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1화 〉2-1. 얕은 잠 (10) (51/88)


  • 〈 51화 〉2-1. 얕은 잠 (10)

    가상 현실 체험을 마친 프릴 루에리아는 부스에서 나온 뒤로도 꽤나 들뜬 목소리로 자기가 봤던 것들을 한참 재잘댔다. 에반 플루토는 적당히 들어주면서 프릴과 함께 V 하우스의 전시회를 마저 돌아다녔다.

    "선생님도 제가 봤던 것들을 화면으로 보셨죠?"


    "응? 아아, 미안. 부스 안이 컴컴하길래 구석에서 잠깐 졸았다."

    "아깝네요! 선생님도 보셨어야 했는데. 물론 헤드기어를 쓰고서 직접 체험하는 거하고 옆에서 화면으로 보는 것은 차이가 크겠지만요. 어찌나 현장감이 생생한지 전 아직도 가상 현실에서 만났던 사람이 여기 어딘가에서 지켜보는 느낌이 드는  있죠?"

    그렇게 말하던 프릴이 갑자기 멈칫하고 걸음을 세웠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따라다니던 에반도 덩달아 멈춰섰다.

    "왜 그래?"

    "잠시만... 거기 그대로 서 계셔 주시겠어요?"


    프릴은 한쪽 눈을 찡긋 감고 자신의 손가락을 반대쪽 눈 앞에 가져다 대서 에반의 얼굴을 가렸다. 얼굴을 가리니 검은 복장과 흑발, 검은 구두, 검은 장갑이 남았다. 체격도, 체형도 가상 현실에서 만난 SHN이라는 정체 모를 사내와 비슷했다.

    '나... 무의식적으로 선생님을 떠올렸던 걸까?'


    "뭐하는 거야?"

    "하앗?!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좀... 헤헤. 그것보다 어서 저쪽도 구경하러 가요!"


    얼굴을 가린 에반의 모습에서 가면  SHN을 겹쳐보던 프릴이 에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이 퍼뜩 돌아와서 고개를 휘휘 젓고는 가던 길을 향했다. 가상 현실로 빚어낸 꿈에서까지 나오다니 내가 이 정도로 선생님을 의식하고 있는 걸까? 프릴은 그렇게 사뭇 소녀스러운 생각까지 하면서 가상 현실에서 봤던 짜릿한 기억의 여운에 잠겼다.


    "그거 아세요? 가상 현실 속에서 저는 아민 제국의 황녀였던 거 있죠?"

    "그래? 몇 번째 황녀?"

    "그, 그건  모르겠는데요... 일단 5번은 아닌 게 확실해요."


    "가상 현실이라 다행이네. 애저녁에 멸망한 제국의 황녀보다야, 지금 멀쩡히 있는 제국의 귀족 영애가 낫지 않겠어? 그건 그렇고 황녀가 되보니 어떻더나?"


    "거울을 봤는데 무척 아름다웠어요. 아민 시대 기준으로도 분명 미인이였겠죠?"

    "글쎄다. 아무튼 그렇게 가보고 싶어하던 아민 제국을 가상 현실 속에서나마 직접 보니 어떤 기분이냐? 기대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어?"


    "아무리 우월하고 진보된 세계라 해도 탐욕과 전쟁을 뿌리뽑지 못했어요. 오히려 건물이 높게 솟을수록 사람의 가치는 낮게 떨어졌고, 무기의 위력이 너무 탁월한 나머지 생명은 하찮아졌죠."


    "그래서 실망했니?"


    프릴은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아니요. 저는 아민 제국이 이상적인 낙원이였다고 믿지는 않아요."


    "낙원이라..."


    "아민 제국 역시 사람이 살던 곳이니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그로 인해 되풀이되는 실수에서 자유롭지 못했겠죠. 언뜻 보면 당연한 이치인데 그 동안 너무 간과했던 거 같아요. 역시 선생님과 함께 박람회에 오길 잘했어요."

    "즐거워 보이는구나."


    "즐거워요. 재밌는 것도 잔뜩 있고, 생각해 볼만한 것도 많고, 선생님도  얘기를 잘 들어주시니. 특히나 그 가상 현실 체험관은 정말  상상을 훨씬 뛰어 넘었어요! 상용화되면 극장들은 전부 문 닫겠죠?"


    "그때가 되면 극장에서도 그때의 방법을 찾겠지. 시대의 흐름에 표류하는 건 예술가들이 늘 해오던 일이니까."

    "그렇네요. 하지만 가상 현실의 활용성은 예술이나 오락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아요. 심리 치료는 물론이고, 뇌에 가상현실 형태로 시각 정보를 입력하면 눈이 불편한 사람도 앞을 볼 수 있어요."

