프릴은 에반이 한 말을 양피지 공책에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요?"

"Ignotia ili kriu pshono hanatia e ai....  문장은 문법이 잘못되었어. 등위 접속문은 다른 접속문과는 달라서 계사 없이 동사에 일몰(日沒)이 일어나지 않아. 그러니 동사 kriu 앞에 일몰 ili 빼고 미래형 종결사 krakost를 삽입해야 맞다."

"그럼 Ignotia kriu pshono hanatia krakost e ai...."

"Ignotia(화염)은 관념 명사니까 대명사를 ai로 받으면 안 돼. ai는 사람에게만 쓰는 대명사다."

"그럼 id로 바꿔야 하나요?"

"아니. 그건 실체를 가진 현존 명사를 받는 대명사잖아. 추상적인 관념 명사는 ekha로 받아야지."

"아아, 이럴 수가. 대명사를 잘못 써서 수정해야  게 많겠네요. Ignotia kriu pshono hanatia krakost e ekha.... "

"등위 접속사 e 뒤에 모음이 오면?"

"ed로 바뀐다 였죠... Ignotia kriu pshono hanatia krakost ed ekha.... 으으 어렵네요."

"그리고 다음  문장. Kuir는 복수형으로 쓸 수 없는 명사야. -ia로 안 끝나서 현존 명사로 오해하기 십상인데 엄연히 관념 명사로 취급해야 해. 관념 명사는 무조건 3인칭 단수 취급하는  알지?"

"왜 kuir가 관념 명사죠? 왕이라는 뜻인데 왕은 실체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되지. 여기서 왕은 절대유일의 권력을 가진 군주라는 관념적인 의미로 쓰이는 거지, 왕관 쓰고 앉아있는 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야. 세상에 군주는 절대유일이니까 단수로 표기 안하면 자체적으로 모순이 되잖아."

"설명을 듣고보니 이해는 되겠는데... 그러면 암흑 시제로 작문을 어떻게 하죠?"

"정 암흑 시제로 문장을 쓰기  때리면 그냥 그 왕의 이름을 직접 써. 그러면 주어가 현존 명사니까 광명 시제, 여명 시제, 황혼 시제로 골라서 한결 편하게 갈 수 있지."

"검열을 통과하지 않은 문서에 황제의 친명을 기록하는 것은 불충죄에 해당하는 걸요."

"어쩌겠냐? 문법보다 헌법이 중요하면 문법을 틀릴 수밖에. 아니면 '그 왕(itu kuir)' 이라던가 '어느 왕(are kuir)' 이런 식으로 우회해도 현존 명사로 취급할 수 있지."

"아그루스 고고학회에서  아민어를 보면 다들 저처럼 kuir를 현존 명사로 취급해서 썼어요."

"응 걔들  다 문법 틀린 걸 당당하게 출판한 거야. 그렇다고 해서 나같이 근본 없는 지도원 나부랭이가 그 잘난척하는 맛에 사는 꼰대들에게 지적을 해봐야 뭐 듣기나 하겠어? 걔들 눈에 나는 족보도 없는 들개랑 똑같다고. 망할 놈들."

에반이 꼴도 보기 싫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프릴은 에반이 어떻게 고고학회의 높으신 학자들과도 면식이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그 궁금증은 나중에 파헤치기로 하고 지금은 미뤄뒀다.

"철자 표기법을 잘 지켜야지. 자음은 확실하게 모음으로 감싸주고, 모음도 접합이 되는 모음끼리는 꼭 이어주고. 또 음절이 종료되면 반드시 종결 부호를 찍어주는 걸 잊지 말고. 전상 문자로 표기한 아민어는 종결 부호를 안 찍으면 가독성 개판 된다고."

"아차! 연습을 열심히 했는데 여전히 헷갈리네요."

"헷갈리면 민간 문자로 써. 쓸데없이 복잡한 전상 문자보다 민간 문자가 훨씬 쓰기 편하잖아? 동글동글해서 귀엽기까지 하고."

"그래도 전 무조건 전상 문자에요. 멋있잖아요."

"이런 게 뭐가 멋있어? 자고로 문자란 읽고 쓰기 편해야지. 아그루스 문자처럼 말이야."

"전 개인적으로 아그루스 문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곡선이 단 하나도 없는 뾰족뾰족함이 뭐랄까 귀여운 구석이 없어서요."

"큭! 그, 그...그렇구나."

상형문자를 쓰는  불편해 보여서 에반이 나름 열심히 만든 문자인데 긴 세월이 지난 지금  귀엽다고 혹평을 받았다.

"게다가 아그루스 문자는 왠지 모르게 대충 만든 문자 같아요. 온통 세모랑 직선밖에 없어서요."

"대충 만들다니?! 그게 바로 일관성이라는 미학이야! 문자 만든 사람이 들으면 섭섭해하겠어!"

