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3-1. 다소 거친 방식 (2)
학원의 수업이 끝난 뒤 에반 플루토를 비롯한 체스부의 멤버들은 아라한이 머무는 곤룡회 수장의 방에 다시 모였다.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국제 교류 학관에 발을 들이는 게 처음인 시엘은 신기하다는 듯이 두리번 두리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라한은 다소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유리아 양이 체스부의 결성을 처음으로 제안했던 곳이 이곳인 만큼 의미가 있는 공간임은 이해합니다만, 곤룡회 수장을 위한 거처인 이곳에 여러분이 들락거리는 것을 다른이들이 알게 되면 제 입장이 다소 곤란해집니다. 특히나 남자가 드나드는 걸 봤다는 얘기라도 퍼지면 해명하기 난감하겠죠."
"미안해요. 학생회실을 비워보고 싶었는데 학생회 회의가 많아서 그러질 못했습니다."
이리들의 습격사건을 계기로 주말 동안의 학원 안전 시스템과 비상 연락 체계를 어떻게 개편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거의 매일 같이 계속된 탓에 학생회실에 불이 날 지경이였다. 이러는 와중에도 백화 상회의 업무를 처리하고, 이제는 체스부 부장까지 맡아놓고도 성적에 차질이 없도록 착실히 공부하는 유리아가 쓰러지지 않는 게 대단할 따름이였다.
"빠른 시일 내에 동아리 부실을 확보하여 다음에 모일 때는 이런 불편한 점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동아리 연합회 측과 이야기를 마쳐뒀으니 아마 이번주 안으로 부실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꼭 좀 부탁한다고. 이거 다리가 너무 저려서 못 앉아있겠어."
양반 다리가 익숙하지 않은 시엘이 그렇게 툴툴거렸다. 유리아는 준비해온 종이 몇 장을 꺼내며 멤버들을 주목시켰다.
"그러면 체스부의 첫 동아리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학업과 개인 일정으로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리고, 또 특별히 장소를 제공해준 아라한 양에게도 감사를 표합니다."
처음에 천설당에 모였을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다소 뻣뻣한 분위기였다. 프릴과 시엘이 작게 나마 박수를 쳤다. 유리아는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고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우선 오늘 회의 순서는 첫번째로 몇 가지 전달 사항을 말씀드릴 것이고, 두번째로 여러분 각자의 조사 성과에 대해서 나눠본 다음, 마지막 세번째로 체스부 활동의 방향성에 대한 건의사항이 있다면 듣는 것으로 해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아직 시작도 안했으니 졸지 말고 들어주시겠습니까, 에반 플루토 씨?"
"으헙?!!"
그새 지루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졸고 있는 에반이였다. 유리아의 질책에 고개를 격하게 움찔한 그는 멍하니 풀린 눈을 하고서 입가의 침을 닦아냈다. 유리아는 뭐라 한마디 하는 것도 시간의 낭비라고 판단했기에 그냥 회의를 마저 진행했다.
"우선 첫번째로 전달 사항입니다. 신규 동아리 개설 신청서가 동아리연합회의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만약에 빠꾸 먹었으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였냐?"
"그 점은 걱정할 게 아닙니다. 그저 제가 조금 더 수고를 했겠죠. 동아리연합회를 원만하게 '설득' 하느라 말이죠."
유리아가 찾아간 뒤로 기사단 주둔지가 발칵 뒤집어졌던 게 불과 얼마 전 일이다. 유리아가 제출한 신청서에 허가 도장을 찍는 동아리 연합회의 손이 얼마나 벌벌 떨렸을지 상상하니 짠하기까지 했다.
"이로써 체스부는 정식 동아리로 등록이 되었고, 체스부 부장은 저 유리아 릴리스가 맡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제가 부장을 맡는 것에 이의가 있거나 본인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일동의 침묵과 부동자세가 몇 초간 유지되자 유리아 릴리스는 조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만장일치로 체스부 부장은 제가 맡는 것으로 확정하겠습니다. 신뢰에 감사드리며 여러모로 미흡하고 또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리아는 형식적인 감사 인사를 했다. 비즈니스에 빠삭하고, 학생회장도 오래해서 그런지 절차상 필요한 형식적인 멘트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유리아였다.
