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7화 〉2-1. 얕은 잠 (6) (47/88)



〈 47화 〉2-1. 얕은 잠 (6)

물이 차올랐다. 바닥을 적셔놓은 정도에 불과했던 물은 잠깐 사이에 발목이 잠기게 하더니 곧 순식간에 차올라서 프릴 루에리아의 키보다도 높은 곳에 수면을 드리웠다. 물 속에 가라앉아 있지만 숨을 쉬려고 발버둥칠 필요 없었고, 기껏 예쁘게 차려 입은 새 옷이 흠뻑 젖어버릴 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헤드기어를 벗으면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릴, 그저 가상현실로 만들어낸 꿈에 불과하니까.

그 때문인지 프릴을 집어삼킨 물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고, 수압이나 부력 역시 느껴지지 않았다. 가라앉는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어느 샌가 심해의 밑바닥에 서있어서 어디를 둘러봐도 컴컴한 어둠뿐이었고, 위를 올려봐도 수면이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공허와 어둠만이 시야를 지배했다. 담력이 부족하다면 덜컥 겁이 나서 헤드기어를 벗어 던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릴은 개척가답게 겁먹지 않고 찬찬히 어두운 자각몽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녀의 용기에 화답하고 싶었는지 어둠 사이에서 스스로 은은한 빛을 내는 커다란 무언가가 줄지어 모습을 나타냈다. 처음에는 거대한 산호나 열수구인줄 알았던 그것들은 프릴이 어둠을 헤치며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연물과는 거리가 먼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선명히 드러냈다.

인조적이지만 동시에 몽환적인 이 건축 양식은 분명 녹사르 제도의 빈 무덤 유적지를 본따서 만들어졌다. 프릴이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 샌가 그녀가 지나온 길들도 전부 유적으로 둘러싸인 예스러운 거리로 바뀌어있었다. 프릴은 감탄사를 내뱉는 것도 잊은 채 설레는 가슴을 랜턴 삼아 어두운 거리의 끝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한편 프릴의 옆에서는 에반 플루토가 화면을 통해 그녀의 의식이 만들어낸 가상 현실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프릴 상상 속의 아민 제국은 저런 모습인가?'

화면에 나타난 가상 현실 속 아민 제국의 모습은 깊은 바다 밑에서 영면에 든 유적에 불과했다. 바쁜 일상을 보내는 주민의 모습도, 수많은 교통수단이 만들어내는 소음도 없어서  어떤 생기나 삶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고요함, 적막함.  조용하고 어두운 물밑에 늘어서 있는 유적들의 모습은 마치 역사 너머로 잊혀진 세계를 위해 남겨둔 묘비를 연상시켰다.


'가라앉기 전의 살아있는 도시 모습은 역시 상상이 안 가려나?'

옆에서 화면으로 프릴의 꿈을 지켜보던 에반은 문득 장난기가 도져서 프릴에게 깜짝 선물을 하나 선사하기로 했다.

'재미난  꾸라고.'

에반은 헤드기어를 쓰고 가상 현실에 빠져있는 프릴을 향해 살며시 손을 뻗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프릴은 가상 현실 속의 몽환적인 해저세계에 빠져있어서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불현듯 솟아난 한 줄기의 빛이 프릴의 시야를 가렸다. 어찌나 강렬한 빛인지 심연의 어둠을 남김 없이 걷어낼 기세였다. 프릴은 빛줄기를 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빛이 한층 약해진  느낀 프릴이 살며시 눈을 뜨자 그녀가 거닐고 있던 몽환 속 폐허는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동서남북을 분간할 길이 없는 망망한 광야만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프릴을 두근거리게 했던 그 모든 풍경이 신기루에 불과했던 것 같다.


그때 구슬 크기의 작은 불빛이 프릴의 주변을 맴돌았다. 장난기 가득한 요정처럼 프릴을 놀리듯 노닐던 그 불빛은 그녀의 바로 눈앞에서 멈춰섰다. 조금 전 심연을 걷어내고 아민의 폐허를 사라지게 한 빛줄기의 근원이 바로 이것인 모양이다.

프릴은  작은 불빛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불빛은 프릴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 안에까지 들어온 그 불빛을 꼭 쥐었다.

