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7화 〉3-1. 다소 거친 방식 (3) (57/88)


  • 〈 57화 〉3-1. 다소 거친 방식 (3)

    대륙의 역사는  순간도 조용했던 적이 없다. 국경을 맞대고 인접한 왕국들은 수 세기에 거쳐 자신들이 숭배하는 유물들을 앞세우며 크고 작은 전쟁을 반복해왔다. 길고 긴 전쟁의 역사 끝에 달의 왕국 루니아가 승리를 거머쥐어 대륙 북부의 왕국들을 정복했고 그렇게 아그루스 제국이 탄생했다.

    그 이후로도 아그루스 제국은 중부 지역의 왕국과 공국, 연합들 역시 차례 차례 무력으로 흡수했고, 세월이 지나서는 안개전쟁이라는 악수를 둬가면서 남부 지역의 이스티아 왕국, 카무곤, 수르비나까지 강제로 복속시켜 버렸다.


    아그루스 제국은 피지배 국가들의 사회 체제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정복한 영토의 왕족과 귀족들을 폐위하였으나, 그 대신 호족이라는 계급에 봉하여 공무와 행정 처리의 요직을 독점하도록 하는 식으로 그들의 정치적 권위를 보장했다.

    또한 신을 믿는 행위는 황제 보다 높은 존재를 두는 불충죄라는 명목하에 종교를 모두 폐지했지만, 그 외의 모든 문화와 관습은 말살시키지 않고 자유롭게 두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고, 지금의 아그루스 제국은 하나의 국호와 황제 아래 단결되어 있지만 지역 마다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 다채로운 문화를 갖게 되었다.

    루나칼립스 학원과 오르토스 학원이 있는 곳은 라쿠이르다. 라쿠이르는 아그루스 제국의 탄생이 선포되기도 이전에 이미 루니아에게 복속당했기 때문에 수백년에 걸쳐 고유의 정체성을 거의 다 잃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저명한 마법사와 학자들이 도시와 떨어져 조용히 연구에 전념하는 한림(翰林)으로 알려지면서 왕도는 물론이고, 다양한 영지에서 귀인들이 가르침을 청하러 찾아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문화 양식의 가게들이 생겨났다.

    에반 플루토와 시엘 밀리우스가 저녁을 먹기 위해 앉아있는 식당 역시 그런 부류였다. 사탕이나 기념품 위주의 상권이 발달한 누르워와는 달리, 전통의복을 수선하거나 다른 지역의 요리를 파는 가게가 늘어선 이곳은 이른바 은행나무 사거리라고 불리는 곳이다. 커다란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뻗어나간 골목마다 가게가 늘어서 있지만 각자 다른 문화 양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비주얼이 참 일관성 없는게 꽤나 재밌다.

    "근데 갑자기 무슨 변덕으로 나한테 저녁을 사준다는 거야? 회의 때 갑자기 날 지목하길래 뭔가 싶었는데."

    시엘이 서비스로 나온 물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장난을 치며 에반에게 물었다. 시엘이 만지작거리자 물은 순식간에 얼었다가, 결정이 되어 흩어졌다가, 다시 녹아 물이 되기를 반복했다.

    "얌마 물은 소중한 자원이야.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고."


    "쳇. 알았다고."


    시엘은 자신이 만지작거리던 물을 에반의 컵에다가 부어버렸다. 에반은 자신의 물컵에 담긴 물을 휴지통에 버렸다. 시엘이 그 모습을 보며 킥킥거렸다.

    "소중한 자원을 그렇게 막 버리면 어떡하나?"

    "여전히 매를 버는 솜씨가 예술이구나."


    "저녁 다 먹고 후식도 사줄 거지?"

    "그럴 리가 있겠냐? 선심 쓰려고 한턱 내는 거라 착각하는 모양인데, 너가 이뻐서라던가 사줄 마음이 들어서 이러는 거 아니다. "

    "쳇. 어련하시겠어?"


    "근데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해서 이렇게 순순히 따라올 줄은 몰랐다. 무슨 꿍꿍이냐고 의심하고  믿을 테니 억지로 끌고 올 생각이였는데."

