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3-2. 압박 (1)
사람의 성격이라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복합적이고 다각적이기 때문에 단편적인 관찰만으로는 어떤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쾌락만을 위한 살인이라던가 성범죄 등 결정적인 과오라면 그 단서 하나만으로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결론지어도 무방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닌 이상은 어떤 한 사람이 선한가 악한가, 옳은가 그른가, 숭고한가 비루한가, 희극적인가 비극적인가를 판단하려면 오랜 행동 관찰이 불가결하다.
행동 관찰을 오래하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인체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에도 항상성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적인 자극으로, 혹은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성과 감성의 균형이 깨지면 평소 항상성이 유지되는 동안 늘 보여주던 것과는 다른 면모가 나타난다.
그렇다 하더라도 항상성은 말 그대로 항상 같은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향인 만큼 시간이 경과하면 그런 격양 상태에서 평상시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런 과정을 여러 번 관찰하고나서야 비로소 그 사람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간혹 타인의 예상을 불허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혼자 자극을 받아 갑자기 격양된 모습을 보인다거나, 평상시의 모습과 격양된 모습의 격차가 너무 크다던가. 아니면 단순히 항상성 자체가 있는 건지 의심될 정도로 일관성이 없다던가. 사람은 본능적으로 미지를 두려워하기에 예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무서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이런 예상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을 흔히들 무서운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프릴 루에리아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학생들이 관찰한 그녀의 모습은 수줍음 많고, 내성적이고, 주목받기를 싫어하고, 부끄럼쟁이에 조용한 아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감정적 항상성이 맞춰진 상태일 때의 이야기다.
학원 내에서는 그녀를 자극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평상시의 잔물결 하나 없는 호수 같은 모습만 보이지만, 겁도 없이 그녀를 자극했다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한 번이라도 봤다면 다시는 잊지 못한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프릴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다가 호된 꼴을 당했는지 모를 일이다.
프릴의 평상시 모습과 자극을 받았을 때의 모습이 격차가 큰 이유는 그녀가 책임감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루나칼립스 학원의 학생으로서의 자신, 루에리아 공작가의 딸로서의 자신, 마법을 탐구하는 개척가로서의 자신, 꿈 큰 소녀로서의 자신. 프릴은 자신이 가진 정체성 중 어느 것 하나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프릴의 학생 면모만 보고 그녀가 귀족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프릴이 어린 소녀라는 것만 보고 그녀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간과했다가는 크게 다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세리(税吏)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세관청(税官廳)을 찾아온 프릴이 번호표를 뽑고 앉아 기다린지 한참이나 지났지만 세리들 중 그 누구도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얌전하게 앉아서 번호표를 쥐고 있는 프릴의 모습은 도무지 무서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프릴은 주변을 돌아봤다. 세금과 관련되어 부당한 일을 겪은 많은 시민들이 민원을 제기하러 와있었지만, 상담을 맡은 세리들은 영세한 시정(市井)의 서민들 사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분명히 공납을 면제해준다고 약속 받았으니까 대대로 물려받아온 포도밭을 넘긴 겁니다. 여기 이게 그 계약서에요! 보세요! 도장까지 떡하니 찍힌 계약서가 여기 있는데도 자꾸 딴소리를 한다구요!!"
"식구 중에 남자라고는 빵 깨물 이도 안 남은 늙은 아버지하고 진작에 안개전쟁에서 죽은 남편이 다란 말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징집 불응 군납금을 내라는 겁니까? 늙은이에게 칼 채우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귀신이라도 깨워내라는 말입니까? 아낙네 혼자 버는 살림에 안 그래도 세금 빠지면 남는 게 없는데 군납이 웬 말입니까? 예??"
"이봐요 이게 대체 뭡니까?!! 세금이 왜 이리 많이 나왔나 알아봤더니 이 위험물 수거 및 처리세는 대체 뭐죠?! 우리집은 빵가게인데!! 병원이나 공장도 아니고 빵가게에서 위험물 수거할 게 뭐가 나온다는 겁니까?!"
"우물세는 왜 또 올린 거냐? 작년에 비해 세배나 올리다니. 진짜 니들이 이리보다 더 나빠 이 양아치들아. 니들도 이 돈 내고 물 쳐마시니? 나와.... 나와!! 앓느니 죽지 이러고 다 뜯기며 살 바에야 니들 잡고 나도 죽어야겠어! 빨리 나와 이 새끼들아!!!"
