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1화 〉3-2. 압박 (5) (71/88)



〈 71화 〉3-2. 압박 (5)

범죄를 수사해서 민생의 안전을 도모하고, 제국 내의 비리와 부정을 척결하는 공직자인 수사관은 신분증에 거미 문양이 찍히기 때문에 거미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린다. 수사관은 늘 이리들을 쫓아다니다 보니 전쟁터에 나가는 기사보다도 순직자가 더 많이 나오는 데다가, 귀족들의 비리 및 유착을 수사하느라 귀족들에게 밉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박복하고 출세길이 꽉 막힌 거미 문양은 노타이틀 서민들에게서도 기피 1순위가 되었다. 존경은 하지만, 내가 하긴 싫은 직업의 대표격인 셈이다.


그러나 범죄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공로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황제의 귀에까지 자주 드나들게 되면 그 노련한 수사관은 황제로부터 치안관으로 임명받게 된다. 치안관은 기사단장, 고고학회장과 더불어 오직 황제만이 임명할 수 있는 명예로운 세 직분 중 하나인 것이다.


치안관은 모든 수사관들을 지휘하여 범죄와 부패 근절의 선봉에 서서 제국을 주시한다. 이 믿음직한 주시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바로 황제에게 직접 규탄서를 쓸 수 있는 권리다. 증거자료들을 충분히 모았다면  어떤 권세를 누리는 귀족의 비리와 부패도 황제에게 직접 고발할 수 있다. 그렇기에 미천한 평민에게는 죽어도 예의를 차릴 수 없다며 모가지 빳빳하게 구는 오만한 귀족도 치안관을 상징하는 눈 문양 앞에서는 목구멍 밑에 감춰뒀던 존댓말을 토하기 마련이다.

이런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치안관들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근무지를 계속 옮겨 다닌다. 치안관들의 수사 방식과 정의관과 응징 수위가 저마다 다르다 보니 지역에 따라 차이가 생기지 않도록 골고루 섞기 위함이라고 한다.


언월의 작은 주인. 프릴 루에리아는 자신의 하인이 끄는 마차를 타고 학원과 멀리 떨어진 6군까지 왔다. 그녀가 이곳을 찾아온 목적은 치안관 유티스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치안관 유티스는 이곳 북부 지역으로 발령받아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대청소를 시작했다. 그롬의 모든 번경을 봉쇄해버린 뒤 입경, 출경 심사를 강화시키고는 퇴로를 잃은 이리들을 철저히 사냥했다. 그렇게 이리 조직들의 주요 힘줄과 돈줄을 끊어버린 뒤로 3년 동안 군소 지부의 형태로 흩어진 이리 조직들을 수사하다가, 최근에 라쿠이르에서 킬링 이터가 모습을 나타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라쿠이르 수사 당국에 찾아온 것이다.


프릴이 수사 당국에 발을 들이자 그녀를 알아본 수사관들이 자리에 서서 경례했다.


""제국에 영광!! 황제께 충성!! 언월의 주인께 경례!!!""


상급 귀족이 행차하면 공직자는 물론이고 모든 평민들은 무릎을 꿇고 충성을 표해야만 한다. 하물며 휴영의 공작가 씩이나 되는 귀족의 앞이라면 과장 보태지 않고 그야말로 바닥과 하나가 될 지경까지 엎드러져야 한다.


그러나 수사관은 '특수 계급으로서의 계층적 고립 의무' 라는 칙령의 적용 대상이다. 권력과 유착한 범죄를 수사하고, 타락한 권력을 심판하는 것이 직분이기에 수사관은 황제 이외의  어떤 계급에게도 충성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언월의 주인인 프릴이 수사 당국에 왔음에도 무릎 꿇지 않고 서서 경례하는 수사관들을 불충죄로 처벌하지 못한다.

프릴은 수사관들의 경례를 받고, 그들에게 하던 일을 마저 할 것을 지시했다. 다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한 수사관들 사이에서 한 수사관이 프릴 앞에 섰다.

"어떤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치안관을 만나고 싶은데 지금 가능할까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금방 말씀 전해드리겠습니다."


수사관은 프릴에게 고개 숙여 경례를 한 뒤 집무실로 들어갔다. 수사관이 문을 열고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담배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치안관 유티스가 이곳 수사 당국에 온 이후로 집무실의 담배 냄새가 훨씬 심해졌다.

치안관 유티스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심란한 표정으로 수사 보고서를 넘겨보고 있었다. 세련된 가죽 재킷에, 검은 뿔테안경, 말끔하게 잘 면도된 얼굴. 나쁘지 않은 인상인데 그놈의 담배 냄새가 첫인상을 망쳐놓고 있었다.

"치안관님."

"어. 왜?"


"지금 휴영의 공작 언월의 주인 루에리아 공녀께서 치안관님을 찾고 계십니다."

수사관의 보고를 들은 유티스가 하던 일을 멈추고 눈을 한번 껌벅였다.


"휴영공이  나를?"


