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3-1. 다소 거친 방식 (12)
방과후. 체스부의 모든 멤버들이 부실에 모여 앉았다. 여전히 정리가 안 돼서 너저분한 부실을 보자 시엘 밀리우스가 궁시렁거렸다.
"나 참 게으른 지도원 같으니라고. 본인이 고문을 맡은 동아리 부실이 이렇게 지저분한데 아직도 청소를 안 해놨다니. 어제 대체 뭐 했던 거지?"
"어허 내가 어제 얼마나 바빴는데. 밤늦게까지 구르고 뛴 내 수고를 알아주진 못할망정. 아니 애초에 왜 청소가 안 된 걸 가지고 나를 타박하냐? 고문이 뭐하는 역할인지는 알아?"
"그나저나 부실을 정리할 때 찻잎과 다기도 좀 구비해놨으면 좋겠군요, 지도원 님."
"과자도 놓고! 덮고 잘 담요도 두고! 보니깐 충분히 다 가능한 예산이더만!"
"놀자판이구나. 아주 그냥 놀자판이야."
그때 부원들 틈에서 눈치를 살피던 프릴 루에리아가 자그마한 골동품 상아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쭈뼛거렸다.
"저기.... 그래도 저희 일단은 체스부니까 구색이라도 갖추려고 집에서 체스판을 가져왔는데.... 기물(棋物)이 몇 개 없는 것 같아요."
"비숍이 없군요. 과연 종교인과 유신론자를 불충자라고 부르며 배척하는 아그루스 제국 답습니다. 보드게임에서도 성직자를 배제할 줄이야."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안 한 지 오래돼서 잃어버린 거예요! 집안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아마 4층 아니면 5층 세 번째 복도에...."
"집이 5층도 있어? 와 굉장하네. 나 너희 집 화장실로 이사 가도 될까? 과자가게 얼음 창고 앞쪽 방에서 사는 것보다는 너희 집 화장실이 낫겠지?"
"밀리우스 군. 루에리야 양 저택의 화장실 임대료가 당신의 가게 임대료 보다 훨씬 비쌀 거라는 생각은 못 하시나요?"
"아아 젠장 그걸 잊고 있었네!!"
"하하 개판이네. 얘들 계속 이렇게 만담하게 둘 거야? 빨리 어떻게든 해봐 부장님."
"흠흠!!"
유리아가 어수선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멤버들의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부실 안이 조용해지자 유리아가 말을 시작했다.
"제 예상과는 다르게 거의 매일 여러분을 소집하는 것 같습니다. 바쁜 가운데 이렇게 한 분도 빠짐없이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체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형식적인 인사말이나 절차는 전부 생략하겠습니다. 그럼, 에반 플루토 씨."
"예이."
"당신이 조사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을 모두에게 알려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어떤 작전을 세우실 것인지도 빠짐없이 면밀하게 말씀해주세요."
"맡겨달라고."
에반이 새 보드마카를 꺼내서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잘 나오나 시험 삼아 화이트보드를 찍찍 그어보자 이제 처음으로 뚜껑을 딴 새 마카답게 진한 잉크 자국이 생겼다. 에반은 색상별 마카를 도구함에다가 채워놓았다.
"훌륭하군요. 사비를 터신 건가요?"
"그럴 리 있겠어? 나중에 체스부 예산으로 청구할 거야."
"그럼 그렇겠죠. 아무튼 설명을 시작해주세요."
유리아가 지시하자 에반은 씨익 웃으며 멤버들의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쳐다봤다.
"자, 일단 복습하는 차원에서 우리가 왜 이렇게 체스부라는 명목상 동아리를 만들고 남들 눈을 피해 모이는지 다시 곱씹어 보자."
"유리아 양의 뎀피돈에 대한 정보를 유출한 학원 내부자를 색출. 더 나아가서 범죄 세력과 결탁하여 마법 학문을 오용하는 교직원을 축출."
에반이 운을 떼자 아라한이 받았다. 사이에 낀 유리아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색출이건, 축출이건 어디까지나 수단과 과정에 불과할 뿐, 제가 체스부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 그 자체는 아닙니다."
"으음? 정말인가요?"
아라한이 눈을 흘겨뜨며 유리아를 쳐다봤다.
"그럼 유리아 양의 목적은 대체 무엇인가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정인지라 지금 여기서 대답해 드리기에는 시기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감정 운운하면서 본인의 목적도 떳떳하게 말해주지 못하는데, 우리에게는 위험을 무릅쓰고 협력해주기를 요청하시는 것인지요?”
