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3화 〉2-2. 그의 이야기 (53/88)



〈 53화 〉2-2. 그의 이야기

아주 먼 옛날, 스스로가 뿜어대는 빛의 찬란함에 눈이 멀어버리고 만 제국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제국의 이야기입니다. 다만 그 제국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떻게 무너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이야기입니다.

질서 바르게 혼란스럽던 어느 시대. 제국의 새로운 황제를 정하기 위해 후계자 자격이 있는 모든 적격자들이 모였습니다. 어느 황태자는 자신이 가장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으니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황녀는 자신이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려 왔으니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귀족은 자신이 돈이 가장 많으니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귀공자는 자신이 가장 혁혁한 전공을 많이 세웠으니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어린 황녀는 말했습니다.

"저에겐 군대도 없고, 넓은 영토도, 많은 돈도 없습니다.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작은 정원 뿐이에요. 작은 새 지저귀고, 아름드리 사과나무 그늘을 내어주는 어여쁜 정원이죠. 처음에는 황궁 한 구석 흙 한 줌에 뿌리내린 풀꽃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제가 발걸음을 멈추고 보살펴주니 지금은 아름다운 정원이 되었답니다. 황제가 되면 이 세상을 사람들이 행복하게  수 있는 정원처럼 만들어야 해요. 낙원을 만들어야 해요."

모두가 어린 황녀를 비웃었습니다. 그 누구도 어린 황녀가 황제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비록 어린 황녀에게는 군대도, 영토도, 재산도 없지만 그녀에게는 가장 정의로운 관료들과, 가장 지혜로운 여인, 그리고 그녀를 지켜주는 한 떠돌이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떠돌이 남자는 어린 황녀에게 약속했어요.


"내가 너의 가장 예리한 칼이 될께. 내가 너의 가장 단단한 발톱이 될께. 내가 너의 가장 날카로운 이빨이 될께. 힘든 일이라면 나에게 맡겨줘. 어려운 일이라면 나에게 맡겨줘. 위험한 일이라면 나에게 맡겨줘. 전부 나에게 맡겨줘. 그러니 너는 너의 정원을 만들어."

떠돌이 남자는 '이빨'이 되었습니다. 이빨은 군대를 자랑하던 황태자를 물어뜯었습니다. 영토를 과시하던 황녀도 물어뜯었습니다. 돈이면   줄 알았던 귀족도 물어뜯었습니다. 전쟁을 좋아하던 귀공자도 물어뜯었습니다.

어린 황녀는 여제가 되었습니다. 드넓은 도시에 우뚝 선 마천루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렸습니다. 높은 산도, 깊은 바다도 굴복했습니다. 그러나 여제는 찬란한 옥좌를 비우고 자신의 정원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여제는 온 세상을 정원으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여제는 우선 제국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두 다리로 서서 걸으며, 손을 뻗어 무언가를 쥐고, 생각하며, 울고 웃는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피조물들이 감히 창조주들을 거역할 수 없도록 극히 적은 양의 마력만을 불어넣었고, 그렇게 새로운 세상의 정원사로 일하게 될 '대체 인류'가 탄생했습니다.

대체 인류는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생각을 할 수 있지만 그 어떤 감정도, 자아도 찾아볼 수 없었죠. 이래서는 제국에 흔하고 널린 다른 인형들과 다를 게 없었어요. 그래서 여제는 '대체 영혼'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대체 영혼을 만들기 위해 금지된 옛 마법에 손을 뻗으려 하자 여제 곁을 지켜온 가장 정의로운 관료들이 거세게 반대했습니다.


"황금왕조 시대의 금서를 해금하는 것 만큼은 동참할 수 없습니다. 분명 달빛왕조 시대의 파멸을 불러오는 결말만이 기다릴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부디 헤아려주시기를."

가장 정의로운 관료들은 끝까지 목숨을 걸고 반대했고, 결국 여제는 자신의 이빨로 하여금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왕조의 금기를 손에 넣은 여제는 대체 영혼을 만들어냈죠.