"사실 동아리에는 고문과 부장 이외에도 최소한의 임원이 필요합니다. 부장을 보좌하는 부회장,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는 서기, 예산안을 작성하고 지출내역을 기록하는 회계. 그렇기 때문에 최소 구성원이 4명 이상의 학생이여야 하는 것이죠."
"그럼 오늘 회의에서 그 임원을 정할 건가요?"
"아뇨. 그냥 제가 다 맡아서 할 겁니다."
"어어?"
유리아가 아까부터 만지작거리고 있던 종이들은 동아리 업무와 관련된 양식들이였다. 프릴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에게 맡겨도 괜찮아요. 안그래도 바쁜 일이 많은데 혼자서 다 하려고 할 필요는 없어요."
"맞습니다. 역할을 분담하도록 하죠."
"아닙니다. 제가 다 해야합니다. 그도 그럴게 체스부라는 이름으로 동아리를 개설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명목상일뿐 저희가 정말로 체스나 두며 친목을 도모하려고 모이진 않죠. 그러니 예산안이나 활동보고서도 다 제가 적당하게 작성해서 제출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다 맡겠다는 겁니다. 다만 구성원 명단의 모든 임원칸에 제 이름을 적을 수는 없으니 여러분의 이름은 적당히 아무 임원칸에 기입해 놓고 실질적인 업무는 제가 보는 거로 하겠습니다."
"질문! 그럼 고문은 실질적으로 무슨 일을 하면 되나?"
"에반 플루토 씨, 당신의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냥 제가 당신에게 서류를 줄 때마다 교직원 확인란에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오오. 좋다 좋아! 그 정도 쯤이야 뭐!"
"그리고 혹여나 뭔가가 잘못되었을 경우 당신이 법적인 책임을 지면 됩니다. 그게 답니다."
"좋아 좋..... 엉? 뭐라고??"
"역할 분담에 대한 전달 사항은 이 정도면 된 것 같고 그러면 다음 전달 사항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잠깐! 잠깐만! 방금 한 말 뭐야? 내가 뭔 책임을 진다고?"
방심하다 무심코 피망을 먹어버린 편식 심한 유치원생 같은 반응을 보이는 에반이였으나 역시나 유리아는 가볍게 무시하고 멘트를 이어나갔다.
"체스부의 정규 부활동은 사전에 협의된 대로 매주 수요일 이 시간으로 결정하겠습니다. 다만, 상황에 따라서는 정규 부활동 외에도 소집이 있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주말에는 활동을 어떻게 할 건가요?"
"공식적으로 주말 활동은 없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말이죠."
"공식적으로라...."
"너무 부담 갖지는 마세요. 여기 있는 모두가 학생이라는 신분 외에도 각자의 신분이 있으니 주말에 시간을 내기 어려울 거라는 건 저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불필요하고 형식적인 소집 및 활동은 지양할 생각입니다."
유리아는 동아리 관련 서류들을 잘 정리에서 서류철에 봉한 뒤 찬물로 목을 적셨다. 아라한이 그녀의 잔을 차가운 보리차로 다시 채워줬다.
"그리고 한가지 더. 체스부가 정식 동아리로 등록된 이후로 제게 들어온 입부 신청서가 꽤 많았습니다. 입부 희망자들에게는 심사해 본 뒤 결정하겠으나, 일주일 지나도 답변이 없다면 안 된 것으로 알라고 말해뒀습니다."
"그 심사도 유리아 양이 맡을 건가요?"
"아뇨. 입부 신청서들은 이미 다 파쇄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체스부의 멤버를 증원할 의향이 없습니다."
"매몰차긴."
"제가 조금만 더 매몰찼으면 당신은 지금 여기에 앉아있지도 않았겠죠, 밀리우스 군."
"이거 영광으로 알아야 하나."
시엘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체스부와 관련한 전달 사항은 이 정도입니다. 혹시 질문 있으신 분?"
