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3-2. 압박 (6)
맥스패티에는 순수하게 햄버거를 먹기 위해 앉아있는 손님이 없어보였다. 영업을 할 의지가 보이지 않는 불량한 청소 상태와 허름한 인테리어. 드문 드문 떨어진 테이블에서는 여러 조직의 시궁쥐들이 앉아서 떳떳하지 못한 사업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얼마전에 에반 플루토에게 호되게 당한 뒤로 갈퀴날들이 방어 병력으로 파견한 이리가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니고 있었다.
유티스와 두 수사관이 그 광경을 찬찬히 살펴보며 담배를 태웠다. 그들이 꽁초를 재떨이에 찍어놓는 동안에도 여태 누구 하나 메뉴판을 들고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
"어허. 서비스가 영 별로구먼.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면서 꼬히 한잔도 안 타오고 말이야."
"치안관님 커피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아 그래도 그 성의라는 게 있잖아. 성의."
"쟤들 장사하는 저 꼬라지에 성의가 있어 보이시나요?"
"맛있는 햄버거는 기대 하질 말아야겠는데."
유티스가 수사관들에게 담배불을 나눠주며 중얼거렸다. 수사관 한 명이 매캐한 연기를 후우 뱉고는 이리 쪽을 흘겨보며 말했다.
"저기 낮술 빨면서 어슬렁거리는 이리 말입니다. 블랙리스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릭입니다. 갈퀴날들도 몇 번 꼬리를 밟혔으니 이제 주요 시설에 방어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했나 봅니다."
"그릭? 까다로운 상대야?"
"카일과 비교하면 조금 못 미치지만 그래도 갈퀴날들 중에서는 손꼽히는 전력입니다. 수사 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이름 올릴 정도면 얼추 설명이 되죠."
"그래? 그런 놈이 이런 산속에 숨어서 햄버거 가게나 지켜보고 있으려니 심심하겠네."
"갈퀴날들 입장에서도 일이 이렇게 된 게 어처구니가 없을 겁니다. 이런 조용한 산동네에서 카일 씩이나 되는 전력을 잃을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저희야 블랙리스트에서 한 놈 지웠으니 잘 된 일이지만, 솔직히 악명에 비해 너무 허무하게 갔습니다."
"백화 상회에 루나칼립스 학원을 동시에 건드린 데에는 그만한 뒷배가 있어서 사전 준비를 다 해놨다는 뜻일 텐데 말이죠."
"미리 뒤에서 밑준비를 해봐야 무슨 소용이야? 루나칼립스 학원에는 이바노 씨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으니 카일이건 나발이건 다 털릴 수밖에 없지."
"이바노?"
"아무튼 저 그릭인가 뭔가 하는 이리는 너희 둘이서 알아서 잘 해봐. 내가 직접 나설 거 까지도 없지?"
"네, 네. 제발 부탁이니 직접 나서지 말아주십시오."
한편 맥스패티의 점원들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유티스와 수사관들 쪽을 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에반 플루토 때문에 맥스패티가 입은 피해를 복구하느라 외부인 손님을 받을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 주문을 안 받고 계속 방치하면 알아서 짜증내면서 나갈 줄 알았는데, 유티스 일행은 몇 분이 지나도록 테이블에 버티고 앉아서 이야기 나누며 줄담배를 태웠다. 보다못한 점원 하나가 유티스 일행의 테이블로 가서 주문을 받았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뭐로 하시겠어요?"
"너희 뭐 먹을래?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됐습니다. 쏠 거면 좀 모양새 나는 곳에서 덜 익은 소고기나 썰게 해주십쇼."
"들었지? 얘꺼 햄버거는 패티 덜 익혀서 가져다 줘."
"..."
"전 햄버거 안 먹습니다. 양파맛 감자튀김으로 하겠습니다."
"저도 점심을 이미 먹어서요. 치즈스틱이면 됩니다."
"좋아. 그러면 주문은 양파맛 감자튀김에 치즈스틱하고, 혹시 햄파이 있나?"
"그런 거 없어요."
"그럼 계란 프라이. 이상."
"...."
점원은 '얘들은 또 뭐하는 새끼들이지?' 하는 표정으로 인상을 구겼지만 곧 얼마 전에 겪었던 사건이 스쳐 지나가며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못 보던 이상한 손님들이 사이드 메뉴만 주문하면 곧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징조다. 점원은 다소 경직된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저희... 사이드 메뉴만 따로 주문은 안 되시고, 메인 디쉬를 주문하셔야 하는데..."