“그럼 아라한 양, 그러는 당신은 왜 제게 협력해주시기로 한 건지, 체스부에 들어온 목적을 물어보면 대답해주실 의향이 있습니까?”
“저의 목적이요?”
“능청 떨지 마세요. 설마 학원 안의 누군가의 표적이 된 저를 구하기 위해서라던가, 학원의 비리 세력을 타파하여 안전하고 깨끗한 루나칼립스를 가꿔가기 위해서 체스부에 들어왔다고 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곤룡회의 수장님.”
“으흠. 저 역시 지금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네요. 누군가가 앞장서서 솔직해지기 전까지는 저도 계속 부끄럼을 탈 거 같아요.”
“피차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나중에 숨김 없이 말씀 드릴 테니 지금은 일단 회의 안건에 집중하죠."
"좋네요. 대답을 피하고 말을 돌리는 모습은 언제 봐도 좋아요."
아라한이 재미 있다는 표정으로 유리아를 흘겨보며 부채를 펼쳤다. 에반은 본래 회의 주제로 돌아와서 말했다.
"어어… 이렇게 기싸움 하라고 꺼낸 얘기가 아닌데. 아무튼! 궁극적인 목적이건, 개인적인 목적이건 그런 건 너희들끼리 알아서 찾아야 할 부분이고, 한의 대답한대로 일단은 유리아의 비밀을 이리들에게 팔아 넘긴 윗대가리를 찾아서 잘라내는 게 체스부의 1차 목적이지.”
“찾는다고 해도 막연한 걸요. 선생님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저희에게 주어진 자료는 루밀리 양이 알려준 몇 가지 정보와 갈퀴날들이라는 이리 조직에 대한 게 전부인데요.”
“그거면 충분해.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잖아?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알고 있으니 반은 왔다고, 반은.”
“또 때리면 반응이 온다는 얘기를 하려는 거야? 그러니까 어디를 때려야 할지 감이 안 온다니깐. 우선은 이 갈퀴날들을 때려야 할 텐데 갈퀴날들이 있을만한 곳이 어딘지 알아?”
“있을만한 곳? 걔들이 보란 듯이 티를 내면서 모여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예 ‘어서오세요, 갈퀴날들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라고 현판까지 써다 걸어놨을지 모르니 유심히 봐야겠다 그치?”
“으으음…”
“상식적으로 추측을 하는 건 제일 마지막 단계에 와서 해야 해.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떠오를만한 장소라면 이리들이 숨을 곳으로 선택하지 않겠지.”
“그렇네.”
시엘이 복잡하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럼 이제 어떡해? 때린다니 압박한다니 댁만 이해하는 말로 설명 들어봤자 더 감이 안 와."
"방사(放射)형 통증이라고 들어봤냐?"
"뭐라고?"
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유리아가 대신 대답했다.
"실제로 통증을 유발하는 원발(原發)부위와는 멀리 떨어진 부위에서 통증을 호소하는 증상 말씀이십니까?"
"맞아. 가령 허리에 문제가 있는데 무릎이 아프다거나, 심장에 이상이 있는데 손이 저리는 그런 거. 역시 유리아가 두통이랑 약을 달고 살아서 그런지 잘 아네."
"..."
"그래서 그 방사형 통증인지 뭔지하는 얘기가 왜 나와?"
"왜긴? 한대 때려줘야 반응을 보일 거라고 했잖아? 근데 이런 일을 하다 보면 꼭 예상치도 못한 엉뚱한 곳에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마치 방사형 통증처럼 말이지."
에반은 화이트보드에 마카로 '유리아', '루나칼립스 학원', '갈퀴날들' 이라고 적었다. 그리고는 마카 뚜껑으로 화이트보드를 두드려 딱딱 소리를 내며 말했다.
"이 셋. 그간 우리가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전부 배제해 놓고 그냥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보자고. 그러면 이 셋을 한 번에 엮는 교집합이 될만한 게 뭐가 있다고 생각해?"
"없습니다. 유리아 양이 루나칼립스 학원의 학생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습니다. 더욱이 셋을 한번에 엮을 만한 공통분모는 찾아볼 수 없죠."
"그렇지. 평범하게 생각하면 그 말이 맞아. 그래. 평범하게 생각하면. 하지만 학원에 쳐들어왔던 갈퀴날들을 좀 때려줬더니 뭐가 나왔지?"
에반은 그렇게 말하며 화이트보드에 '뎀피돈' 이라고 적었다.
"자, 이제 '유리아', '루나칼립스 학원', '갈퀴날들' 이 셋을 하나로 묶는 교집합이 보이게 됐지?"
