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9화 〉3-2. 압박 (3) (69/88)


  • 〈 69화 〉3-2. 압박 (3)

    에반 플루토는 부지런히 부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테이블과 의자  낡은 비품들은 모두 새것으로 교체했다. 좋은 비품을 안 주려고 버티던 자재관리부 지도원들이 체스부 부장 유리아 릴리스라는 서명을 보자마자 비닐도  뜯은 새것으로 챙겨준 덕분에 의자는 튼튼, 책상은 반짝, 필기구도 꽉꽉 채워져 있었다.

    구교사 건물이 앞을 떡하니 막고 있지만 그래도 환기가  되게끔 창문을 열어놓은 상태로 먼지들을  털어냈다. 4층 구석에 숨어있는 부실이라 남직원 화장실까지 다녀오려면  여정을 떠나야 했지만  수고를 무릅쓰고 물걸레를 빨아와 바닥과 벽, 구석구석 깨끗하게 닦아냈다.

    삭은 거미줄을 털어내고, 묵은 먼지도 닦아내고, 물걸레질  해주고, 비품들을 교체하자 제법 부실 다운 모습이 되었다.


    "휴. 이제야 좀 봐줄 만하네. 이제 여기다가 체스판도  챙겨놓고, 한이 부탁했던 티타임 용구들도 세팅해 놓고 하면  숙소보다도 아늑해지겠는걸. 젠장."

    "수고 많으셨어요. 에반 플루토 씨."


    유리아 릴리스가 부실 테이블에 산더미만 한 서류와 장부들을 쌓아놓고 있었다. 에반이 열심히 청소를 하는 동안 그녀 역시 열심히 서류들을 보며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청소하느라 먼지 풀풀 날리는데 뭘 굳이 여기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냐?"

    청소를 마친 에반이 유리아 옆에 앉아서 관심을 보였다.

    "이게 다 뭐야? 학생회 업무야?"

    "아뇨. 학생회 업무는 학생회실에서만 해결합니다. 이건 루에리아 양이 저에게 전해준 자료들이에요. 체스부 활동의 일환인 셈이죠."

    에반은 유리아의 발치에 놓여있는 상자를 하나 발견했다. 세관청의 문양이 찍힌 상자였다. 안에는 유리아가 검토를 마친 회계 장부들이 들어있었다.


    "세관청?"

    "루에리아 양이 세리들을 찾아갔다고 하네요. 세리들에게 세무조사와 군정 감사를 명령해서 주둔군의 모든 예산 장부를 압수했고, 못 미더운 세리들 대신 저에게 검토를 부탁했습니다."

    "하하! 이런  기대하긴 했지만 기대 이상이잖아 프릴 녀석?"


    에반은 얼마  작전 회의 때 맥스패티의 자금원을 끊고 갈퀴날들을 압박할 사람으로 프릴 루에리아를 지목했다. 그녀를 지목한 에반의 지시사항은 '조져' 라는 간단한 한 마디였다. 조진다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냐는 질문에 에반은 본인이 자신 있는 특기를 살려서 자유롭게 하되 기왕이면 거칠수록 좋다고 대답했다.


    "세리들이라. 그 관직에 앉은 이리 새끼들부터 길들여서 목줄 채우고 조지러 다닌다니. 재밌네, 재밌어. 프릴 녀석 생각보다 화끈한데?"

    "감탄할 점이 많은 학우입니다. 주둔군의 부단장, 저번에 제가 찾아갔을 때는 변명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놨지만 루에리아  앞에서라면 입도 못 떼겠죠."

    재력의 정점에 선 유리아 릴리스의 압박과 권력의 정점에 선 프릴 루에리아의 압박은 느낌이 달랐다. 유리아가 정곡을 콕콕 찌르며 꾸짖어서 상대방이 입도 벙긋 못하게 하는 느낌이라면, 프릴의 경우에는 가만히 있어도 상대방이 알아서  잘못했나 술술 토하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학원에서의 루에리아 양은 아주 유순합니다. 학원 안에서는 모두가 같은 학생이고, 마법이라는 거대한 학문 앞에서는 누구나 한없이 작고도 무지한 자라는 그녀만의 철칙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학원을 벗어나면 루에리아 양은 학생이기 이전에 언월의 공작가 장녀입니다. 루에리아 양은 그런 본분 역시 소홀히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높은 자리일수록 자기 본분을 지키는 사람이 별로 없다. 특히 정말 정말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나마 덜한 편인데, 항상 보면 어중간하게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자기보다 만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같잖은 권세를 휘두른다. 그렇게 작은 그릇에 걸맞지 않은 분에 넘치는 위세를 떵떵거리며 자신이 갑이라는 만족감을 느낀다.

    프릴 루에리아는 그런 부류의 종자들을 모두 엎드러지게 할 권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결코 과시하지 않는다. 신분에 관계없이 학원의 학생에게는 예의를 다하고, 조금이라도 마법을 더 탐구한 선배라면 존경을 표하고, 묵묵히 빗자루질을 하는 늙은 지도원에게도 깍듯이 인사를 한다. 반대로 신분에 관계없이 자신의 본분을 더럽히는 자라면 프릴 루에리아의 단호한 분노를 피해갈 수 없다.

