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3-1. 다소 거친 방식 (1)
동아리연합회의 회장은 유리아 릴리스를 앞에 두고 바짝 긴장한 나머지 침 삼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유리아는 연합동아리 신설 신청과 부실 배정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 학생회 활동으로 바빠 부활동을 전혀 하지 않던 그녀가 자신의 이름으로 동아리를 개설한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였다.
지금까지 동아리연합회는 신규 동아리가 부실이 필요하다고 하면 적당히 아무 곳이나 배정해주고 만약 불만을 표할 경우에는 '꼬우면 맨땅에서 부활동 하던가' 식으로 나왔다. 하지만 늘 해오던 그 방식을 지금 유리아를 상대로 쓰다가는 이번달 중으로 새로운 동아리연합회 회장을 선출하는 선거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어, 어서오세요. 유리아 릴리스 씨. 그.... 차 한잔 내어올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과자나 과일은 어떤가요? 아니면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시면 사양말고 뭐든 말씀하세요."
"실례지만 제가
다소 바빠서 최대한 빨리 얘기를 마무리짓고 가봐야합니다. 그러니 불필요한 절차는 생략해주시겠습니까?"
"앗... 네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은 아니죠. 우선 필요한 서류는 모두 작성해왔습니다. 여기 이게 부원 명단이고, 이건 활동계획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체 예산기획안입니다."
"네! 저 주시겠어요?"
유리아에게서 받은 서류를 살펴보던 동아리연합회 회장은 다소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원이 네 명뿐이네요? 체스부인데 인원이 네 명 밖에 없으면 재미가 없을 텐데요. 좀 더 인원을 확충해야 매칭도 다양하게 되고 실력도 향상이 될 거에요."
"지금은 초기 인원일 뿐입니다. 입부 신청서는 계속 받고 있고 심사 단계에 있습니다. 그래도 말씀하신 건 참고하도록 하죠."
"고문은 에반 플루토 지도원이라는 게 꽤나 충격적이군요. 평판이 안 좋은 건 익히 들었는데 왜 이런 인물을 고문으로 지목하신 거죠? 다른 평판 좋은 지도원이나 교사들도 유리아 씨 부탁이라면 흔쾌히 고문으로 나서줬을 텐데요."
"에반 플루토 씨는 학원에서 근무한지 아직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신규 지도원입니다. 지금 시점에서 떠도는 평판은 대부분이 선입견에서 기인하기에, 근거 빈약한 선입견을 타파할 기회도 주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실제로 저는 최근에 그분에게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아서요, 충분히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그렇군요. 유리아 씨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도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할 수 없겠네요. 그 다음으로 예산기획안을 좀 보면... 어라? 이렇게 적은 활동자금으로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0 하나가 더 적은 수준인데요?"
"어차피 체스나 두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활동의 전부인데 많은 예산이 필요하겠습니까? 거기에 적힌 금액이면 충분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도 과분할지도 모르죠."
"그치만 이 정도로는 부원들이랑 과자 까먹는 정도 밖에 못하는 걸요. 방학 동안 친목 도모 여행을 떠난다거나, 만월제 때 부스를 내놓는다거나 하려면 이 돈 가지고는 택도 없어요."
유리아는 골치가 아파왔다. 터무니없이 과한 돈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적게 가져가도 괜찮다는데 왜 뜯어말리면서 설득하는 거지? 만월제 때 부스를 내놓는다니 꼴랑 네 명 밖에 없는 체스 동아리가 무슨 컨텐츠로 부스를 만들 것이며, 애초에 그나마 모인 네 명도 방학 중에 친목 도모 여행이랍시고 함께 멀리 놀러가서 나란히 이불 깔고 누워 잘 만큼 살가운 사이가 아니다.
"혹여나 부족한 금액은 사비로 충당하시려는 생각이시면 지금 예산기획안을 수정해오도록 해주세요. 학생회장이라 당연히 아시겠지만 루나칼립스 학원은 교칙 상 교내 정규 행사에 개인적인 경제력을 행사하는 걸 금지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 저희 쪽 회계가 심사숙고 하여 관리할 겁니다."
"그런가요? 명단을 보니 회계 임원은 시엘 밀리우스던데요? 그 주먹 밖에 모르는 오르토스의 천방지축에게 예산을 맡겨도 괜찮으시겠어요?"
"함부로 평가하지 마세요. 시엘 군은 부친과 함께 가게를 운영하다 보니 돈계산이 빠른 편입니다."
"그런가요? 하긴 유리아 씨도 상회 쪽에 연이 깊으신 분이고, 안목이 있으니 아무렇게나 인선을 한 것은 아니겠죠. 그런데..."
서류를 살펴보던 동아리연합회 회장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심상찮은 표정을 지었다.
