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3-1. 다소 거친 방식 (4)
중앙교사 4층의 구석에 숨어있는 체스부 부실. 수요일은 아니지만 유리아의 부름을 받은 체스부 멤버들이 모두 모였다. 부실은 방치된 기간이 길었던지라 정리가 잘 안 되어 있었고 자재들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여덟명 정도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과 화이트보드, 먼지 쌓인 책꽃이가 전부였다.
"여러분 아무래도 우리 부장님이 부동산 사기를 당했나 봅니다."
에반 플루토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부실을 둘러보며 그렇게 빈정거렸다. 다른 멤버들은 의자를 꺼내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한 사람씩 앉을 때마다 낡은 의자다리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시간을 내서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시다시피 이곳이 앞으로 저희가 의견을 나누고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모일 부실입니다. 관리하는 사람이 오랫동안 없었던지라 다소 어수선하고 물품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불편한 점이 있겠지만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최대한 보는 눈이 없는 장소를 찾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이 정도면 일부러 찾으라 해도 못 찾아오겠는데."
"앞으로 부실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품이 있으면 부장인 제게 건의해주세요. 예산 지출 및 잔액은 매주 수요일 정규 모임 때 여러분께 공개해서 투명한 재정운영을 유지하겠습니다."
"뭐 지출 나갈만한 구석이 있나? 다음주부턴 모일 때 여기 테이블에다 과자를 수북히 쌓아놓자고."
"과자가 아니라 먼지가 수북히 쌓여있잖아. 의자도 삐걱삐걱 아주 비명을 질러대고. 이거 닦아서 쓸만한 수준이 아니니 싹 다 교체해야해. 유리아, 뭐가 필요한지는 알지?"
"동아리연합회에 비품 교체를 신청해서 빠른 시일내로 처리하겠습니다."
"좋아. 왠지 자제관리부에서 여기 4층까지 낑낑대고 비품 끌고오는 것도 내몫일 거 같아 불안한데... 뭐 어차피 수고할 거라면 이런 고물들 닦느라 헛수고 하느니 의미 있는 수고를 하는 게 낫지."
에반은 테이블과 의자 외에도 교체가 필요한 비품이 없나 둘러보았다. 제 구실을 못할 게 분명해서 당장 갖다 버려야하는 고물과 잡동사니들이 한가득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씀드리는 거지만, 체스부의 실질적 활동과 관련된 문서나 자료들은 절대로 부실에 남겨서는 안 됩니다."
유리아가 기밀 단속을 위해 부실은 항상 비워두도록 재차 강조했다.
"그러면 부실과 관련된 공지사항은 이 정도로 해두도록 하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유리아가 책꽂이 구석 어귀에 있는 검정색 마카를 꺼내서 화이트보드에 글씨를 쓰려고 했다. 그러나 잉크가 바짝 말라버려서 글씨가 써지지 않았다. 뚜껑을 덮어서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린 뒤 파란색 마카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상태는 매한가지였다. 책꽂이에 있는 마카들을 다 가져왔으나 잉크가 제대로 나오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유리아는 책꽂이에 방치되어 있던 필기구 보관함을 아예 뜯어내서 쓰레기통에 쳐박아버렸다.
"어쩔 수 없이 그냥 구두로 진행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그럼 루에리아 양."
"네."
"아이텔소드 양에게서 들었던 것을 저희에게도 자세히 설명해주겠습니까?"
"저...."
프릴은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다른 멤버들을 바라봤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천히 말씀해주세요."
"그게 아니라.... 루밀리 양은 절대 외부 발설 금지라고 몇 번이고 저에게 당부했는데 여기서 말하면 루밀리 양을 배신하는 게 아닐까요?"
진심으로 걱정하는 프릴이였다. 유리아는 그런 프릴을 다독였다.
"저희끼리는 외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 부실 밖으로만 새어나가지 않게 한다면 외부 발설이 아니에요."
"그, 그렇죠? 그런 거죠?"