    "공짜밥인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 그리고 뭐 꿍꿍이가 있어서 그러는 거였으면 일단 다 먹고나서 도망치면 그만이지."


    "도망쳐? 허이구. 내 손에 이미 두 번이나 잡혀놓고도 학습한 게 없는 거냐?"

    "두 번 잡히는 동안 학습한 게 없겠어? 이제 어림도 없지!"

    시엘은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에반은 의욕을 쬐끔 발휘해서 도망치는 시엘을 3초만에 붙잡아 바닥에 눕혀놓은 뒤 으스대는 저 얼굴이 분함으로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었지만, 술래잡기나 하려고 시엘을 부른 게 아니였기에 이번만은 참아뒀다.


    "주문하신 피쉬파이 세트  개 나왔습니다."

    주방 아주머니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가져왔다. 시엘은 난생 처음보는 생소한 그 음식을 이리저리 살펴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면서 열심히 관찰했다.


    "이게 뭐지? 생긴 건 파이 같은데? 같이 딸려온  정체를 도저히 모르겠네."


    시엘이 나이프로 파이를 가르자 안에 갇혀있던 뜨거운 공기가 식욕을 돋구는 냄새와 함께 퍼져나갔다. 파이 안쪽에는 두툼한 흰살 생선살과 올리브가 잔뜩 들어있었고 생선살 밑에는 마요네즈를 베이스로 만든 소스가 듬뿍 깔려있었다. 기름진  땡길 때에 딱 좋을 법한 비주얼이였다. 파이의 균열 사이로 줄줄 새어나오는 마요네즈를 보자 시엘의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우와 엄청 맛있어 보이는데! 솔직히 난 당신이  골탕 먹이려고 이상한 거 먹일 줄 알았는데."


    "마.  먹을 거로 장난 안친다. 그리고 나도 같이 먹어야 하는데 이상한  먹이겠냐?"

    에반이 포크로 파이를 푹 찔러 뜨거운 공기를 빼내며 말했다. 그리고는 포크 끝에 묻은 마요네즈 소스를 낼름 혀로 햝았다. 시엘은 파이를 한입 먹어보았다. 충분히 식혔다고 생각했는데 입안에 들어온 마요네즈 소스가 여전히 뜨거워서 후후 거리며 열기를 뿜어댔다.


    "앗뜨뜨! 입천장  벗겨질 뻔했네! 와 근데 이거 진짜 맛있다!"


    "천천히 좀 먹어라 누가 뺏어 먹는데?"


    시엘은 흡족한 얼굴로 파이를 먹었다. 겉부분은 바삭하고 속은 올리브유와 생선육즙이 베어들어 부드럽고도 감칠맛이 났다. 생선살은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고 식감도 아주 탱글탱글했다. 하지만 화룡점정은 단연 밑에 깔려있는 마요네즈 소스였다.

    "맛있냐?"


    "응! 이런 맛있는  있는데 난 왜 들어본 적이 없는 거지?"


    "이 피쉬파이는 이스티아 번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요리로 꼽혀. 이스티아 요리가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가장  특징은 올리브를 엄청 써댄다는 거야. 너도 보면 알겠지만 이 피쉬파이, 파이 자체 만으로도 요리할 때 올리브유를 엄청 빨아들이는데 안에 올리브 토핑도 왕창 들어가 있지."

    "정말 그러네. 이스티아 사람들은 왜 그렇게 올리브를 좋아한대?"

    "너희 설국 사람들이 불곰토끼 뒷다리에 그렇게 걷어차여도 불곰토끼 사냥에 환장하는 이유랑 똑같은 거지 뭐."


    "불곰토끼!! 젠장... 그 거지같은 설국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불곰토끼 스튜를  먹는 건 너무 괴롭다고!"

    "알겠으니까 아쉬운대로 생선이라도 드셔. 설국에는 생선 없잖아? 물이 죄다 얼어있으니까."

    "그거 지금 날 놀리는 거지?"


    "아니 없는 걸 없다고 하는건데 그게 왜 널 놀리는 거냐? 피해망상 있어? 자의식 과잉이야?"