시민들이 저마다 세리들에게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지만 상담 테이블에 앉은 세리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농민, 소상공인, 과부. 하나같이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세리들은 뒷돈을 두둑하게 챙겨주기 전까지 입을 열 생각을 안 한다는 거야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돈 없는 서민들에게선 그나마 남아있는 것도 빼앗아가고,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들 상대로는 사사건건 세무조사를 하다가 먼지 한 톨이라도 털어져 나오는 순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뒷돈을 받아낸다. 투명한 조세 운영을 담당해야 할 세리들이 누구보다도 많은 포탈금을 뒷주머니에 쟁여놓고 있는 것이다.
사흘을 굶어도 세리와는 겸상을 하지 않는다는 아그루스의 속담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이봐, 아가씨."
세리 중 한 사람이 프릴에게 말을 걸었다. 프릴은 자리에 가만히 앉은채 시선을 앞에 고정해서 세리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손만 세리 쪽으로 쭉 뻗어서 그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세리는 멈춰 서서 큭큭큭 웃음소리를 내며 프릴에게 말했다.
"보아하니 여기 앉아서 기다린지 꽤 된 거 같은데. 번호표는 이렇게 기다릴 정도의 숫자가 아닌데도 말이야."
세관 상담을 받는 사람 중에는 프릴 보다 나중에 온 뒷번호의 사람들도 꽤 있었다. 물론 프릴이 그 점을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어린 아가씨가 세관청에는 무슨 볼일로 온 건지 모르지만 이러고 마냥 앉아있다가는 해 저물걸?"
그는 그렇게 말하고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그리고는 까딱까딱 흔들어 보였다. 뒷돈을 달라는 의미였다. 프릴은 순수하지만 그걸 모를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꽤 있으신 집안 영애님이신 거 같은데. 박봉 공직자에게 잔돈이라도 좀 챙겨 달라고."
"저희 가문은 공직자에게 어떠한 형태의 뇌물과 청탁금도 수수하지 않아요. 당신도 힘들게 살아가는 시민들의 세금으로 녹봉을 받아먹는 공직자라면 이런 식으로 직무를 더럽히지 말도록 하세요."
조곤조곤하면서도 단호한 명령조의 말투였다. 세리는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곧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크크크!! 난 말이야. 아가씨 같은 부류의 귀족이 제일 좋단 말이야. 앞에서 깨끗한 척하고 고상 떨수록 뒤를 털어보면 나오는 게 많으니까! 그 고상한 얼굴이 약점 몇 번 만지작거려주면 자존심 상해서 부들부들 거리는 꼴이 얼마나 볼만한지!"
"황제 폐하의 심복인 귀족들을 조롱하다니. 그 담력 하나만은 높이 살게요. 그보다도 빨리 제 업무를 봐주세요."
"이 아가씨가 참. 받은 게 있어야 주는 것도 있는 거지."
세리가 다시 손을 내밀어 뒷돈을 요구했으나 프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세리는 피식 웃으며 뒤돌아섰다.
"맘대로 하셔. 우리들 퇴근이 빠르거든? 되도록 빨리 마음을 바꾸는 게 좋을 거야."
"기다리세요."
프릴이 불러 세우자 멈춰 선 세리가 그녀를 보며 히죽 웃었다.
"뭐야? 빨리 마음을 바꾸는 게 좋을 거라고 말은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빠르면 재미없는데."
"재미를 보고 싶은가요? 그럼 이걸 받으세요."
프릴이 세리에게 건넨 것은 현금도 아니고 수표도 아니고 돈 봉투도 아니고, 돈이 될 만한 물건도 아니었다. 얇은 갈색 서류봉투였다. 내용물을 모르지만 일단 실망하고 본 세리에게 프릴이 말했다.
"그건 제가 작성해온 세무조사 의뢰서에요."
"이런 건 창구에 제출하셔야지. 창구 앞에 앉으려면 나한테 줘야 할 게 있잖아. 이런 거 말고 좀 더 쌈박한 거."
"저와 내기를 하나 하죠."
"내기? 무슨 내기?"
"당신 입장에선 돈이 될만한 내기에요."
"아 그렇다면 내가 마다할 이유가 없지. 무슨 내기인데?"
