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2-1. 얕은 잠 (9)
인간이 가진 잠재력 중에서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항목이 세 가지 있다. 창의력, 악의, 그리고 그 둘의 시너지.
프릴 루에리아는 격납고 안을 둘러봤다. 드넓은 수용 면적을 가진 격납고 내부는 아민 제국의 폭정이 자제력을 상실했을 때 탄생한 대량학살 모듈 <인종청소기>로 가득했다. 광기 어린 황녀에게 선택받지 못한 생물체는 버튼 한 번 누르기만 하면 전부 백골만 남기고 도시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이 인종청소기들. 또라이 황녀가 모듈을 어떻게 손봤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같은 황녀끼리라고 너를 말소 대상에서 예외 처리 하지는 않았겠지."
"누구를 겨누기 위한 건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이런 끔찍하고 비윤리적인 무기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없애버려야 해요!"
"비윤리적이라고...?"
SHN이 순간 멈칫했다. 프릴 역시 그의 반응에 혹여나 자기가 뭘 잘못 말했나 싶은 생각이 들어 위축됐다.
"설마 윤리라는 단어를 꺼낼 줄이야. 윤리라... 너는 그런 노선을 지향한다는 거지?"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네요. 윤리라는 게 노선 지향 같은 거창한 단어가 필요한 개념이였던가요?"
"황녀가 아민 제국을 몰라도 이렇게 몰라서야 어떡하냐? 아무리 적격자라 해도 정원에 너무 오래 틀어박혀 지내면 현실 감각이 없어지기 마련인가 봐."
"...."
"어.... 뭐지? 화 안 내? 한 소리 들을 준비 단단히 해뒀더니만 조용하네? 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 여보세요?"
SHN이 프릴 주변을 알짱거렸지만 그녀는 적당히 거리를 두며 대답하지 않았다. SHN은 그런 프릴을 내버려두고 그냥 돌아섰다.
"역시 너 오늘 많이 이상해.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은데."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지금 그가 보고, 말을 걸고, 지키고 있는 대상은 '황녀'지 프릴 루에리아가 아닐 테니까.
"설마 홍차 한 잔 거른 여파가 이 정도로 큰가?"
SHN이 중얼거려도 프릴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최대한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SHN과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피했다. 이 세계에서 마주치는 모든 이들은 SHN을 포함해서 모두 프릴의 꿈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들일 뿐이니까. 자신의 무의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물과 깊이 대화한다고 해서 의미있는 결과가 나오지는 않겠지. 오히려 꿈의 전개에 모순을 빚어 오류를 일으킬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기, 그 정도로 화났어? 미안하다고. 모욕할 의도는 정말로 없었어."
"화난 거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니... 하아! 차라리 목에 찌릿찌릿이 오는 게 나을 지경인데."
"찌릿찌릿?"
SHN은 또 황녀와 관련된 내용이라 그런지 프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뒷통수를 헝클일 기세로 마구 긁적였다. 호쾌한 몸놀림으로 무장병력과 여왕거미를 해치우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쩔쩔매던 그는 잠시 말을 고르는 눈치를 보이더니 이윽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솔직히 말할 테니까 상처받지는 말아줘. 나는 역시 네가 황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곳, 아민 제국은 이름 없는 풀꽃에도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보는 너같은 사람이 어울리는 곳이 아니야."
프릴이 다소 경직된 표정을 애써 감추며 SHN의 말을 계속 들었다.
"네 정통성이나 능력을 폄하하는 게 아니야. 세상은 네가 가꾸는 정원처럼 아늑하고, 어여쁘고, 정성에 보답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지. 특히나 아민 제국은 더더욱. 내 말을 믿어. 내가 널 만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곳을 험하게 굴러다녔는지는 너도 얼핏 들었을 거 아냐?"
대체 무엇을 설득하고 싶은 걸까? 어딘가 간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목소리로 말하던 SHN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렵사리 뒷말을 덧붙였다.
"난 네가 어울리지 않는 왕좌에서 망가져가는 걸 지켜보고 싶지 않아. 그 자리에 걸맞은 존재로 변해가는 건 더더욱 보기 싫고."
군대에게 뒤쫓기는 전투기에서도 시덥잖은 농담이나 던지던 그가 어색할 정도로 침체된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물론 프릴은 여전히 이 대화를 전혀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문득 이상해도 한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이곳은 프릴의 머릿속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꿈속의 아민 제국인데... 벌어지는 사건부터,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까지 전부 구체적이여도 너무 구체적인 나머지 창조자인 프릴 조차 이해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하늘을 뚫는 마천루, 중력이 역전된 공중도시, 하늘에 고인 호수, 고층 건물을 타고 오르는 기계 거미들, 순간이동 무기, 인종청소기. 정말 이 모든 게 프릴의 상상을 통해 빚어진 각색이란 말인가? 프릴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이 정도로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이 잠재되어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때 위잉! 위잉! 하고 요란한 경고음이 울려 프릴이 깊게 생각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SHN도 자신의 주무기인 명왕성을 쥐며 태세를 갈무리했다.