에반은 '뎀피돈' 에 동그라미를 친 뒤 '??' 표시와 연결시켰다.
"아무튼 이 뎀피돈 유리아 리미티드 에디션을 노리는 누군가가 있고, 그 누군가랑 짝짜꿍하는 교직원이 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때려서 알아낸 거였지. 이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해서 나하고 한이 또 추가로 몇 군데를 때리고 왔어. 한?"
에반이 부르자 아라한은 기다렸다는듯이 무언가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낯익은 기계 장치였다. 장치를 알아본 유리아와 프릴이 반응을 보였다.
"꿈꿈 스퀘어?"
에반은 화이트보드에 'V 하우스' 라고 적었다. 그러자 프릴이 경악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V 하우스가 엮여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설마... 꿈꿈 스퀘어로 이상한 짓을?!"
"의심을 안 한 게 오히려 더 이상한데?"
"그치만! V 하우스의 연구진은 모두 학계의 정식 일원으로 이름이 알려진 학자와 마법사들이였어요. 이리들과 가담하고 있을 거라고는..."
"진정해. 연구진이 직접 관여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자기의 업적이 어디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그런 똑똑한 멍청이들은 의외로 널렸다고."
"그래서, 에반 플루토 씨, V 하우스의 관리자들을 부른 뒤 그들을 미행 했다고 하셨죠? 무엇을 발견하셨습니까?"
"미행 끝에 도착한 곳은 14군 외곽에 숨어있는 외딴 폐공장이었어.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내가 무엇을 봤는지 알아? 갈퀴날들 밑에서 하청 받는 시궁쥐 패거리였어"
그 말에 평소 꿈꿈 스퀘어를 애용하던 프릴의 표정이 당혹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우리 기숙사 사생들 뇌파가 왜 V 하우스가 아니라 시궁쥐들 소굴로 샌 걸까? 궁금해서 그 시궁쥐들에게 직접 물어봤지."
"직접 물어봤다고? 걔들이 곱게 말해줄 리가 없잖아?"
"아니야. 싹싹하게 차까지 한잔 타오면서 잘 설명해주더라고. 미리 말해두는 건데 난 아무도 안 죽였다?"
에반의 말을 들은 멤버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는 가운데, 현장에 있던 아라한만이 부채를 펼쳐서 자신의 표정을 숨겼다.
"여튼 걔들 말 들어보니까 자신들은 센서에 기록된 뇌파를 정리해서 백업한 다음 센서를 포맷하는 역할을 맡고 있더라고. 이런 작업을 얘들 용어로는 손질이라고 부르더라."
"그럼 그렇게 손질한 센서 속 자료를 누구에게로 넘깁니까? 그 사람이 누군지만 알면 될까요?"
"수틀리면 손절치고 내빼버리는 말단 시궁쥐 하청들이 오너를 직접 대면해서 물건을 넘길 리가 없지. 갈퀴날들이 암만 빈사 상태에서 기사회생을 노리는 상태라 해도 그롬을 주름잡던 네임밸류가 있는데 그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아. 당연히 원청의 원청을 계속 건너 건너서 오너에 도달하는 구조가 일반적이다. 그래야 어디 잘못돼도 꼬리 자르고 오너를 런하게 할 수 있으니까."
"쳇! 잔머리 잘 돌아가는 녀석들이 왜 범죄 안 저지르고 살 생각은 안 할까?"
"오너와는 아직 근접하지 못했겠지만, 일단 폐공장에서 손질한 뇌파 자료는 갈퀴날들의 또 다른 하청이자 이 폐공장 시궁쥐들의 원청인 맥스패티로 향한다."
에반이 화이트보드에 '맥스패티' 라는 글자를 추가했다.
"맥스패티? 뭐야 그건 또? 무슨 싸구려 햄버거 체인점 같은 이름이잖아."
"맞아. 싸구려 햄버거 체인점이야."
"맞다고? 아니, 이게 왜 진짜 맞는데?!"
시엘 뿐만이 아니라 유리아와 프릴도 의아하다는 눈치였다.
"햄버거 가게에서 마법사 학생들의 뇌파를 왜 필요로 하죠?"
"우리도 사실 체스하고는 별 상관 없듯이, 얘들도 사실 햄버거 따윈 아무래도 좋을 놈들이지. 실제 돈벌이 수단은 따로 있었어."
"맥스패티라는 곳도 결국은 거쳐가는 하청일 뿐이라는 뜻이군요. 그럼 그 실제 돈벌이 수단은?"
"인육이다."
"인육이라고요?!"