파슷!  다시 눈을 똑바로 뜨지 못할 만큼 강렬한 섬광이 솟아났다. 손을 아무리 꽉 움켜줘도 빛이 새어나오는  막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엄청난 규모의 지진이  것처럼 프릴이 딛고 있는 온 세상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떨리는 대지 위에서  다리로 균형을 잡고 서는 건 불가능했다.

빛도 지진도 점점  심해졌지만, 그럼에도 프릴은 어째서인지 불빛을 쥔 손을 놔버리려 하지 않았다.

"!!"


지진이 잦아들자 웅크렸던 몸을 일으켜보니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자욱한 구름이었다. 어느덧 그녀가 딛고 있는 곳은 깊은 심연의 밑바닥이 아니라 창공과 맞닿은 어느 옥상이었다. 땅이 솟구친 것인지, 하늘이 내려앉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면 키가 큰다고 하던데.'


프릴은 짙은 구름의 바다를 내려다보며 그런 천진난만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성장판 자극을 위해 저 구름의 바다로 뛰어내리는 대신,  더 꿈속을 탐험하기로 했다.

기껏 상상  아민 제국의 모습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거닐  있는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려서 아쉽지만, 꿈이라는  원래 아쉬울 때 깨어나고, 깨고 나면 사라지는 것 아니던가. 비록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자신의 내면에 고여있는 무의식을 살펴보는 건 좀처럼 쉬운 기회가 아니니 집중하기로 했다.

프릴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주변을 살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두터운 구름의 장벽이 천천히 걷히자 그 틈으로 햇살이 뻗어 들어왔다. 바다 밑에서 빠져나온  확실했다. 이윽고 햇살이 구름의 벽을 가르자 그 틈으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저건...?!"


까치발 딛고 손 뻗으면 태양도 닿지 않을까 싶을 만큼 높은 하늘마루에 마천루들이 늘어서 있었다. 아그루스 제국의 기술과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솟아있는 왕도의 첨탑들이 귀여워 보일 정도로 비현실적인 높이의 마천루였다. 프릴이 봐온 왕도의 첨탑들이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면,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마천루들은 말 그대로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꿈이니까 가능한 높이겠지? 프릴은 구름을 뚫고 뻗어있는 마천루들의 숲을 관람했다. 언젠가 아그루스 제국의 기술 수준이 발전을 거듭하다 보면 왕도의 첨탑들도 이 정도로 높아지게 될까? 프릴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쓸데없이 높아서 고층 생활에 불편한 점이 많은데 굳이 더 높이 쌓아 올릴 필요는 없다.

건물 사이를 떠다니고 있는 비행체들은 자세히 보니 부유생물들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이동수단이었다. 프릴은 비행체들이 저마다의 궤도를 따라 마천루 틈새를 부유하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렇게 미래적인 도시의 풍경을 지켜보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가상 현실 속이니까 날개를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에 낑낑대봤지만 자각몽이라고 해도 그 정도로 속 편하게 일이 풀리지는 않는 모양이였다. 허리와 어깨 쪽을 매만져 봐도 날개 비슷한 거 하나 돋아나 있지 않았다. 이런 어딘지 모를 마천루의 옥상에서 주변을 둘러본들 길이 보일 리야 없었고,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둘.


첫번째 방법은 그냥 뛰어내리고 키가 자라기를 바라는 것이지만 일단 보류. 두 번째 방법은 지금 서있는 이 건물로 들어가보는 것. 건물 안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옥상에서 계속 구름을 맞으며 서있어봤자 달라질 건 없어보였다. 어차피 가상 현실로 만들어 낸 꿈속인데 뭐가 튀어나온들 죽기라도 하겠는가? 프릴은 건물 안으로 통하는 문 앞에 서서 손을 뻗었다.

덜컥! 프릴이 잡기도 전에 문 손잡이가 저절로 돌아가더니 철문이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인기척을 느낀 프릴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문을 열고 나타난 상대가 옥상으로 들어왔다.


핏에 딱 맞는 검은 정장 너머로 나타난 체형으로 보아 남성이었고, 흑발에 검은 장갑, 검은 구두까지,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관성 있게  블랙 컬러로 맞춘 옷차림이 인상적이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정장 차림의 실루엣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져 강한 인상을 자아냈다.


"하여간 사람 피곤하게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네. 그 창의력을 좋은데에 좀 써줬으면 하는데. 아무튼 쫓아오던 놈들은 일단 다 정리했다. 이렇게 됐으니 이제 조용히 넘어가길 기대할 수는 없겠어."