"메인 디쉬? 메인 디쉬라... 점장 좀 불러줄래?"
"예?"
점원은 유티스의 말을 듣는 순간 불길한 징조가 적중했다는 확신을 느꼈다.
"저, 점장님은 뭐 때문에 찾으시는지...?"
"그냥 뭐 좀 물어보려는데."
점원은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 눈으로 필사적인 사인을 보내는 한편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저기 죄송하지만, 점장님은 지금 바쁘셔서요. 다음에 오셔야 할 거 같은데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네가 대신 점장한 테 말 좀 전해줄래?"
척! 수사관 한 명이 거미 문양이 찍힌 공직자 신분 증명서를 펼쳐보였다.
"오늘부로 여기 문 닫는다고."
"거, 거미?!"
점원이 소리치며 뒷걸음질 치자 맥스패티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수사관들은 담뱃불을 재떨이에 찍어 끄고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맥스패티 안을 어슬렁거리던 갈퀴날들의 이리 그릭이 들고 있던 술병을 벽에다 후려쳐서 깨뜨렸다. 그릭은 날카롭게 깨진 술병을 수사관의 얼굴에다 대고 집어던졌다.
휙! 수사관은 고개를 살짝 틀어 술병을 가뿐하게 피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을 유도했는지 수사관이 고개를 튼 쪽으로 매서운 무언가가 몰아쳐왔다.
"!!"
파사삭!! 와지끈! 쨍그랑!!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유리컵과 접시들이 깨져 공중으로 튀어오르고 테이블이 박살났다. 수사관이 노련함에서 비롯된 반사 신경으로 피하지 않았더라면 목 없는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투사체는 없었다. 염력? 아니면 와이어 계열인가?"
찰나 차이로 머리가 터질 뻔한 참인데도 불구하고 수사관은 별 거 아닌 양 담담하게 그릭의 무기에 대한 추측을 동료와 주고 받았다. 그릭이 간만에 재미 좀 보겠다며 몸을 풀고 팔을 한 번 더 휘둘렀다.
"다들 피해!!"
"끄아아악?!!"
맥스패티의 점원들과 시궁쥐들이 그릭의 인정사정 없는 공격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우왕좌왕 흩어졌다. 이윽고 줄지어 서있던 테이블들이 산산조각 나면서 그 파편이 공중으로 튀어올랐고, 유리창이 깨졌다. 그릭의 공격을 피한 수사관들이 위력과 여파를 관찰하고서 정답을 돌출해냈다.
"삭풍(朔風)이다."
기류의 왜곡을 일으켜 절삭력을 발휘하는 술식이였다.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갈퀴날로 마구 긁은 것처럼 찢어놓을 수 있다. 상대의 아티팩트 능력을 확인한 수사관들이 기민하게 발을 움직였다. 그릭 역시 수사관들에게 틈을 내주지 않기 위해 다시금 삭풍을 일으켰다.
와장창!! 그릭의 아티팩트가 일으킨 바람이 지나는 곳마다 물건이고, 가구고 할 것 없이 찢겨나갔다. 난장판이 된 가게 한 구석에서 유티스가 무너진 잔해를 치우고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깽판 칠 때 치더라도 주문한 계란 프라이는 갖다주는 거 맞지...? 으이익?!"
휘익!! 유티스는 자신의 머리를 겨누고 날아오는 삭풍을 잽싸게 잔해 밑으로 숨어서 피했다. 그리고는 새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며 중얼거렸다.
"안 줄 거면 말로 하지 거 참."
한편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의 문이 열리고 점장이 헐레벌떡 나왔다. 주변을 살핀 그녀는 멀쩡한 게 남아있지 않은 가게 꼬락서니를 보고 경악했다.
"이게 다 뭐야?! 가게를 지키라 했더니 왜 철거하고 있어?!"
"아가리 닥쳐! 나 혼자서 수사관 셋을 정면으로 상대해서는 시간 벌기도 안 되니까 뭐라도 쳐 해봐!"
철컥!! 철컥! 하필 이런 타이밍에 맥스패티에 있던 재수 없는 시궁쥐들과 점원들이 총을 꺼내서 수사관들을 겨누었다. 탕! 탕! 탕! 그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사관들에게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수사관 하나가 아티팩트를 발동시키자 투명하고 두꺼운 유리방벽이 눈앞에 솟아났다. 유리방벽은 내구도가 상당해서 총탄에 뚫리지 않았다. 착! 착! 총알이 다 떨어지자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빈 탄창이 돌아가는 소리만 났다.