대체 영혼을 완성한 여제는 다음으로 '대체 시간'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잠깐의 멈춤도 허락하지 않고 무심하게 앞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속박되어 있는 이상 사람들은 상실과 이별을 겪어야만 하니까요. 낙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영원한 행복, 불멸의 세상이 필요했습니다. 여제는 가장 지혜로운 여인에게 또 다시 황금왕조의 금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지혜로운 여인은 단호하게 거절했죠.

"흐르는 물줄기를 막을  있겠느냐? 막는다면 썩어가는 그 물이끼를 어찌할 것이지? 물러나거라. 가서 너의 헛된 꿈부터 헹궈서 깨우거라."

가장 지혜로운 여인은 끝까지 완고하게 막아섰고, 결국 여제는 이빨에게 그녀의 목숨을 끊도록 시켰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막대한 대가였지만 결과적으로 여제는 대체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인류의 권능, 영혼의 권능, 시간의 권능. 모든 힘을 손에 넣은 여제는 마지막으로 이 권능들로 '낙원의 권능'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했어요.

여제의 이빨이 그녀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이죠. 이빨이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했던 정의로운 관료들은 한때 그의 동료이자 친구였고, 이빨이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했던 지혜로운 여인은 그의 스승이자 연인이였어요. 식어가는 연인을 부둥켜 안고 나서야 이빨은 여제를 멈추기 위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제는 이빨을 설득하려 했어요. 낙원만 완성된다면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다고 말이죠. 그러나 이빨은 그녀가 만들고자 하는 낙원을 믿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녀의 세상을, 그녀가 가꿔온 모든 정원을 부숴버리기로 했어요.


두 사람은 더 이상 어린 황녀와 떠돌이 남자가 아니였어요. 이제와서 그때 그 사이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이빨은 알고 있었고, 여제는 믿지 못했죠.


결국 여제는 이빨과 돌아섰어요. 그녀는 자신의 계획을 막으려는 이빨에게 대항하기 위해 특별한 대체 인류를 하나 만들었어요. 가장 뜨겁게 뛰던 심장과, 가장 처절한 마음과 비극을 재료삼아 빚어진 이 대체 인류는 단연 특별했어요. 본래대로라면 대체 인류는 사람을 거스르지 못하도록 약하게 설계되지만, 이 특별한 대체 인류는 황실의 모든 기술을 불어넣어서 사람을 아득히 능가하도록 만들어졌죠. 게다가 이빨 앞에서도 공포에 질리지 않고, 그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수 있었고요.

무엇보다도 특별한 건  대체 인류는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답니다.

하지만 사랑 역시 이빨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였어요. 결국 사랑은 이빨에게 패배한 채로 목숨만을 간신히 건져 도망쳤고,  뒤로 도망친 사랑이 어떻게 되었는가는 아무도 몰라요. 혹여나 지금까지도 어딘가에서 평범한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죠.

사랑마저 도망치고나자  이상 이빨의 진격을 막을 이는 없었어요. 아무리 훈련된 군대라 하더라도 이빨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였고, 아무리 여제의 권능으로 시간을 되돌리며 반복해봐도 이빨을 쓰러뜨리고 나아갈 수 있는 미래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죠.


결국 이빨은 낙원이 완성되기 전에 여제를 쓰러뜨렸어요. 하지만 여제를 쓰러뜨렸다고 해서 어린 황녀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어요. 이빨에게 남은 건 후회뿐이였지요. 그는 여제가 가지고 있던 인류의 권능, 영혼의 권능, 시간의 권능, 불완전한 낙원의 권능을 각각 네 개의 여제석에 나눠서 봉인한 뒤 누구도 찾지 못하는 곳에 숨겼어요.

여제가 사라지자 불완전한 낙원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어요. 마치 하늘의 모든 파란 부분이 땅으로 내려앉은 것과 같이 큰 홍수가  세상을 덮쳤고, 땅은 무너져 내려 물밑으로 가라앉았어요. 지켜주기로 약속한 사람을 물어뜯은 이빨은 후회속에 몸을 던진채 영원히 영원히, 깊이 깊이 가라앉았답니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런 눈빛은 하지 말아주세요.


