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2-1. 얕은 잠 (5)
중요한 문제를 낼 것이니 최대한 센스를 발휘해서 진지하게 답변해보길 바란다.
자, 당신은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기대에 부푼 상대의 눈빛 앞에서 차마 거절하지 못했기에 함께 주말을 보내기로 약속했다. 상대는 사춘기의 소녀이며, 교양 있는 지식인 계층이고 또 품위에 신경써야 하는 상류층이다. 이런 상대와 함께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어느 장소를 골라야 할까?
극장? 무난한 선택이다. 공연 감상은 실패하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 익살맞은 희극을 보며 웃어도 좋고, 유명한 가희의 노래와 어우러진 배우들의 열연에 압도되어 전율을 느끼는 것도 좋겠지. 마술 공연이나 곡예는 마법사에게 그다지 흥미를 일으키지 못할지도 모르니 보류하는 게 좋을듯하다. 공연이 끝나면 분위기 좋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서 감상을 나누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대공원? 좋은 판단이다. 지금은 아그루스 제국 북부 지역의 날씨가 한창 좋을 때다. 특히나 라쿠이르는 도시와 공업 지대가 비교적 적어서 북부 지역의 자연 경관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겨울이 물러나고 봄기운이 완연해지는 시기라 개화하는 꽃들도 많으니 분명 대공원에 멋진 경치가 조성되어 있을 것이다. 만약 솜씨에 자신이 있다면 손수 도시락을 준비해보기를 권장한다.
동물원? 꽤나 훌륭한 안목이다. 아그루스 제국의 드넓은 영토와 대자연 속에는 도시 생활에서 접할 수 없는 수많은 생물들이 저마다 독특한 생태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집에서는 엄혹한 후계자 수업, 학원에서는 마법 공부. 학업에 지쳐 도시를 벗어날 기회가 좀처럼 없는 상류층 청소년에게 동물원은 모험과 같은 신선한 경험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극장, 대공원, 동물원. 괜찮은 선택지들이 나왔으니 이제 결정을 해야 한다. 어느 곳을 선택해도 다 저마다의 장점이 있고, 기대되는 효과가 있다. 다만 어느 곳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사전 준비에 필요한 게 달라지기 마련이니 신경을 써야 한다.
고민은 충분히 했으니 다시 이 중요한 문제로 돌아오자. 교양 있는 지식인 계층이고 또 품위에 신경써야 하는 상류층에 사춘기 소녀인 프릴 루에리아는 과연 어디를 선택했을까? 정답은...
"박람회라니. 주말에 시간 내가면서 박람회 같은 걸 보러 오는 고등학생이 어디 있어? 수행평가 과제나 현장학습으로 가자 해도 싫어해야 할 곳을 말이야."
에반 플루토는 황당했다. 어느 한 학생에게서 주말에 시간을 꼭 내달라는 부탁을 받았기에 최대한 기대에 부응해 주려고 나름 신경 써서 준비했지만, 설마 학술 전시회장에 가고 싶다고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평소 그녀의 지적 호기심과 탐구 정신을 생각하면 예상 못한 게 부끄러울 법도 하다. 꽃구경 하면서 놀아줄 사람이 필요해서 다른 사람 주말을 할애해 달라 할 성격이 아니라는 건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부분인데. 학원 밖에서 만큼은 마법사나 학생이 아니라 그 나이대의 청소년으로 대해주려 했던 게 오히려 정답에서 멀어졌다.
'헥센테크(hexentech) 시대, 당신의 몽환은 현실이 됩니다.'
안내문에는 그렇게 쓰여있었다. 에반은 안내문을 자세히 읽어보지 않고 적당히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아, 선생님! 이쪽이요! 여기 표 사왔어요!”