딱! 수사관이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에 총알 세례에도 깨지지 않던 유리방벽이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그 파편들이 날카로운 끝부분을 앞으로 향하고 화살처럼 날아갔다.
와장창! 쨍그랑! 유리 파편들이 쏟아지는 소리와 가게 안의 물건들이 부숴지는 소리가 혼비백산이 된 시궁쥐들의 목소리와 뒤섞였다. 스르륵! 참다 못한 그릭이 아티팩트 칼을 뽑아들고 수사관들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쇄도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수사관이 아티팩트를 발동시키자 기세좋게 뛰어들던 그릭의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되더니 그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 뿐만 아니라 맥스패티 안에 있던 다른 시궁쥐들도 공중에 떠오르더니 다같이 사이좋게 천장에 솟구쳐 달라붙었다.
"반중력. 아니, 중력 역전인가?"
천장에 쳐박혀 허우적거리는 다른 시궁쥐들과는 달리 그릭은 균형을 잡고 몸을 일으켜 천장을 딛고 섰다. 그는 몸에 감고 있던 갈고리 사슬을 바닥에 걸고는 튀어올라 공중에서 몸을 뒤집은 뒤 그 추진력으로 수사관을 덮쳐 칼을 휘둘렀다.
"아니. 정답은 중력 박탈이다."
"뭐...?!"
수사관이 장갑을 낀 주먹을 휘둘렀다. 빼앗은 모든 중력이 운동 에너지로 바뀌어 주먹에 실렸다. 빠각!! 제대로 직격 당한 그릭이 엄청난 속도로 튕겨나서 쳐박혔다. 빼앗긴 중력이 돌아온 시궁쥐들도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다른 수사관이 아티팩트를 발동시키자 쓰러진 그릭의 몸을 유리결정이 뒤덮었다. 그릭이 몸부림쳤지만 곧 그의 전신이 단단한 유리로 뒤덮였다.
쩌저적. 쨍강!! 그릭이 삭풍으로 유리를 깨뜨리고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 유리가 깨지면서 생긴 파편이 곧바로 다시 그릭을 덮쳐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끄아아악!"
털썩! 비명을 지르고 쓰러진 그릭은 이따금씩 몸을 떨었지만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교묘한 술식이 걸려있어서 그릭이 움직일수록 유리조각들이 파고들었다.
"얌전히 있었으면 끝날 걸 기어이 피를 보기는."
"정리 됐습니다."
"결국 계란 프라이는 안 나오는 거야?"
수사관들이 그릭을 쓰러뜨리자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던 유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점장을 향해 건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 들어라. 여기 가게에 이름 등록해놓고 일하는 니들. 협박, 폭력, 폭력 치사, 살인, 살인 교사, 인신 및 장기 밀거래, 조세 포탈.... 거 많기도 하네. 아무튼 무슨 죄 무슨 죄 해서 무슨 법 무슨 법에 의거하여 싹 다 체포한다. 가게 돈도 겉으로 드러난 돈, 밑에 꽁쳐둔 돈 전부 다 조사 끝날 때 까지 동결시킬 거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는 그냥 햄버거 파는 가게야! 우리가 뭐 범죄 저질렀다는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증거? 없는데. 뭐 이제부터 찬찬히 까보면 나오겠지."
유티스가 당당하게 증거 같은 거 없다고 말하자 점장이 기세 좋게 언성을 높였다.
"공권력 행사할 거면 영장부터 떼와야 하는 거 알지?! 영장 어딨어?!"
"없는데."
"그럼 니들이 지금 우리를 체포할 권한이 있어?!"
"없어! 하하하!"
유티스가 깐족거리며 웃었다. 열 받을대로 열 받은 점장이 큰소리쳤다.
"증거도 없어, 영장도 없어, 권한도 없어. 그런 놈들이 누구 마음대로 우리를 체포하겠다는 거야?!!"
"누구 마음대로긴? 내 마음대로지."
툭. 유티스가 점장 앞에 무언가를 내밀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금속을 주조해서 만든 동전이었다. 다만 화폐로 쓰는 동전이 아니라 고위 공직자가 명함 대용으로 쓰는 동전이었다. 동전에 선명하게 새겨진 눈 문양이 점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 문양을 본 점장의 표정이 싹 식었다.
"치안관이라고?!!"
치안관의 구두, 서면 명령은 그 자체로 영장으로서의 법적 효력을 발휘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명령이 정당한 공무와 수사를 위함이였음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선 집행 후 절차 이행이 가능하다.