"시설 경비대가 추가로 투입된 모양이야. 우리가 안 어울리게 감상에 젖어있으니까 도저히 못 봐주겠나 봐."
"여길 빠져나갈 건가요?"
"당연히 때 되면 가야지. 황궁이 암만 뭐 같아도 여기서 사는 거 보다야 낫지 않겠어?"
"가기 전에 이 인종청소기들은 다 파괴해야 하지 않나요?"
"이걸 언제 다 부수고 앉았어? 무엇보다 기껏 또라이 황녀를 물 먹일 기회가 생겼는데 조용히 부수고 나가면 그건 그냥 봉사활동이잖아."
"그럼 이대로 두고 갈 건가요?"
"당연히 아니지. 네가 손에 넣은 그거를 쓸 차례잖아?"
SHN은 프릴이 꽉 쥐고 있던 그 의문의 기계 장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프릴이 기계 장치를 잘 살펴보자 아까까지는 눈에 띄지 않던 버튼 하나가 보였다. SHN 쪽을 보니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릴은 이 버튼을 누르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
지이이이이잉!! 버튼을 누르는 순간 컴컴하던 격납고에 조명이 번쩍 들어오더니 인종청소기들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돔 형태로 되어있던 격납고의 천장이 열리며 하늘이 드러났다. 벽과 천장이 사라지자 불어온 거친 하늘바람이 프릴의 머리를 헝클었다.
프릴이 손에 쥔 기계 장치를 번쩍 들어올리자 신호를 감지한 인종청소기들이 부웅 떠올랐다. 인종청소기들은 자체적인 부유능력이 있어서 공중에 떠올라 하늘로 향했다. 창공에 대열을 맞춰 진을 치던 인종청소기들이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구체 형태로 되어있던 인종청소기들은 내장되어 있던 회로를 돌출시켜 서로 서로 연결망을 구축해나갔고, 수천 개의 인종청소기들이 연결망을 완성시킬수록 하늘에 나타난 거대한 마법진이 점차 점차 확대되어갔다.
이윽고 창공을 뒤덮을 기세의 마법진이 위쪽을 바라봤다. 위쪽에는 황태자의 지상도시의 하늘이 맞닿아 있었다.
콰쾅!! 어디선가 날아온 미사일에 인종청소기 몇 개가 격파되었다. 몇몇 회로가 끊어지자 마법진이 흐트러졌지만 인종청소기들은 빠르게 연산식을 재처리해서 연결망을 수복시켰다.
인종청소기를 격추시킨 미사일은 3번 황태자의 전투기 편대에서 발사한 것이었다. 황태자 역시 바보는 아닌지라 자기 영토의 생물체들이 사라져버리는 걸 손놓고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5번 황녀의 근위대와 도시 방위 편대 역시 대공 병력을 보내 황태자의 전투기 편대와 대치했다.
두 도시의 전투기 편대가 서로 마주보고 무장 모듈을 과시하고 있었다. 작은 불씨라도 떨어지는 순간 겉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지게 될 것이기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 5번 황녀 측에서 파견한 근위대가 먼저 경고의 메세지를 보냈다.
[AEP : 이 공중도시는 아민 제국의 왕좌에 앉을 정당한 혈통과 적법한 자격을 가진 황녀님의 영공이다. 황녀님의 영공을 무단으로 침범하고 선제 공격까지 가한 대가를 엄혹히 치르게 할 것이니, 지금이라도 응징의 무게를 덜기를 원한다면 겸손한 자세로 담판의 장에 나아와야 할 것이다.]
[OLC : 너같은 조무래기 따위하고 담판할 시간 없다. 나야말로 아민 제국이 필요로 하는 철혈과 명석을 겸비한 적격자이자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은 황태자. 가서 너희의 황녀를 불러와라.]
[KMP : 불러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신호기 사이에서 망나니라 불리우는 황태자와 미치광이라 불리우는 황녀의 목소리가 교차했다.
[OLC : 아아, 황녀여, 너의 영토가 내 머리 위를 지나가며 그림자를 드리워도 너그러이 이해해줬거늘, 조용히 지나가지 않고 이런 짓을 꾸미다니. 네년이 기어이 화를 자초하는구나.]
