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2-1. 얕은 잠 (4)
결국 프라우드의 쇼콜라 케이크는 프릴 루에리아가 거의 다 먹었다. 하지만 어차피 에반 플루토는 케이크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기에 상관 없었다. 오히려 토끼처럼 야금야금 케이크를 먹는 프릴을 구경하는 쪽이 훨씬 좋았다. 아직 아쉬운지 바닥에 남은 초코크림 까지 긁어먹기 위해 포크로 접시를 간지럽히고 있는 프릴을 보며 에반이 물었다.
"그나저나 넌 왜 체스부에 들어가겠다고 한거야? 유리아의 부탁을 거절했다가는 나중에 교실에서 마주보기 더 껄끄러울까봐?"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전 진심으로 힘을 보태고 싶었어요. 하지만 유리아 양을 돕는 것 보다도 저를 위한 목적이 더 크겠죠."
"너를 위한 목적?"
"네. 어쩌면 체스부의 활동을 통해서 제가 찾고 있는 것에 대한 실마리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네가 찾는 거라면 아민 제국이랑 관련된 거?"
"맞아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민 제국의 생존자죠."
프릴 루에리아는 아민 제국 시대를 살던 고대인 중 누군가가 지금도 바다 위 대륙 어딘가에서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고 있다고 굳게 믿는 주의였다. 차라리 이 세상이 평평하다고 주장하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허무맹랑한 공상 취급 받지만 프릴은 믿음을 저버릴 수 없었다. 지상의 그 어떤 마법과 기술로도 심해에 가라앉은 아민 제국에 닿을 수 없으니, 유일한 희망은 아민 제국의 생존자를 찾아내 도움을 청하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에반은 잠깐 앉아있었더니 그새 나른해져서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그리고는 프릴에게 물어봤다.
"만약에 네가 찾는 아민 제국의 생존자가 진짜로 있다고 쳐. 그리고 어찌저찌 해서 만났다고 치자. 그 사람이 네가 기대한 모습일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니?"
"어떤 모습일지 기대를 전혀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 학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이에요. 자신의 믿음이 꺾였을 때 실망할 각오쯤이야 되어 있어요."
"믿음? 어떤 믿음?"
"과거의 세계와 지금의 세계를 이어줄 열쇠, 끊어진 고리를 다시 이을 매듭, 바다 밑에 잊혀진 이야기들을 들려줄 전달자... 뭐 그런 희망을 찾고 싶으니 생기는 믿음이죠."
"믿음이라. 누구인지 모를 그 옛 세계의 존재를 너무 친절하게 보는 거 아니니?"
"네?"
"그렇잖아? 생각해보자. 가령 어느 개미 하나가 잔뜩 기대에 부푼 모습으로 널 찾아와서는 자신을 각설탕이 가득한 찬장으로 데려다 달라고 한다던가. 그럼 너는 어떡할래?"
"으음... 저는 제 찬장에 개미가 돌아다니는 건 원하지 않아요. 각설탕 하나 둘 정도는 내어줄 수 있지만요. 아민 제국의 눈에 비친 우리 후대 문명도 그런 느낌일까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야. 중요한 건 네가 오늘 아침에도 단어장 보면서 걸어다니느라 그 개미를 발견 못하고 사뿐히 밟고 오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거지."
프릴이 알듯말듯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고 밟았다면 차라리 다행이지. 집어들어서 머리 가슴 배를 뜯는다던가, 아니면 개미집을 찾아내서는 녹인 반소(礬素)를 부어서 조형물을 만들지도 모르지."
"유리아 양이 저번에 제게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선생님도 뒷감당 못할 호기심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쪽이 우선이라는 주의인가요?"
"감당하고 못하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애초에 나는 어떤 주의 같은데에 속할 입장도 못 되고. 믿음이 꺾였을 때 실망할 각오라고 했지? 나는 오히려 반대로 그 믿음이 이루어진 다음을 걱정하라고 충고하고 싶네."
"어째서죠?"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래. 쌓아올릴 때만 해도 낙원인 줄 알았던 곳은 항상 도달하고 나면 비로소 실체가 뚜렷해져."