유리아가 질문을 받자 아라한이 물었다.
"소규모로 구성되어 있다 해도 성과 없는 동아리에 예산이 지속적으로 할당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명목상 동아리라 하더라도 뭔가 보여주기식으로 내세울만한 게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점은 동의할 수밖에 없군요. 보통 동아리들이 성과를 피력하기 위해 취하는 방식으로는 외부 활동에 참가해서 입상하거나, 만월제 때 부스를 내는 것등이 있습니다만..."
"저희끼리 참가할 만한 외부 활동이 있나요? 혹시 체스 잘 두시는 분...?"
프릴이 물었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지켜보던 에반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한 마디 던졌다.
"만월제인가 뭔가 하는 학원 축제 있다며? 그때 그냥 적당히 부스 하나 열어."
"열어서 뭐하게?"
"네가 체스쿠키 구워다가 팔면 되겠네. 메이드복 입고."
"싫어! 왜 날 부려먹는 식으로 가는데?! 댁도 같이 메이드복 입고 홍보하러 다니면 생각해본다."
"호오? 너 자신 있냐?"
"왜? 쫄았을까 봐?"
"하긴. '많이 해봤으니까' 누구보다 자신 있겠구나."
"그게 무슨 의미야?!"
"쿠키 굽기 말하는 거다. 무슨 생각을 하셨나? 혹시...?"
"시끄러! 저 인간이 정말...!!"
"두 분 정숙해 주시겠습니까? 우선 아라한 양이 질문한 대외적 성과 마련 방안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오는대로 논의하도록 하죠. 그 동안 저도 다른 동아리들의 사례를 조사해보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의 있으신 분 있으십니까?"
"없는듯 하군요."
"그럼 또 다른 질문 없으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안건은 각자의 조사 성과를 나누는 것입니다. 혹시 학원 내의 불온한 움직임이나 수상한 점에 대해 포착한 게 있다면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윌터라는 지도원 양반이 프릴을 보는 눈이 수상해."
"장난치지 마세요, 선생님."
"장난치는 거 아닌데...."
에반이 시무룩해져서는 축 늘어졌다.
"다른 분들은 발견하신 거 없으신가요?"
유리아가 물었으나 아무도 말문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눈치만 보는 채로 침묵의 시간이 계속됐다. 이대로 불편한 고요함이 계속되도록 둬봤자 묘한 수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기에 유리아는 소득 없는 회의를 일단 마저 진행시켰다.
"괜찮습니다. 사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모임을 조직해서는 수상한 조짐을 포착하면 정보를 공유하자고 한들 막연한 데다가 감도 안 잡히는 게 정상이겠죠."
"누구를 찾아야 하고, 누구를 쫓아가야 하는지도 전혀 모르는 지금 이 상황에서 억지로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가는 도리어 남들이 보기에 수상해 보일 겁니다. 특히나 체스부는 근본 모를 조합으로 갑자기 생겨난 동아리라는 점도 감안해야 할 테고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지켜보고, 무언가 의심되면 꼭 말씀해주세요. 마지막으로 향후 체스부의 활동 방향성에 대한 건의사항을 제안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서로의 의견과 행동방식의 차이를 이해하는 게 주 목적이니 부담 갖지 말고 자유롭게 말씀해주세요."
에반 플루토가 손을 들었다.
"나 말해도 될까?"
"건설적이고 진중한 발언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너희들 말이야, 업계 베테랑을 앞에 앉혀두고는 왜 너희끼리 쬐깐한 머리를 맞대고 있는 거야? 자랑은 아니지만 난 아주 오래전부터 온갖 지저분한 놈들을 잡으러 다녔다보니 더러운 꼴을 꽤나 많이 봤어."
"정말 자랑은 아니군요. 그래서 당신의 경험에 따르면 어떻게 하는 쪽이 좋겠습니까?"
"너희들 다 겉으로 드러나는 걸 찾으려고 애쓰니까 아무 수확도 없는 거야.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너희 같은 애송이들에게 꼬리를 밟힐 정도면 나쁜짓에는 재능이 영 꽝이니 때려쳐야지."