"당신에게 드린 그 의뢰서를 세관장(税官長)에게 보여주세요."
"아서라. 세관장 님이 얼마나 바쁘신데. 이런 거 검토할 시간 없으시다고."
"내기니까요. 한번 전해주세요."
"좋아. 그 다음엔?"
"그 다음은 간단해요."
전방만을 주시하고 있던 프릴이 그제서야 세리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녀는 세리의 얼굴을 보고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이 얻어맞는다면 제 승리이고, 한 대도 맞지 않는다면 당신의 승리입니다."
세리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얻어맞는다고? 느닷없이? 혹시나 싶어서 프릴이 건넨 서류를 꺼내서 살펴봤지만 그저 평범한 세무조사 및 감사 의뢰 서식일 뿐이었다.
"내기 조건은 그게 다야?"
"네. 그게 다예요. 만약 당신이 이긴다면 당신이 부르는 대로 돈을 드릴게요."
"부르는 대로?! 내가 얼마를 부를 줄 알고?"
"얼마를 부르건 상관없어요."
"만약에 내가 지면?"
"제게 무릎 꿇고 사죄하세요."
세리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프릴을 보았지만 프릴의 표정에선 진심이 보였다. 내기지만 장난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좋아. 그 내기 받아들이도록 하지."
세리는 횡재했다는 얼굴을 하고서 프릴에게 받은 봉투를 챙겨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다른 세리들이 회계 업무를 보고 있었고, 세관장이 서류더미를 정리하며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세관장님."
"왜 불러. 바쁘니까 용건만 빨리 말해. 너 땜에 지금 또 숫자 헷갈리기 시작했어."
"지금
어떤 시건방진 쫌생이 귀족 꼬마가 하나 와있는데요 세관장님에게 이걸 전해달라 하더군요."
"그게 뭔데?"
"그냥 세무조사 의뢰서요."
"얌마 지금 장난치냐? 그런 업무는 창구에서 해결하라 그래. 왜 고작 그런 걸로 세관장을 찾는 거야? 하여간 귀족들은 상식이라는 게 없어요 상식이."
"그렇죠? 큭큭!"
내기에서 이겼다는 확신이 든 세리가 얼마를 부를까 숫자를 부풀리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세관장이 그런 세리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귀족 꼬마는 여기 온지 얼마나 됐어?"
"꽤 오래 됐죠. 귀족이니까 바쁜 공직자들에게 용돈 좀 챙겨달라 했는데 푼돈 한닢도 안주겠다고 얼마나 버티던지요. 그래서 꽤 오래 방치해 뒀습니다."
"너 참 여전하구나. 귀족 상대로 그러는 거 안
무섭냐?"
"정 호통치면 횡령감사 한번 빡세게 굴리면 되죠 뭐. 털어서 먼지 한톨 안나올 귀족이 뭐 얼마나 있겠어요? 안나오면 나올 때 까지 털면 그만이고요. 아무리 겸상 못할 불명예스러운 종자들이라고 욕먹더라도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이런 짭짤한 재미 아니겠어요? 혹시 세관장 님은 귀족이 무서우셔요?"
"그럴 리가 있겠냐? 왕도 쪽 귀족이 아닌 이상 귀족 같은 거 하등 무서워할 필요 없어. 아무튼 그거 이리 줘봐. 어느 집안 누구인지나 한 번 보자."
"넵! 안 그래도 저도 궁금하던 참입니다."
세관장이 세리에게서 받은 봉투를 뜯어서 안에 든 서류를 꺼냈다. 세관장과 세리는 의뢰인의 성명과 신분을 기재하는 칸을 살펴봤다.
아그루스에서는 황제가 공인한 명예로운 칭호가 있다면 그것을 문양으로 만들어서 모든 공문서의 이름 옆에 도장 찍는다. 이 문양은 황제가 공인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이 임의로 제작 및 위조할 수 없다.
황제에게 하사받은 영토를 거느리는 귀족의 이름 옆에는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 찍힌다. 기사의 이름 옆에는 계급장이 찍혀서
문양 역할을 하고, 수사관의 이름 옆에는 거미 문양이 찍히고, 치안관의 이름 옆에는 눈(目) 모양의 문양이 찍힌다. 그와 별개로 고고학회가 주관하는 능력 검정을 통과한 학계 공인 마법사의 경우에는 고리를 두른 별 문양이 더 찍힌다.