"무슨 경험을 하셨는지는 묻지 않을게요. 왠지 궁금해했다가는 엄청 실례일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요. 그래도 기쁘네요."
"기쁘다고? 응원해주기는 커녕 불길한 소리만 늘어놓았는데?"
"제가 아민 제국의 생존자에 대한 얘기를 해도 보통은 가능성 없으니 깊게 생각할 가치 없다고 여겨요. 그런데 선생님은 제 믿음이 사실일 경우를 전제로 두고 진지하게 걱정해주시니 기쁠 수 밖에요."
프릴은 초코크림이 묻은 입가를 티슈로 깨끗하게 닦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에반이 따라준 우유 한 잔을 받아서 꼴딱 마셨다. 반 정도 마신 컵을 내려놓자 방금 닦은 입가에 또 흰색 우유띠가 생겼다.
"저기, 선생님... 보답을 하고싶다고 말하자마자 케이크를 얻어먹은 것도 염치 없는데 또 부탁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선생님이 꼭 들어주셨으면 하는 부탁이 있어요."
"꼭 내가 들어줘야 하는 부탁이냐? 이 많고 많은 지도원들 중에서 꼭 내가?"
"네. 선생님이니까 할 수 있는 부탁이예요."
"너에게 있어서 나는 대체 무슨 존재이길래 그러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내가 뭘 도와줄까?"
"주말에 제게 시간을 내어주셨으면 해요."
에반은 순간 쎄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곳에는 저번처럼 황급히 뛰어들만한 분수대도 없어서 프릴의 기대의 시선을 피하질 못하고 온몸으로 받아야만 했다. 저렇게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에 대고 싫다며 딱 잘라 거절하는 건 난이도가 보통이 아닌 일이다.
"알았어. 대신 앞으로 체스부에서 만큼은 어색하더라도 유리아 녀석을 잘 좀 도와달라고."
"네!"
에반은 케이크를 먹을 때 쓴 식기들을 설거지를 해서 정돈해 놓은 뒤 프릴과 함께 주방 밖으로 나왔다. 그는 정원을 손질하는 데 쓸 도구 몇 개를 도구함에서 집은 뒤 프릴을 본관 교사(校舍)까지 바래다주었다.
"저번에도 했던 말이지만 위험하니까 걸을 때는 앞에 보고 다녀. 단어장 보면서 다니다 어디 부딪히지 말고."
"네, 선생님."
성인 보폭으로 네댓 걸음 정도 떨어진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프릴과 이젠 신경 쓰는 것도 포기한 에반이 대화를 주고 받았다. 그런 두 사람의 사이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오오, 프릴이구나. 좋은 하루."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남성이 빗자루질을 하며 프릴에게 웃고 있었다. 사람 참 좋아보이는 인자한 미소였다. 프릴은 그 노신사에게 꾸벅 인사했다.
"윌터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래 그래. 잠은 잘 잤니?"
"네. 잘 잤습니다."
"다행이구나. 그러고보니 이쪽의 지도원 분은 이름이....."
"사감대리 에반 플루토."
"아하 그랬지. 허허. 이제 같이 지도원으로 일하게 된지도 꽤 됐으니 이름을 기억해야 허는데 나이가 들었더니 이름을 못 외우겠어."
"외울 필요가 없으니 안 외우는 거겠지."
에반이 삐딱하게 말하자 윌터는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다시 표정을 부드럽게 펴고 옅은 웃음을 띄웠다.
"허허허. 자네나 나나 둘 다 학생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게 노력하는 입장이니 앞으로 같이 잘 해보자고."
"글쎄."
에반은 악수를 청하기 위해 뻗은 윌터의 손을 무시하고 슥 지나서 가버렸다. 당황한 프릴은 쓴웃음을 지으며 멋쩍게 서있는 윌터에게 인사를 한 뒤 에반의 뒤를 쫓아갔다.
"선생님! 윌터 선생님께 왜 그러시는 건가요?"
"처음 봤을 때 부터 거슬렸는데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양반이야."