"그치만 사실인걸요. 아그루스 문자는 문자 자체의 센스도 별로예요. 아민 문자는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봐도 예쁘고 달을 본떠 만들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는데, 그에 반해 아그루스 문자는 문자 자체도 별로  예쁘고, 무얼 본떠서 만들었는지도 알 수 없고 그리고 또...."

"그만! 알겠어! 이제 그만...."

"어라? 선생님  그러세요?"

"됐으니까 아민어 얘기로 돌아오자..."

풀이 죽다 못해 울상이 된 에반을 보며 프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프릴에게 한바탕 악의 없는 난도질을 당해 너덜너덜해진 에반은 그녀의 양피지 더미를 정리하며 말했다.

"아무튼 전상 문자를 계속  거면 표기법은 잘 지키도록 해. 아민어 전상 문자가 왜 그렇게 복잡하게 생긴 건지 이유를 아니?"

"그거야 기득권층의 지식 독점을 위해서 아닌가요?"

"그건 무식하게 복잡한 전상 문자를 굳이 계속 쓰는 이유고. 처음 만들어질  그런 난해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이유 말이야."

"모르겠어요. 아민 문자가 처음 만들어진 시기라면 도대체 얼마나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거죠?"

"정답을 말하자면, 사람의 마력 회랑을 본떠서 만들었기 때문이야."

"회랑을 본떠 만들었다고요?!"

"그래. 그래서 모음이 이렇게 복잡한 거고, 글자들도 전부 이어지게끔 되어 있지. 쓰는 건 복잡하긴 하지만 이 문자로 올바르게 기록한 주문은 자체적으로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는 매개체야. 문자 자체가 회랑을 기호화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이지."

"그런 이유가 숨겨져 있었던 거군요... 선생님의 학설이라면 고고학회를 발칵 뒤집을  있을 텐데요."

"뒷받침할 증거가  남아있는데 무슨 수로 그 꼰대들을 발칵 뒤집냐? 당장에 저번에 내가 푸그앙 교수 대신 수업에 들어갔을 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잊은 건 아니지?"

"그럼 저도 한번 물어볼게요. 증거도 남아있지 않은데 선생님은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알고 계신 건가요?"

"....."

"또 말씀해주지 않으시는 건가요? 선생님, 아시잖아요. 저 같은 사람은 궁금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것을요."

"아민어 설명이나 마저 해줄게. 여기 이 문장을 보면..."

에반이 대놓고 답변을 회피하기 위해 말을 돌리자 프릴은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표했다. 프릴이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에반에게 따지려던 그 순간 주머니 속에 있는 교신 장치가 진동을 일으켰다. 프릴이 신호를 받자 유쾌하게 인사하는 유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릴은 유티스의 인사를 받았다.

[루에리아 공녀님~!! 평안하심까?]

"안녕하세요, 치안관 유티스. 활기가 넘치네요. 수사에 진척이 있나 봐요?"

"유티스?!!"

프릴이 통화하는 동안 잠이나 자려고 엎어진 에반이 치안관 유티스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발작을 일으키듯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여기는 라쿠이르고, 라쿠이르는 북부 지역이고, 지금 북부 지역의 치안관은 유티스라는 것을.

[맥스패티인가 뭔가 하는  맛대가리 없는 햄버거 가게는 영업 정지 시켜놨습니다. 다진 고기 공장도 박살을 내놨고요. 관련된 애들은 쥐새끼부터 간부까지 싸그리 유치장에 가둬놨습니다.]

"역시 명성대로 민완(敏腕) 치안관이시네요. 빠른 일처리에 감탄했습니다."

[아휴 말도 마세요! 치안관이라고 증거도 없이 아무나 막 잡아다가 가둬도 되냐고 어찌나 시끄럽게들 굴던지요. 열 받아서 걔들 콩밥을 싹 다 팥밥으로 바꿨어요. 세상에 팥밥이라니! 아마 치안관들 중에서 제가 제일 범죄자들에게 잔혹할 걸요?]

"그, 그런가요? 하하..."

프릴은 좀 전에 에반이 실없는 농담을 할때 지었던 그 어색한 웃음소리를 다시금 냈다. 그리고는 떠벌거리는 유티스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치안관 유티스. 지금은 제가 중요한 용무가 있어서 조금 바빠요. 나중에 용무가 끝나면 제가 연락할게요."

프릴이 통화를 끝내려고 하는데 에반이 프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나 좀 바꿔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을 알아본 프릴이 교신 장치에 대고 말했다.

"아, 잠시만 끊지 마시겠어요? 바꿔달라는 분이 있어서요."

[예에?!!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저희가 이렇게 연락 주고받는다는 걸 외부인에게 알리시면 안 되죠!! 공녀님이 치안관인 저랑 연락 주고받다는 사실만 해도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이란 말입니다!! 이 정도는 기본이니까 미리 당부 안 해도 다 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지금 대체 누가 바꿔달라고 하는 거죠?]

"나다 이 깐족아."

[....]

에반이 프릴에게서 낚아챈 교신 장치에 대고 말하자 요란하게 재잘거리던 유티스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그러나 그 침묵은  큰 소란을 피울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바노 씨이이이!! 이야~ 세상에!! 이게 얼마 만에 목소리 듣는 거죠?!!]