"아라한? 그 동방인 유학생 무리의 주축을 맡고 있는 자가 학원 동아리의 일원이라고요? 안 그래도 루나칼립스의 학생회장인 유리아 씨와 동방인 무리의 수장인
그녀 사이에는 골이 좀 깊지 않던가요? 무슨 심경으로 입부를 희망한 건지 물어보셨습니까?"
"정확히는 제가 입부를 제안했고, 그녀가 수락했습니다."
"어어? 정말요? 그럼 유리아 씨는 무슨 이유로 제안하신 거죠?"
묻지마. 유리아의 싸늘한 시선이 그렇게 말하는듯 했다. 동아리연합회 회장은 뒷덜미가 쎄하게 시려오는 걸 느끼고는 유리아가 제출한 서류에 모두 도장을 찍은 뒤 파일로 잘 묶어서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대강 파악은 했으니 심사결과 나오는대로 말씀 드릴게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부실 배정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부실이 정해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나요? 장소가 마땅히 없어서 부원들의 사생활 공간까지 빌려서 모이는 상황이다 보니 최대한 빨리 부실을 이용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심사가 통과되는대로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최대한 빠르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훌륭합니다."
유리아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동아리연합회 회장은 바로 유리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중개업자 모드에 들어갔다.
"여기 딱 좋은 부실이 있어요. 여기 사진 한번
보시겠어요? 내부가 대략 이런 구조인데 보시면 알겠지만 엄청 넓죠? 넓은 데다가 입지도 아주 좋아요. 학년 안 가리고 많은 학생들이 지나다니는 곳이니까 신규 부원 유입이 원활하게 될 겁니다. 게다가 창문도 많아서 햇볕도 잘 들고 밖도 잘 보이죠. 1층이라 계단도 없고 찾아오기도 쉽습니다. 이 정도 부실이면 A급, 아니지 S급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떤가요?"
동아리연합회 회장이 자신있게 소개했지만 어째서인지 유리아의 안색은 심히 불쾌해보였다.
'뭐, 뭐야 저 표정은? 나 방금 무슨 실수했나? 그게 아니면 설마 이 정도 부실로도 영 만족을 못하겠다는 건가? 이거 노리는 동아리가 많은데도 최대한 안 주고 버틴 완전 노른자 위의 황금 부실인데?'
동아리연합회 회장은 땀을 삐질 거리며 유리아에게 물었다.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네요. 어떤 점이 거슬리시나요?"
"거슬리는 거야 한둘이 아니지만 특히나 S급이라는 게 누군가를 생각나게 해서 제일 거슬리네요. 아무튼 이 부실은 하나부터 열까지 제 기대와 정반대로군요."
"아아아.... 그럼 어떻게 해드릴까요?"
"간단한 거 아닌가요? 이거와 정반대의 부실을 보여주시죠."
"네?! 기왕이면 부실이 넓은 게 좋지 않나요?"
"공간을 차지하는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니 굳이 부실이 넓을 필요 없습니다. 지나치게 좁지만 않으면 됩니다."
"면적이야 그렇다 쳐도 보통은 다들 입지가 좋은 쪽을 선호하는데요. 신입 부원을 확보하는데 유리하니까요."
"유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사람의 왕래가 많으면 활동에 불편을 겪을 것 같습니다."
"창문도 적은 것 보다야 많은 게 좋지 않나요? 밖도 잘 보이고."
"안에서 밖이 잘 보인다는 건 돌려 말하면 밖에서도 안에서 뭐하는지 잘 보인다는 거죠? 전 보는 눈이 많은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동아리연합회 회장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까지 만나온 동아리들은 조금이라도 더 좋은 조건을 챙기려고 끊임없이 비교하고, 요구하고, 바득바득 물어뜯다 보니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게 피곤했지만,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이 학생회장 님은 검소함을 실천하는 건지, 다른 동아리들을 배려하는 건지, 단순히 심사가 꼬인 건지 남들이 기피할 만한 선택만 골라 담으려하고 있다. 도무지 이해를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요청을 받았으니 제일 안 좋은 부실의 사진을 꺼내서 유리아에게 보여줬다.
"이 부실은 지금까지 주인을 만난 적이 없어요. 다들 차라리 맨바닥에서 부활동을 하고 말지 이 부실은 줘도 안 받더라고요. 그도 그럴게 4층 구석에 혼자 있는 부실이거든요.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짓다보니 그 밑에 방 하나가 생길 정도의 공간이 남길래 다용도실 하나를 만든 건데... 이걸 뭐에 쓰기도 애매해서 그냥 부실로 지정해놓은 거라 부실 노릇하기는 참 안 좋아요. 4층 구석에 숨어있어서 일부러 찾는 게 아닌 이상 우연히 발견할 일도 없고, 창문도 하나 뿐인데 그마저도 구교사 건물이 앞을 딱 가로막고 있어서 담쟁이덩굴 밖에 안보여요. 게다가 주변에 인접한 다른 동아리 부실도 없어서 분위기도 완전 썰렁해요."