    프릴은 V 하우스에 전시된 스퀘어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가상이라는 이유로, 진짜 현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할 수 없어요. 실체를 가진 것보다 가치 있는 허상이 갈수록 많아지는 세상인 걸요."

    "허허. 조예 깊으신 분께서 이렇게 열린 사고를 가지고 계시다니 아주 바람직한 일입니다."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에반과 프릴이 멈춰 서서 돌아보니 백의 가운을 걸친 중년의 학자가  사람을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아리땁고 지적이신 분께서 제 이념을 이토록  이해해주시다니 학자로서 기쁠 따름이군요."


    "누구시죠?"


    "반갑습니다. V 하우스의 대표이자 스퀘어 연구의 총괄 감독관인 버나드 박사라고 합니다. 오늘은 저희 전시회에 찾아와주셔서 대단히 감사 드립니다."


    자신을 버나드라고 소개한 그 과학자는 다시  번 정중하게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프릴도 예의를 갖춰 인사를 받았고, 에반은 관심없다는  삐딱하게 서서  산이나 바라봤다.


    "저기, 박사라고 하셨죠? 그렇다는 건...?"

    "아아, 네. 아그루스 국립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국립대학?! 의학 박사?!!"


    아그루스 국립대학이라는 말에 안 그래도 똘망똘망한 프릴의 눈동자가 더더욱 땡그랗게 커졌다.

    "그리고 지금은 라비나 진리협약의 일원으로서 지혜가 주도하는 세상을 이룩하기 위한 연구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지... 진리협약?!"


    프릴은  손을 살포시 모아서 떡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는 자신의 입을 가렸다. 그에 비해 에반은 심기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에반은 마음 같아서는 프릴을 데리고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그녀가 이상적인 학자와의 인터뷰를 눈앞에 두고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는 걸 알았기에 일찌감치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딴청을 피웠다.

    "명예로운 이름을 몰라본 제 실례를 부디 너그러이 넘어가 주시기를. 이렇게 존경스러운 학자를 만나게 되어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프릴이 귀족의 예법으로 경의를 표하자 버나드가 당황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과찬의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저는 명예나 존경을 누릴만한 인물이  되니 부디 예우를 거두시고 편하게 대해주시기를."

    신분에 상관 없이 본받을 만하다 싶으면 누구에게나 예의를 갖추는 점이 귀족치고는 별나다면 별난 프릴의 성향이었다.


    "아직 연구가 진행 단계인지라 전시회에서 많은 걸 보여드리기에는 다소 성과가 미흡합니다만, 잘 구경하고 계셨는지요?"


    "네! 조금 전에 가상 현실 체험관에 다녀온 참인데 정말 근사한 경험이었어요!"

    "그건 정말 기쁜 소식이군요.  가상 현실 증강 스퀘어는 제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역작  하나니까요."


    "완성되면 가장 먼저 어느 분야에 접목하실 계획인가요?"


    "완성? 아아, 그렇군요. 사실 제가 완성시키고자 하는 건 스퀘어나 가상 현실이 아닙니다. 비록 그 마공학 증강 장치들이 근사한 경험을 선사해 줄 수 있고, 또 무궁무진한 응용 방안을 가지고 있지만, 제 진정한 목적에 비하면 그저 한 걸음의 발돋움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목적이요?"


    에반은 프릴의 눈망울에서 또 별빛 비슷한 무언가가 반짝이는 걸 확인하고는 공부쟁이들끼리 재밌게 떠들도록 뒤로 살짝 물러났다. 프릴의 표정을 보아하니 시간이 꽤 걸릴 모양인데 심심하니 아까 그 음료 자판기 있던 곳에 한 번 다녀와 볼까 생각했지만 귀찮고, 싸구려 음료는  질색이기에 관뒀다.


    "혹시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비록 몸담은 학계가 다르다 하더라도 추구하는 목적 만큼은 라비나 진리협약의 다른 구성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낙원'을 만드는 것이죠."


    버나드는 프릴을 데리고 전시회장 한쪽의 넓은 곳으로 이동하며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집중해서 듣는 와중에도 남자를 상대하는 안전거리는 꼭 지키는 프릴이였다.


    "우리는 수많은 세균과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법을 익혀왔습니다. 그렇게 의학 서적의 두께가 두꺼워지는 동안 외부의 공격을 상대하는 방법은 계속해서 늘어왔으나, 정작 내부의 문제에 대응하는 방법은 알아내지 못했죠."


    "정신 의학의 정립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논의가 이루어진 분야죠. 몸을 고치기 위한 의학이 발전을 멈추지 않은 동안, 마음을 고치기 위한 의학은 걸음마도 떼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보이지 않으니까요?"