공직자들은 언제나 이름 옆에 따라붙는 이 문양만으로 그 사람을 얼마나 존경해야 할지 판단한다. 반면에 그 어떤 문양도 찍히지 않은 절대다수의 서민들은 이른바 노타이틀이라고 불리우며 무시를 당하는 것이다.
"어디 어디 볼까?"
세관장이 신분 기재란에 적힌 이름을 보자 프릴 루에리아 라는 이름 옆에 선명한 반달 문양이 찍혀 있었다. 달빛왕조를 자칭하며 밤하늘을 찬미하는 아그루스 제국에 있어서 달은 절대적인 권력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감히 달을 가문의 문양으로 지정할 수 없다. 단 세 가문의 공작가를 제외하고 말이다.
초승달 문양을 가진 상현(上弦)의 주인 '퀴넬'
그믐달 문양을 가진 하현(下弦)의 주인 '루스페라'
반달 문양을 가진 언월(偃月)의 주인 '루에리아'
황제를 보좌하여 아그루스 제국을 세운 개국공신 가문이자 왕도 루니아를 영토로 거느리는 제국의 머리. 달빛왕조의 명예와 영광을 누리는 3대 휴영(虧盈)의 공작가. 오직 그 세 가문만이 달의 문양을 가질 자격을 인정받는다.
반달 문양을
본 세관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손은 바람 앞의 앙상한 나뭇가지 마냥 떨리고 있었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책꽂이를 뒤적거려 도감을 하나 꺼냈다. 서명 도감이었다. 왕족이나 귀족의 서명은 재미삼아 따라해 보기만 해도 엄중히 처벌당할 정도로 막강한 법률적 효력을 갖기 때문에 주요 공공 기관에는 왕족, 귀족, 호족의 서명이 정리된 서명 도감이 하나씩 꽂혀있다.
세관장은 황급히 가장 최신판 도감을 펼쳐 페이지를 뒤적거렸다. 목차에는 왕도 루니아를 비롯해 11개의 번이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지만 달 문양이라면 왕도 루니아의 귀족이니 제일 앞 페이지다. 황제와 그 일가족의 서명 파트를 넘어가자 바로 휴영공들의 서명 파트가 나왔다.
"언월의 주인 루에리아 가문...."
조금 더 도감을 뒤져보자 '휴영의 공작 언월의 주인 루에리아 가문, 38대 가주의 1남 1녀 중 장녀, 프릴 루에리아' 라는 항목이 나왔다. 도감에 있는 서명을 프릴의 서류에 있는 서명과 대조해봤다. 획 하나의 차이 없이 정확하게 일치했다.
"이런 미친!!!"
세관장은 욕설 섞인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옆에 서있던 세리의 턱주가리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턱이 돌아간 세리가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한대 얻어맞아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내기에서 졌다며 그를 조롱하고 있었다.
"이 미친 새끼야!! 여기 있는 애들 다 죽이려고 작정했어?!! 상대를 봐가면서 까불어야지 휴영공을 건드려?! 이 미친 새끼! 생각 없는 빡통대가리 새끼!!"
세관장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세리에게 마구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했다. 세리는 구타 당하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들 나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세관장이 다급하게 사무실 밖으로 향하자 업무를 보고 있던 세리들이 뒤따랐다.
"너 뭐 해?! 빨리 따라 나와!"
"예? 한 시간 내로 이 장부들 싹 다 조작해서 새로 그려놓으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지금 시간이 빠듯한데..."
"지랄하지 말고 빨리 따라와! 불충죄로 모가지 잘리기 싫으면!!"
"아 네, 네!!"
사무실이 열리고 안에 있던 세관장과 세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 소란에 밖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세관장은 프릴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국에 영광!! 황제께 충성!! 언월의 주인께 경례!!!"
세관장이 목청 떨어지도록 큰 목소리로 경례하자 다른 세리들과 시민들도 언월의 주인이라는 말에 새파랗게 질려서 그 자리에 무릎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국에 영광!! 황제께 충성!! 언월의 주인께 경례!!!""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바닥에 납작 엎드러지는 바람에 세관청의 업무가 정지되었다. 우렁찬 경례 소리가 멎고나자 모두가 입을 꾹 다물어서 조용해졌다. 얼어붙을 것만 같은 분위기 속에서 프릴은 말없이 시선을 슥 돌려서는 조금 전에 자신과 내기를 했던 그 세리를 봤다. 프릴과 눈이 마주친 그 세리는 이마를 바닥에 박아놓고서 싹싹 빌기 시작했다.