[KMP : 하필이면 항로가 너의 도시를 지나가야만 했던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겠지. 하지만 재수없는 황태자 씨, 말은 확실히 해두자고. 내가 뒤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었건 간에 내 영토에 선제 공격을 한 건 너다. 네 전투기 한 대가 내 도시에 쳐들어와서 막대한 피해를 일으켰어.]
[OLC : 그 전투기는 정기 순찰 도중 갑자기 제어권을 빼앗겨 설정해둔 궤도에서 이탈했다.]
[KMC : 네가 한짓이 아니라고 발뺌하려는 건가?]
[OLC : 정말로 내가 네년의 도시에 침공할 생각이였다면 고작 전투기 하나만 보냈겠나? 내가 가진 걸 모두 털어서라도 네가 가진 걸 모두 쓸어버렸겠지. 하지만 난 너같은 또라이와는 달라서 너처럼 반칙을 써가며 자신의 정당성을 깎아내리는 바보짓은 하지 않아.]
[KMC : 반칙? 정당성? 좀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하는 게 어떨까?]
[OLC : 장님이라서 저 인종청소기들이 안 보이나? 그게 아니면 머리가 안 돌아가서 사태 파악이 안 되나?]
[KMP : 저 인종청소기가 네 영토를 겨누고 있다는 보장이라도 있나?]
[OLC : 없으면 내 백성들이 다 녹아내리고 나서야 따지라는 건가?]
[KMP : '내 백성'? 흐음. 첩자를 색출하겠다고 피바람을 몰고 다니던 망나니 황태자님이 '내 백성' 같은 말도 하는 거야?]
[OLC : 말을 돌리려는 걸 보니 불리한 화제에서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지?]
[KMP : 불리하다고? 내가? 어째서?]
[OLC : 애초에 인종청소기는 진작에 폐기 칙령이 내려진 모듈이다. 왕좌가 공석이라고 해도 칙령은 절대적. 당연히 적격자들의 왕좌 쟁탈전 역시 칙령의 범위 안에서 이뤄져야 하지. 봐라. 넌 적격자들간의 규칙을 어겼어. 그래놓고 선제 공격이나 운운하는 꼴이라니, 과연 잡종의 피가 섞이면 이렇게까지 멍청한 소리도 할 수 있는 것이로군.]
[KMP : 리바이어던.]
[OLC : .....뭐라고?]
[KMP : 리바이어던 생체 실험. 관련 자료를 전부 인멸한 줄 알았지? 그런데 이걸 어떡하지? 그토록 첩자 색출 노래를 불러대며 단두대 위에서 춤 춰대던 게 확실히 성과는 있었는데 말이야... 완벽한 성과는 아니였네.]
[OLC : 너... 어디까지 알고 있지?]
[KMP : 글쎄? 궁금하면 황궁에 적격자들 불러모아서 낭독회라도 가져볼까? 아, 이거 하나는 말해야겠어. 이것저것 캐다보니까 역시 너의 일 저지르는 솜씨 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더라고. 황제 폐하의 서거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의심을 해볼만 하단...]
콰콰쾅!!! 황태자 측 전투기에서 발사된 람소로크 모듈에 황녀의 신호기가 박살나버렸다. 신호기가 공중분해되어 파편이 흩날리는 걸 신호탄 삼아 양측의 전투기들이 서로를 향해 화력을 퍼부었다. 근위대 편대들이 격돌하자 파랗던 하늘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이 갑작스러운 무력 충돌의 발단이 되는 건 갑자기 궤도에서 이탈한 전투기 한 대의 난동이다. 3번 황태자도, 5번 황녀도 아닌 다른 외부의 누군가가 둘을 이간질하려는 수작이라는 건 조금만 생각해봐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서로를 공격할 명분, 구실, 계기. 그것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걸 놓치지 않고 SHN이 판을 깔아준 덕분에 황녀는 선제 공격, 황태자는 칙령 위반이라는 명분을 캐치하고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둘은 왕좌에 가장 근접한 선두 주자이며 이 왕관 쟁탈전을 위해 가장 많은 피를 보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런 둘의 영토가 같은 하늘을 맞대는 동안 아무 일 없을 거라고는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모두가 황녀의 공중도시가 황태자의 영토 위를 지나가는 동안 충돌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다만 이번 만큼은 모두의 예상을 넘어설 정도로 치열한 양상으로 번질 듯하다.
SHN은 폭발음과 포성으로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다. 저러고 치고박고 싸우느라 우리를 신경 쓸 겨를이 없겠지."