    "아아 알았으니까 먹기나 하자!"


    입가에 마요네즈를 묻힌 두 사람이 서로 틱틱대면서 파이를 썰었다. 시엘은 파이와 함께 온 투명한 무언가를 포크로 집었다. 뒤가 다 비쳐보일 정도로 투명한데 질감은 다소 바삭바삭해 보였다. 눈으로 봐서는 음식인지 아닌지 조차 파악하기 힘든 비주얼이였다.

    "아까부터 신경 쓰인 건데 이건 대체 뭐야?"


    "아 그거? 감자튀김이야."


    "감자튀김?! 이게 어딜 봐서 감자튀김이야? 투명하잖아?"


    "이스티아에서는 감자튀김을 그렇게 해서 먹어. 감자를 푹 삶은 다음  물에다가 전분을 섞어서 굳힌 걸 튀기면 이렇게 돼."

    "너무 번거로워 보이는데? 고작 감자를 가지고 그렇게 정성을 들일 필요가 있나? 그냥 대충 삶거나 찌면 되는 걸 가지고."

    "문화 차이인 거지. 아무튼 세트를 시키면  감자튀김이 딸려오는데 이스티아 사람들은 이거 없으면 아쉬운 모양이야."

    시엘은 투명한 감자튀김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살짝 눅눅한 느낌이였고 소금을 안쳐서 다소 싱거웠다.


    "씹을  마다 올리브유 맛이 나."

    "그건 일부러 소금을 안쳐. 이렇게 소스에 찍어먹으라고 있는 거야."

    에반이 파이 밑에 고인 마요네스 소스에 감자튀김을 찍어서 잘 버무렸다.


    "파이보다도 이 소스에 찍은 감자튀김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더라."


    "으아아 이거 열량 소모하려면 운동 엄청 빡세게 해야겠다. 설마 이스티아에서는 이걸 맨날 먹는 건 아니겠지?"

    "이스티아(Istia)라는 지명 자체가 아민어로 검이라는 뜻이잖냐. 그래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검술 연마가 일상이라 열량 소모는 걱정 안해도 돼. 오히려 이런 고열량 음식이 필요하지."


    "그렇군. 설국이 하도 거지같이 춥다 보니 음주를 시작하는 평균연령이 아그루스보다 훨씬 낮은 거랑 같은 맥락인가."


    "넌 몇 살에 시작했냐?"


    "노코멘트. 아그루스로 이민 온 뒤로는 끊었으니 교칙 위반 아니라고."


    "어련하시겠어요."

    시엘은 키득키득 웃으며 마요네즈에 적신 감자튀김을 입에 물었다.

    "무튼 이스티아는 돌잡이도 소검, 대검, 장검, 단검으로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도검 제일주의 사회야. 그러다보니 기사나 용병 중에 이스티아 출신이 많지."

    "근데 이스티아는 남부 지역이잖아? 남부 애들은 다 아그루스 엄청 싫어하는 거 아니였어?"

    "당연히 엄청 싫어하지. 특히 수르비나 하고 카무곤에서는 지금도 틈만 나면 독립 항쟁이 일어나니 말 다했지. 하지만 이스티아 애들은 죄다 칼잡이잖아? 그러니 자신보다 강한 힘을 가진 세력에게 넘어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겠지. 게다가 말이야, 아무리 남부 지역이 자존심이 세도 결국 시골 깡촌이잖아? 그런 깡촌에서 출세하고 이름 날리려면 귀족 하나 잘 만나서 기사 노릇 하는  빼고 뭐 방법 있나?"

    "난 설국에서 얼어죽거나, 골목에서 과자 가게나 하다 늙더라도 아그루스 뒤치닥거리는 사절이야."


    "너야 너만의 길을 찾아나가겠지만 이스티아는 칼로 망하는 일이 있어도 칼로 흥할 길만 찾는 그런 도검 만능주의자들의 사회야. 오죽하면 이름에도 검이 들어가겠어?"

    "오오 그러고 보니  루밀리라는 애 이름에도 검이 들어가네. 루밀리 아이텔소드."