사복 차림의 프릴 루에리아가 입구 앞에서 한껏 들뜬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활기찬 동작으로 손짓하자 새하얀 원피스 자락이 가볍게 하늘거렸다. 저러고 폴딱폴딱 뛸 듯이 반겨주는 사람이 루나칼립스 학원에도 한 사람 정도 있다는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에반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프릴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혹여나 베레모가 삐딱해지지 않았나 고쳐 쓰고는 에반에게 입장권 두 장을 보여줬다.
“표 정도는 내가 사도 되는데.”
“아니에요! 제가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했던 거니까 오늘 하루는 전부 저에게 맡겨주세요.”
“맡겨달라는 대사를 뺏기다니 NPC 체면이 말이 아니네. 아무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계획이야?”
“계획이요? 우선 전시회장을 순서대로 한 바퀴 돌아야죠.”
“이 큰 건물을 한 바퀴 돌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네. 좋아,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반대 순서로 한 바퀴 돌아봐요.”
“아… 그런 거 좋아하는 애들 가끔 있지. 그 다음에는?”
“안에 식당가가 있으니 거기서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해요.”
“좋네. 오전 일정은 그렇게 하고, 오후에는?”
“소화도 시킬 겸 인상 깊었던 곳을 우선으로 보면서 한 바퀴 더 돌까요?”
“아니 이 건물 밖으로 나가는 건 예정에 없니? 다리 안 아프겠어?"
"괜찮아요. 저 여기 처음 오는 것도 아니에요."
"뭐 일단 구경 좀 다녀보자. 어디부터 갈까?”
“저쪽이요!”
프릴이 활기차게 앞서나갔다. 에반은 나서서 리드하는 대신 프릴이 혼자 신나도록 내버려두면서 옆에서 최대한 장단 맞춰 리액션이나 넣어주기로 했다.
"이번 학술 전시회의 주제인 '헥센테크' 사업 박람회는 꼭 한번 구경하고 싶었어요. 끝나기 전에 선생님과 함께 올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헥센테크(hexentech). 공학에 마법을 접목시켜 기술 혁신을 꾀하는 마공학과 자연계의 물리적, 화학적 한계를 마법으로 극복하여 인류의 진보를 꿈꾸는 마도학을 통틀어 일컫는 신조어다.
"헥센테크라. 고고학 말고도 이런 기계 냄새 나는 공학 분야에도 관심이 있나보구나."
"물론이죠. 제가 아무리 잊혀진 과거 세계에 낭만을 품고 있다고 해도, 전 아주 미래지향적인 사람이거든요? 애초에 따지고보면 아민 제국은 시간상으로는 과거 속 세계지만 그 문명 수준은 우리의 기준으로 아득한 미래잖아요?"
"뭐 그렇다 할 수 있네."
둘은 다양한 기계들과 설계도가 즐비한 전시장을 거닐었다. 프릴은 전시된 기계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에반은 전시장에 늘어선 그 해괴한 마공학 장치들이 무슨 과시를 하건 전혀 흥미가 동하지 않았지만, 프릴의 즐거운 주말에 찬물을 끼얹기는 싫었기에 겉으로 티내지 않았다.
"헥센테크는 민간에서나 학계에서나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분야인데. 더러는 사도(邪道) 취급 받는 경우도 흔하더만, 너는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인가봐?"
"네, 맞아요. 마법도 엄연히 학문이고, 학문이란 본디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존재잖아요? 응용하고, 융합해서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해야죠! 마법의 무궁무진한 활용성이라면 이루지 못할 꿈은 없을 테니까요."
힘차게 말하던 프릴이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표정이 어둡게 굳었다.
"사실 사람들이 왜 헥센테크에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지는 저도 잘 알고 있어요.마법으로 편리함을 추구하는 걸 극도로 망설이는 아그루스 제국의 사회 풍조 때문이겠죠."
"사회 풍조라. 길거리 풀꽃도 씨앗 없이 싹트는 일이 없는데, 하물며 이런 거대한 제국의 사회 풍조가 이유 없이 어느 날부터인가 자리잡았을 리는 없겠지?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과학과 마법을 격리시키는 이 비효율적인 이분법이 어디서 기인했을까?"