"최고입니다. 다른 건 볼 것도 없이 이 부실로 하겠어요."
"대체 어떤 기준으로 평가를 하시는 거죠? 체스부가 아니라 죄수부인가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부원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항의해서 나중에 다시 찾아와도 바꿔주기 어렵다고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항의하는 부원이 있어도 없는 거로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니까요."
아무렇지도 않게 섬뜩한 말을 하는 유리아를 보고 동아리연합회 회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자신이 유리아가 제출한 동아리 서류에 부결 도장을 찍었다면 분명 이 검은 냉혈한이 자신을 '없는 거'로 만들어버리지 않을까? 이 떡잎부터 남다른 아가씨가 번듯한 권력자로 자라면 얼마나 무서운 어른이 될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근데 정말 이 부실로 괜찮으시겠어요? 다른 좋은 곳 놔두고 왜 굳이 이런
곳을 고르시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네요."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 부실이 아니면 안 괜찮을 것 같습니다. 더 얘기해봤자 불필요한 시간 소모일 뿐이니 바로 이 부실로 안내해주시겠습니까?"
"저도 참 별일을 다 겪는군요. 그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상태가 심각하니 그 점은 유의해두세요."
"기대되는군요."
"모르겠네요. 그냥 생각하는 걸 그만둬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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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칼립스 학원의 어느 점심시간. 남은 기숙사 조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지겨워진 에반은 뭔가 좀 더 신선하고 파릇파릇한 야채를 먹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혔다. 그런 그가 욕구 충족을 위해 찾아온 곳은 누르워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였다. 언제 한번 꼭 와야겠다고 눈으로 점 찍어뒀는데 지금이 최적의 시기였다.
"후우~~ 흡!!"
샌드위치 가게 문을 연 에반이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밀빵이 익어가는 냄새를 빨아들였다. 진열대에 누워 있는 온갖 종류의 신선한 야채들이 흡사 무지개를 방불케했다.
"좋구나, 좋아."
에반이 주문을 하기 위해 계산대로 향했다. 그런데 먼저 와있는 작은 손님이 입고 있는 복장이 너무도 눈에 익었다. 루나칼립스의 교복이였다. 에반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시간대에 누르워에서는 학생을 찾아보기 힘들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학원 학생을 찾아보기 힘들다. 라쿠이르 번의 시민들이면 모를까 마법학원의 아가씨, 도련님이 이런 서민 내음 풀풀 나는 가게에 점심을 먹으러 오는 건 상상하기 힘든 경우라
신기할 따름이였다.
뭐 맛있는 음식 앞에서 신분의 고저가 무슨 의미인가? 에반은 신기하다는 생각도 이내 잊어버리고 계산대 앞에 섰다. 종업원이 에반과 학생의 앞에 서서 주문을 받았다.
"야채는 모두 넣어드릴까요?"
종업원의 질문에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올리브는 빼고, 토마토 많이."
"토마토는 빼고, 올리브 많이."
"뭣?!"
"하?!!"
에반과 그 학생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물오른 여름 나뭇잎 같은 민트색 머릿결에, 신비로운 옥빛이 감도는 눈동자, 꼬장꼬장한 표정. 분명 루밀리 아이텔소드였다.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외나무다리에서 진검을 들고 마주선 원수 마냥 서로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나 참. 어떤 철부지 아가씨가 편식을 하나 했더만, 우리 사감보조님이였잖아? 품위유지는 어디로 가고 어린애처럼 토마토 빼달라는 소리나 하고 있어? 설마 기숙사에서 조식 먹을 때도 반찬 골라내서 먹나?"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애초에 자기도 올리브 빼달라고 하셨으면서!"
"토마토가 빨갛게 익으면 의사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는 말도 못들어봤어? 건강하게 잘 자라려면 토마토도 잘 챙겨 먹어야지?"
"하! 올리브가 노화 방지에 좋다는 거 모르시나요? 보아하니 이제 슬슬 챙겨드셔야 할 것 같은데요."
"뭐라고?! 내가 몇 살인 줄 알아?!"
종업원은 서비스 업종의 거친 풍파에 단련될 대로 단련이 되었는지 앞에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말리지도 않았다. 그냥 빨리 입에 먹을 걸 물려주고 보내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해결책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주문을 계속 받았다.
"소스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토마토케쳡 듬뿍!"
"올리브 오일 넉넉하게요!"
"하 거참!!"
"어휴..."
종업원은 앞에서 만담 하는 두 사람을 내버려둔 채 자기 일에 집중했다. 그러는 동안 종업원 앞에서 다 큰 어른과 덜 큰 학생이 서로 으르렁 가르릉 신경전을 벌이느라 바빴다.