    "전부는 아니더라도 가장 중요한 핵심은 짚은 답이군요. 좀 더 정확한 답은 '해부할 수 없으니까' 입니다."

    "해부요?"


    "네. 의학 체계의 출발은 해부입니다. 해부를 통해 파악해낸 원리를 바탕으로 이론을 정립하고, 그 이론에 따라 검진을 하고, 진단을 내리고, 처방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나 정신은 그런 지극히 당연한 체계를 따르지 못합니다. 시진(視診)을  수도, 청진을 할 수도, 촉진(觸診)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진단을 내릴 수도 없고, 처방을 내릴 방도도 없죠."


    "아아..."

    "그러나 마음을 보거나 만질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마음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수없이 겪어봤으니까요."

    "맞아요."


    "이 암울한 세상 속에서 무거운 삶을 짊어지면 마음이 병드는 것은 너무도 금방입니다. 그런데 치료해줄 방법이 도무지 없다는 말만 반복하는  의학 박사로서 굴욕을 넘어서 절망입니다. 그때 제가 만난 은사님의 조언에 힘입어 발견하게 된 가능성이 바로 이것이죠."


    버나드가 단말기를 조작하자 전시회장 내부에 영사되어 있던 가상 현실 풍경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내부는 어둠 속에 빠졌다. 이윽고 울퉁불퉁하게 생긴 무언가가 홀로그램처럼 아른거리며 허공에 나타났다. 대칭을 이루는 구조에 호두 껍데기를 닮은 주름투성이의 외견으로 보아 분명 두뇌를 형상화한 것이였다.

    "뇌?"


    "우리의 뇌는 마치 현악기와도 같습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셀  없을 만큼 많은 현들이 매우 촘촘하게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허공을 화면 삼아 나타난 두뇌 이미지가 확대되자 복잡하게 얽힌 신경세포들이 생체 신호와 대사 물질을 전달하는 시각 자료가 펼쳐졌다.


    "보이십니까? 뉴런과 시냅스가 전기 신호를 주고 받는 모습입니다."

    "오염생물을 닮아서 징그러운  같으면서도 어딘가 신기하게 생겼네요. 저런  우리 뇌 안에 잔뜩 있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우리  그 누구도 이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법은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숨쉬듯 자연스럽게 이 악기로 온갖 잡음을 일으키며 살아갑니다. 뇌파라고 불리우는 뇌의 연주 소리는 기존의 해부학으로 밝혀낼  없었던 영역을 개척할 실마리라 할 수 있죠."

    "미지의 영역을 개척할 실마리요? 아민 제국처럼 말이죠?"


    "하하!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죠."


    버나드는 껄껄 웃으며 프릴에게 강연을 이어나갔다. 간만에 적극적으로 경청하는 사람을 만나서 신났는지 버나드는 가지고 있던 자료를 이것저것 허공에 띄우며 물 만난 고기처럼 아낌없이 자신의 연구 성과를 자랑했다. 프릴 역시 '미지의 영역을 파헤칠 실마리' 라는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스위치에 불이 들어온 상태였다.

    저렇게 된 이상 말릴 방도가 없다. 말릴 이유도 없다. 처음부터 프릴은 저러고 싶어서 이런 박람회에 찾아왔으니 여기선 즐기게 내버려두는 수밖에. 옆에서 살짝 떨어져서 듣고 있던 에반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아민 제국의 비유가 참으로 적절하군요. 1만 1천 미터의 깊은 바다보다 탐험하기 어려운 곳이 바로 사람의 머릿속입니다. 머리가 희끗하게  때까지 생애를 바쳐 연구에 전념해왔지만, 성과는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전시회 건물 하나조차 채우지 못하죠."


    "그렇지 않아요! 충분히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전시회 건물 하나조차 채우지 못했다니요? 저희 학원에는 이미 박사님의 성과로 가득한 걸요!"

    "학원? 학원이라면...?"


    "루나칼립스 학원이요."

    "아하. 명문 마법학원의 인재셨군요. 어쩐지 눈빛에 감도는 총명함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헤헤."


    “그나저나 루나칼립스 학원에 제 성과가 가득하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요?”


    “루나칼립스 학원의 기숙사에는 V 하우스에서 시험용으로 제공해준 꿈꿈 스퀘어가 숙소마다 있어요. 꿈꿈 스퀘어도 박사님의 작품이죠? 거의 모든 학생들이 만족하고 있답니다.”


    “아아, 수면 보조 스퀘어를 말씀하시는 거였군요. 호응을 얻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의심했는데 직접 써보고서 놀랐어요. 어떻게 장치를 작동시키는 것만으로 숙면이 가능한 거죠?”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서 죄송합니다만, 학생분께서는 숙면이란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시겠습니까?"


    "음...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수면이겠죠?"

