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2-1. 얕은 잠 (8)
와장창!! 전투기가 벽을 뚫고 건물 안으로 들어와 쳐박혔다. 반파되어 연기가 나는 전투기의 문이 열렸다. 그러나 손상 정도가 심해서 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힘을 줘 밀어봐도 망가진 부품이 걸렸는지 도저히 열리지 않았다. 빠직! SHN이 성질머리를 담아 문을 걷어차서 날려버렸다. 밖으로 나온 그는 주변을 스윽 둘러봤다.
어둑어둑한 실내에 격납고로 향하는 문이 굳건히 잠겨있었다. 주변을 돌아다니며 살피던 SHN은 박살난 전투기에 대고 소리쳤다.
"어이! 살아있냐?! 죽은 거 아니지?!"
SHN이 부르자 전투기 안쪽에서 프릴 루에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으으... 전 괜찮아요!"
"쳇. 빨리 나와."
쳇? 방금 분명 쳇하고 혀 찬 거 맞지?! 프릴은 따지지는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전투기에서 내렸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어떻게 하긴. 네가 옳았다는 걸 확인해야지."
"제가 옳았다는 거요...?"
전후사정 문맥이 도저히 파악 안 되다보니 프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화가 자꾸 헛도니까 SHN 역시 답답하다는 듯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너 오늘 정말 어딘가 이상한데? 유달리 얌전한 것도 그렇고, 내가 아까부터 계속 반말하면서 '너' 라고 불러도 한 번도 발끈하지 않는 점도 그렇고. 뭐랄까... 내용물이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지."
"저, 저는...!"
프릴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SHN의 눈길을 피하며 뒷걸음질 치다가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강렬한 위화감에 이끌려 홀리듯이 거울로 향한 프릴이 그곳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것은 구름처럼 부드럽고 새하얗고 풍성한 은발을 찰랑찰랑 드리운 소녀의 모습이 아니였다. 서글픈 새벽하늘에 홀로 뜬 달빛처럼 창백하고도 야상적(夜想的)인 은빛 단발과 자수정처럼 윤기 있게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가 참으로 신비로운, 고독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거울너머에 있었다.
프릴이 자신의 볼을 꼬집어보자 거울너머의 여인도 똑같이 볼을 꼬집었다. 지켜보고 있던 SHN이 불렀다.
"어이, 황녀님. 오늘은 홍차를 못 마셔서 잠이 잘 안 깨나?"
"네...?!"
"정신 차리자고. 우리가 하도 초인종을 요란하게 눌렀더니 집주인이 열 좀 받았으니까."
붉은 레이저 포인트 몇 개가 SHN에게 집중되었다. 프릴이 흠칫 놀라 살펴보니 어느 샌가 나타난 무장병력들이 그를 조준하고 있었다. 저만치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이 건물의 관리자로 보이는 제복 차림의 근위대원이 무장병력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무장병력의 전투원들이 근위대원의 지시를 따라 저마다 자리를 잡고 SHN을 위협했다. SHN은 프릴에게 손짓하며 느긋하게 몸을 풀었다.
"여긴 내게 맡기고 물러나 있어. 금방 정리할 테니까."
SHN이 허공을 향해 팔을 쭉 뻗고 손을 활짝 폈다. 마치 무언가를 부르려는 것처럼.
"떨며 얼어붙어라, 명왕성."
SHN이 영창에 응답하여 모여든 검은 그림자를 손으로 움켜쥐자 그의 손에 무기가 나타났다. 한 손으로 쥘 만큼 작은 크기의 삼지창이지만, 창이라고 부르기에는 생김새가 포크와 비슷했다. 식기로 쓰이는 일반적인 포크와 비교했을 때 살짝 더 길었다. 중무장한 전투원들과 홀로 맞서기에는 솔직히 초라해 보였지만, SHN은 기교 있는 손동작으로 무기를 빙글빙글 돌리며 폼 내다가 꽉 잡아쥐었다.
"명왕성이잖아? 저런 덜 떨어진 실패작을 쓰는 놈이 있을 줄이야."
근위대원이 명왕성을 쥔 SHN을 비웃으며 사살 명령을 내렸다. 전투원들이 일제히 사격했다. 물론 SHN은 가만히 서서 당해주지 않았다. 그가 던진 명왕성이 전투원 한 명의 어깻죽지에 꽂힌 순간 그의 몸이 그림자에 감싸여 순식간에 사라졌다.
"크악?!!"
별안간 들려온 단말마 쪽으로 무장병력들의 시선이 향했다. SHN은 어깻죽지에 명왕성이 꽂힌 전투원의 등 뒤로 순간이동해 있었다. 전투원을 제압한 SHN은 어깨에 꽂힌 명왕성을 뽑아서 복부 측면을 깊이 찔렀다. 그대로 안쪽을 파고들게끔 손을 놀리자 괴롭게 신음하던 전투원이 늘어졌다.