"이명... 뿐만은 아니겠죠. 이명도 이명이지만 역시 12년 전의 그 전쟁... '안개전쟁' 때문이겠죠."
프릴의 말대로 마법은 분명 그 활용성이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그 활용성이라는 것은 대량 살상과 국토 황폐화에서도 재래식 무기가 따라잡지 못할 만큼 현저한 두각을 나타낸다. 악의를 가진 사람 혹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의 손에 이런 마법이 쥐여지고, 여기에 안 좋은 방향으로의 창의력까지 더해지면, 돌이킬 수 없는 재앙 하나 둘 정도는 허망할 정도로 간단하게 일어나기 마련이다.
"네 말대로 마법이라면 이루지 못할 꿈은 없지. 근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점이 이 사회에 뿌리박힌 막연한 두려움의 근원 아니겠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전부 동화나라 같은 꿈만 꾸겠는가? 유감스럽게도 마법에게는 이루어져도 괜찮은 꿈과 안 되는 꿈을 분간할 도덕적 판단 능력이 없다.
"이해해요. 이해 하는데..."
프릴의 목소리가 점점 작게 기어들어갔다. 에반이 아뿔싸 하는 표정으로 프릴을 달래주려 했다.
"아아, 미안하다. 내가 괜한 말을 꺼냈네. 네 관점을 반박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어."
"아뇨, 아뇨!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전 지금 즐거워요. 이런 대화 하는 게."
프릴은 손을 휘휘 저어가며 밝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조금 전에 못했던 말을 다시 이어나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사 면허가 있는 사람이 처방전을 쓸 수 있는 것처럼, 마법 역시 마법사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마법을 평범한 일상에서 최대한 배제시키려 하죠. 마법 없이도 잘 돌아가야지 멀쩡한 사회라고 믿으니까요. 그 관점 자체는 타당하다고 생각해요.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요."
프릴이 어느 자동 판매기의 앞에 섰다. 구조가 엄청 복잡해 보이는 기계지만, 딱 봐도 자신을 눌러달라고 외치는 듯한 생김새의 버튼 하나가 튀어나와 있었다. 프릴이 버튼을 누르자 기계 안의 물이 순식간에 얼더니 곧 얼음이 동동 떠있는 음료 한 잔이 나왔다.
전기로 물을 냉각시켜 얼음을 만들고, 만들어진 얼음을 녹지 않게 보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전력이 필요하고, 전력은 거저 나오지 않는다. 전력의 생산은 곧 공해의 발생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공학의 힘으로 물의 원소 작용에 개입해 순식간에 얼음을 생성하면 미미한 수준의 이명만 발생하기에 발전소가 자욱한 매연을 토할 필요가 없다.
프릴은 자동 판매기에서 나온 음료를 집어들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 음료를 입에 대지 못할 것이다. 마법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더라도 얼음을 입에 대기 찝찝해 할 것이다. 그러나 프릴은 망설임 없이 음료를 마셨다. 과즙 농축액을 설탕물에 희석한, 지극히 평범한 음료의 맛이었다.
“마법이 일상의 모습을 바꾸는 것에 대한 경계심은 바람직하다고 봐요. 참혹했던 전쟁을 통해 얻은 교훈을 잊지 않고자 하는 노력이니까요. 하지만 과거에 대한 반성과,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과연 상반되는 개념일까요?”
프릴은 에반에게 음료를 권했지만 에반은 사양했다. 마공학으로 만든 얼음이 찝찝해서 라던가 헥센테크의 산물을 회의적으로 봐서 같은 심오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음료가 맛이 없어 보여서일 뿐이었다.
