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8화 〉3-2. 압박 (2) (68/88)



〈 68화 〉3-2. 압박 (2)

"갈퀴날들이 요구 후원금액을 또 올렸다고?"

라쿠이르 주군군 부단장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묻자 기사가 대답했다.


"예. 듣기로는 본인들의 자금 조달원이 의문의 습격자에게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복구할 때까지는 저희 쪽 후원금으로 충당하겠답니다."

"망할 놈들! 이쪽도 백화 상회의 후원금이 쫙 빠져서 쪼들린다고!"

"돈을 못 주겠다면 계약은 부득불 파기랍니다. 그렇게 되면 부단장님이 주문한 물건도 물 건너가는 거죠."

"건방진 이리 새끼들이 주제도 모르고 감히!!  새끼들.... 기사단이 자기들 적금통장으로 보이는 거야 뭐야?!"


"그게..."


"그게 뭐?! 말을 해!"


부단장이 윽박지르자 기사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걔들 말로는 부단장님이 하도 요청해서 설계에도 없는 모델을 특별히 맞춤 제작해주는 거니까 인건비가 많이 깨진다네요."

"인건비는 얼어 죽을 놈의 인건비! 재료도 다 있으니 그냥 찍어내기만 하면 되는데 무슨 특별 맞춤 제작?!"


부단장이 소리를 지르고는 고가의 궐련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 나서 조금 뒤에 그의 콧구멍이 굴뚝처럼  연기를 뿜었다.

"하여튼간에 마음에 안 드는 새끼들이야. 우리가 케어 안 해줬으면 떠돌이 들개 신세였을 놈들이 말이야. 그롬에서 쫓겨난 주제에 우리 덕분에 라쿠이르에 자리 깔고 앉았는데 어따 대고 갑질이야, 갑질은?"

"그렇다 해도 부단장님도 참 간이 크시네요. 다른 여자도 아니고 무려 '그녀'를 지명하시다니."


"시끄러. 내가 지금까지 투자한 돈이 얼만데 그 정도도 못해주겠어."

"나중에 정말 뒷수습  할 자신 있으신가요?"

"아 사고로 위장하면 된다니까? 뭘 그렇게 쫄아?"

"꼬리 밟혔다간 우리 다 죽어요."


"됐으니까 군납 장부나 고쳐. 걔들이 더 달라고 하니까 더 뜯어내야지."


"지금 군납금 때문에 여론이 엄청 안 좋아요. 부당 징수라며 민원이 계속 늘어나서 세리 애들이 귀찮아 죽겠다고 얼마나 말이 많던지요."

"평민들 여론이  좋다고 안 뜯을 거야?"


"안 뜯는 게 아니고 더 이상 뜯길 것도 안 남았다는데요?"


"마른 오징어도 꽉꽉 짜면 물이 나와. 니 악력 문제일 뿐이야."

그것이 시민들을 수호하고 제국의 명예를 지킬 기사단의 부단장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기사는 자신의 상관보다  쓰레기일 자신이 없었다. 다만 그 역시 부단장과 공조해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먹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상관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기로 했다.

"이번에는 뭘 빌미로 뜯어야 할까요? 군납 징세 사유도 어지간한   써먹었어요."

"하 정말. 이럴  남부 지역에서 내전이라도 터져주면 건덕지 생기니 얼마나 좋아? 반군 놈들 요즘 왜 이렇게 얌전한 거야? 짜증 나게."

"기사 맞으시죠?"


부단장이  태운 궐련을 재떨이에 놓으며 누런 이가 드러나게 씨익 웃었다. 부하 기사가 군납 장부를 꺼내 펼치려던 그 순간 응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기사 하나가 황급히 들어왔다.


"부단장님! 지금 바깥에....!!"

"뭐야? 뭔 일인데?"


응접실 밖 복도 쪽에서 무수히 많은 발소리가 울려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부단장이 응접실 문쪽을 응시했다. 잠시 뒤 응접실로 들어온  사람.


"세관장?"


부단장은 그 사람을 알아봤다. 하지만 세관장은 낯설 정도로 경직된 표정을 하고 있었고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여긴 웬일로  거지? 이유야 넘어가고 마침 잘 됐네. 안 그래도 군납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오고 말이야."


부단장이 살갑게 세관장을 반겼으나 세관장은 짧게  마디 했다.