    "그래. 이름이 뭔가 마검 같은 애들은  이스티아 출신이라 봐도 돼. 아이텔소드, 레반틴소드, 블레이즈, 컴뱃핸드, 룬나이프, 요네르세이버..."

    "와우 멋지잖아? 내 이름은 꽃에서 따왔는데. 나도 그런 전사 같은 이름이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밀리우스도 전사 이름이잖아."

    "하아... 솔직히 사람들이 날 보면 꽃을 떠올리겠어, 전사를 떠올리겠어? 당연히 전자일  아니야?"


    "재수 없어.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 다들 꽃을 떠올린다고 지 입으로 말하다니."


    "아오 좀!! 이쪽은 진심으로 콤플렉스 느낀다고!!"

    시엘이 분하다는 듯이 씩씩거렸다.

    "뭐 됐어. 이런 거로 부들부들 치를 떨어봤자 나만 손해잖아. 그래서, 이제 이걸 먹인 대가로 나에게  요구할 셈이야?"


    "뭐겠냐? 내일 아침 수업 시작하기 전까지 이거 만들어 와."


    "....내가 왜??"

    "내가 뭐하러 얇은 지갑 쥐어짜면서 이걸 너한테 먹였겠냐. 이제 맛을 알았으니 만들어 오라고. 식으면 맛없으니까 보온 용기에 담는 거 잊지 말고."

    "그냥 아주머니한테 1인분 포장해달라고 해. 왜 굳이 내가 수고를 해야 하는데?"

    "그거야 당연히  센스를 발휘해서 어레인지를 하면 좋을 테니까 그런 거지."

    "난 디저트만 만들어 봤다고. 이런 식사 종류는 자신 없어."


    "어차피 파이잖아. 넌 분명 잘할 거야."

    완고하게 나오던 시엘이 넌 분명 잘할 거라는 에반의 말에 바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잘할 거라고 생각해?"

    "당연하지! 그 까다로운 유리아의 입맛을 만족시킬 정도면 보통이 아니잖아?"

    "보통이 아니라고? 하하! 그렇긴 하지!"

    단순한 녀석. 에반은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게끔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파이야 그렇다쳐도 이 소스가 난관인데. 마요네즈가 베이스인 건 알겠지만 뭐를 섞은 건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아."


    "그건 네 스타일 대로 어레인지 해. 중요한 건 올리브유랑 올리브를 엄청 넣어야 한다는 점이야. 일반적인 기준으로 많이 넣는 거로는 부족해. 아무리 그래도 이건  과하다 싶은 생각이  때쯤 조금  넣으면 얼추 이스티아식 입맛에 맞을 거야."


    "난해하네.   해볼게. 투명감자칩은 귀찮을 뿐 어려워 보이지는 않네."

    "좋아 좋아. 의욕을 발휘해주는 요리사 님을 위해 예정에는 없던 디저트도 한턱 쏘도록 하지."


    "이야~ 웬일이래? 나야 사양할 이유가 없지. 어디 갈 건데?"

    "당연히 누르워의 천설당이지."


    "싫어어어!!!!"


    -------------


    다음날 점심시간. 프릴 루에리아는 긴장된 표정을 한채 안절부절 못하고 앉아있었다. 그녀의 옆에 앉은 소피아가 프릴의 목에 목걸이가 걸려있는  보고 화들짝 놀라 말했다.


    "프릴?! 이 목걸이 뭐야?"

    "앗! 소피아.... 그냥 좀 기분전환 삼아 한 번 해본 거야."

    "누구한테 받은 거야? 남자야? 어떤 새끼야?"


    "그런  아니야!"


    사실 맞다. 에반 플루토에게서 받은 텔레파시 목걸이니까 남자에게서 받은 거라는 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소피아는 독점욕을 불태우며 누가 뺏어갈세라 프릴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프릴은 그런 소피아를 떨쳐냈다.

    "있지, 소피아. 오늘은 내가 선약이 있어서 그러니까 다음에 보자."

    "왜에에? 나랑 같이 점심 먹자!"


    "오늘은 정말 안될 것 같아."