"제가 어리석어 달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언월의 주인이시여 부디 달빛과 같은 자애로움을 베풀어 주시기를!!!"
그것은 내기에서 져서 하는 벌칙 같은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공포와 위기를 느껴서 자비를 구걸하는 것이었다. 프릴은 그런 세리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 마디 했다.
"안으로 안내하세요."
"네!!"
프릴은 세관장의 안내를 따라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에 자리를 잡고 앉은 프릴은 단호한 목소리로 세관장에게 말했다.
"용건은 이미 들어 알고 계시겠지만 세무조사를 의뢰하고 싶어요."
"네! 물론입니다! 어디를 조사하면 되겠습니까?"
"라쿠이르 주둔군이요."
"...예??"
프릴의 말에 세관장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주, 주둔군이요?"
"네. 최근 행보를 보아하니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아서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제국군 기사단의 군정 운영을
개인이 감찰하는 것은..... 허억?!"
프릴의 눈을 본 세관장이 말을 잇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녀가 화를 내서라던가 언짢은 기색을 보여서 그런 게 아니었다. 프릴은 자신의 감정이 조금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을 지키고 있었지만, 세관장은 프릴의 눈이 자신을 향해 똑바로 시선을 고정시킨 것만으로 숨통이 턱 막히는 압박감을 느꼈다.
"지금. 저더러 '개인' 이라는 단어를 쓰신 건가요?"
세관장이 바로 고개를 조아리며 벌벌 떨었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언월의 주인이여! 부디 달빛과 같은 자애로움을!!"
"지금 바로 주둔지에 가서 군납 수금 할당 장부, 예산 편성 기획안, 지출 기록 장부, 후원금 관리 장부... 그곳에서 펜을 굴린 모든 것을 다 압수하세요."
"알겠습니다!!!"
"물론 저도 기사단 주둔지에 따라갈 거예요."
"직접 같이 행차하신다고요? 어째서 여기서 기다리시지 않으시고?"
"설마 제가 당신들을 신뢰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당신들이 주둔군이랑 손잡고 시민들에게서 부당하게 군납금을 뜯어먹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뒷공작할 게 뻔하니까 당신들은 믿지 못하겠어요. 그러니 압수한 장부는 제가 가져가서 검토를 맡길 거예요."
"맡긴다니요?! 누구에게?"
"백화 상회의 유리아 릴리스."
"백화 상회?!!"
백화 상회라는 말에 세관장은 물론 세리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평소에 어떻게든 백화 상회를 물어뜯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세리들 입장에서는 백화 상회가 자신들의 비리를 구석구석 알게 된다는 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다.
"세무조사를 위해 압수한 장부들을 대조하고 검토하는 것은 모두 세리들의 직무입니다! 돈 좀 만졌을 뿐 장사치에 불과한 백화 상회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그럼 지금 이 시간부로 제가 권한을 부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
세관장은 아차 싶은 심경에 목이 막혀서 감히 뒷말을 꺼내지 못했다. 프릴이 그를
불렀다.
"세관장."
"네...."
"고개를 드세요."
세관장이 조아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프릴을 올려다봤다. 프릴의 두 눈이 그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혜성처럼 쏟아져서 자신을 태워버릴 것만 같은 그 눈빛을 바로 볼 수 없어 시선을 피했다.
"제 눈을 똑바로 보세요."
"......"
세관장이 프릴과 눈을 마주쳤다. 프릴은 얼어붙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자, 어서 말씀하세요. 제 앞에서 '안 된다' 고 말해보세요."
"...."
완전히 압도당한 세관장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 답변을 들은 프릴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본인들 입으로 탈탈 터는 건 세리의 특기라고 말씀하셨으니 솜씨를 보여주세요. 이곳에서 절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 지금부터라도 서두르시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친 프릴이 앞장서 걸어나가기 시작하자 세리들이 벌떡 일어나서 그 뒤를 따랐다. 세관장과 세리들을 대동한 프릴은 기사단 주둔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