"하늘이 온통 전쟁통이 되어버렸는데 저길 어떻게 뚫고 돌아가죠?"
"흠..."
SHN이 프릴에게 명왕성을 건네줬다.
"잠깐 이거 좀 쥐고 있어봐."
"네?"
프릴은 명왕성을 건네받았다. 명왕성은 어지간한 컴뱃 나이프 보다도 무게가 가벼웠다. 이렇게 가볍고 작은 무기로 그 거대한 기계 거미도 쓰러트리다니. 프릴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SHN이 그녀에게 물었다.
"너 헤엄은 칠 줄 아나?"
"네? 헤엄이요?"
"에라 모르겠다. 금방 끝낼 테니까 어떻게든 허우적거려 보라고."
"그게 무슨...?"
프릴이 답하기도 전에 SHN이 힘껏 달려나가더니 그대로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하늘에서 떨어지던 그는 곧 자신의 밑으로 빠르게 날아가던 전투기에 착지했다. 그대로 전투기 위에서 또 다른 전투기를 향해 뛰어올랐다. 그리고 비행하는 전투기를 붙잡고는 매달린채로 멀찍이 날아가버렸다.
"설마 나도 저걸 따라해야 한다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꿈속이라고 해도 저건 좀..."
멍하니 서서 SHN의 공중 곡예를 지켜보던 프릴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자신이 남일 보듯이 강 건너 불구경할 때가 아니라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명왕성은 자체적인 위력은 약하지만 순간이동이라는 변칙적인 활용성을 가진 모듈이다.
"어...??"
프릴은 갑자기 시야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광활하게 탁 트이는 것을 느꼈다. 명왕성을 쥐고 있던 프릴이 전투기에 매달린 채로 날아가던 SHN이 있는 곳으로 순간이동한 것이다.
"꺄아아아앗?!!"
프릴의 야무진 비명소리가 바람을 맞으며 하늘에 흩날렸다. SHN은 한손으로는 전투기의 날개를 붙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프릴의 손목을 잡았다. 남자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지만 지금 만큼은 거부 반응을 나타내고 있을 형편이 아니였다.
"자, 손 놓는다."
"네?!! 그게 무슨?!!"
"걱정 마. 금방 네 쪽으로 돌아갈 테니까. 오래 안 걸릴 거야."
"자, 자, 잠, 잠깐...?! 놓지 말아주세요!"
그러나 SHN은 프릴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놔버렸다. 매달릴 곳이 없어진 프릴의 몸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한없이 떨어졌다.
"꺄아아앗?!!"
거친 바람이 프릴의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기껏 예쁘게 맞춰입은 원피스 자락이 깃발처럼 나부낄 기세였다. 베레모는 진작에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 마천루들은 대체 얼마나 높은 건지 떨어지고 떨어져도 지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꿈에서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헤드기어를 벗으려고 시도해봤지만 눈이나 관자놀이 쪽을 손으로 만져봐도 헤드기어가 아니라 맨얼굴이 만져질 뿐이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면 까마득한 높이를 떨어지다가 지면에 쳐박히고 나서야 이 꿈이 끝나는 걸까? 아니면 이대로 계속해서 끝없이 떨어지는 걸까? 좋게 생각하자면 키는 좀 쑥쑥 클 거 같다.
고민하던 프릴의 눈에 맑은 물방울 덩어리가 보여왔다. 생김새 때문에 물방울이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공중호수였다. 풍덩!! 공중호수에 빠진 순간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공중호수는 바닥이 없어서 사방이 전부 수면이기에 햇살이 빈틈없이 들어왔다. 햇살을 한몸에 받는 맑은 물은 유리처럼 투명하고, 그 안을 넘실넘실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모습은 동화스럽기까지 했다.
비단같은 비늘을 가진 물고기들과, 유리 같이 투명한 물에 감싸인채 호수 밑으로 가라앉던 프릴은 점점 눈앞이 어두워지는 걸 느꼈다.
"일어나."
확!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헤드기어가 벗겨지자 프릴의 눈이 번뜩 떠지고 앞이 보였다. 헤드기어를 벗자 아민 제국의 도시도, 공중호수도 모두 사라졌고 V 하우스의 부스로 돌아와 있었다.
프릴이 아직도 꿈속의 광경이 아른거리는지 멍하니 앉아있자 또 다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려. 아직도 아른아른하면 아까 그 얼음 든 음료수 한 잔 더 마시러 갈래?"
"네...?"
프릴이 눈을 비비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니 흑발에 검은 옷, 검은 장갑의 남자가 서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SHN...이 아니라 에반 플루토였다. 그는 헤드기어를 들고 프릴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재밌는 꿈 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