"자세한 용건은 듣지 못했습니다."

"으음. 알겠어. 가자."


유티스는 가죽 재킷의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잔뜩 어지럽혀져 있는 책상 한구석에 놓은 탈취제를 들어 전신 구석구석에 뿌렸다. 준비를 마친 그는 사무실에서 나와 프릴 앞에 섰다. 그는 프릴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똑바로 선 자세로 거수경례를 했다.

"제국에 영광. 황제께 충성. 언월의 주인께 경례."

경례를 하는 유티스의 목소리에서는 예우를 표하는 성의가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휴영의 공작를 대면하고 있다고는 감히 상상도 못할 만큼 불손한 자세였으나 프릴은 꼿꼿이 선 치안관의 경례를 아무  없이 받았다.


"치안관 유티스입니다. 저를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수사의뢰를 신청하고 싶어서요."


"바깥에 신고 접수하는 수사관들이 많은데 굳이 치안관을 지목하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네. 치안관인 당신이 직접 제 얘기를 들어주셨으면 해요."

"일단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프릴은 유티스와 수사관의 안내를 따라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진동하는 담배쩐내에 프릴이 살짝 인상을 구기자 수사관이 황급히 창문을 열고 탈취제를 여기저기 난사하기 시작했다.


"어이구 이거 귀하신 분을 이렇게 누추한 곳에 앉혀서 죄송스럽네. 쬐끔만 아량을 베풀어 주십쇼. 네?"

유티스는 말투부터 행동 하나하나가 왠지 모르게 프릴이 알고 있는 누군가와 닮았다. 프릴은 기분탓이라고 치부하고서 말을 꺼냈다.

"치안관 유티스. 제국을 주시하며 그 어떤 위협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언제나 시민의 안전만을 생각하는 그대의 혁혁한 공로는 익히 들었습니다."


"과찬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예의상 하는 인사말은 빼고 그냥 용건으로 바로 넘어가면 안 되나요? 제가 워낙에 공무가 바빠서 말이죠."

유티스가 그렇게 말하자 옆에 있던 수사관이 경악한 표정으로 '이 인간이 쳐돌았나?' 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유티스는 여전히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지 직접 찾아와서 저에게 면담 신청 하시는 걸 보면 어지간한 일은 아닌 거 같은데, 빨리 해결 보게 빨리 얘기하죠? 이런 냄새나는 방에 1초라도 더 앉혀두는 것만 해도 제 마음이 불편해서 말입니다. 네."


상대를 가리지 않는 껄렁껄렁한 이 태도. 정말로  사람을 닮은 것 같다고 프릴은 생각했다.

"그럼 바로 용건으로 들어가죠. 이걸 읽어주시겠어요?"

프릴은 자신이 가져온 파일을 유티스에게 건넸다. 무제 표지를 한 장 넘기자 <맥스패티, 갈퀴날들, 라쿠이르 인육 매매의 연관 관계> 라는 제목이 있었다. 그 제목을 보고 흥미롭다는 표정을  유티스는 찬찬히 파일을 넘기며 내용을 읽어봤다. 내용은 루밀리가 제공했던 자료들과 에반 플루토의 조언, 체스부의 회의 결과, 그리고 체스부 부원들의 조사 성과들을 조합해서 도출해낸 추측이었다. 몇 장을 넘겨보자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진 유티스는 진지한 눈으로 자료들을 정독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파일을 덮은 유티스가 자신의 옆에 있는 수사관에게 말했다.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 이 얘기는 둘이서 해야겠어. 여기 공녀님께서 비밀 보장을 원하시거든."

"알겠습니다."


수사관이 집무실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히자 유티스가 프릴을 보며 말했다.


"예...  일단 잘 봤구요. 소설 응모는 신춘문예 가셔서 등록하셔요. 여긴 그런 업무 안 봅니다."


탁! 휘익! 유티스는 자료를 책상에 던져놓고 프릴 쪽으로 밀어보냈다. 프릴은 자료를 다시 유티스 쪽으로 밀었다.

"저는 지금 장난치는 게 아니에요."

"딱 봐도 그래보여서 더 골때리는  있죠? 꽤나 재밌네요. 이 자료의 내용 뿐만이 아니라, 공작가 아가씨가 이런 자료를 저한테 들이밀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아주 재미져요, 아주 재미져."

유티스는 프릴이 가져온 자료를 집어들고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면서 물었다.


"이거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건지 물어보면 말해주실 겁니까?"


프릴은 침묵으로 답했다. 유티스는 그런 프릴의 무응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그럴  같았습니다. 아... 담배 땡기네."

유티스는 의자 등받이가 뒤로 젖혀질 정도로 거의 눕기 직전까지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가 몸을 탁 튕기듯 일으켜서 다시 똑바로 앉으며 말했다.

"그래서 저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지금 치안관을 자기 사냥개로 써먹을 생각이십니까?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충성을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적임자라고 판단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예요."