    "효과적이고 효율적. 좋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기준으로 효율성을 따질까요?"

    "수면 시간 대비 실질적인 피로 회복 정도죠. 같은 시간을 자도 개운하게 일어나는 날이 있는가 하면 피로가 덜 풀린채로 일어나는 날도 있으니까요."


    "아주 좋습니다. 그럼 그 두 날의 차이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컨디션 상태나 심리 상태라고 보는데요, 그 외에도 많은 요인이 있겠죠."

    "좋습니다. 이제 이걸 봐주시겠습니까? 뇌파에 대한 실험 도중 발견해  겁니다."


    버나드가 단말을 조작하자 눕혀놓은 S자처럼 구불구불한 굴곡선이 나타났다. 프릴은 그 굴곡이 나타내는 의미를 이해하려고 유심히 살펴봤다.

    "하루에 8시간을 잔다고 치면 우리는 생애의 3분의 1을 잠든 채로 보내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수면이라는 행위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수면 시간 동안 우리의 뇌는 아주  변화를 보입니다."

    "그럼 이 그래프가 나타내는 게 잠을 자는 동안 나타나는 뇌의 변화인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잠이란 눈을 감았다 떠보니 아침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통념과는 달리, 밤에 눈을 감아서 아침에 다시 뜨는 그 사이에 우리의 의식은 몇 번이고 깊은 잠에 들었다가, 반쯤 깨어나기를 반복하죠."

    "그렇구나. 그럼 이 굴곡의 깊이가 충분하고, 또 간격이 안정적이여야 숙면이라 할 수 있겠네요?"

    "바로 그겁니다. 하지만 제가 진정으로 흥미를 느낀 구간은 바로 이곳이죠."


    버나드가 가리킨 곳은 굴곡이 높아서 각성 상태에 가까운 수면 뇌파 양상이였다.

    "제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이 '얕은 잠' 의 구간입니다. 사람이 꾸는 꿈도 모두 이 구간에서 펼쳐진다는 것을 아시나요? 의식과 무의식이 질서 없이 뒤얽히는  얕은 잠의 영역이야말로 정신 의학이 파헤쳐야 할 아민 세계와도 같습니다. 수면 보조 스퀘어나 가상 현실이 이 얕은 잠의 영역을 탐사하며 얻은 부산물을 마법과 접목시킨 결과물입니다."

    "와아..."

    프릴이 감명깊은 표정으로 버나드의 역작인 스퀘어들을 바라봤다. 의학의 힘으로 마음 또한 치료하고 싶다는 열의에서 시작된 연구가 뇌에 대한 발견으로 이어지면서 놀라운 가능성을 제시했고, 그 가능성은 마법을 통해 현실로 이루어졌다.


    "꿈에 대한 논문을 잔뜩 쏟아대다보니 학계는 제게 '몽상가' 라는 타이틀을 지어줬습니다. 학자에게 몽상가라니 반쯤은 놀리려는 의도가 담긴 작명이지만 저는 기쁘게 받아들였죠. 저를 잘 나타내는 타이틀이라는  사실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버나드는 백의 가운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제가 시간을 너무 오래 뺏었군요. 장래 유망한 어린 학자가  비전에 이렇게 경청하니 이보다 기쁠 수는 없습니다. 여기 제 명함을 드리겠습니다. 혹시나 나중에 제 조언이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연락 주십시오. 부족한 식견입니다만 조금이라도 더 쌓아온 제 경험을 아낌없이 나눠 드리겠습니다."


    "저, 정말인가요?"


    프릴이 버나드가 내민 명함을 바라봤다. 그러나 어느 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에반이 탁! 하고 버나드의 명함을 가로챘다. 명함을 대충 훑듯이 읽어본 에반이 자신의 자켓 안주머니에 명함을 챙겨넣었다. 버나드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점잖게 물었다.


    "그쪽의 선생님은 혹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냥 이 학생의 보호자니까."

    "그, 그렇군요. 시간을 할애해서 실례 많았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니 부디 느긋하게 둘러보시기를."


    버나드가 자리를 떠나고 나자 프릴이 에반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선생님! 저번의 윌터 지도원 님 때도 그렇고  그렇게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 무례하게 행동하시는 건가요?"


    "내가 문제 있다는  인정하는데 말이야, 너 역시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 너무 의심이 없는 거 아니야?"


    "의심이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일생을 바친 학자분을요?"


    "더 나은 세상이라... 됐다. 나중에 얘기하자. 이런 주제로 토론하기 보다는 전시회장을 더 돌아다니면서 놀자고."

    에반은 프릴을 달래주면서 자리를 옮겼다. 전시회장에 진열된 꿈꿈 스퀘어들이 뚜- 뚜- 하는 일정한 신호음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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