    "선약이라면 누구를 보는 건데? 남자야? 어떤 새끼야?"


    "그런  아니라니깐. 동급생이랑 중요한 할 얘기가 있어. 그러니 미안하지만 이만 자리를 비켜주지 않을래?"

    "에엥. 오늘의 프릴은 뭐랄까 엄청 단호한데?"

    소피아는 꽉 붙잡고 있던 프릴의 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이 죽어서 축 늘어진 소피아를 보자 프릴도 마음  구석이 불편했다.

    "미안, 소피아."

    "아니야. 나도 항상 막무가내여서는 안 되겠지. 점심 맛있게 먹고 이따가 보자."

    "응. 이따 봐."

    소피아는 교실 밖으로 나가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소피아가 나가자 에반으로부터 텔레파시가 울려왔다.


    [좋아. 방해꾼은 제거했고. 이제 작전 시작이다.]


    [근데 정말 이런 작전이 효과가 있을까요? 그냥... 음식을 먹기만 할 뿐인데요?]

    [걱정하지 마라. 준비한 미끼는 확실하니까.]

    [그럼 시작할게요.]

    프릴은 에반이 미리 챙겨준 도시락을 꺼낸  뚜껑을 열었다. 보온 용기의 뚜껑이 열리자 따끈따끈한 파이 하나가 김을 모락모락 풍겼다. 뚜껑을 연 것 만으로도 진하고 향긋한 올리브유 냄새가 퍼져나갔다.


    [처음 보는 음식이네요.]


    [시엘 녀석의 작품이야. 내가 미리 맛을 검사했는데 끝내주더라고. 역시  녀석 소질이 있어.]

    [그럼 이제 이걸 먹으면 되는 건가요?]

    [그냥 먹는  아니라, 냄새를  풍겨야지.]


    [내, 냄새요?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거 아닐까요?]

    [괜찮아. 금방 빠지니까. 나이프로 그 파이를 갈라볼래?]


    프릴은 에반이 시키는대로 나이프를 들어 파이를 갈랐다. 그러자 안쪽에 있던 뜨거운 공기가 진한 올리브유 향과 함께 뛰쳐나와서는 교실 여기저기 뛰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안에 있던 농후한 마요네즈 소스가 파이의 균열에서 흘러나왔고, 안쪽에는 탱글탱글한 흰살 생선이 꽉 차있었다. 올리브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듬뿍 들어간 올리브는 이것이 누구의 취향을 조준하고 만들어진 파이인지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서, 선생님! 저 생선 잘 못 먹어요! 게다가 이 소스는 마요네즈 아닌가요? 으으으....]

    [괜찮아. 어차피 네가  먹을 거 아니니까. 루밀리 상태는 어때?]

    [루밀리 양이요? 지금 자리에 앉아서.... 히익?!!]

    루밀리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고개를 프릴 쪽으로 향한 채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프릴은 그 맹렬한 시선에 하마터면 육성으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냄새를 맡은 모양이네. 이제  더 살랑살랑 유혹해야지.]


    [그렇게 말씀하셔도 살랑살랑 유혹이라니 어떻게 해야하죠?]

    [파이를 한입 먹어. 최대한 맛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프릴은 파이를 포크로 집어들었다. 올리브와 도톰한 생선살이 알차게 꽉 차있었고, 올리브유와 마요네즈 소스가 뒤섞인 하얀 유동성 물질이 뚝뚝 흘러내렸다. 프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것은 작전. 이것은 꼭 필요한 작전이다. 그렇게 되새김질 하며 스스로를 독려한 프릴은 눈을 꽉 감고 파이를 입에 우겨넣었다.

    [으으.... 선생님 이거  입맛에는 너무  맞아요.]

    [그래도 완전 맛있다는 듯이 연기해.]


    프릴은 최대한 미소를 지으려고 했으나 입안에 들어온 걸 씹을  마다 표정이 일그러지려고 하는 걸 억지로 참느라 얼굴 근육이 빳빳해졌다. 일단 맛있다는 듯이 연기하는 것과는 완전 동떨어진 표정인 건 확실했다. 그래도 다행이 루밀리에게는 효과가 있었다.