"쏴!!"
전투원들의 일제사격이 SHN을 향해 쏟아졌다. SHN은 입고 있던 검은 정장의 자켓을 벗어서 칼라를 잡고 휘둘렀다. 촤르륵! 검은 정장 자켓이 형체를 잃고 그림자가 되어 흩어지더니 물에다가 풀어놓은 먹물처럼 허공에 퍼져나갔다.
전투원들이 뒤로 물러나면서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그림자가 삽시간에 퍼져나가면서 가까이에 있던 몇몇 전투원들이 어둠 속에 집어삼켜졌다.
"아무것도 안 보여!"
"광학 모듈도, 탐지 모듈도 통하지 않아! 단순한 어둠이 아니다!”
“이런 걸 의복 형태로 입고 다니다니, 이런 모듈은 듣도 보도 못했는데!”
“뭐가 됐건 신속히 시야 확보를... 으아악?!"
어두운 장막 속에서 전투원들의 비명 소리가 번갈아 가며 울렸다. 근위대원은 장막에 집어삼켜지지 않은 전투원들을 향해 명령했다.
"뭣들하는 거냐?! 쏴라! 마구 쏘다 보면 맞겠지!"
"하,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아군이 오사 당할 우려가 있습..."
"그런 게 중요해?! 황녀님의 돈으로 무장을 덕지덕지 발라놓고 위세 부리면서 호위호식 하는 주제에 이럴 때 네놈들 안위부터 챙기겠다는 거냐?! 외부인이 시설 안으로 침투하지 못하게 막는 게 최우선이다. 쏴라! 쏘지 않는 것들은 전부 불충죄로 다스릴 테니!"
전투원들은 어둠의 장막을 향해 화력을 집중해 무차별 난사했다. 잠시 뒤 장막을 뚫고 튀어나온 명왕성이 빙글빙글 돌며 허공을 갈랐다. 파팟! SHN이 모습을 나타내며 명왕성을 쥐고 그대로 바로 앞에 있는 전투원의 가슴팍에 꽂아 넣었다.
"크악?!"
빡! SHN은 가슴팍에 콱 박힌 명왕성을 쥐고서 그를 힘껏 걷어차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자신을 제압하러 달려드는 또 다른 전투원을 향해 명왕성을 휘둘렀다. 포크를 연상시키는 외견 때문에 찌르기만 할 수 있는 무기일 줄 알았는데, SHN이 힘을 실어 휘두르자 검은 궤적을 그리며 적을 베어넘겼다.
파칙! 마지막 남은 전투원이 빔 샤벨을 꺼내자 위협적인 소리가 났다. 그는 SHN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어 살인 광선을 휘둘렀다. 팍!! SHN이 어퍼컷 올리듯이 명왕성으로 상대방의 턱을 찍어올렸다. 그대로 상대방의 두 다리가 공중에 뜨도록 들어올려서 어깨 뒤로 넘겨 던져버렸다. 살벌한 소리를 내던 빔 샤벨이 사그라들었고 바닥에 널브러진 전투원이 움찔거리며 늘어졌다.
전투원들을 모두 무력화시킨 SHN이 두 팔을 벌리듯이 반쯤 들자 어둠의 장막이 몰려와 그의 몸을 감쌌다. 장막은 곧 다시 원래의 검은 정장 자켓의 형태로 돌아와 SHN의 몸에 착 붙었다. SHN은 재킷의 칼라를 정돈하며 정장 핏을 점검했다. 그렇게 잠시 맵시를 내고 난 뒤 혼자 남은 근위대원 쪽을 봐주자 근위대원이 버튼을 누르며 무언가를 작동시켰다.
쿠르르르!! 천장이 열리더니, 천장 너머 높은 공간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내려왔다. 거대한 구형의 기계장치로 보이는 그것은 뜨겁고 끈적끈적한 섬유 질감의 줄에 매달린 채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콰지직!! 어느 정도 바닥에 가까워지자 구형의 기계장치에서 다리처럼 생긴 부품들이 튀어나왔다. 복잡하게 생긴 부품들이 서로 맞물리며 튀어나오기도 하고, 결합하기도 하며 빠르게 상호 작용하다가 금방 거미의 모습으로 변했다. 쾅!! 거대하고 무거운 기계 거미가 바닥에 내려앉자 묵직한 소리가 났다.
"<강철을 먹는 거미 : 여왕타입>..."
SHN은 명왕성을 고쳐 쥐고 여왕거미를 노려봤다. 여왕거미 쪽 역시 무수한 눈알에서 쏜 붉은 탐지 광선을 SHN에게 집중시키고 있었다. 사냥감을 마주한 여왕거미는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신중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저돌적인 돌격과 함께 그 육중한 합금 다리를 들어올려 내려찍었다.