“아무리 모두가 경계하더라도 결국 누군가는 악용하기 마련이에요. 그러니 모든 문제를 전부 예방하는 건 불가능하죠. 그렇다면 저는 최악의 경우를 우려하는 것보다는 최선의 결과를 이루는 쪽에 제 노력을 투자할 거예요.”
“이게 그 개척가인가 뭔가하는 건가?”
“흔히들 저를 그렇게 부르더라고요. 개척자니, 침묵자니 이런 아리송한 용어로 학문을 이분하는 걸 좋게 보지는 않지만요. 선생님은 어떠신가요? 개척의 길과, 침묵의 규칙. 선생님은 어느 쪽에 속하시나요?”
“몰라, 신경 안 써. 오지랖 부리기 귀찮으니까 살고 싶은대로들 살라고 해. 그러다 나한테까지 피해끼치겠다 싶으면 그때 때려주면 그만이야."
"합리적인 건지, 개인주의인지 분간이 안 서네요. 그래도 즐거워요.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요."
"명색이 사립 명문 루나칼립스 학원인데 토론회나 학술 동아리 하나 정도는 마련되어 있지 않아?"
"많긴 한데... 그다지 참여하고 싶지 않아요. 다들 제 주장에는 적극적으로 논박하려 하질 않거든요. 저와 의견 충돌을 한다고 해서 불충죄를 범하는 것도 아닌데..."
"아하, 그런 거였구먼. 안타깝지만 그것도 일종의 사회 풍조 아니겠어?"
"그러니 최근에 토론 다운 토론을 하느라 목소리를 높였던 상대는 유리아 양을 빼면 없네요.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제 신분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시고, 저를 그저 평범한 학생이자 풋내기 마법사로 봐주셔서 기뻐요."
"그냥 귀족들 파벌놀이에 관심이 없을 뿐이지, 딱히 배려하려는 의도는 아니였는데 기뻐할 거 까지야."
"아니요, 저는 기뻐요. 그 어떤 동급생이나 지도원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탁을 선생님이라면 들어주시니까요."
프릴의 얼굴에서 봄맞이가 한창인 하늘보다도 깨끗한 미소가 피었지만 에반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기, 마음은 고마운데 말이야, 이 거리를 두고 그런 말을 하면 듣는 입장에서 모양새가 되게 이상하거든?"
프릴은 체격좋은 성인 남성의 보폭 기준으로 세 걸음 정도 되는 거리를 두고 에반과 떨어져 있었고, 둘 사이에는 넘어서는 안 될 보이지 않는 벽 같은 무언가가 세워져 있었다.
"으음... 죄송해요, 하지만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이렇게 되더라고요. 저도 고치려고 노력은 해봤는데 역효과만 컸던지라, 오늘 같은 날 무리했다가 선생님에게 실례를 끼치기는 싫어요."
"알았다. 뭐 불편한 점도 없으니 상관 없겠지. 신경 쓰지마."
두 사람은 그렇게 전시회장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무언가를 발견한 프릴이 팔짝 뛸 기세로 신난 목소리를 내며 에반을 불렀다.
"선생님, 저기에요! 제가 이번 박람회는 꼭 놓치지 않고 오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저기 때문이에요."
프릴이 가리킨 곳에는 'V 하우스' 라는 명의로 박람회에 참여한 어느 헥센테크 연구시설의 체험관이 있었다. 에반이 좀 더 살펴보니 전시회장의 체험관 대부분이 V 하우스에서 출품한 사업 아이템들이였다.
"V 하우스?"
"가상(Virtual) 현실 분야를 개척하는 연구소에요. 요즘 저도 무척이나 흥미를 보이고 있어요. 꿈을 현실로 끌어오는 기술이라니, 마법이 여기에 빠질 수가 없겠죠!"
프릴은 선물 상자를 든 어린아이 마냥 들떠서는 누가 말릴세라 체험관 안으로 들어갔다. 에반은 피곤한 보호자의 표정을 하며 뒤따라 들어갔다.