"털어."


그 한 마디에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 무리의 세리들이 응접실 안으로 우르르 밀려들어왔다. 안에 있던 기사들과 부단장이 잠시 아연실색해져서  광경을 멍하니 봤지만  상황 파악을 마친 부단장이 큰 소리로 호통쳤다.

"세리 놈들을 믿은 내가 어리석었지! 역시 겸상 못할 더러운 협잡꾼 놈들!! 누구의 사주로 이런 일을 벌이는 거냐  배신자들아!!"


"배신자? 재밌는 말씀을 하시네요."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 부단장에게 대답한 것은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앳되고 어린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말에 무게와 힘이 담겨있었다.

응접실 문 너머에서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기사들과는 체격 차이가 확연할 정도로 작은 체구에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한 귀족 소녀였다. 은색으로 윤기가 나는 하얀 머릿결에 리본으로 장식을 달아서 전체적인 인상이 마치 인형 같았다. 하지만 맑은 두 눈동자만큼은 마력이 깃든 것처럼 힘이 느껴졌다.


"여기 있는 사람 중 누가 진짜 배신자일까요? 사람들을 속이고, 황제 폐하를 기만하고, 기사의 명예를 더럽힌 당신이야말로 배신자 아닌지요?"


"루, 루에리아 공녀?!!"

상상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기사들과 부단장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얼어붙었다. 휴영의 공작 언월의 주인이 어째서 이런 곳에 찾아온 것인지는 알  없었지만, 어설프게 이 상황을 모면하려 하다가는 모가지가 잘릴  분명했다. 관직을 잃는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모가지가 잘린다는 게 아니라 물리적인 의미에서 모가지가 잘린다는 것이다.

"제국에 영광!! 황제께 충성!! 언월의 주인께 경례!!!"

무릎을 꿇은 기사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그 경례 구호를 들은 프릴이 냉소적으로 답했다.

"제가 들어오자마자 거짓말부터 하는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공녀님을 향한 저희의 충의는 거짓이 아닙니다!!"

"부단장."


"예!!"

"조용히 하세요."


"...."

"지금 이 순간부터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할 때 이외에는 발언을 허락하지 않겠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입을 열거나, 묻는 말에 바르게 대답하지 않는다면. 언월의 주인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언월의 주인에 대한 도전. 그것은 루에리아 공작가에 대한 도전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루에리아 공작가와 같은 명예, 영광을 향유하는 다른 모든 휴영의 공작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휴영의 공작이 어떤 자들인가? 국경일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면 황제가 친히 베푸는 만찬 연회에 초대받는 유일한 귀빈들이 바로 휴영의 공작들이다. 다른 귀족들은 궁정 마법사들의 철저한 몸수색을 거쳐 무기나 암살 마법 술식이 없다는 걸 확인 받아야만 잠시나마 황제를 알현할  있는데, 그런 황제와 한 테이블에 앉아서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들 수 있는 존재. 밤하늘의 제국, 달빛의 왕조에서 달빛을 나눠 받은 상현, 하현, 언월의 주인들인 것이다.

그런 휴영의 공작에게 도전한다? 그것은 황제를 모욕하는 행위다. 황제를 모욕하는 행위는  반역이다. 그리고 반역자는 오로지 사형으로 다스린다.  사실을 모를  없는 기사들이 감히 입도 벙긋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세리들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주둔군이 작성한 장부들을 상자에 옮겨 담았다. 자신들의 만행이 상자에 옮겨지는 동안 기사들은 그 어떤 변호도, 변명도 못한 채 무릎을 꿇고 부동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

세관장이 프릴을 보고 섰다. 그는 입을 열지 못하고 프릴을 향해 쭈뼛쭈뼛 부자연스러운 몸짓만을 보냈다.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지 눈치챈 프릴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루에리아 공작가를 상징하는 반달 문양이 그려진 은 장신구였다. 프릴은 바닥에 장신구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세관장은 잽싸게 그 반달 장신구에 무릎꿇고 앉아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달빛에 손을 가져다 대어 자비를 구하는 것. 묻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입을 여는 자는 불충죄로 벌하겠다던 프릴의 명령에서 잠시 예외를 둬서 발언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 행위였다. 발언권을 얻은 세관장은 자신의 목숨줄인 반달 장신구에 손을 꼭 댄 채로 입을 열었다.