"라쿠이르 옆에 우므나티아라고 사람이 사람 같지 않은 미친 동네 있잖아? 최근에 북부 지역에 또라이 치안관 하나 부임해 오면서 우므나티아도 압박을 꽤나 쎄게 받았는데, 그때부터 맥스패티 라쿠이르 직영점이 우므나티아의 인육 유통 땅굴망 겸 자금 세탁소 역할을 하고 있었어. 덧붙여서 이 맥스패티가 갈퀴날들 밑에 딸린 하청들을 관리하는 본부 같은 곳이라 할 수 있지."
"아직 갈길이 먼 거 같은데 벌써부터 파고들수록 가관이군요."
유리아가 지끈거리며 아파 오는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에반은 '맥스패티' 아래에 '인육' 이라고 쓰고 '꿈꿈 스퀘어' 와 '인육' 을 '맥스패티' 에 연결시켜 묶어놨다.
"맥스패티의 역할은 하나 더 있어. 한이랑 내가 그 망할 햄버거 가게랑 인육 가공 공장을 때렸고, 털 수 있을 만큼 털어서 알아낸 사실이 있어."
에반은 '맥스패티' 밑의 '꿈꿈 스퀘어' 와 '인육' 옆자리에 '백설탕' 이라는 글자를 썼다.
"설탕?"
"한이랑 내가 신사적인 방법으로 자백을 유도해서 백설탕 만드는 공장을 몇 군데 알아냈지."
"신사적...?"
"그러고보니 루밀리 양의 수첩에서 다진 고기랑 설탕의 거래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내용을 봤었는데..."
프릴의 말에 유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미리 준비한 서류를 한 장 꺼냈다.
"저도 신경 쓰여서 상회 쪽 자료들을 살펴봤습니다만, 라쿠이르 시장의 근황을 어느 각도에서 분석해봐도 설탕과 관련된 이변은 보고된 바가 없습니다."
"그 설탕이 아니야."
"예...?"
에반은 약종이로 감싼 하얗고 반투명한 결정을 체스부 부원들 앞에 꺼내보였다. 그다지 먹어도 괜찮아 보이는 생김새가 아니였다. 부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탕이 아닌 건 확실했다.
"저탄소 고분자 수용성 마력용해제. 이상적이고도 안정적인 성능 덕분에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은 적이 없지만, 마력을 가진 특수물질이라 취급 과정에서 세금이 빡세게 붙는다. 당연히 무허가로 생산하는 건 억 단위로 탈세하겠다는 소리지. 얘를 일컫는 은어가 바로 백설탕이다."
"에반 플루토 씨, 당신 말대로 계속해서 연관성 없어보이는 것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군요. 인육과 설탕이 학생들의 뇌파와 대체 무슨 공통분모로 엮인다는 건지..."
유리아와 프릴, 아라한 세 사람이 각자 명석한 두뇌를 굴려봤지만 애초에 지금 단계에서 맞춰질 수가 없는 퍼즐이었다. 에반은 그 광경이 나름 즐겁다는듯이 낄낄거리고는 화이트보드에 마카를 가져다댔다.
"여기 이 인육하고 백설탕이 맥스패티의 자금줄, 즉 혈관이라고 할 수 있지. 인육은 이미 나하고 한이 때려서 끊어놨으니 이제 백설탕도 끊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조급해지겠죠. 예정 보다 더 빠르게, 평소 보다 더 무모하게 행동해서 눈에 띄는 돌출 행동이 관찰될 게 분명합니다."
"한의 말이 맞아. 혈액순환이 제대로 안 되면 분명 안 하던 짓도 하기 시작할 거야. 그런데 말이야, 너희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 혈관이 한 줄 더 놓여있었어."
에반이 화이트보드에 새로 적은 단어는 '주둔군' 이었다.
"주둔군?!!"
"인육을 유통하는 이리들이 기사단의 비호 아래 있다는 겁니까? 점입가경이로군요."
유리아는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지 다른 멤버들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에반은 화이트보드에 쪽지 한 장을 붙여서 모두가 볼 수 있게 했다. V 하우스 관리자들의 차를 뒤져서 찾았던 쪽지였다.
-------------
노루마 현황 : 민찌
25K 갈
25K 갈
20K 통 -> 45K 통
20K 통 -> 60K 갈
25K 갈 -> 60K 통
시발 장난 치나? 우리더러 죽으라는 거야?