SHN은 민첩하게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구르면서 착지하는 동시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빔 샤벨을 주워들었다.
쾅!! 공격이 빗나간 여왕거미의 합금 다리가 두텁고 튼튼한 벽을 뚫으며 박혔다. 파츳! SHN이 빔 샤벨을 작동시키자 합금도 스치는 순간 깔끔하게 절단내는 광선이 솟아났다. 여왕거미는 벽에 박힌 자신의 다리를 빼내려고 움직였지만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파삭!! SHN이 큼지막한 종축을 그리며 광선을 휘두르자 여왕거미의 합금 다리가 잘려나갔다. 다리 한 쪽을 잃은 여왕거미는 육중한 몸체의 무게중심을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다가 한쪽으로 주저앉았다.
파슷!! SHN이 여왕거미가 다시 일어나기 전에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는데 천장 쪽에서 불길한 작동음이 들려왔다. SHN과 프릴이 위를 올려다보니 여왕거미가 내려왔던 천장 너머 어두운 공간에서 작고 붉은 불빛이 나타났다.
팟! 팟! 팟! 뒤이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불빛들이 떼지어 나타났다. 불빛들은 천천히 움직이며 어둠을 헤치고 나왔다. 그 많은 적색 불빛들은 전부 기계 거미들의 눈알이었다. 크기는 주먹 두 개 합쳐놓은 정도로 작은 크기였지만, 족히 수백 대에 달하는 숫자에서 비롯된 위압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벽을 타고 몰려오던 거미떼는 다리를 벽에 고정시켜 뿌리박고 저마다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 뒤에는 몸통이 열리더니 딱 봐도 무언가를 쏠 준비가 되어있는 총구가 솟아났다.
“터렛…!”
SHN을 노리던 거미떼는 총구를 확 틀어 프릴을 조준했다. 투다다다다! 프릴의 위로 탄환비가 쏟아졌다. SHN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프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한 팔로는 프릴을 끌어안듯 감싸고 반대쪽 팔로 정장 자켓을 펼쳐서 온몸으로 탄환을 막아냈다.
촤락! SHN이 명왕성을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던진 뒤 프릴을 꽉 안았다. 그러자 잠시 뒤 두 사람이 명왕성 쪽으로 순간이동 됐다. 거미 터렛의 집중포화에서 벗어난 SHN은 프릴이 무사한지 살펴보며 그녀의 어깨를 탁탁 털어줬다.
“으읏…?!!”
팍!! 프릴은 뒤늦게나마 SHN을 밀쳐내며 거리를 뒀다. SHN은 떨떠름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기껏 도와줬더니만 너무하는 거 아니냐? 아하, 총알받이 주제에 어딜 감히 내 옥체에 손을 대냐 이거지?”
“아, 아뇨! 저는…!”
“됐어, 나중에 얘기해."
SHN은 정장 자켓을 벗어서 프릴에게 덮어줬다. 정장 자켓은 프릴의 전신을 덮을 만큼 넉넉한 로브로 변해서 그녀를 감쌌다. 자신의 방어구를 프릴에게 넘긴 SHN이 와이셔츠 차림으로 여왕거미 쪽을 향해 섰다.
"일단 저 악취미스러운 골동품부터 어떻게 해야지."
SHN이 망설임 없이 여왕거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위에서는 터렛의 총탄 세례가 쏟아지고, 앞에서는 여왕거미가 시뻘겋게 달궈진 거미줄을 내뱉었다. SHN은 몸을 날려 거미줄 공격을 피하고, 천장 높이 명왕성을 던져올렸다.
파팟! 터렛이 SHN을 향해 총알을 퍼부었을 때 그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가 공중에 높이 뜬 명왕성이 있는 곳에 다시 나타났다. 명왕성을 쥔 SHN은 벽에 있는 어느 터렛을 찍으며 매달린 뒤 벽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터렛들의 공격을 제치며 높은 천장 가까이까지 벽을 타고 질주한 SHN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집중력을 순간적으로 끌어올린 뒤 손에 쥔 명왕성을 힘껏 내던졌다.
빗발치는 탄환 사이를 헤치며 쏜살같이 날아간 명왕성은 조금 전 빔 샤벨에 잘려나갔던 합금 다리에 꽂쳤다.
"저거...! 서, 설마!!"
근위대원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굳어섰다. 명왕성은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게 되면 주인을 비롯해서 주인과 근접한 대상을 즉시 명왕성의 근처로 순간이동 시킬 수 있다. 그런데 숙달된 사용자가 모듈 조작에 개입한다면 반대로 명왕성을 사용자 쪽으로 순간이동 시키는 것 또한 가능하다.