프릴은 품에서 작은 스프링공책 한 권을 꺼냈다. 그 공책에는 루밀리에게 피쉬파이를 주고 구입한 정보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프릴은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고는 말을 꺼냈다.
"우선 이미 알고 계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유리아 양의 뎀피돈을 노리고 학원에 쳐들어온 이리들은 '갈퀴날들' 이라는 조직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하네요. 이들은 표면상으로는 합법적인 사업 체인을 운영하지만, 실상은 시궁쥐 등급의 하급 범죄집단을 광범위하게 알선하여 납치, 청부살인, 밀수 등 위법한 일을 처리하는 집단이에요."
"시궁쥐야 원래부터 어느 동네 밑바닥을 가도 있는 애들이니 넘어가고, 왜 갈퀴날들이 직접 이런 곳에서 설치고 다니는지는 물어봤어? 걔들 원래 서식지는 여기가 아닌데."
에반에게 질문을 받은 프릴이 공책을 앞으로 막 넘기고는 필기가 빼곡한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낱장을 훑으며 대답했다.
"갈퀴날들의 본거지는 그롬이지만, 몇 년 전 그롬의 기사단과 수사당국이 연합하여 펼친 대대적인 이리 토벌 작전의 여파로 중심적인 본부를 해체하고, 지부를 여러 지역으로 분산시킨 상태라고 해요."
"궁지에 몰린 조직들이 흔히 쓰는 방식이야. 그런 생존법이 원활하게 먹히려면 일단 본부를 해체하더라도 대가리에 해당하는 그룹 세력이 살아남는다는 게 전제되어야 해. 갈퀴날들의 경우에는 어떻게 됐지?"
"주요 사업의 거래처가 그롬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갈퀴날들의 핵심인물들은 본부가 해체된 뒤로도 지부에 합류하지 않고 그롬에 잔류했어요."
"하지만 그 결과는?"
"어느 시점부터 잔류 세력의 활동에 대한 보고가 끊어졌다고 하네요. 자세한 내막은 루밀리 양도 모르는 거 같아요."
"몸 사리면서 간 보는 건가?"
"아니, 죽은 거야. 킬링 이터한테."
시엘의 질문에 에반이 대신 답변했다. 프릴은 공책을 여기저기 뒤져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킬링 이터에게 죽었다는 이야기는 루밀리 양에게서도 듣지 못했어요. 3년 전 킬링 이터가 잠적하기 전까지 주로 출몰하던 곳이 왕도 주변과 그롬이라고는 들었지만..."
"카그루 이식 수술이라는 거 말이야. 흉터가 남지?"
"네. 루밀리 양의 말에 따르면 카그루를 이식 받은 사람은 뒷목 아랫쪽 어깨보다 낮은 위치에 역십자 모양의 흉터가 있다고 해요. 지우거나 문신으로 덮어봤자 카그루를 발동시키면 카그루가 살갗을 뚫고 나오기 때문에 흉터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네요."
"그럼 그 흉터가 있는 놈들이 그롬 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번경(藩境)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을까? 그것도 다른 동네도 아니고 제국의 코어라고 불리는 곳 중 하나인 그롬의 검문소를 말이야. 정예 기사단은 물론이고 마법사까지 동원해서 보초를 서는데 담 넘어가는 건 말이 안 돼. 평소에는 연줄이 닿아있는 검문관한테 뇌물 좀 찔러주거나 약점을 잡는 식으로 통과했겠지만, 그때는 한창 이리 토벌 작전 때문에 분위기 살벌해서 그런 수작질도 못부렸겠지."
"그러면 그롬 내의 잔류 세력은?"
"그래. 비즈니스 때문에 남은 게 아니야. 카그루 때문에 못 나간 거지. 카그루를 포식하는 킬링 이터 입장에서는 완전 가두리 양식장 아니겠어?"
"그런 거였군요. 이 이야기를 루밀리 양이 들었다면 표정이 어떻게 변했을까요?"