    "...우음...."


    프릴이 인내심을 발휘하느라 눈치 못  사이 루밀리는 프릴의 근처에 옮겨 앉아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피쉬파이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선생님 이제 이걸 루밀리 양에게 주면 되는 건가요?]

    [아직 아니야. 지금 줘봤자 기사의 체면이라는 게 있어서 이 악물고 거절할 게 분명하다고. 좀  확실하게 끌어당겨야지.]

    [어떻게 할까요?]

    [도시락이랑 같이 있던 작은 보온 용기 하나 있지? 그거 꺼내서 뚜껑을 열어.]


    프릴은 에반의 지시대로 자그만한 보온 용기를 꺼내서 뚜껑을 열었다. 안에 들어있는 것은 투명하고도 납작한 무언가였다. 뭔가 목공본드 굳은 자국 같이 생겼는데 냄새는 고소했다. 프릴이 이게 대체 뭘까 하는 표정으로 집어들자  투명한 것의 정체를 알아본 루밀리의 눈이 번뜩 뜨였다.


    "아앗! 아...."

    루밀리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그 바람에 프릴이 깜짝 놀라서 움찔했다.

    [이게 뭔가요 선생님?]


    [놀랍게도 감자튀김이다.]

    "네에?! 아....."

    프릴이 놀라서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외쳤다. 그 바람에 이번엔 루밀리가 깜짝 놀라서 움찔했다.

    [그 감자튀김을 마요네즈 소스에  찍어서 먹어. 동작과 표정은 과장되도 좋으니 확실하게.]

    프릴은 에반의 지시대로 했다. 단순히 음식을 먹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결코 쉬운 작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프릴이였다.


    [너무 기름져요. 살찌면 어떡하죠?]


    태생이 귀족이라 어쩔 수 없는지 프릴은 음식을 복스럽고 맛깔나게 먹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최대한 맛있다는 듯이 웃으려 했지만 부자연스러운 표정만 연출될 뿐이였다. 그럼에도 루밀리에게는 효과가 있었던지라 아까보다도  프릴과 거리를 좁힌  안절부절 애태우고 있었다.

    [자, 프릴. 내가 알려줬던 대사 기억하지? 지금이야.]

    프릴은 고개를 끄덕이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대사를 흘렸다.


    "갈퀴날들, 극본가들, 청소부들. 분명 이 세 조직  하나일 텐데 킬링 이터와 대체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거지?"

    "아....!!"


    프릴은 그냥 연기에 소질이 없는 게 확실했다. 자동 음성 재생 장치 보다도 어색한 억양이였다. 그럼에도 루밀리는 벌떡 일어나더니 프릴의 바로 옆에 앉고서 두눈을 빛냈다.

    "뭔가 조사하는 게 있으신 거 같은데, 실례되지 않는다면 제가 힘을 보태도 괜찮을까요?"

    [됐다. 낚았다. 역시 사람은 자기가 아는게 나오면 신나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지.]

    [이제 어떻게 하죠?]


    [한껏 띄워주는 대사.  기억하고 있지? 무조건 달달 외워서 말하려고  필요는 없어. 대사가 아니라 단순히 루밀리를 칭찬한다고 생각하면 부담이 덜 되겠지.]

    프릴은 고개를 끄덕이고 루밀리를 바라보았다.


    "아, 루밀리 양. 그러고보니 루밀리 양은 긍지 높은 기사 가문인 아이텔소드 가문의 영애라고 들었어요. 제국을 수호하는 아이텔소드 가문의 명성은 저희 반에서 모를만한 사람이 없겠죠. 명예로운 가족을 두고 있는 게 정말 부러워요."


    프릴의 찬사에 루밀리는 몸둘 바를 몰라 하며 얼굴을 붉혔다.

    "부럽다니요 그, 그렇지 않습니다! 과찬의 말씀이셔요!!"

    "평소에 범죄자에 대한 조사를 하시는 걸 자주 봤어요. 어머님이 시민의 안녕을 위해 불철주야 수고하시는 범죄수사관이라고 들었는데 루밀리 양을 보니 역시 정의로운 핏줄은 다르구나 라고 생각했죠."