    "나도 그걸 알아봤기 때문에 프릴 녀석에게 이 역할을 맡긴 거야. 다음 행보가 기대되네."

    "그럼 제게는 어떤 역할을 맡기실 셈이신가요?"


    "네가 활약하는 건 좀 후반부야. 아주 결정적인 역할이니까 실수하면 안 된다고."

    "벌써 겁주시는 겁니까? 무엇을 그렇게 설계 중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일은 에반 플루토  당신이 숙련도가 높은 것 같으니 당신의 작전을 믿겠습니다."


    "이야. 이제 나도 슬슬 너에게 신뢰를 받는 건가?"


    "지도원으로 인정하는 의미의 신뢰는 아니니까 오해 마시기를."

    "쳇. 선 긋기는. 그나저나 그쪽 상황은 좀 어때?"

    "끔찍합니다."

    유리아는 주둔군의 장부들을 면밀히 검토하면 할수록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을 느꼈다. 의도적인 오류, 대조 결과 불일치, 분식 회계, 누락, 공백, 허위 기재 등등 멀쩡한 부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출이 나갈 구석이 없는데 군납이나 후원 등으로 악착같이 돈을 끌어 모아서는 당당히 기록할 수 없는 곳에 지출했으니 장부가 멀쩡할 수가 없었다. 장부 여기저기 숫자의 형태로 기록된 참상에 유리아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괴로운 한숨을 내뱉었다.

    "백화 상회의 후원금을 음지로 빼돌리다니. 기사라는 작자들이 어렵게 살아가는 시민들의 돈을 갈취해서 이리들에게 바치다니. 이런 게 가능하군요. 세상에 이런 게 현실이 되는 게 가능한 것이군요."

    "어... 유리아? 안 그래도 힘든데 너무 스트레스를 늘린 거 같아 미안해지네."

    "아뇨. 당신이 사과할 건 아닙니다. 이런 놈들과 뒤에서 작당하는 자가 앞에서는 루나칼립스 학원의 교직원이라고 불리며 존경 받고 있다니 치가 떨리네요. 에반 플루토 씨 당신 덕분에 알지 못했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런 자를 교직원이라 부르며 존경했겠죠. 누군지는 몰라도 하루 빨리 축출해내고 싶습니다."


    유리아가 장부 검토를 마무리하며 말했다. 에반은 유리아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이런 자료를 여기다 두면 안 되겠지? 나한테 맡기면 내가  숨겨놓을게."

    "부탁 드리겠습니다.  방은 이미 누가 쳐들어온 전적이 있으니까요."

    “맡겨두라고. 찾는 걸 잘하는 사람은 숨기는 것도 잘하거든.”


    “엄청 수상한 사람의 대사를 마치 믿음직스러운 사람의 대사인 양 말씀하시네요.”


    “마무리 됐으면 이거 마시고 머리 좀 식혀.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에는 달달한 게 딱이야.”

    에반이 유리아에게 딸기우유를 선물했다.


    "동방 유학생들이 입고되자마자 전부 사들이는데 어디서 구하시는 건가요?"

    "수급처가 한 군데 있지. 앞으로도 하나씩 챙겨줄게."

    "감사합니다."


    "정리 됐으면 이제 기숙사로 돌아갈 거야?"

    "아니요. 잠깐 상회에 볼일이 생겼습니다... 중요한 볼일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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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뻐억!!

    "머저리 새끼들!!!"

    "크악!!"


    빠악! 굵직한 타격음이 울리더니 흉터쥐 우두머리가 얼굴을 감싸고 쓰러졌다. 이리 서너명이 욕설을 퍼부으며 14군 폐공장의 시궁쥐들을 마구 짓밟았다. 시궁쥐들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구타 당하고 있었다.


    "모질이들! 멍청한 새끼들!! 납품도 제때 못하고 물건까지 홀라당 뺏겨?!"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을 했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반성을 하나요?"

    "반성? 푸하하하하!"

    흉터쥐 우두머리의 대답에 어느 이리가 배를 잡고 미친듯이 한바탕 웃어제꼈다.


    "그래. 반성을 해야지. 반성을 하려면 어디로 가야할까? 갱생의 방으로 가야지. 갱생의 방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이리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흉터쥐 우두머리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정돈  된 수염이 지저분하게 난 얼굴로 씩 웃으며 말했다.


    "훌륭한 패티로 거듭나서 나오는 거야."

    "제발! 그것 만큼은!!"


    이리는 바닥에 무언가를 던졌다. 동전 크기의 작은 금속 덩어리였다. 바닥에 떨어진  금속 덩어리는 부르르르 진동을 일으키더니 별안간 부피를 부풀려 커다란 기계로 탈바꿈했다. 큼직한 몸통에 다리가 넷 달린 형태를 한 그 기계는 사람 한 명은 너끈히 들어갈 너비의 입을 가지고 있었고   너머로는 날카로운 연삭기 톱날들이 맹렬히 회전하고 있었다. 갈퀴날들의 마개조로 만들어진 이른바 미트볼 분쇄기라는 이름의 기계였다.