넓직한 체험관 안에는 이렇다 할 전시물이나 안내원이 없어서 한 눈에 보기에도 허전했다. 게다가 넓은 면적 때문에 그 허전함이 더 부각되었다.
"가상현실 체험관이라며? 한 번 보자."
에반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말하자 프릴이 벽에서 눌러달라며 존재감을 과시중인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체험관 내부가 소등되어 깜깜해지더니 가상 현실로 만들어낸 아민 제국의 유적과 유물들이 환영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프릴은 감탄했고, 에반은 하품했다.
"이거 봐요, 선생님! A급 유물 '달그림자' 에요! 저쪽에 저건 A급 유물 '어스름 장막' 맞죠?! 이런 유물들을 라쿠이르에서 볼 수 있다니, 역시 여기 오길 정말 잘했어요!"
실물도 아닌 가상 현실인데 프릴은 아민의 유물들을 보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였다.
"신나 보이는구나. 눈 오는 날 산책 나간 강아지 마냥."
"실제 유물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은 국립 박물관 뿐인데, 국립 박물관은 왕도에 있으니까요. 선생님께 부탁해서 같이 가보고 싶긴 하지만, 아무래도 학기중에 다녀오기에는 너무 먼 거리죠."
"아니 그 말은 방학중이라면 부탁할 의향이 있다는 거냐?"
에반은 방학동안 숨어있을 수 있을 만큼 깊은 분수대를 찾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선생님, 여기 이 유물을 봐주시겠어요?"
어느 비석 앞에 선 프릴이 손짓을 하며 에반을 불렀다. 에반이 가까이 가보니 비석에는 전상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읽어보고 싶은데 도와주셨으면 해요."
에반이 고개를 끄덕이자 프릴이 비석에 새겨진 아민어를 더듬더듬 읽어나갔다. 비석을 읽던 프릴이 멈칫하더니 에반 쪽을 돌아봤다.
"선생님... 처음 보는 철자가 있어요."
"그거 e다."
"e라고요?"
"네가 알고 있는 e의 철자는 나중에 생겨난 거야. 내 이름 에반의 e도 그 철자를 써. 근데 고고학회 학자중 몇몇 띨띨이들이 i의 변형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내 이름이 이바노(ibano)가 되어버렸다고, 젠장."
"이바노는 왠지 착한 동네 아저씨 같은 이름이네요."
"칭찬으로 들으련다. 아무튼 마저 읽어봐."
에반은 프릴이 하는 아민어를 계속 듣다가 고개를 한번 끄덕거리고는 말했다.
"잠깐. 여기 이거 다시 읽어볼래?"
"gromo. 크다는 뜻이에요. 이 정도는 아주 기초적인 단어죠."
"이거는? 이거도 읽어봐."
"krapluto, idgromagono. 저기... 두번째 단어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그냥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돼. id는 ~에 있다, grom은 네가 아까 말한대로 큰, agon은 불, 여기에 형용사 어미 o. 합쳐지면 대화재 한복판에 있다는 말이니까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이런 뜻이지."
"아하. 음... 혹시 제가 잘못 읽었나요? 발음이 이상한가요?"
"발음은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 어차피 발음 평가할 원어민이 어딨다고? 그것보다도 읽는 방법이 틀렸어."
"정말요? 어디가 어떻게요?"
"내가 한 번 다시 읽어보라고 짚어준 단어들의 공통점이 뭐지?"
"음... 아! 전부 형용사네요!"
"그래, 맞아. 알고 있겠지만 아민어의 형용사는 반드시 o로 끝나는 게 문법적 규칙이다. 그런데 학자들이 놓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어."
놓치고 있는 사실 하나. 프릴의 귀가 쫑긋하고 곤두서게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말이였다.
"사실 형용사 어미로 붙는 o는 묵음이야. 표기는 하되 발음하면 안 돼."
"네?!"
