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4화 〉Session 1 (54/88)



〈 54화 〉Session 1

No Problem Company의 본사 지하 깊은 곳. 최상위 보안 등급의 제한구역으로 통하는 관문 앞을 당직 NPC들이 지키고 있었다. 가장 민감한 대외비를 취급하는 구역답게 이곳을 지키고 있는 NPC들도 모두 A급 정예 전투원들이었다. NPC들 사이에서 A급이 가지는 위상을 생각하면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시설인지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었다.


"기분이 이상해. 숨쉬는 것조차 찝찝해. 마법이나 아티팩트 같은  쓰지도 않았는데 이명이 간질거리는 거 같아서 역해."

"또,  시작이지."


당직 NPC 하나가 자신의 동료에게 투덜거리기 시작했지만 그의 동료는 말상대 하기도 귀찮았는지 푸념을 받아주지 않았다.

"넌  그래?"

"뭐가?"


"여기에 있다보면 속이 울렁거려서  참겠어. 이거 분명 기분탓이 아닐꺼야."

"맨날 그렇게 꿍얼거리고는 근무 교대해서 밖에 나가자마자 햄파이를 처먹는데 설득력이 잘도 있겠다, 그치?"

"듣고보니 그것도 이상해.  햄파이 별로 안 좋아해. 근데 여기 있다가 지상으로 올라가면 그렇게 매점 햄파이가 땡기더라? 이상한 일이야. 여긴 모든 게 이상해. 그냥 다 이상해. 아무튼 이상해."


"니가 제일 이상해. 좀 닥치고 있어봐."


"그럴싸한 가설이 떠올랐어! 들어봐."

"또 여기에는 매점에서 설치한 특수한 아티팩트가 심어져 있어서 근무 시간 동안 햄파이를 사먹고 싶다는 암시에 걸린다는 소리를 하려는 거냐?"


"어떻게 알았어? 내 마음속을 읽기라도 한 거야?"

"니가 맨날 똑같은 소리를 한다고는 생각 못 하냐? 개소리 할 거면 제발 레파토리라도 좀 바꿔가면서 해라. 맨날  놈의 매점 햄파이 음모론 어휴..."


"야 니네 둘! 좀 닥쳐봐! 니들 때문에 듣고 있던 나까지 햄파이 땡기잖아!"

"그렇다는데? 이것도 매점의 함정이 발동한  아닐까?"

"넌 입만 열면 헛소리가 질질 새지만, 여기가 이상하다는 말만큼은 사실이다. 으휴."


당직 NPC들이 적당히 시간 죽이면서 시설을 지키고 있는데 외문 쪽을 관리하던 NPC가 난처한 얼굴을 하고서 찾아왔다.

“뭐야? 무슨 일로 여기까지 들어왔어? 근무 바꿔주러 왔으면 두 팔 벌려 환영인데.”

“그럴 리가 있겠냐.  좋은 소식이다.”


“씁… 그럼 그렇지. 뭔데? 또 갑자기 교대표에 빵꾸 나서 연장 근무야?”

“그건 아니야.”

“그럼 최악은 면했네. 아무튼 뭔 일인데?”

“S급 하나가 막무가내로 들어오겠다 하는 중이야.”

“시발 뭐라고?!”


당직 NPC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표정을 구겼다.

“그러고 보니 생각지도 못한 최악의 경우가 더 있었네. S급이 쳐들어온다니…… 왜 하필 시발 내가 근무일 때냐고, 아아!”

“그래서? 누가 왔는데?”

“아더레이는 아니겠지? 제발 아더레이는 아니라고 해줘!”

“플루토. 플루토가 왔어. 또 저기압인 표정으로 회장님을 찾고 있어.”

“아니 회장님을 회장실에서 안 찾고 왜 자꾸 여기서 찾아? 회장님이 이런 지하 밑바닥에 찾아올 일이 있으시겠냐고?”


“낸들 알겠냐?”

“그나저나 플루토인가. 너도 전에 본 적이 있지 않던가?”

“아니. 그건 다른 S급이었어. 애초에 같이 다니면서 행동하지도 않았고.”

“난 외근 뺑뺑이나 돌다가 최근에 본사 온 거라 S급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그래서 그 플루토라는 S급은 어떤 부류지?”

“제일 막 나가기는 하는데 그나마 말이 통해서 대화로 풀어나갈 여지는 있어.”

“아 그러면 지상에서 대화로 풀어서 돌려보내라고 해. 여기까지 들여보내서 대화하면 뭐가 달라져? 다시 가서 설득해봐.”


“그럴 필요 없다. 이미 왔으니까.”

파츠츳!! 지하 복도를 비추는 조명이 불안정하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니 어둠 속에서 황금빛 안광이 잠시 번득이다가 사라졌다. 이윽고 저벅저벅 발소리가 복도를 타고 들려왔다. 누군가가 어둠을 두르고 다가오고 있었다. 고장  것처럼 불안정하게 점멸하던 전등들이 그가 지나갈 때마다 맥없이 꺼져버렸다. 거리가 좁혀지자 어둠  발소리의 실체가 어렴풋하게나마 보였다. 조문객처럼 우울한 흑색 제복을 차려 입은 남성이었다.

“플루토…!”

NPC들은 반사적으로 응전 태세를 갖추었다. 같은 직장 동료가 찾아온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경직된 풍경이었다.

"어떻게 벌써?! 사중 결계에다가 온갖 보안 술식을 걸어놔서 아무리 빨라도 이렇게 금방 해제할 수는 없었을 텐데?!"


"뭐하러 술식을 풀고 앉았지? 그냥 문을 뜯어버리면 그만 아닌가?"