"일리 있군요. 이면에 숨은 것을 찾으려면 겉을 뒤져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다면 무슨 수로 안쪽에 파고 들죠?"
"때려야지."
"때린다고요?"
멤버들 모두 에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한대 때려줘야 반응을 하지."
"때린다니 누구를요?"
"물론 아무나 때리면 안 되지. 아무나 때리는 건 폭력이니까. 그치만 맞아야 할 놈을 때리는 건 압박이야. 근데 이런 잠복세력 색출 및 추적 임무라는 건 말이야, 일단 한 놈만 확실하게 압박해도 절반은 끝내고 들어가. 확실하게 때려주면 맞은 놈 말고 나머지 놈들도 가만히 안 있고 꼼지락대기 시작하거든."
"알 듯 하면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이해할 만한 용어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가령 이번에 있었던 사건만 해도 마찬가지야. 분명 유리아의 뎀피돈을 노린 건 갈퀴날들의 이리들이였지만, 걔들은 와서 삽질만 하다가 죽었지. 그런데 왜 우린 이렇게 찜찜할까?"
"그거야 그 이리들은 단순한 배달부에 불과했을 뿐 뎀피돈을 노리는 자는 따로 있기 때문이죠."
"그래. 바로 그게 내가 말한 압박이라는 거야. 멍청한 이리들을 때렸을 뿐인데 학원 내에 뎀피돈에 대한 정보를 빼돌리는 놈이 숨어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이런식으로 한쪽을 치면 협력 관계로 얽혀있는 다른 쪽도 따라오는 경우가 많아."
멤버들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배달부들은 죽었으니까 지우고. 이제 우리가 알아내야 할 것은 딱 둘이지. 뎀피돈을 필요로 하는 놈, 그 놈에게 유리아가 초특급 한정판 뎀피돈을 가지고 있다는 비밀을 떠벌리고 그 보상으로 뭔가를 챙긴 놈."
"학원 내에서 제가 뎀피돈 임상연구 대상자라는 걸 아는 사람을 특정할 수 있다면 한결 수월하겠지만 아무리 학생회장이라 해도 제 권한으로는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네 선에서 다 까발려지면 마찬가지로 나쁜 짓에 영 재능이 꽝인 거지. 좀 전에 내가 뭐라고 말했지? 네 뎀피돈에 대해 떠벌린 놈은 보상으로 뭔가를 챙겼을 거라고 했지? 그 뭔가가 뭘지 조사하는 쪽이 훨씬 빠를 거야."
"그거야 당연히 돈 아니겠어?"
"아니지. 확실한 건 돈은 아닐 거야."
시엘이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머지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에반 만큼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내가 겪어본 바로는 이런 뒷공작 벌이는 애들은 대부분 돈이 목적이 아니야."
"그러면 뭐가 있죠?"
"정보, 자료, 지식, 기회. 자신의 뒤틀리고 변태스러운 꿈을 이루는데에 필요하고, 돈으로는 못 사는 그런 형이상학적인 것이지."
모두가 에반의 말을 듣자 단번에 납득했다. 편견일지 모르지만 마법사는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하나 같이 마법을 모르는 일반인과는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것처럼 특이한 이상에 심취하기 마련이다. 루나칼립스 같은 상급 마법학원에서 오래 있었을 정도의 마법사라면 어디서 수상한 프로젝트 한 두개 정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에반 플루토 씨 당신의 조언 덕분에 저희의 활동 방향이 구체적으로 틀을 잡아가고 있네요. 다만 지금까지 저희에게 주워진 자료들로는 어디를 압박해야 할지 아직 감이 오지 않습니다."
"그럼 자료를 더 늘리면 되잖아?"
"출처는요?"
유리아가 묻자 에반이 그녀에게 역으로 질문했다.
"시장이 형성 및 유지되는데 필요한 삼박자가 뭐지?"
"수요, 공급, 유통."
"역시 백화 상회의 유리아 릴리스구먼. 맞아."
에반은 유리아에게 엄지를 척 올려보였다. 그러나 유리아는 됐으니까 마저 설명하라는 눈치였다.