"치안관이 어째서 이런 곳에...?!"
"어째서 이런 곳에 있냐니 난 뭐 어디 정해놓고 다녀야 하나? 니들 같은 놈들 모여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쑤시고 다녀야지, 안 그래?"
유티스는 난장판이 된 가게를 한번 스윽 둘러보고는 장난기 빠진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 쳐넣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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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해 저물기 전에 짐 다 싸고 옮겨야 해!"
"누군 지금 놀고 있나?! 분쇄기라던가 장비들이 너무 무거워서 시간이 걸린다고 몇 번을 말해!"
"시팔 더럽게 무겁네... 버리고 가면 진작에 출발하는 걸 이 뭔 고생이냐?"
"이게 다 얼마짜리 장비들인데! 애초에 이거 건지자고 이 지랄 하고 있잖아."
"고기는 다 챙겼어?!"
"다 챙겼어. 빌어먹을...! 잠깐 냉동시설 밖으로 꺼내놨는데 그 사이에 뭣같은 냄새가 나네!"
외딴 산속에 숨겨진 다진 고기 공장. 맥스패티의 시궁쥐들이 공장 안의 기계 장비들과 고기를 옮기고 있었다. 외부 세력에게 한번 꼬리가 밟혀 공장 위치가 탄로난 이상 언제 또 습격당할지 모르니 철수하라는 지령이 내려와서다. 그들은 대형 화물차를 대기 시켜놓고 공장을 비우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애쓴다, 애써. 땀까지 뻘뻘 흘리면서 아주 그냥."
그때 누군가가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맥스패티의 시궁쥐도, 갈퀴날들의 이리도 아닌 처음보는 어느 여성이 공장 안으로 들어오며 거들먹거렸다. 시궁쥐들은 난데없는 불청객의 난입에 잠시 손을 멈췄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공장 안을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안녕들하십니까, 개자식들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불철주야 개짓거리 하면서 질서를 어지럽히시느라 고생들 많으십니다."
"넌 뭐야?"
"뭐긴 뭐야 신고 받고 달려온 공직자 나으리지."
그녀는 비취색이 감도는 민트빛 머릿결을 쓸어넘기며 자켓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보였다. 동전의 붉은 거미 문양이 그녀의 직급을 나타내고 있었다.
"거, 거미가 벌써 왔다고?!"
"수사 당국의 호민경 쟈네트다. 공무 수행을 위해 너희를 전부 연행하고, 이곳에 있는 물건들은 증거 자료로 압수하겠다. 그 전에... 일단 한 대 맞고 시작하지."
빠각!! 쟈네트가 휘두른 제압봉에 맞은 시궁쥐 하나가 저만치 날아가버렸다. 천적을 앞에 둔 시궁쥐들은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 했다. 그러나 공장 철수 작업의 호위를 위해 갈퀴날들이 배치해둔 이리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쟈네트에게 다가갔다.
"혼자 왔나?"
"떼로 왔긴 했는데. 내가 원체 성질이 급해서 먼저 도착했지. 좀 있으면 올 거니 걱정 마라."
"증원이 도착하기 전에 너 정도는 찢어놓을 수 있다."
꾸르륵!! 이리들의 몸이 카그루로 뒤덮였다. 카일이 가진 카그루와는 다른 타입이었다. 심해어의 비늘을 닮은 형태의 카그루가 전신을 뒤덮고나자 이리들의 모습이 마치 취미 고약한 뱃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전설 속의 어인처럼 변했다.
"경갑형 카그루인가."
쏴아아아!! 시궁쥐들이 화재 진화 장치를 작동시키자 공장 천장에서 물이 쏟아졌다. 구르르르!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기괴한 울음소리를 낸 이리들이 스르륵 모습을 감추고 사라졌다.
"물이 있으면 기동력 상승에 은신까지 할 수 있군."
후우욱!! 쟈네트가 재빠르게 몸을 뒤로 날려 보이지 않는 일격을 피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강력한 충격이 거칠게 물줄기를 튀겼다. 쟈네트는 최대한 뒤로 물러나다가 쎄한 감각이 스치고 지나갈 때 망설임 없이 제압봉을 휘둘렀다. 후욱! 그러나 그녀의 공격은 허공을 휘두를 뿐이었다.
"!!"