"시끄러 임마. 목소리 낮춰라 귀청 떨어지겠다."

[지금 라쿠이르 번에 계신 건가요?]

"그래. 루나칼립스 학원에서 하루하루 감자로 연명하고 있지."

[역시  뒷골목의 오염생물을 처치한  이바노 씨가 맞았네요! 이럴 수는 없어요. 이바노 씨와 같이 북부 지역에 있었는데 그 사실도 라쿠이르에 오고 나서야 알다니.]

"좀 모르고 살자, 제에발. 넌 날 좀 그만 알았으면 좋겠어. 아 됐고. 요즘  어떠냐?"

[어떻냐니요. 아시잖아요? 치안관이라는  게으르면 밑도 끝도 없이 한가하지만, 부지런하면 내가 일을 하는 건지 일이 나를 하는 건지 분간  될 정도로 바쁘죠.]

"그래서 넌 어떤데?"

[어떻겠습니까? 발바닥에 불나게 열심히 일하는 중이죠. 제 발바닥 탄내 거기까지 나잖아요, 안 그래요?]

"넌 임마 말을 해도 뭘 그렇게 하냐? 누구한테 배운 말본새야 그건?"

[누구겠습니까?]

"나네. 하여간 못된 것만 골라서 배워서는."

[그 못된 짓만 골라서 배운 결과 짜잔! 훌륭한 치안관으로 거듭났습니다.]

"참 눈물 없이는 못 들어주겠네."

[이바노 씨, 그래서 루나칼립스 학원에선 언제 짤릴 예정이신가요?]

"예정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예정이야?! 왜 짤리는 걸 전제로 까는데?"

[설마 거기를 평생직장으로 삼으시려는  아니시죠? 에에에이!! 아니시죠? 설마 아니시죠? 그죠?]

"그냥 맞고 싶다고 말해. 맞고 싶다는  뭘 그렇게 빙빙 꼬아서 말하냐?"

[이바노 씨, 그냥 NPC 때려치고 수사관으로 들어오세요. 제가 자리 딱 깔아놓을 테니까요. 이바노  정도라면 치안관 다는  시간문제잖아요? 그러면 황제 폐하에게 피력도 하고, 유명해지고, 명예롭고, 존경받고. 솔직히 전 이바노 씨가 계속 그렇게 노타이틀로 썩고 계신 게 이해가 안 간단 말이에요.]

"황제에게 피력하고, 출세하고, 유명해지고. 그런 거 다 부질없는 짓이다."

[말만 들어보면 이미 황제 폐하 측근까지 해봤다는 것 같네요.]

"황제 측근이건 여제 호위무사건 뭐가 됐건 간에 말이야, 네 밑으로 들어가서 거미줄 치는 건 사양이다. 차라리 여기서 감자나 까먹고 말지. 애초에  NPC를 그만둘  있는 처지도 아니야."

[으음. 그러면 알겠습니다. 나중에 직접 만나서 다시 설득할게요.]

"알겠다며! 왜 문장 앞이랑 뒤랑 호응이 안 되는데?!"

[제가 포기가 빨랐으면 치안관 달았겠습니까?]

"됐고, 니 연락처가 왜 프릴 주머니에 있는지나 설명해.  귀족 싫어하는  아니었어? 언제부터 치안관이 휴영공의 사냥개 노릇을  거지? 나중에  이미지에 크게 타격이  텐데?"

[수사 의뢰 접수라고만 설명해두죠. 그러는 이바노 씨야 말로 설명해주시죠? 언제부터 학원의 지도원이 이리 소탕작전 같은 것도 맡은 거죠?]

"난 S급 지도원이니까 가능해 임마. 이게  학생들의 안위를 위해서 위험수당도 안 나오는데 발 벗고 나서는 내 S급 헌신이거든?"

[여전하시네요. 냄새나는 곳이 있으면 퍼내고 보시는 건.]

"너도 조심해라. 라쿠이르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물 맑고 공기 좋은 산속 도시라던가, 바다가 보이는 휴양지라던가, 현자들이 은거하는 마법사의 성지가 전부가 아니야. 이곳과 관련해서 불길한 가설이 떠오르니까... 한적한 동네라고 해서 별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 와중에 제 걱정 해주시는 상냥함이란. 일단은 알겠습니다. 이바노 씨도 주의 깊게 보셔요. 맥스패티는 제가 자금줄을 싹  훑어서, 관여된 애들 몽땅  유치장에 넣어놨거든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시죠?]

"알지."

에반은 유티스가  말이 무엇인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유티스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또렷한 발음으로 강조해서 말했다.

[갈퀴날들, 지금 엄~~청 열받아있어요. 곧 이바노 씨를 찾으러 가겠죠.]

에반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에반은 유티스에게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고 해.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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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 문자로 표기한 아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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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 문자와 민간 문자의 비교. 가장 오른쪽의 동글동글한 게 민간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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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루스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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