"글쎄. 그 녀석 엄마가 명색이 수사관인데 이런 가능성을 배제했을 것 같지는 않아.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는 가설 단계니까 말하지 않았던 거라 봐. 사실 나도 직접 봐서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앞뒤가 맞는 거일 뿐이지. 그러니까 적당히 걸러 들으라고."
아라한은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생각의 흐름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정리된 것을 말했다.
"요컨대 '갈퀴날들' 은 본부가 해체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본부의 핵심 전력들 중 대다수는 그롬에 고립 되었다가 킬링 이터에게 잡아먹혀 사실상 궤멸. 이렇게 큰 타격을 입은 상태인데 주요 활동구역도 아닌 이곳에서 물의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내막에는 학원 측에 내통하는 자가 있다. 이 말입니까?"
"딱 봐도 여기 라쿠이르에 지부를 새로 개척하려고 스폰서를 물색하는 중이라 보는 게 문맥이 매끄럽잖아? 시나리오가 이렇게 흐르면 좀만 코를 벌름거려도 무언가 냄새가 나는 게 있을 거라고."
"냄새를 쫒는 건 좋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해할 만한 수상한 방식은 부탁이니 하지 말아주세요."
유리아는 에반의 실력을 어느 정도는 믿고 있었지만, 그 실력을 발휘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불안함을 감추질 못했다. 모로 가도 왕도에만 가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한 가지 솔루션을 위해 열 가지 트러블을 야기하지는 않을까 벌써부터 우려됐다.
"그때 뎀피돈을 탈취한 이리들이 갈퀴날들 소속이라고 해서 갈퀴날들이 뎀피돈의 수요자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겠죠?"
"당연하지. 갈퀴날들은 중간 유통에 불과할 가능성이 더 크지. 누구를 연결해주는 중간다리 역할을 하는지도 또 파고 들어야 한다고."
"한 명만 찾아내서 될 일이 아니였군요."
"이런 놈들은 사람이 아니야. 종양이야. 그것도 아주 악성인 종양이지. 이런 종양들의 특징이 뭔줄 알아? 문제 일으키는 부분만 똑 떼버리는 게 불가능해. 더 퍼지지 못하게 다 파내버리고 들어내버려야 해."
"제가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생각 이상으로 판이 커지는군요."
"겁나?"
"긴장이 전혀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죠."
유리아가 솔직하게 말했다. 동아리까지 만들어가며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판을 벌인 것은 자신인데 벌써부터 긴장감이 느껴지면 어떡하자는 거야? 그녀는 속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애써 평정심을 지켰다. 에반은 그런 유리아의 심정을 지지했다.
"옳은 일은 혼자선 못한다. 이렇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모은 걸 보면 너는 충분히 안목이 있고, 판단 능력이 있어. 그러니 긴장될 때면 억지로 감추지 말고 그냥 긴장해. 대신 너 자신이나 우리를 못 믿어서 긴장하지만 말아달라고."
"에반 플루토 씨...."
자신의 마음을 슬쩍 읽기라도 한 걸까? 유리아는 내심 감탄하는 한편 방금 전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불안함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방금은 조금 지도원 같았습니다."
"무슨 소리야? 난 항상 지도원 같다고."
에반의 발언에 멤버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웃었다. 에반이 빈정 상해서 팔짱을 끼며 불만을 표시했다.
"이거 왜들 이래? 솔직히 나만큼 니들 챙겨주는 지도원이 어딨다고?"
"네, 네. 맞아요. 지금까지 이런 지도원은 없었죠."
"그거 칭찬 아닌 거 같은데?"
유리아는 잠시 다른 방향으로 뜬 이야기의 흐름과 분위기를 정리했다.
"프릴 양, 그 밖에 더 들으신 건 없나요?"
"네. 선생님이 루밀리 양에게 해보라고 했던 질문들은 다 해봤어요. 우선 최근 들어 라쿠이르 내에서 이리 조직끼리의 유혈 패싸움이 발생한 사례가 있는지 물어봤는데 보고된 바는 없다고 대답했어요."
"외부 세력이 자리 깔고 앉으려고 들어서는데도 텃세가 없다라."