쟈네트가 제압봉을 꺾어들어 자신의 몸통을 방어했다. 빠각!! 묵직한 충격에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했지만 뒤로 덤블링을 돌아 위기를 모면했다. 아티팩트 제압봉의 능력으로 방어에 성공하긴 했지만 충격 때문에 손목이 시큰거렸다. 아무리 내구도가 떨어지는 경갑형 카그루라고 해도 엄연히 카그루인 만큼 막강한 완력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
쟈네트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작은 정육용 칼에 눈길이 갔다. 안개 전쟁 이후로 다시는 진검을 휘두르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지만, 진검이 아니라 저 정도 날붙이라면, 휘두르지 않고 들고만 있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아무리 굳게 맹세했다고 해도 엉뚱한 고집 부리느라 범죄자를 놓친다면 본말전도다. 휘두르지만 않으면 상관 없겠지. 쟈네트는 바닥에 널브러진 칼을 집어들었다. 현역 시절 휘두르던 진검이나 가문이 내린 마검에 비하면 하염없이 짧고, 가볍고, 볼품없는 날붙이다. 하지만 이거로도 충분했다. 날이 서있는 금속을 쥐는 것만으로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아니 원래 모습으로 조금이나마 돌아온 것처럼 옥빛 눈동자에 생기가 새롭게 돌았다.
'저 여자... 설마 이스티안?!'
카그루로 몸을 숨긴 이리 하나가 그 눈빛을 보고 심상치 않은 기백을 느꼈지만 이미 늦었다. 은신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쟈네트와 눈이 정확히 마주치고 있다.
카그루에 은신 효과를 부여하기 위해 화재 진화 장치로 물을 뿌리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물이 위치를 발각하게 만들고 있었다. 땅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공중에서 튀기는 부자연스러운 물방울 소리. 지금의 쟈네트의 귀에는 그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카그루 때문에 흐트러진 거친 호흡 소리는 아예 소음일 지경이었다.
파앗! 쟈네트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섬광과 같은 비취색 궤적이 공장 안을 갈랐다.
"크아악!!"
쟈네트가 휘두른 제압봉에 직격당한 이리 하나가 공장 벽에 처박혔다. 경갑형 카그루의 내구도로는 쟈네트의 일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없었다. 바닥을 뒹군 이리가 피를 토하며 몸을 움찔거렸다. 팟! 또 다시 쟈네트에게서 뿜어져나온 청록색 불꽃이 2층을 향해 레이저처럼 직선을 그리자 쟈네트가 순식간에 2층에서 모습을 나타내더니, 은신해있던 저격수를 제압봉으로 내리찍었다. 그 충격에 바닥이 무너지며 쟈네트와 저격수 이리가 밑으로 떨어졌다. 쟈네트는 의식을 잃은 이리를 밟으며 착지했다.
휘익! 쟈네트가 용도를 다한 칼을 허공에 휘익 집어던졌다. 그러자 컥! 하는 단말마와 함께 은신이 풀린 이리가 나타났다. 쟈네트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다가 그녀가 던진 칼에 관통당한 것이다. 쟈네트는 숨을 헐떡이는 그 이리를 제압봉으로 후려쳐 쓰러뜨렸다.
"방금건 내가 휘두른 게 아니야. 쟤가 와서 들이받은 거지. 그러니 내 맹세하고는 상관 없어."
쟈네트는 제압봉으로 쓰러진 이리를 툭툭 찔러보고는 공장 안의 시궁쥐들을 노려봤다. 순식간에 이리 셋이 전멸하자 힘의 차이를 실감한 시궁쥐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려 했다.
"서라. 안 그러면 쫓아가서 팬다."
뚝, 쟈네트의 한 마디에 시궁쥐들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서 굳은듯이 멈췄다.
"그대로 움직이지 말고들 있어라. 얌전히 유치장 갈지, 한대 맞고 납골당 갈지 고르라 하면 어려운 질문 아니잖아?"
시궁쥐들을 멈춰 세운 쟈네트가 시궁쥐들이 부지런히 옮기던 통을 하나 열어봤다. 안에는 핏기가 선명한 내장들이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어휴... 맛있는 거 많은데 왜 이런 걸 처먹냐는 말이다."
쟈네트는 천장에서 쏟아지는 물로 손에 묻은 핏자국을 씻어냈다.
"에반 플루토..."
그녀는 자신의 상관인 유티스에게 이 공장에 대해 알려준 의문의 제보자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에반 플루토라는 이름을 입에 담으니 왜일까 피곤한 감정이 울컥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유티스 그 인간이 자꾸 '그분이 오셨다'며 싱글벙글 노래를 하더만... 이번에는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려고...!"
쟈네트는 손톱을 잘근거리는 나쁜 버릇이 그새 또 나타났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