문을 열고 나타난 그 의문의 남자가 말했다. 가면을 통해 변조된 음성이지만 분명 남자 목소리였다. 그는 마치 프릴과 아는 사이인 양 말했지만 프릴은 남자가 하는 말의 맥락을 따라갈 수 없어서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따름이었다.


"그래서... 이 난리를 쳐가며 내 속을 썩인 보람은 있나? 없으면 그냥 여기서 뛰어내려 버릴 거야. 물론 너도 같이. 이 높이면 꽤나 아플 거다."

남자가 물었지만 당연하게도 프릴은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여기선 '사람 잘못 보신 거 같다' 던가 '저희 혹시 아는 사이인가요?' 등의 말을 꺼내는 게 자연스럽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런식으로 답했다가는 가면으로 감춰진 저 얼굴이 무슨 험악한 표정을 지을지 종잡을  없었다.

"이봐, 오늘따라  이렇게 얼빠지게 구는 거야? 사람이 묻고 있으면 대답을 하라고."

"저, 저요?"


"그래, 너요. 달리 누가  있나? 찾던 물건은 손에 넣었는지 묻는 거다."

'찾던 물건? 나는 딱히 무언가를 찾은 적이 없는데?'

남자에게서 떨어지려고 슬금슬금 뒷걸음치던 프릴은 문득 조금 전에 어두운 심연에서 붙잡았던 불빛을 아직도 꼭 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조심스레 손을 펼쳐보니 프릴의 손에 이상하게 생긴 장치가 있었다.


'이게 뭐지?  불빛은 어디로 가고 이런 유물같이 생긴 장치가... 혹시 이걸 저 사람에게 줘야 하나?'

프릴은 언제부턴가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던  장치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장치를 본 남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크게 될 사람인지, 큰일 낼 사람인지, 여전히 겁대가리를 찾아볼 수 없네. 이젠 감탄하기도 지쳤어."


그는 그렇게 영문 모를 반응을 보이고는 프릴의 옆을 지나쳐서 옥상의 난간을 딛고 섰다. 땅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높이의 옥상 난간에 서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지만, 남자는 태연하게 균형을 잡고 서서는 손목을 매만졌다.


남자가 손목에 이식된 단말을 조작하자 허공에 화면이 나타났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만지자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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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체 신호 : 일치
유전자 코드 : 일치
접속 권한 : shaxhtia 등급


Arhendal 사설망에 접속합니다.
환영합니다, 달빛 왕조의 이빨이여


<정의, 지혜, 권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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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에 이식된 단말로 유전자 단위의 신원 확인을 통과한 그는 보안등급이 극도로 높은 어느 연결망에 접속했다. 그리고는 연결망을 통해 동료로 추정되는 누군가와 통신했다.


"엠젠."


[MZN : 정의, 지혜, 권능! 제국에 영원불멸한 영광을! 입니다.]

"엠젠. 여기는 SHN이다. 임무를 마치고 귀환한다."


[MZN : 황녀님을 벌써 찾으신 건가요?]


"그래, 물건도 손에 넣었어."

[MZN : 역시 SHN님이야. 빠르고 확실하다니깐.]


"물건을 입수한 건 내가 아니라 이 말썽쟁이 황녀님 되시겠다. 아무튼 이제 이 빌어먹을 곳을 빨리 벗어나야 해."

[MZN : 으음? 너무 이르지 않나요? 모처럼 두 분이서 즐기는 바깥 나들이인데 좀 더 오붓하게 만끽하다 오시는 게 어떻겠어요?]

"헛소리 할 시간 없어."


[MZN : 헛소리라뇨? 그렇잖아요? 그 빌어먹을 곳을 벗어나봤자 더 빌어먹을 황궁 말고 갈 곳이  있어요?]

"엠젠."


[MZN : 아, 알았어요. 한 마디 더 했다가는 또 쥐어박겠네. 어휴!]

어두운 인상의 검은 사내와는 달리 통신 너머의 목소리는 아주 쾌활하고 장난기 가득했다.

[MZN :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시려고요?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비행기 한 대 보내. 적당히 빠른 녀석으로다가."

[MZN : 아아! 또, 또 무리한 부탁이나 시키시고! 아시잖아요. 여긴 다른 적격자(適格者)의 구역이에요. 그것도 3번 황태자의 구역. 자기 구역 영공에 다른 적격자의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거 알게 되면  망나니 황태자가 뭔짓 할지 알 만큼 아시는 분이.]