"중요한 내용인가요?"
"전달하는 바가 많지. 우선 갈퀴날들이 벌이고 있는 일이 기존 라쿠이르의 이리들과 업종 중복을 피해갔다는 거. 이리라는 것들은 상도덕에 어마무시하게 예민하게 굴거든. 그리고 갈퀴날들이 라쿠이르 이리들의 업계 분위기에 맞춰주기로 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 점이 특히나 중요한 게, 다 같은 범죄자라 해도 지역마다 이리들의 성향 차이는 뚜렷하다고."
"저 인간은 어떻게 저렇게 자세하게 꿰고 있는 거야? 혹시 예전에 어딘가의 조직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활동했던 몸이라던가 그런 거 아냐?"
"한 자리 차지하긴 뭘 차지해. 그랬으면 이런 곳까지 와서 쥐 땀구멍만 한 방에서 웅크리고 자겠어?"
에반이 툴툴거렸다. 유리아가 프릴에게 마저 이야기하라고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또 최근 들어 시장에서 부쩍 거래량이 늘어난 물건이 없냐고 물어봤어요.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알려달라고 했는데 수사 당국에서도 그런 건 조사하지 않았다네요."
"흐음. 이런 것까지 다 알려주길 바란 건 너무 욕심이였나?"
"아, 그러고 보니 루밀리 양의 수첩에서 얼핏 봤던 거 같아요. 다진고기랑 설탕의 유통량이 부쩍 늘었다고 하던데."
"설탕?"
"네. 워낙 사소한 물건이라 지금 저희가 조사하고 있는 것과는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혹시나 싶어서 말씀 드릴께요."
"설탕... 설탕이라..."
에반이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유리아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라쿠이르에 설탕 유통이 늘어날 일이 뭐가 있나 의문스러운 얼굴로 계산을 돌려봤다.
"거래량이 늘어난 물건은 왜 궁금하신 거였죠?"
"가끔 그게 참고 자료가 되기도 해. 이리라는 놈들도 결국은 돈 벌 속셈인 거잖아? 하지 말라는 짓까지 하면서 돈 벌려는 놈들이지. 그러니까 어느 조직이건 돈벌이를 위한 '아이템'이 있어. 약이건, 무기건, 사람이건 주력으로 미는 아이템 하나 이상은 있다고."
"근데 그런 걸 시장에서 거래하진 않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시장하고 암시장이라는 건 가끔씩 예상치 못한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법이야. 뭐라 말로 설명하기 좀 복잡해. 그냥 최대한 간단히 말하자면, 지하세계 경제라고 해서 양지의 경제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건 아니라고 해둘게."
"그런 거라면 수사 당국이 아니라 저에게 물어보시는 게 좋지 않았나요? 저라면 백화 상회의 정보력을 풀어서 시장 동향을 꼼꼼하게 조사해 드렸을 텐데요."
"그렇게 걱정 안 해도 필요할 땐 철저하게 이것저것 시켜먹어 줄 테니까 안심하라고."
에반이 데헷하는 표정으로 엄지를 치켜 세워올리며 유리아를 봤지만 유리아는 반응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어보라고 한 게 뭐였었죠? 아 맞다. 라쿠이르 번에 이주하여 들어온 사람 중 마법사는 얼마나 있었는지 물어보라고 하셨죠?"
"마법사? 그건 왜 물어보는 거죠?"
"설명은 나중으로 해두고 일단 듣자. 얼마나 들어왔다더나?"
"마법학원에 근무하는 교사나 교수를 제외하면 이주민 중에서 마법사는 네 명이라고 하네요."
"오오 좋아. 그래서 그 놈들 이름이 어떻게 되는데?"
"저 그게.... 개인정보와 신원은 함부러 알려줘선 안 된다고 해서..."
"거 참!! 간지럽히기는! 시엘이 파이에 정성을 좀 더 들였다면 알려줬을지도 모른다."
"뭔 소리야! 본인도 맛있다고 하나 다 먹어놓고선!!"