"...?? 뭐요?"

저쪽이 자물쇠를 채워놓는다고 해서 이쪽이 반드시 열쇠를 마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모른채 S급을 상대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결계를 치고 술식을 짜는데 사활을 걸던 NPC는 망연하게 서서 손을 떨었다. 내부까지 침입한 에반 플루토는 자신을 막아선 NPC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우호도 적대도 어느 쪽도 아닌 무표정. NPC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어찌할지 머리를 맞댔다.

"이제 어떡하냐? 가란다고  거면 여기까지 뚫고 들어오지는 않았을 거 아냐?"

"니가 가서 말해봐."


"나?! 내가 왜?!"


"아니 아무튼 누군가는 가서  걸어봐야   아냐."


"그니까 왜 나냐고?!"


"니가 니 입으로 말했잖아. 대화로 풀어나갈 여지가 있다고."


"이 씨..."

동료들이  떠밀어서 총대를 메게 된 그 NPC는 에반 앞으로 나아갔다. 에반은 적의나 살기 같은 걸 일절 내비치지 않고 서있을 뿐이였다.


"오랜만입니다, 플루토. 저 기억하십니까?"


"레터."


"의외네요. 기억하고 계실 줄이야. 마지막으로 봤던 게 안개전쟁 때니까 족히 12년은  지났는데 말이죠."

"그때 네가 의뢰를 받고 지키던 소녀 기억하나? 이젠 내가 지키게 됐다. 지킨다고 말하는  맞는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인연 앞에서 세상은 참 비좁은 모양이다."

"그럴지도 모르죠..."

"....."

"아무튼 그건 그거고, 심층부 시설 출입에 관해서는 저희 쪽에서 보고 받은 사항이 없는데, 여긴 누구의 허가를 받고 들어왔습니까?"

"저 안에 볼일이 있다."

"누구의 허가를 받고 들어왔는지 물었습니다."


"갈길이 바쁜데 비켜줄 수 있겠나?"


"안 된다고 하면 힘으로 쓸어버리고 가실 거면서 뭐하러 물어보시죠?"


"그래도 같은 직장에서 고생하는 처지인데 예의상 절차라는 게 있지 않겠어?"


"예의상 절차요? 문짝 뜯어버리는 것도 절차의 일부입니까?"


"어떻게 할 거지? 끝까지  막을 건가?"


레터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가 자신을 지켜보고있는 동료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는 에반에게 답했다.

"방비 근무 서는데 침입자가 발생하면 당직자들이 덤터기 쓰는 게 이만저만 아니잖습니까? 더욱이 이런 민감한 시설은 특히나 문책 수위도 높고요. 무슨 말 하는지 이해하시죠?"


"불똥 안 튀게 해달라는 거지."

"잘  부탁 드려요. 아까 하셨던 말씀대로 같은 직장에서 뺑이 치는 처지 아니겠습니까?"

"알았다. 내가 책임지도록 하지."

"꼭  부탁합니다."


레터가 동료들에게 눈짓을 보내자 당직 NPC들이 모두 에반에게 길을 터주고 관문을 열었다. 관문이 열리자 에반은 다시 어둠을 두르고 앞으로 나아갔다. 에반이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가자 관문이 굳게 닫혔다. 에반을 보낸 NPC들이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 돌렸다.

"이거로 된 걸까?"


"어차피 못 막아. 결국  막았다고 뒤질 신세라면 개기다가 깨지고 뒤지느니 그냥 놀다가 뒤지고 말지."

"그나저나 저 사람이 S급 NPC 중 하나인 플루토라는 거지? 레터 넌 전쟁 때 같이 의뢰 뛰었다며?"

"같이 의뢰를 수행한 건 아니야. 내가 맡은 의뢰인데 나중에 플루토가 개입했을 뿐."

"그  어땠어?"


"달라진 게 별로 없는데. 그때도 지금처럼 어두침침해서는 가는 곳마다 초상집 분위기를 풍기고 다녔지. 같이 오래 있었다가는 나까지 우울증이 도질 거야."

"또 모르지. 의뢰에 따라서는 시덥잖은 농담도 하면서 낄낄거리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까불대고 다니고 그럴지도. S급 씩이나 됐으니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만들기야 일도 아닐  아냐?"

"그럼 S급도 매점에서 햄파이 사먹으려나?"

"넌 좀 닥쳐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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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자 어두운 복도가 펼쳐졌다. 에반 플루토는 담담하게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앞으로 향하다보니 눈이 부실 만큼 밝은 빛과 보드라운 바람이 그를 감쌌다.


터널 같은 어둠을 빠져나오자 그곳에는 정원이 있었다. 작은 새 지저귀고, 아름드리 사과나무 그늘을 드리우는 어여쁜 정원이었다. 이런 깊은 지하에 어떻게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푸른 정원이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이젠 눈물조차 나지 않아.

"Idadi sini adna rad. Axhkiro di sini rad."

정원 한 켠에 앉아있는 새하얀 여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밀실일 터인 지하에서 근원 모를 산들바람이 그녀의 하얀 단발을 보드랍게 쓰다듬듯이 불고 지나갔다. 에반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서 순진무구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미소를 본 에반이 아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인연 앞에서 세상은 참 비좁아."


사르륵. 따스한 햇살도, 싱그러운 녹음(綠陰)도, 사과나무도 마치 잠깐의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한순간에 사르르 사라졌다. 미소 지으며 반겨주던 은빛 단발의 소녀 역시 손 흔들어 줄 겨를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정원이 사라지고나자 어두컴컴하고 빈 공간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여제석이 놓여있었다. 마치 에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듯이.

"그래. 정말로 비좁아서 도망칠 곳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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