    이리는 흉터쥐 우두머리를 잡고 그 기계가 있는 쪽으로 그를 끌고 갔다.

    "일로와 이 새끼야!  딱 봐도 맛대가리 없을 것 같은 새끼."

    "하으으윽!! 한번만! 한번만 기회를 주세요 제발!!"

    흉터쥐 우두머리는 이리 손에 붙잡혀 질질 끌려가면서 애걸복걸했다. 사람 하나를 집어삼킬 준비를 마친 미트볼 분쇄기의 입안에서 날카로운 톱날들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야, 야. 그만해라."

    의자에 걸터앉아서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한 사내가  이리를 만류했다. 왁스를 발라서 반들반들하게 힘  올백머리에 진한 콧수염. 비싸 보이는 투버튼 정장에 사치스러운 반지가 손가락마다 꽂혀있었다. 양 옆에는 이리들을 한 명씩 거느리고 있었다.

    "여기를 털어간 그 년놈들이 3군에 있는 직영점까지 털었다더라. 근데.... 기껏 털어놓고는 돈을 가져간 것도 아니고,  챙겨간 것도 아니야. 털긴 털었는데, 가져간 건 없어. 아니 대체 뭐하는 새끼들일까?"


    "저, 여기 이걸!! 놈이 자기 명함을 남기고 갔습니다!"


    이리의 손에서 벗어난 폭력단 우두머리가 '뭐하는 놈일까' 라는 혼잣말을 듣자 벌떡 일어나서 그에게 명함을 한  건냈다.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는 명함을 받아서 읽어봤다.


    "이게 뭐야? 허드렛일, 힘든 일, 궂은 일, 싫은 일, 위험한  모두  NPC에게 맡겨주십시오. 언제나 당신 곁에 있는 우리는 No Problem Crew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S급 NPC 에반 플루토.... 에라이 시벌!!"

    남자는 명함을 폭력단 우두머리의 얼굴에 대고 집어던졌다.

    "NPC면 그냥 일용직 잡부잖아! 잡부! 하루 벌어서 하루 입에 풀칠하는 거렁뱅이!! 그런 거렁뱅이한테 털려?!!"

    "그 그치만!! S급 NPC라고...."


    "NPC가 S급이여봤자 NPC지! 니들도 뭐 S급으로 쳐맞고 털렸냐?! 이 S급 모지리 Sㅐ끼들아!!"

    "진정하십시오, V 님."

    "후우..."


    옆에 서있던 이리가 만류하자 성질을 부리던 V라는 남자가 콧수염을 매만지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 보니 V님. 최근에 루나칼립스 학원을 쳤던 카일을 기억하십니까?"


    "엉. 꽤나 날고 기던 녀석인데 고등학교 하나 똑바로 못 털고 부하들 다 잃고 철수했다며. 그러고 오다가 듸졌고. 근데 걔가 왜?"

    "그때 카일은 새로 학원에 고용된 S급 NPC에게 저항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했다 합니다. 아마 그 명함에 나온 NPC가 바로 그자인듯 합니다."

    "허어~ 그 카일이 그렇게 당할 정도면 여기 있는 이 찌끄래기들은 뭐 상대 조차도 안 됐겠네. 응응."


    "네 그렇습니다! 상대의 ㅅ도 안 됐습니다. 헤."


    "자랑이다 븅딱아."


    V는 구둣발로 우두머리를 걷어찼다. 그러고는 비싼 구두에 더러운  묻지는 않았나 살펴봤다. 그때 한쪽에서 전보를 주고 받던 이리 한 명이 V에게 보고했다.


    "4군에 있는 민찌 공장도 공격 당했다 합니다."

    "뭐여?! 고기는?"

    "그게...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기라던가 돈이 될만한 물건이 꽤 많았는데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네요."

    "이것들이 지금 갈퀴날들을 상대로 뭔 벨튀를 하고 있나? 간이 배밖으로 나온 건가, 모가지가 탈부착인가?"

    "학원을 습격한 것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갈퀴날들을 추적하고 있다고 보면 타당하겠죠."

    V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이리들을 이끌고 공장 밖으로 향했다.

    "가자.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 좀 봐야 쓰겠어. 당돌한 만큼이나 맛있는 패티가 나올지도 모르겠네. 난 간다 쥐새끼들아, 내일부터 빵꾸 좀 내지 말고 똑바로 손질해라."


    "네! 들어가십시오!!"


    시궁쥐들이 한몸 처럼 일제히 상체를 숙여 인사했다. 그들은 V와 이리들이 나갈  까지 90도로 숙인 자세를 유지했다. 이리들이 나가고 공장문이 닫히자 흉터쥐 우두머리가 고개를 숙인채로 혼잣말을 했다.

    "질 텐데. 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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