"내가 적당히 빠른 녀석으로 보내달라 했지, 우리 비행기를 보내달라 했나?"


[MZN : 몰래 물건을 슬쩍한 거로 모자라서, 이젠 비행기까지 하나 빼돌리자고요? 3번 황태자가 바보도 아니고 금방 꼬리밟힐 걸요? 애초에 여기 원격 조종 통신망의 보안 수준이 허술할 리도 없고요.]


"못하겠냐?"

[MZN : 하! 그런 식으로 자존심 긁는다고 해서 제 생각이 휙 바뀔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절 너무 잘 아시는 겁니다. 기다려 봐요, 잽싸게 하나 보내드릴 테니까.]


잠시 뒤 프릴과 SHN이라는 코드네임의 사내 머리 위로 무인 전투기  대가 열 맞춰 날아갔다. 그런데 그  한 대가 갑자기 대열에서 이탈하더니 두 사람이 서있는 옥상 쪽으로 방향을 틀고 날아왔다.


[MZN : 쉽다 쉬워! 너무 쉬운  아니야?]

엠젠의 콧노래 소리와 함께 옥상 가까이 접근한 전투기가 문을 열었다. SHN이 전투기에 올라타려고 난간에서 발을 떼는데 갑자기 전투기 문이  닫혀버렸다.


"엠젠...!"


[MZN : 하하하! 그대로 발 헛디뎌서 떨어졌으면 엄청 재밌었을 텐데!]


"황궁으로 돌아가서 보자."


[MZN : 아, 미안해요~ 화 내지 말아요, 딸기우유 드릴 테니까.]

지이잉! 전투기의 문이 다시 열렸다. SHN이 먼저 올라타서는 프릴이 탑승하는 걸 돕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프릴은 손을 잡지 못했다. 남자를 상대로 거리를 좁히거나 가벼운 접촉도 꺼려지는  가상 현실 속에서도 극복되지 않았다.


프릴은 SHN의 손길을 거절하고 혼자의 힘으로 전투기에 올라탔다. SHN은 가면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떫떠름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조종석에 앉았다. 두 사람이 탑승하고 나자 전투기의 문이 닫히고 옥상을 벗어나 날아갔다.

[MZN : 수동 운항으로 변경해 드릴까요?]

"나중에 필요하면. 지금은 일단 미리 알려줬던 그 좌표로 이동하자고."


[MZN : 황궁으로 바로 복귀하는 게 아니였나요?]


"일을 이렇게 벌여놓고서는 남의 비행기로 쫄래쫄래 복귀하자고? 그냥 '날 잡아가소' 하고 드러눕지 그러냐?"

[MZN : 그럼 이제 어떡하시려고요?]


"어떡하긴? 더 큰 일을 벌여놔서 이쪽은 신경  겨를도 없도록 해야지."

[MZN : 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큰 문제를 일으키는 건가요? 여전히 거친 일처리 방식입니다.]


"마음에 안 들어?"

[MZN : 그럴 리가요!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어서 빨리 사고 치러 가죠!]


휘이익!! 전투기가 갑자기 옆으로 드러눕더니 격하게 커브를 틀고 급발진했다.  바람에 프릴의 몸이 옆으로 굴러떨어질 기세로 쏠렸다.


"꺄앗?!"

"꽉 잡으라고. 저 녀석 운전 만큼은 나보다 거칠어."

[MZN : 지름길로 갑니다! 좀 많이 지를 거예요!]

그들이 탄 전투기는 주변에 날아다니는 비행체들을 이리저리 제치며 엄청난 속도로 공중을 가로질렀다. 마천루 사이를 통과하느라 360도 회전을 몇 차례 돌다보니 프릴은 어디가 하늘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였다.


"조심해요!"

프릴이 구름다리 뒤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비행 간판을 보고 반사적으로 소리쳤지만 전투기가 유체화 기동을 발동시키자 물리적 형체를 잠시 같은 차원 좌표의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켜서 간판을 통과해 지나쳤다. 다시 원래 공간으로 돌아온 전투기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는 어느 높은 마천루를 향해 들이받을 기세로 질주했다.