"일단 유통을 때려서 싹 끊어놓잖아? 그러면 어떠한 형태로건 염증이 생겨서 부어오르는 쪽이 있어. 거기가 공급이야. 그 공급을 때려서 다 조져놓잖아? 그럼 이제 반응을 하는 쪽이 있다고. 가만 안 두겠다고 살벌하게 날뛰는 반응이건, 새로운 공급원을 찾아 이리저리 눈 돌리는 반응이건 아무튼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여. 그놈이 수요야."
"그런 방식으로 암시장을 부숴오신 겁니까?"
"그래. 유통망 몇 줄기 끊어내면 굵직한 브로커를 찾을 수 있고, 걔네들 조지면 앞에서는 온갖 고결한 척 하면서 뒤에서 추악한 쇼핑을 즐기던 높으신 분들 명단이 쫙 나오지. 정보나 자료라는 건 찾으러 다니는 게 아니야. 뱉어내게 하는 거지."
"그 방식을 지금 이 상황에서도 적용시킬 수 있다는 말씀이죠?"
"물론. 사건이 다양해도 맥락은 항상 거기서 거기야. 다만 그 전에 우리가 설득시켜야 하는 인물이 있다."
에반이 고등부 학생 명단을 꺼내서 펼쳐보였다. 에반이 책갈피를 꽂아놓은 페이지를 보니 한 학생의 이름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루밀리 아이텔소드?"
"루밀리 양이라면 저희와 같은 반인 학생이에요. 조금 고지식하긴 하지만 예의 바르고 의젓해서 인기 있어요."
"이 루밀리라는 녀석이 말이야. 꽤나 명문으로 꼽히는 기사 가문의 영애인 데다가 엄마는 또 수사 당국의 높으신 분이야. 그 영향이 어디 안 가는지 본인도 범죄자나 지하조직의 소탕에 대해 관심이 많고 또 엄청 빠삭해."
"그래서 그녀를 체스부의 부원으로 섭외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건 아니야. 엄청 원칙주의적이고 꼬장꼬장한 애라 우리 같은 행동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겠지."
"우리 같은 행동방식이라니? 우리가 무슨 나쁜짓을 한다고?"
"동아리 명목으로 사조직을 만들고 교직원들 뒷조사."
"어어...."
"그래도 잘 설득하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줄 정보원이라고 봐. 직접 부원으로 섭외하지 않더라도 알게 모르게 주변에 겉돌면서 엮이게끔 끌어들이는 방법도 있고. 아무튼 우리가 이제 어디부터 압박에 들어가야 할지도 아마 이 녀석의 수첩에 단서가 있겠지. 근데 말이야.... 문제가 하나 있어."
"문제요?"
"어떤 문제죠?"
에반이 심각한 표정으로 멤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얘랑 안 친해."
"...?"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는 게 그거였다. 유리아가 잠시 회의 진행하는 걸 잊었다가 에반에게 되물었다.
"안 친하다... 입니까? 루밀리 양은 사감보조니까 같이 얘기해 볼 시간은 많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최근에 좀 말다툼을 해서."
"아아. 기숙사 사생 지도 방침을 놓고 의견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사감대리와 사감보조의 업무분장 때문에 갈등을 빚었습니까?"
"그런 거 아니라니깐."
"그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샌드위치 맛있게 먹는 법을 두고 말싸움을 좀 해서..."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고 있냐는 유리아의 표정이 백미였다.
"아, 괜찮아, 괜찮아. 나에게는 다 계획이 있다 이 말이야. 루밀리의 마음을 돌리게 할 계획이. 거기에 갈퀴날들에 관한 자료까지 뱉어내게 할 계획."
"혹시라도 루밀리 양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그녀를 귀찮게 할만한 계획이라면 그만 둬주세요."
"그런 거 아니야. 루밀리 녀석 말고... 쟤를 좀 귀찮게 해야지."
에반이 시엘을 가리키며 말했다. 별 생각 없이 앉아있던 시엘이 움찔하며 에반을 쳐다봤다.
"나? 난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