"다 수색했습니다. 이곳에서 작성되는 모든 장부들을 다 상자에 담았습니다."


"...."

프릴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세관장 쪽으로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프릴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침묵하자 세관장과 부단장은 불안함과 두려움에 압도당해 떨고 있었다.


"부단장."

프릴이 입을 열어 부단장을 불렀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부단장은 뱃속의 장기들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순간 느꼈다.


"예....예!!"


"꺼내세요."


"예...?? 꺼낸다니 무엇을??"

"무엇이라니요? 제가 지금 찾고 있는 게 무엇일까요? 예산 장부죠."


"장부라면 세리들이 모두 압수했습니다..."

덜컥. 앉아있던 프릴이 일어나서 의자를 밀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다시 한번 부단장을 불렀다.


"부단장."


"예!!"


"고개를 드세요."


부단장이 조아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프릴을 올려다봤다. 프릴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걸음이 향한 곳은 부단장이 업무를 보는 책상이었다. 프릴은 책상에 손을 살짝 올리고는 부단장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저는 지금 언월의 주인들 중에서 가장 어린 달빛이에요. 그렇지만 어리다고 해서 바보라는 뜻은 아니에요."

"...!!"


프릴이 그렇게 말하고는 부단장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책상에 걸터앉은 채로 다리를 도도하게 꼬았다. 그리고는 애처롭게 떨고 있는 부단장을 단호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부단장."

"예..."

"제 눈을 보세요."

"....."

부단장은 자신의 책상에 고고하게 앉아있는 프릴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에게 기회를 드릴게요. 지금 꺼낸다면 착오가 있어서, 깜박하고, 실수로 안 꺼낸 것이라고 믿을게요. 하지만 지금  기회를 놓친다면 당신은 저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


꿀꺽! 부단장은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부단장의 책상에 다리를 꼬고 걸터앉은 프릴은 책상 위에서 찻잔을 하나 발견했다. 부단장이 접대에 애용하는 동방 수입산 고급 홍차가 그윽한 향을 발하고 있었다.


프릴은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찻잔을 집어든 손을 놓아버렸다.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찻잔이 산산조각 났고, 홍차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며 퍼졌다. 파삭! 쨍강! 프릴이 구둣발을 살짝 들어 찻잔의 파편 하나를 가볍게 짓밟아 깨부쉈다.

충분히 메세지를 전한 프릴이 부단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

부단장은 몸을 일으키더니 주변에 있는 기사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사들이 프릴이 앉아있는 책상을 옆으로 밀었다. 기사 서너 명이 힘껏 밀자 무거운 원목 책상이 밀리기 시작했고  밑에서 바닥의 색과 다른 부분이 나타났다. 부단장이 그 부분을 당기자 숨겨진 공간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장부와 서류더미가 숨겨져 있었다. 눈치를 보던 세리들이 황급히 숨겨진 서류를 모두 꺼내서 상자에 담았다. 프릴은 그제서야 책상에서 일어나서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지금부터 이 서류는 백화 상회의 유리아 릴리스가 면밀히 검토할 거예요."

"유리아?!! 허업!!"

유리아 릴리스라는 이름에 부단장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지만 곧바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반달 장신구에 손을 대지 않은 상태로 목소리를 냈다가는 두 번 다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게 목이 갈라지는 형을 당해도 어쩔  없다. 다행히 이번 만큼은 프릴이 그의 목을 가르지 않고 넘어갔다.

"비록 검토는 백화 상회에서 하는 것이더라도 엄연히 세리의 압수수색을 통한 세관청의 세무조사에요. 아시겠죠?"

"....."


 된다고 말할 수 없다. 모든 기사와 공직자들은 귀족을 섬기는 입장이다. 그리고 달은 모든 귀족들의 최정상에 군림한다. 법이 된다고 해도 달이 안 된다고 하면  되는 것이고, 법이  된다고 해도 달이 된다고 하면 그건 되는 것이다.

"들려야할 곳이 있으니 지금은 물러나지만 전 다시 올 거예요. 그때가 언제일지는 몰라도, 나머지 얘기는 그때 마저 하도록 하죠."


자리에서 일어나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나머지 얘기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세관청과 주둔지를 휩쓴 작은 반달의 주인, 프릴 루에리아는 자료 상자를 챙겨서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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