    "그런... 말씀 하시면.... 헤헤... 앗!"

    평소에도 칭찬이 많이 고팠던 모양이다. 루밀리는 몸을 베베 꼬며 쑥스러운 듯 웃다가 정신이 퍼뜩 돌아와서 애써 표정을 고쳤다.

    "부족한 저를 어여삐 봐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언월(偃月)의 주인' 루에리아 공작 가의 영애분께 인정을 받는다니 감격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루밀리는 프릴에게 한쪽 무릎까지 꿇으며 기사의 경례 자세를 했다. 프릴이 화들짝 놀라 루밀리를 일으켰다.

    "이, 이러지 마셔요! 학원에 있는 동안 만큼은 그저 동급생 사이일 뿐이에요!"


    [역시 기사 가문의 영애야. 귀족의 충견 근성이 벌써부터 몸에 잘 배어있네.]


    [선생님!! 그런식으로 말씀하지 마셔요!!]


    프릴은 루밀리를 일으켜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러는 와중에도 루밀리의 시선은 파이에서 떨어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프릴은 파이를 루밀리 쪽으로 슬쩍 밀었다.


    "루밀리 양. 이거 드셔보세요."

    "네?! 아뇨, 그럴 순... 없...습...니다...!!"


    무릎 위의 허벅지살을 꼬집어가며 인내심을 발휘하는 루밀리였다. 하지만 프릴은 파이를 빨리 치워버리고 싶은 심정이였기에 속이 탔다.


    "루밀리 양은 이스티아에서 왔죠? 이스티아 본토 사람의 평가가 궁금해서 그래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네요."

    말은 마지못해 승낙하는 것처럼 보여도 질질 새려고 하는 군침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럼 실례 무릅쓰고..."

    루밀리는 목이 빠져라 고대하던 파이 한 조각을 드디어 입에 넣을 수 있었다. 한입 조심스레 맛을 보자 두 눈에 별조각이 샤라랄라 쏟아졌다.

    "맛있나요?"

    "너무 맛있어요. 은행나무 사거리에서 사먹은 것보다 훨씬 맛있어요! 올리브도 넉넉하게 들어있고, 소스도 굉장히 독특한데 매력있어요. 무엇보다  파이... 파이가 마치 제빵이 전문인 사람이 만든 거 같아요."

    [제빵이 전문인 사람이 만든 거 맞으니까.]

    "감자튀김도 드셔보세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마음에 들어하시니 저도 기쁘네요."


    [이제 자기는 안 먹어도 되니깐.]

    [선생님 쉿.]


     사람이 텔레파시를 주고받고 있다는 걸 모르는 루밀리는 감자튀김을 마요네스 소스에 푹 찍어서 먹고는 세상 부러울 사람 없다는 듯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공략이 거의 끝난 거 같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루밀리 양. 사실 전 최근에 있었던 이리들의 학원 습격 사건을 잊지 못하겠어요. 다행이 이번에는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피해 학생이 발생한 데다가 다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래서  나름대로 이리들이 노리는 게 뭔지 알아보려 했는데 역시 수확이 전혀 없어서 고민인 참이였어요."

    열심히 파이를 탐하던 루밀리가 그 말을 듣고 입운동을 멈췄다. 그대로 씹던 걸 삼키고는 자기 자리로 가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기더니 금방 다시 돌아왔다. 루밀리가 가져온 것은 평소에 항상 가지고 다니던 낡은 수첩이였다. 프릴의 책상에 올려놓고 페이지를 펼치자 빼곡한 필기와 사진들로 가득했다.


    "제가 평소에 틈틈이 조사한 성과입니다.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수사관인 어머니의 자료를 몰래 엿봐서 보충한 내용도 많이 있어요."


    루밀리가 파이는 자신의 쪽으로 당기고, 수첩은 프릴 쪽으로 밀어서 건냈다. 그리고는 프릴의 귀에 대고 귓속말로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 지금부터 제가 알려드리는 건 외부 유출 절대 금지에요. 아시겠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