파파팟!! 곧 명왕성이 꽂힌 합금 다리가 SHN이 있는 공중으로 순간이동 했다. SHN은 명왕성을 뽑은 뒤 합금 다리를 힘껏 걷어찼다. 빡!! 거대하고 육중한 합금 다리가 여왕거미 위로 낙하했다. 와지끈!! 날카롭고 무거운 합금이 높은 곳에서 떨어진 충격에 제 아무리 덩치 크고 견고한 여왕거미더라도 찌그러지며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SHN은 합금 다리를 걷어찰 때의 반동으로 천장을 향해 튀어오른 뒤 천장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는 천장을 박차고 추진력을 얻어 여왕거미 위로 낙하했다. 프릴은 그가 높은 천장에서 하강하는 모습을 보며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저것은 명왕성. 태양빛이 채 닿지 못하고 흩어지는 성계(星界)의 끝자락을 따라 어둠을 두르고 몰아치는 검은 혜성.
가속도를 붙이며 하강하던 SHN은 비틀거리는 여왕거미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콰쾅!!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여왕거미가 중심을 잃고 주저앉았고 눈알 부분의 붉은 조명들이 힘없이 꺼졌다.
타다닷! 여왕거미가 쓰러지자 근위대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러나 SHN이 던진 명왕성이 그의 등에 적중했다. 팟!! 멀찍이 도망치던 근위대원이 SHN의 눈앞으로 순간이동 됐다.
"크아아악!!"
푹! 푹! SHN은 근위대원의 다리를 걸어 주저앉힌 뒤 등에 꽂혀있던 명왕성을 뽑아서 다른 곳도 찍어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의 눈밑에 명왕성을 꽂아넣고는 지렛대처럼 밀어올렸다.
"하, 하지마! 그만 둬.... 으아아아아악!!"
SHN은 근위대원에게 이식되어 있는 군용 의안을 뽑아내 챙겼다. 챙길 걸 챙겼으니 볼일 없는 근위대원을 적당히 널브러뜨리자 텅 빈 눈가를 감싸쥐며 움츠러들었다.
"엄살 피우기는. 이참에 최신형으로 새 거 박아달라고 하면 되는데. 아, 그러려면 반대쪽도 뽑아놔야 하나? 으음... 됐다, 귀찮다."
SHN은 근위대원의 의안을 홍체 인식기에 가져다 댔다. 홍체 인식기가 신원 확인 및 출입 권한 확인을 마치자 잠겨있던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 함정이나 복병이 없는 걸 확인한 SHN이 프릴을 향해 손짓했다.
"정리 됐어. 빨리 들어가자."
프릴은 SHN에게 다가가서 그에게 받았던 로브를 돌려줬다. SHN이 로브를 받아서 걸치자 다시 정장 자켓으로 변했다. 자켓을 다시 걸친 그는 어깨선을 탁탁 정리하며 정장 핏을 매만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두 사람이 복도를 지나 격납 시설 안으로 들어가자 용도를 모를 구형의 기계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크기는 통조림 보다는 훨씬 크고, 화분보다는 살짝 작은 정도에, 내부 구조는 온갖 부품들로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외관은 공처럼 심플한 구형이었다. 조금 전에 봤던 들과는 다른 기계로 추정됐다.
"네 말이 맞았어..."
격납고 가득한 기계들을 둘러본 SHN이 프릴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프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이것들은...?"
"그래. <인종청소기>다."
"이, 인종청소기?!"
살벌하고 흉악하기 짝이 없는 이름에 프릴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마 너는 이름 정도만 들어봤지? 나는 널 만나기 전까지 외곽의 무법지대에서 지겹도록 봤어. 그런데 이런 걸 설마 외곽이 아니라 제국에서 보게될 줄이야."
"저기, 이것들이 작동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죠?"
"작동되는 순간 영향권 안의 모든 유기생물체들을 포착한다. 포착된 게 유전자 코드가 등록되어 있는 유기생물체가 아니라면 세포를 구성하는 단백질을 모조리 아미노산으로 분해시켜 버리지."
"그, 그런...?!"
"사용금지 처분이 내려졌으니 외곽의 것까지 전부 회수하여 폐기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꽁쳐뒀네. 이 정도 수량이라면 도시 하나를 깨끗하게 비울 수 있다. 역시 또라이 황녀야."
프릴은 아연실색해서 격납고를 둘러봤다. 드넓은 격납고는 어디를 둘러봐도 인종청소기로 가득했다. 눈을 뜨는 순간 자비도 관용도 없이 그저 설계에 따라 학살을 벌이는 기계들이 다시 작동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릴의 호흡이 가파르게 떨렸다.
진보된 문명이 열등한 문명과 비교했을 때 무조건적으로 더 우아하고 찬란한 것만은 아니다. 더 발전된 도구와 함께라면 잔학함도, 추악함도 더 효과적으로 표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