"두 분 정숙하세요. 에반 플루토 씨, 라쿠이르에 들어온 마법사에 대한 건 무엇 때문에 궁금해 하신 겁니까?"
"....."
에반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러시죠? 대답하기 어렵다는 겁니까?"
"네가 정숙하라며."
유리아가 제발 유치한 장난 좀 하지 말라는 시선을 보내자 에반은 미안하니까 진정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러니까 말이지, 너희 같은 학생들이 보기에는 마법사란 궤도에 오른 학자 내지는 정점에 선 현자처럼 보이겠지. 그런데 말이야, 실상은 이리 조직의 무력에 가장 핵심이 되는 것도 마법사고, 이리 조직의 가장 큰손 후원자 역시 마법사다. 말했듯이 법, 질서, 윤리 이런 거 일일이 다 지키다가는 자신의 변태스러운 꿈을 이루지 못하니까."
에반은 의자 등받이에 껄렁한 자세로 기대앉으며 말했다. 에반은 체격이 큰 편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낡은 의자는 그의 체중을 감당하기 벅차다는 듯이 삐그덕하고 비명을 질렀다. 에반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여튼 성과가 쬐~끔은 애매해. 맥락은 잡혔지만 결정적인 타겟을 추려내지는 못했으니까. 그래도 파이 하나 뇌물로 써서 얻어낸 것 치고는 준수한 정보량이겠지. 프릴, 시엘. 수고했다."
"아니에요, 선생님. 다음에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부탁하셔도 돼요."
"알면 잘하라고. 이쪽은 한번 얻어먹고, 여러번 시험삼아 만드느라 재료비가 더 나와서 손해란 말이야."
수고했다 라는 네 글자 만으로 극명한 성격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떤 식으로 조사를 하면 좋을까요?"
"내가 선호하는 방식대로 해도 될까?"
"법에 어긋나는 수단만 쓰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됩니다."
"아, 그러면 안 되겠다."
아무렇지도 않게 위험한 소리를 하는 에반을 멤버들이 일제히 쳐다봤다.
"에반 플루토 씨, 당신은 앞으로 행동에 옮기기 전에는 꼭 모두와 의논하셔야 합니다."
"어어? 나만?"
"나머지분들도 마찬가지지만 에반 플루토 씨, 당신은 특히요. 꼭요. 무조건요."
유리아는 에반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뜨고 강조했다.
"아 알았다고. 수사 당국 정보부를 털면 금방 끝나는데 먼길 돌아가야 한다니."
지금 이 인간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제국 치안관 직속의 수사 당국을 턴다니 그러다 목이 잘려도 간단하게 다시 붙일 수 있어서 저런 말이 나오는 건가?
"터무니없는 행동은 제발 삼가주세요. 에반 플루토 씨, 당신은 믿는 구석이 있을지 모르지만 저희가 피해를 입게 될 수 있다고요."
"그래 그래. 위험한 짓은 안 할게."
에반이 말했지만 멤버들이 보내는 시선은 영 신뢰와는 거리가 멀었다. 괜히 또 서글퍼지는 에반이였다.
"아무튼 우리 체스부 부장님께서 위험한 방식은 싫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다소 거친 방식으로 타협을 보는 수밖에 없겠네."
"다소 거친 방식이요?"
"그래. 혼자서는 심심할 테니... 누가 나 좀 도와줘야겠다. 다소 거친 방식에 어울리는 터프한 녀석으로다가."
"쳇. 또 내가 나서야 하나?"
"아니. 넌 빠져."
"아 왜?!! 나도 한 터프 하거든?! 여장이 어울린다고 무시하는 거야?!"
"내가 언제 여장 얘기 한 마디라도 했냐? 넌 파이 구웠으니까 이번에는 쉬라는 거지. 그리고 프릴은 루밀리에게서 정보를 캐왔으니까 빠지고, 유리아는 아직 체스부 심사가 남아있으니 빠지니까... 남은 건 한 사람이네."
에반이 아라한을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음 지었다.
"설마 혼자서 싫다고 빠지진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