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4화 〉2-1. 얕은 잠 (3) (44/88)



〈 44화 〉2-1. 얕은 잠 (3)

"저기 엘리아."

"무슨 일이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거지같은 거지가 누군  아니?"

"갑자기 무슨 수수께끼이신가요?"


"그러지 말고 한 번 생각해봐. 세상에서 가장 거지같은 거지."


"넌센스 퀴즈인가요? 가장 거지같은 거지라. 질문 자체가 역설적인 문장이라 해석하기 쉽지 않군요. 답이 무엇이죠?"

"바로 설거지야."

조식 시간이 끝나고 산더미 같이 쌓인 접시와 포크 등의 식기를 주방에서 벅벅 닦고 있는 에반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주방 청결상태를 점검하던 엘리아는 수수께끼의 해답을 듣고 피식하는 작은 웃음 조차 보이지 않았다.

"젠장, 이게 뭐냐고? 자율배식으로 바꿨더니 평소에는 아침  먹던 애들도 먹기 시작하는 바람에 설거지가 훨씬 늘었잖아."


"당신이 추진한 안건이니 그에 따르는 결과도 당신이 받아들일 몫이겠죠."

"너나 유리아나 이름이 비슷해서 그런가 성격도 비슷한 점이 많단 말이지. 웃는 걸 못보겠다는 점도 그렇고,  반박 못하게 정곡만 콕 찔러서 말하는 점도 그렇고."

"제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더 힘내주시죠."


"지금 여기서  힘을 내라고? 차라리 운명의 여신이 내게 미소짓게 하는 쪽이 더 빠르겠어."


"흐음. 그렇다는 건  여신 보다  높게 쳐주시는 건가요?"

"하. 뭐가 됐건."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는 불충죄를 모든 범죄 중에 가장 악질로 두는 아그루스 제국의 문화는 종교인이나 유신론자를 철저히 배척한다. 그럼에도 엘리아는 운명의 여신을 운운하는 에반의 농담을 문제 삼지 않고 받아넘겼다. 모르는 사람 눈에는 그냥 평범한 농담 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광경을 학생들 중 누군가가 봤다면 여신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며 지적을 늘어놨을지도 모른다.

"이거 입이 많다보니 설거지 한 번 하는데 쓰는 물도 보통이 아닌데. 이 물도 다 기숙사 예산이잖아. 그래도 애들 씻는데 쓰는 물에 비하면 약과지. 예산에서 수도 요금 나가는 거 보고 난 내가 숫자를 잘못 읽은  알았다. 아니, 대체 얼마나 씻길래 물값이 그렇게 나올 수가 있는 거야? 목욕탕도 이 정도는 안 나오겠다."


"한창 관리에 예민할 시기죠. 그렇다고 당신이 사생들에게 씻는 시간을 줄이라고 말씀하실 건가요?"


"말할 수도 없겠거니와 말한다 한들 귓등으로라도 들을까? 그냥 물은 한정된 자원이라는 것을 명심해달라고 강조하는 게 최선이지."


"그래도 당신이 이렇게 기숙사 예산의 낭비를 최대한 막으려고 노력하는 걸 보니  역시 기쁘군요. 처음에는 당신에게 기숙사 예산안을 보여줘도 괜찮을까 걱정했는데, 책임 의식을 가지고 절약에 앞장서는  보니 사감으로서 반성하게 되는 것도 많습니다."

"네가 반성할  뭐 있나? 내가 설거지하기 귀찮아서 식기 세척기 설치하려는 게 목적일 뿐인데. 근데 이걸 좀 보라고.  꾀에 내가 빠졌잖아. 도시락 먹일 때보다 설거지가 늘었어."

"지금이라도 다시 도시락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바꿀  없으니까 그런 걸 물어보는 거겠지?"


"눈치는 빠르시군요."

하아. 뜨거운 물에 세제를 푸는 에반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엘리아 너 처음에는 자율배식으로 바꾸는  반대하지 않았어?"

"그랬었죠. 자율배식을 한다면 사생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선택할 테니 영양 불균형이 걱정되서 그랬었습니다. 하지만 당신 말대로 도시락일 때도 먹고 싶은 것만 골라서 먹던 건 똑같으니 기왕이면 음식물 쓰레기라도  나오는 쪽이 나은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사생들도 만족스러운 반응이고, 이걸 계기로 아침을 늘 거르던 사생들도 아침을 먹게 된 경우가 많으니 결과적으로 좋은 것 같습니다."

"아니, 결과적으로 나는 더 힘들어졌어 큭...."


"당신이 목적을 달성하는  응원하는 차원에서 저도 절약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겠습니다."

"그렇게 냉장고 문이란 문은 죄다 활짝 열어놓으면서 절약 얘기해봤자거든?"

"점검을 위해서입니다. 청소 상태도 양호하고, 식재료마다 보관 기한도 다 적어놓으셨고, 냉동칸의 성에도 모두 깔끔하게 제거하셨군요. 훌륭합니다. 전임자 보다도 일처리가 확실하시군요."