지금은 바다 밑에 가라앉아 사라진 어느 제국에서 공포의 상징이자, 죽음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한 남자가 있었어요. 그는 여제를 즉위 이전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섬기며 총애를 독식했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무너뜨려야만 했죠. 폭주하는 여제를 막고 제국의 멸망을 바라보던 그는 바다밑으로 가라앉았지만, 세월이 흐른 뒤 어느 섬의 무덤에서 눈을 떴어요.

이것은 그의 이야기입니다.

제국이 멸망하던 그때 모든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 것은 아니였어요. 수몰을 면한 유일한 육지에 대체 인류들이 모여살고 있었어요. 이들은 제국이 수몰되어 멸망하기 이전에 사람들의 박해와 차별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외곽의 버려진 땅에 정착해 모여살던 대체 인류들의 후손이였죠. 모조품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버림받고, 학대를 피해 숨어지내던 비참한 운명이 도리어 그들을 구한 것이였어요.


제국의 흔적 중 대부분이 물밑으로 가라앉아 버린 뒤로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고립된 이들의 문명은 원시 수준으로 퇴보했지만, 무덤에서 깨어나 육지를 떠돌던 남자는 이들을 보살펴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때로는 숭배받기도, 때로는 박해받기도 하고, 때로는 조율하기도, 때로는 방관하기도 하며 후대 인류의 역사를 주시했어요. 그들에게 문자를 가르치기도 하고, 그들에게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속삭이기도 했죠. 신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악마라고 불리기도 했어요. 숱한 전쟁들을 지켜봐왔고, 마침내 아그루스라는 이름의 제국이 탄생하는 순간을 함께했고요.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는 자신의 힘이 돌아온 것을 깨닫습니다. 다급하게 거울을 보니 자신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 금안이 의미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자신의 옛 힘이 돌아왔다, 즉 자신에게  힘을 불어넣었던 여제가 다시 깨어났다는 뜻이죠.

여제가 다시 깨어났다. 그것은 떠돌이 남자에게 있어서 뿌리치고 싶은 악몽과도 같은 소식이였어요. 그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빨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는 여제의 잠을 깨운 어리석은 이들을 찾던 중 한 소문을 들었어요. 듣기로는 No Problem Company라는  회사가, 정체 모를 유물을 건진 뒤로 세력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다는 것이죠. 유물 발굴을 위한 인부를 파견하는 것으로 먹고 살던 그저그런 회사가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몸집을 불릴  있었던 것일까?


해답은 바로 여제석이였어요. 이들이 우연히 발굴해낸 수상한 유물은 '인류의 권능'이 봉인되어 있는 여제석이였죠. 긴 잠에서 깨어난 여제는 인류의 권능으로 'NPC'라는 대체 인류를 양산했고, NPC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여러 분야에 파견해 돈을 벌어들였어요. 여제석의 목적은 단 하나에요.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나머지 세 개의 여제석을 찾아내서 자신의 진정한 힘을 해방시키고, 온전한 육신을 입어 세상에 돌아와서, 이번에야말로 낙원을 완성시키는 것.

당연히 떠돌이 남자는 그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이빨로 돌아가 NPC 회사를 초토화시키려 했으나, 여제는 그에게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어느 제안을 던졌어요. 그는 여제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일단은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일단은 말이죠.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배신할 것을 분명히 아는 상태에서, 살얼음판 같이 차갑고도 위태로운 협력 관계가 맺어졌어요. 떠돌이 남자는 여제가 또 다시 이 세상을 지배하러 돌아오지 못하게 하리라고 남몰래 후대인들과 약속했고. 이 비밀스러운 약속을 굳게 안은 채로 지금도 후대인들의 제국 어딘가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네, 맞아요. 그는 지금도 어딘가에 있어요. 어쩌면 당신이 어제 만났을 수도 있고, 아까 봤을 수도 있어요. 저기 지나가고 있을 수도 있고요. 분명한  그는 아직 이 세상을 지켜보고 있다는 겁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아, 미안.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마.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아이스크림. 역시 맛있네요."


"그렇네. 단맛도 식감도 딱 적당했어. 다음에는 저쪽에 구경하러 가볼래?"

"가요, 가요! 안 그래도 뭐가 있나 궁금했어요!"


"진정해, 나 안 도망가니까."

이것은 그의 이야기입니다.

 



Chapter 2.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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