"윌터 선생님은 이곳에서 근무하신지 오래 되셨고, 친절한 데다가 불평 한마디 없이 맡은 일을 묵묵하게 하는 분이라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학생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좋으신 분이에요."
"나랑은 정반대네. 흥."
"혹시 윌터 선생님이 평판이 좋다는 점 때문에 싫으신 건가요?"
"아니야. 내가 그렇게까지 쫌팽이는 아니라고."
"그럼 무엇 때문에 윌터 선생님이 싫으신 건가요? 싫어질 만한 마땅한 계기도 없을 텐데요."
"너한테 너무 친절하잖아."
"...??"
프릴의 사고가 기묘한 기시감 때문에 잠시 회전을 멈췄다. 자신한테 친절하게 대하면 안 되는 건가 하는 주술적인 의구심도 들었다.
"그게 뭐가 잘못됐죠?"
"너한테도 친절한 건 아무 문제가 안 돼. 근데 전교생을 통틀어서 딱 너한테만 친절한 건 문제가 된다고. 그런 건 편애나 흑심 둘 중에 하나인데 어느 쪽이건 지도원 머릿속에 있어선 안 되는 거잖아."
"제 친구 소피아도 그렇고 선생님도 그렇고 선입견은 좋지 않아요. 윌터 선생님이 저한테만 친절하다는 근거는 없는걸요."
"저 양반이 이름 기억하는 건 너 하나뿐이야. 저 양반 아마 시리우스 이사장 이름은 까먹어도 니 이름은 기억할 걸? 게다가 널 볼때 얼굴이 얼마나 헬렐레해지는데."
"헬렐레??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열심히 일하시는 윌터 선생님께 실례에요."
"실례건 아니건 내 충고 잘 귀담아들어. 남자는 자기집 문턱 넘을 힘만 있으면 다 경계대상이라고. 저 윌터라는 양반이 다가올 때는 지금 나랑 두고 있는 이 안전거리 보다 두배는 더 떨어지도록 해. 알겠지?"
"으음... 수고하세요. 전 이만 가볼게요. 주말 일정은 제가 오늘 중으로 계획해서 만날 시간을 알려드릴게요. 오늘 여러모로 고마웠어요."
프릴은 에반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본관으로 들어갔다. 평소와는 달리 바닥을 살펴보며 걷는 모습을 보아하니 혹여라도 개미가 있지는 않나 신경 쓰이는 모양이였다. 에반은 프릴이 계단을 올라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뒤로 돌아섰다. 뒤로 돌아서자 윌터가 빗자루질을 하고 있었고, 지나가는 학생들마다 그에게 인사를 건냈다.
"윌터 씨, 수고가 많으십니다."
"네, 별 말씀을요."
"윌터 지도원.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에반은 심사가 마구 꼬이는 거북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이 인사를 하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것으로 모자라 건의함에 아는척 안 했으면 좋겠다고 써서 넣는 녀석들이 먼저 인사를 한다니. 그것도 존댓말까지 써가면서.
"흠... 그건 그렇고 아무리 봐도 역시 뭐가 있단 말이지."
윌터를 주시하는 에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가 있다는 거죠?"
어느샌가 에반 뒤에 선 유리아 릴리스가 되물었다.
"아 깜짝아! 들어올 때 노크 정도는 하고 들어와라. 훅 들어오지 말고."
"문 없는 실외에서 노크를 하라고 하면 어딜 두드리면 되는 될까요? 뭐, 그보다도 여기서 뭐하고 계시는 겁니까?"
"시기 질투, 의심의 눈초리. 이래뵈도 바쁘다고."
"아아 그러십니까."
그걸 답변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거냐는 눈빛으로 에반을 흘겨본 유리아는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쪽을 봤다. 그곳에는 빗자루질을 하며 학생들과 인사를 주고 받는 윌터가 있었다.
"지도원 윌터 씨 군요. 당신이 본받아야 할 1순위인 지도원입니다."
"하!!"
에반이 과장되게 큰 소리로 코웃음을 쳤다.
"당신도 인정하시겠지만 윌터 씨는 당신과 정반대인 인품의 소유자십니다."