"하아 이 아가씨 참 순진하시네. 루에리아 공녀님. 지금 공녀님이 치안관을 길들이려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수사를 의뢰하는 것일 뿐인지는 당사자인 저희끼리 정하는  아니에요. 남들 보는 눈이 정하는 거죠. 물증도 없이 엉뚱한 짓 하다가 뭐 잘못되면 그걸 빌미로  삶아먹으려 달려들 사람이 어디 한둘인 줄 아시나요?"


"수사를 위한 자료 제공 아닌가요?"

"이걸 자료라 하기에는 너무 추측이랑 심증이 많단 말입니다. 공부하느라 바쁘실 분이 왜 이런  꾸미고 계신 걸까? 좀 거친 취미생활인가?"

"확실히 치안관 당신의 말대로 이 자료는 추측을 기반으로 한 계획이 반 이상이에요. 하지만 이 추측을 한 사람은 이런 일에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 믿고 걸어볼만하다고 판단했어요."


"이바노 씨죠?"


"네??"

"이바노  머릿속에서 나온 계획 아닌가요 이거? 듣자 하니 루나칼립스 학원에 S급 NPC 한 명이 지도원으로 고용되었다는데."

"에반 플루토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하. 맞다, 에반이였지. 전 이미 입에 굳었으니까 이바노라고 부르렵니다."

프릴이 놀라서 물었다.


"선생님을 아시는 건가요?"


"크! 휴영공 언월의 주인 루에리아 공녀님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리다니. 출세하셨네요. 이바노 씨."

유티스는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반면 프릴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님을 어떻게 아시는 건가요?"

"예~전에 같이 일했던 적이 있어요. 제가 아직 수사관이었을 때의 일이죠. 수사 당국에서 일손이 워낙 급해서 보조 인력을 구했는데 그때 온 사람이 이바노 씨였어요. 어떻게 수사관이  건가 의문이 들 정도로 찌질하고 비겁한 새끼 거미였던 제가 이렇게 치안관이 될 수 있었던 건 전부 이바노 씨의 가르침 덕분이죠."

그래서 하는 짓이랑 말하는 모양새가 그렇게 똑 닮았던 건가. 무엇을 가르쳐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방식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최대한 거칠게. 정 모르겠으면 무식한 방법이 제일 좋다.' 이런 내용의 가르침이겠지. 깨달음을 얻은 프릴은 고개를 젓는 한편 다시금 에반 플루토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여튼 그 반응을 보아하니 이 추측의 출처는 이바노 씨로군요.  말이 맞죠?"


"이제 와서 숨기는 건 의미 없겠군요. 네, 맞아요."


그러자 유티스가 씩 웃으며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그러면 당연히 믿어야죠. 저도 이 추측에 걸겠습니다."


유티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3군에 있는 맥스패티랑, 4군에 있는 민찌 공장. 이 둘을 때리면 되는 거죠?"

"네. 그런데 때린다는 건 어떻게 하실 거라는 뜻인가요?"


프릴이 질문하자 유티스가 이가 훤히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희고 고른 치아였다.

"방식은 중요하지 않고요, 일단 특기 살려서 최대한 거칠게 할게요."

역시 그는 에반에게서 가르침을 얻은 사람이 맞았다. 유티스는 집무실 책상에 설치된 내선 전화기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내가 잠깐 다녀올 데가 있거든? 응, 지금. 바로 출발할 거야. 거미 두 녀석만 나 따라오게 붙여줘. 턱힘 짱짱하고 독주머니 빵빵한 애들로. 아, 그리고 내가 쟈네트한테 주소 하나 보내줄 건데, 오늘 중으로 거기도 털어야 하니까 잘 좀 도와주라고. 그래, 그래. 수고해."


수화기를 내려놓은 유티스는 재킷 주머니에 담뱃갑을 넣으며 나갈 채비를 했다. 그는 프릴 쪽을 돌아봤다.


"담배 냄새 나는데 여기 계시지 말고 나가죠. 금방 올 테니까요."


"네. 그럼."

프릴이 유티스를 따라 수사 당국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는 학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고, 유티스는 자신을 따르는 수사관  명을 모터 차량에 먼저 탑승시키고 프릴이 있는 마차 쪽으로 갔다.

"루에리아 공녀님. 이거 받으세요. 저와 통화할  있는 교신 장치입니다. 이번 일이 잘 처리될 때까지 가지고 계시면 제가 도움을 보태겠습니다."


"네. 그럼 뒤는 치안관 당신에게 맡길게요."

"맡겨만 주십시오. 아 그리고."

유티스가 웃으며 말했다.

"이바노 씨에게 전해주시겠어요? 치안관 유티스가 당신이 학원에서 빨리 잘리기를 거미줄 쳐놓고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요."

진심이라서 살짝 불안해진 프릴이었다.

"알겠어요. 전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전 가서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 좀 때려주고 오겠습니다."

유티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프릴에게 거수경례를 한 뒤 차량에 탑승했다. 프릴은 유티스의 차가 멀어지는 걸 보고 나서야 마부에게 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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