"무슨 올리브를 그렇게 먹어대? 변비야? 고지혈증 있어?"
"그러는 당신은 라이코펜을 그렇게 찾으시는 걸 보니 전립선암 걱정이 많으신가 봅니다?"
"뭐라고?!"
아까부터 선빵 쳐놓고 압도적인 손해를 보는 에반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종업원은 묵묵히 손을 움직여서 에반의 샌드위치에서 뺀 올리브를 루밀리의 샌드위치에 넣고, 또 그녀의 샌드위치에서 뺀 토마토를 에반의 샌드위치에 넣었다.
"베이컨 들어가는데 어떻게 해드릴까요?"
"바삭하게 바짝 익혀야지."
"부드럽게 살짝만 익혀주세요."
"하여간 그럴 줄 알았다."
"말을 말아야죠 어휴."
"기름 질질 흐르고 흐물거리는 베이컨을 야채 사이에 넣고 싶나?"
"골판지처럼 빳빳해진 베이컨을 무슨 맛으로 드시나요?"
종업원은 완성된 샌드위치를 종이로 포장해 고정시키며 말했다.
"토마토를 올리브유로 조리하는 게 영양분 흡수에 가장 좋거든요? 그러니 두 분도 친하게 지내시면 생각보다 좋은 점이 많을 거에요."
"햄버거에서 토마토 빼서 먹을 편식쟁이랑은 친해질 수 없다!"
"저 역시 피자에서 올리브 빼서 먹을 사람과는 겸상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네, 네. 뭐가 됐건 가게 안에서는 싸우지 말아주세요."
한창 씩씩거리던 두 사람은 각자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루밀리는 올리브유에 젖어 반들거리는 올리브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물고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옆자리에서 에반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시선을 의식한 그녀가 말했다.
"저에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신가요?"
"뭐, 이렇다 할 건 없지."
"그럼 됐군요."
루밀리는 다시 자신의 샌드위치를 베어물었다. 에반은 그런 루밀리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열심히 턱운동을 할 때마다 볼주머니가 부풀었다 줄었다를 반복했다. 문득 시선을 느낀 루밀리가 에반 쪽을 돌아보는 바람에 눈이 마주쳤다.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별 건 아니고. 너 예전에 엘리아에게 케이크 준 적 있다고 했지? 올리브 케이크였나."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당신도 하나 맛보고 싶으신가요?"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고. 혹시 엘리야 말고 다른 지도원에게도 케이크를 준 적 있나? 초콜릿 케이크로."
루밀리는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표정을 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그녀 역시 에반에게 쇼콜라 케이크를 선물해 준 사람이 아닌 게 확실했다.
"저는 초콜릿도, 케이크도 안 좋아합니다. 물론 당신도 안 좋아합니다."
틱틱대는 저 표정으로 보아 부끄러워서 괜히 새침떼는 건 분명 아니였다. 루밀리는 그런 표정 연기를 하기에는 얼굴에 너무 많은 걸 적어놓고 다니는 타입이니까.
"더 할 말 없으시죠?"
"그래, 그래. 마저 맛있게 먹어라."
에반은 머리가 다시 복잡해졌지만 이내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자신의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물었다. 야채들의 하모니가 확실하게 반주를 깔아주는 동안 흥건한 즙을 뿜어대는 토마토의 맛이 거침없이 파고들어왔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에반은 좀 전의 루밀리가 지었던 것과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 케이크를 누가 줬는지가 뭐가 중요한가? 어쨌건 좋은 케이크였고, 독은 확실히 없었고, 프릴이 맛있게 잘 먹었다. 선심을 써 준 학생의 호의에 감사하는 차원에서 그 익명성을 존중해주는 게 신사적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간만에 여유를 가지고 식사를 하던 에반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필기가 빼곡한 루밀리의 수첩이였다. 다만 내용을 보아하니 학원 시험에 나올법한 부류의 공부는 아니였다.
카그루의 유래와 현황, 자연 상태의 카그루와 아티팩트 카그루의 비교, 이리의 역사, 킬링 이터의 등장과 행적 분석, 주요 이리 집단과 그에 따른 시민 피해, 일그러진 별들 등등. 낡은 수첩의 페이지 마다 유명 범죄자나 무법자 집단에 관한 자료들로 가득했다.
"흠...."
에반은 루밀리를 또 한번 유심히 보았다. 다소 까칠하긴 하지만 귀족이나 왕족 특유의 오만함과는 전혀 다른 인상이였고, 낡은 수첩을 들고 샌드위치 가게를 찾는 모습은 부유한 상인 집안과도 거리가 멀어보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인상, 몸짓, 목소리에서는 기사 특유의 곧게 뻗어나가는 힘과 수사관들이 지니는 겁없는 용기가 느껴졌다.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수첩을 넘겨보는 루밀리를 보고 있는 에반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