"허이구 그러셔요."
"당신이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신임을 얻지 못하는 건 결국 당신의 태도 문제입니다. 좀 머리도 단정하게 다듬으시고, 표정도 펴시고, 목소리도 밝게 하시고, 성실한 태도도 보이시고. 그러면 학생들도 자연히 당신을 따르겠죠."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물론이죠."
"그럼 내가 내일부터 머리를 가르마 태워서 세운 다음 생글생글 웃으면서 '안녕 얘들아, 오늘도 좋은 하루! 공부 열심히 하렴! 이히히 청소 너무 신난다!' 이러고 있으면 넌 어떨 거 같냐?"
유리아는 말 대신 표정으로 부정적인 답변을 하고 있었다. 에반은 그러면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거봐. 솔직히 너라고 해서 활짝 웃는 얼굴로 옆사람이랑 수다 떨면서 등교하라고 하면 할 수 있냐? 사람은 지한테 어울리는 짓을 하며 살아야 해."
"분하지만 인정하겠습니다. 정석과는 다른 방법으로 인식을 개선할 방안을 모색해보죠."
올블랙 컬러의 두 사람이 모여서 그런지 우중충한 얘기가 오고갔다. 인상을 찌푸리던 에반이 문득 좀전에 먹었던 케이크를 떠올렸다.
"있잖아, 유리아."
"무슨 일이시죠?"
"음..... 아니다."
에반은 말을 하려다 말고 혼자 연거푸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닫았다. 유리아는 대체 뭐냐는 눈빛을 보냈다.
"갑자기 뭐죠?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 건가요?"
"그게 말이야... 아니다. 역시 아니겠지."
"그러니까 대체 뭡니까? 말씀이라도 하고서 아닌지, 맞는지 생각하세요, 궁금하게 만들지 마시고."
"그게 오늘 아침에 나한테 선물로 케이크가 왔거든. 그것도 엄청 터무니없이 비싼 거."
"잘 됐군요. 그러면 여기 서서 윌터 씨를 질투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 반응을 보니 역시 네가 준 건 아닌가보네."
"그게 궁금하셨던 겁니까? 네, 전 아닙니다."
"하긴 그렇겠지."
"뭔가요, 그 반응은? 저도 당신에게 신세진 게 있으니 예의상 의리상 챙겨드릴 의향은 있습니다. 다만, 전 깜짝 이벤트 같은 걸 준비할만한 성격이 못 되니 굳이 몰래 드리지는 않겠죠."
프릴도, 유리아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케이크를 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 것인가? 에반의 궁금증은 출구 없는 미궁 깊은 곳으로 끝없이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뭐 나야 여기 멍청하게 서있던 거라고 치고. 유리아, 넌 뭐하는 거야?"
"당신이 여기 멍청하게 서있던 걸 발견해서 드릴 말씀이 있던 참입니다."
"뭔데?"
"체스부의 활동과 관련된 겁니다. 이번주 안으로 멤버들을 전원 소집해서 회의를 할 계획이라서요."
"나도 포함하는 거야?"
"당연하죠. 당신은 체스부의 멤버가 아닌가요?"
"난 그냥 고문이니까 은근슬쩍 빠지려 했는데. 구체적인 시간은 정해뒀어?"
"아직 다른 멤버들의 개인 일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소집일과 시간을 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미리 귀띔 정도만 해두는 겁니다."
"미리 말해두는데 주말은 좀 어려울 테니 비워뒀으면 좋겠어."
"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학생 신분 이외에도 다들 해야할 일이 있을 테니 주말은 되도록이면 체스부 활동을 삼갈 예정입니다."
"그래 알겠어. 시엘 녀석에게는 내가 따로 말해줄게. 괜찮지?"
"그렇다면 전 한시름 덜겠군요.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 드리겠습니다."
"좋아. 수고하라고. 회장 겸 부장님."
유리아는 에반에게 인사를 하고 수업을 듣기 위해 교실로 향했다. 복도에 멀뚱히 선 에반도 정원 손질 업무를 시작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