"그래서 아까 네가 읽은 것들. 그로모, 크라플루토, 이드그로마고노 이렇게 발음하는 거 아니야. 그롬, 크라플루트, 이드그로마곤 이게 정확한 발음이다."
"그럼 우리 모두 잘못된 발음으로 알고 있는 거네요?"
"글쎄.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다고 했지, 잘못 알고 있다고 하진 않았어. 후기 아민어는 문법적으로, 발음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이 차차 약해져서 o를 생략하지 않고 그대로 발음하는 경향이 빈번해지게 됐고, 이 상태에서 몰후(沒後) 지상 문명에 전달된 거다. 그냥 어느 언어에서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야."
"아아... 그렇구나. 아직도 충격 받아서 놀란 게 가시질 않았어요. 역시 선생님에게 부탁하길 잘한 거 같아요. 그런데... 선생님. 혹시 이 비석의 아민어가 무슨 뜻인지 해석해주실 수 있나요?"
"....."
에반이 비석을 보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깜짝 놀란 프릴이 어쩔 줄 몰라하며 허둥댔다.
"죄, 죄송해요! 무리한 부탁이라면 억지로 하실 필요는 없..."
"끝이다, 살얼음 위에 세운 영원의 정원이여, 새장 속의 새를 잃은 봄 따위 원하지 않는다는 변명에 겨울시계는 결국 다시 흐른다. 끊었다, 사슬을 엮어 만든 새장을, 다시는 볼 수 없을 미소를 댓가로. 헛되다, 마침내 얻은 날개가, 펼칠수록 곤두박질치는 이 장엄한 익살극에 도돌이표 찍고는."
"도치법이 난무하는 문장이였네요. 이래서 도저히 해석이 안 됐던 거였어요. 저...고마워요, 선생님."
뭔가 생각에 잠겼는지 표정이 어둡던 에반은 프릴의 고맙다는 인사에 표정을 풀고 찜찜한 기분을 털어냈다. 오늘 같은 날 프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으니 최대한 밝게 보이기로 했다.
"아, 있다! 선생님 저게 V 하우스의 주인공이에요."
프릴이 가리킨 곳에는 가상현실 증강 체험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두 세 사람 들어갈 정도 크기의 부스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부스 안에 들어가보니 큼직한 화면과 헤드기어가 놓여있었다.
"V 하우스는 가상 현실 연구를 위해 사람의 무의식, 특히나 꿈에 대해 많은 분석을 했다네요. 그 결과물이 바로 이 가상현실 증강기에요. 아직 시험기기지만 사용자의 심리를 분석해서, 꿈처럼 펼쳐보여 준다고 해요. 좀 더 다듬어서 완성되면 분명 환상적인 경험을 선사하겠죠?"
뭐하러 비싼 돈 주고 그런 기계를 만들지? 그냥 누워서 자면 되는 거 아닌가? 에반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옆에서 저렇게 들떠있는 프릴을 생각해 차마 입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프릴은 전신의자에 기대 앉아서 헤드기어를 착용했다. 앞에 놓인 큼지막한 화면에 전원이 들어오며 V 하우스의 로고가 나타났다.
"그러고 보니 앞에 화면이 있었죠? 민망한 꿈이라도 꾸면 어떡하죠?"
"뭘 어떡해? 나만 좋은 구경 하는 거지 뭐."
"우으..."
"신경 쓰이면 나는 밖에 나가있을까?"
"아뇨, 괜찮아요. 전 준비 됐으니 이제 작동시켜 볼께요!"
"그래. 근데 나 그쪽 아니다."
"아...!"
프릴은 헤드기어를 쓰고 있어서 앞이 안 보였기에 에반이 없는 반대쪽 방향에 대고 말하는 중이었다. 배시시 웃는 프릴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헤헤. 벌써 민망하네요."
"그럼 작동시킨다."
"네, 부탁해요."
에반이 증강 장치를 작동시키는 걸 도와주자 화면에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