프릴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에 힘을 꽉 쥐었다. 높은 고도에서 미친듯이 질주하는 속도감은 인간의 원초적인 감각을 짜릿하게 자극하는 법이다. 그 짜릿함에서 나오는 상쾌함은 상당한 중독성을 가진다. 그게 자신에게 닥친 현실이거나, 너무 생생한 꿈만 아니라면.

[MZN : 가즈아아!!]


전투기가 드러눕듯이 직각으로 방향을 틀더니 마천루의 벽을 활주로 삼아 달리기 시작했다. 마천루의 벽을 따라 가속도를 붙이던 전투기는 이윽고 마천루의 옥상을 지나 두터운 구름층을 뚫고는, 광활하게 탁 트인 창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 높은 마천루들도 더 이상 닿지 않을 만큼 높은 고도까지 올라온 전투기는 속도를 줄이고 기류에 올라탔다. 프릴이 한숨 돌리려고  그때 그녀의 눈에 또 다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위를 올려다보니 거꾸로 뒤집힌 마천루의 옥상들이 구름 사이 사이를 뚫고 나와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프릴은 혹시나 지금 자신이 탄 전투기가 거꾸로 뒤집힌 채로 비행하는 중인가 싶어서 아래를 내려다 봤다. 그러나 아래에는 자신이 방금 지나쳐 올라온 마천루들의 옥상이 똑바로 늘어서 있었다.

'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위에도, 아래에도 마천루가 있다. 곧이어 구름이 서서히 걷히자 프릴의 눈앞에 공중에 뒤집힌 채로 떠있는 도시가 그 장엄하고 초현실적인 장관을 과시하며 나타났다.


땅에서 하늘로 쌓아올린 도시와 하늘에서 땅을 향해 쌓아올린 도시가 거울에 비춰진 것처럼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고, 그 사이의 하늘을 전투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공중도시다."


"공중도시라고요?!"

"그래. 5번 황녀의 구역이지."


[MZN : 5번 황녀도 3번 황태자 못지 않게 정신 오락가락하는 또라이죠.]

"밑에는 망나니, 위에는 또라이. 떨어져도 고달프고, 솟구쳐도 애처로우니 그냥 흘러가는대로 사는 게 속편하지. 저 물고기들처럼 말이다."

"물고기라고요?"


이 높은 하늘에서 부유 생물체도 아니고 물고기라니? 의문이 든 프릴이 SHN이 가리키고 있는 곳을 보니 그곳에는 호수가 떠있었다. 공중도시에 이어 공중호수였던 것이다.

"지상도시의 중력과 공중도시의 인공중력이 서로 겹치는 곳은 되도록 걸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잘못 걸쳤다가는 위로 솟구치지도, 아래로 떨어지지도 못하고 계속 공중에 표류하는 거다. 하지만 오히려  점을 이용하면 저렇게 하늘 한복판에 호수를 만들 수도 있다."


하늘에 떠있는 거대하고 맑은 물방울 속에 수많은 물고기들이 넘실넘실 헤엄치고 있었다. 그리고  여정에 지친 철새들이 잠시 쉬어가느라 거꾸로 뒤집힌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MZN : 저 공중도시는 궤도를 지나는 대로 협약에 따라 배정된 지상에 착륙할 예정이더군요. 그때까지 저 밑의 망나니 황태자의 도시와 마찰 없이 조용히 넘어갈  있을지가 관건이겠네요.]


"착륙한다고요? 그렇다면 인공중력이 없어질 텐데  호수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공중도시가 회수해 가고, 나머지는 비가 필요한 곳에 뿌리지. 기후를 인위적으로 통제하게 됐으니 그 편리함의 대가로 물의 순환도 인위적으로 조율하는 수밖에."

[MZN : 초단위로 정확한 일기예보라는 건 꽤나 시시해요. 낭만이라는 게 없잖아요?]


"아민 제국에서 낭만 찾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MZN : 하긴 그렇네요.]

"아민... 제국....?"

프릴은 전투기의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다시금 둘러봤다. 하늘에 떠있는 도시와 중력의 틈새에 고여있는 물이 만들어낸 공중호수, 그리고 구름을 뚫고 솟아난 마천루.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이고, 미래적인 환상의 결집체.


유물 몇 조각과 유적 몇 군데를 살펴본  전부인 후대인의 상상력으로는 차마 담아내지 못할 만큼 압도적인 세계가 프릴 앞에 나타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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