통으로 60은 절대 못 쳐. 설탕으로 메꾸라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시발 그냥 날 갈아 잡수시던가
-------------
체스부 멤버들은 쪽지를 유심히 읽어봤지만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쪽지를 처음 보는 게 아닌 아라한은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정보들이 이제서야 조금씩 정리되어 맞물려갔다. 유리아는 쪽지에서 뭔가 짚이는 점이 있는지 표정이 더욱 굳었다. 에반은 유리아를 바라보며 호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 역시 체스부 부장님이야. 체스부가 결성되기도 이전에 벌써 한대 제대로 때려놓았단 말이지?"
"....."
"그게 무슨 말이야? 유리아가 뭘 때렸는데?"
"선생님, 이 쪽지가 무슨 뜻인지 알려주시겠어요?"
"노루마라는 건 정해진 할당량이다. 민찌는 다진 고기를 말하는데 인육이지. 즉, 이 쪽지는 이번에 갈퀴날들이 오더 내린 인육 할당량에 관한 쪽지야."
"갈은 뭐고, 통은 뭔가요?"
아라한은 에반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동방인이잖아? 미꾸라지탕 안 먹어 봤어? 뭐, 됐다.'
"갈은 갈았다는 뜻이고, 통은 건더기가 통째로 있다는 뜻이겠죠."
"오오, 맞았어. 한의 말대로야. 근데 얘들이 인육을 갈았건 통썰었건 우리 알 바는 아니지. 이 쪽지에서 정말 중요한 내용은 따로 있어."
20K 통 -> 45K 통
20K 통 -> 60K 갈
25K 갈 -> 60K 통
"할당량이 갑자기 2,3배가 올랐네요. 그래서 우리더러 죽으란 소리냐고 원성이 나오고 있고요."
"백화 상회 회장님의 따님 되시는 분이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셨어. 학원 총기 난사 사건 때 기사단의 대처가 실망스럽다고 물자 후원금을 한 번에 4분의 1까지 확 깎아쳐버렸다나. 그런데 말이야, 저 쪽지의 다진 고기 할당량이 갑자기 천장 뚫고 뛰어오른 타이밍이랑 기사단 후원금이 나가리 된 타이밍이 맞아 떨어지는데 이게 우연일까?"
'일이 늘면 돈도 더 주던가 해야지. 돈은 그대로인데 일은 계속 느니까 수지가 안 맞지.'
'이게 다 게을러빠진 기사단 놈들 때문이야. 밥버러지 새끼들.'
"아아...!"
"그 뒤는 간단해. 기사단은 삭감당한 후원금의 공백을 메꿔줄 다른 상회들을 유입시키고 뒤를 봐줬지. 근데 말이야. 궁금하지 않아? 할 것도 없고, 돈 나갈 일도 없는 이런 조용한 동네의 주둔군들이 무슨 놈의 후원금이 그렇게 필요한 걸까? 오죽 한가한 나머지 부단장이 실질적인 지휘를 맡고 있고, 단장은 외부로 원정 나가 있어서 얼굴도 못 볼 지경인데 이런 놈들 예산이 영지의 세금만으로는 모자란 이유가 뭘까?"
"전 그들의 응접실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온통 금칠을 해놓았더군요. 분명 뒷주머니로 돈이 흘러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들 뒷주머니에서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어디서 굴러먹다 온 이리들이랑 공생관계를 구축했지. 얘들이 갈퀴날들 돈 대주고 뒤 봐주고 대신 뭘 챙겼는지는 열불 뻗치니까 나중에 생각하자고."
유리아의 머릿속에 그때 보았던 부단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절로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뭐 일단 이 정도면 충분히 누구 목을 졸라야 하는지는 드러났어. 이제 백설탕도 끊어버리고, 기사단에까지 압박을 넣어주면, 우리가 찾아야 할 대상은 우리 발로 찾아다니지 않아도 알아서 뛰쳐나올 거야."
설명을 마친 에반의 시선은 프릴을 향해 있었다. 프릴은 체스말을 꽉 쥔 채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인물들이 체스부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모였으니 역할 분담은 아주 중요하지. 내가 봤을 때 얘들을 압박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프릴 너야."
에반은 프릴과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프릴의 눈은 잔잔한 호수처럼 유하고 부드럽고 또 맑아서 어린아이의 눈 같았지만, 그 안에는 별이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아이 같은 순수함을 약함이라고 착각하는 바람에 함부로 그 별을 깨우는 순간, 감당 못할 만큼 폭발적인 개벽을 선사할 그런 힘이 가라앉아 있는 눈이었다.
"프릴 루에리아."
"네. 선생님."
에반은 화이트보드에 적힌 '주둔군' 과 '백설탕' 두 글자를 붉은 마카로 쫙쫙 그어버리며 말했다.
"요놈하고 요놈. 조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