"당연하지. 내가 괜히 S급이겠어?"

이곳에 발령 받은 뒤로 들은 지극히   되는 칭찬이였기에 에반은 한껏 우쭐해져서 설거지에 박차를 가했다.

"당신을 파견한 회사에는 당신 외에도 2명의 S급 NPC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도 저희 학원에 고용한다면 좋을...."

쨍그랑!!!! 유리 접시가 깨지는 파열음이 울려퍼졌다. 에반이 손에 힘을 갑자기  주는 바람에 그가 닦고 있던 접시가 산산조각이 난 것이였다.

"손 괜찮으십니까?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안 괜찮아...."

"그럼 어서 이쪽으로 오시면 제가 응급처치를 해드리겠습니다."

"손 말고."


"네??"


"걔들이 여기 오면 안 괜찮아. 나도 안 괜찮고, 여기 학원도 안 괜찮아. 다 안 괜찮아. 절대로. 절!대!로! 안 괜찮아!!"


에반이 손에 힘을 꽉 쥐는 바람에 그의 손에 있던 유리조각이 열과 압력에 녹아버렸다. 그 악력을 넘어선 어떤 물리력을 보고 할말을 잃은 엘리아였다. 저런 손이 고작 접시 파편에 다쳤을까봐 걱정한 것인가 자괴감도 들었다.


"있지? 엘리아  생각에는 내가 평범한 사람인  같아, 개또라이 중의 상또라이인 거 같아?"


"당신에게 실례됩니다만 만약 당신이 억지로 답하게 한다면 후자 쪽을 골라야겠죠."


"그치? 솔직히 생각해서 그렇지? 근데 있잖아?  아직 내 똘끼를 제대로 드러내지도 않았어. 나 아직 시작도 안한 거 거든? 근데 그 두 녀석들도 만만치 않아. 나도 멀쩡하다고는 절대 말 못하지만 그래도 걔들은 진짜 문제가 있어. 나만큼이나 또라이야. 아니, 어쩌면 나보다  할 수도 있어."

엘리아는 머릿속으로 NPC가 'NeuroPsychiatry Chronic illness(만성 신경정신 질환)' 의 약자인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S급이라는 건 Seclude demanded(격리 필요)를 나타내는 것인가?

"제가 듣기로는 A급 NPC 들은 일그러진 별이 직접 관련될 정도로 위험한 의뢰를 배정받는다고 하더군요. A급만 해도 그 정도인데 업체에  셋 뿐이고, 단순히 돈을 많이 지불하는 것만으로는 내어주지 않는다는 S급은 어떨지 궁금하긴 했습니다."

"궁금만 해둬. 알려고 하지는 말고. 솔직히 나 한 명도 기껏 고용해놓고 이렇게 설거지 시키는 것 밖에 못하면서."

"좋게 생각합시다. 당신이 허드렛일만 할수록 학원이 평화롭다는 뜻이잖아요?"


"그 말도 맞네."


하지만 에반이 허드렛일 밖에 할 게 없을수록 체스부의 활동이 수확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입장이 복잡한 상황이였다.


"어우! 이 놈의 설거지는 어떻게  게 해도 해도 줄어들지를 않냐? 그냥 마법 쓰면 접시 하나 닦을 시간에 싹  뽀드득 광을 낼 수가 있는데 대체 왜 손으로 한땀 한땀 닦고 있어야 하냐고?!"

"사생들이 거칠게 항의할 테니 보는 눈이 없을 때라도 마법으로 설거지를 해결하려고 하지는 말아주세요."

"이해할 수가 없어!"

에반은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전투나 기술 발전을 위한 연구 이외의 영역을 벗어나면 마법을 도통 쓰려고 하지를 않는다. 즉, 마법을 일상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하지를 않는다. 물론, 마법이라는 게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재능도 있고, 교육도 받은 엘리트들만 사용할 수 있는 첨단 기술의 정점이긴 하다. 그치만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들도 굳이 설거지는 세제로 하고, 청소는 빗자루로 하고, 멀리 갈 때도 열차를 타고 간다.

이는 마법이라는 게 무조건적으로 이명을 일으키고 이명은 생명체에 악영향을 끼치다 보니 정립된 관념이다. 더욱이 12년전 안개전쟁이라는 참상을 겪고 아직도 그 여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보니 마법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버렸다. 그 결과 마법을 일상생활 곳곳에 자리잡게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마법에 능숙한 요리사가 마법을 써서 재료들을 최상의 신선도로 보관해두고, 화염 마법으로 화려한 플람베를 선보인다면 사람들이 감탄해서 줄을 서서  레스토랑에 몰려들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람들은 '마법으로 음식을 만든다니 제정신인가? 분명히 그 음식을 먹었다가는 탈이 날거야' 라던가 '마력이 묻은 음식을 먹으면 이명에 걸려서 뇌가 망가지겠지?' 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특수한 공정을 거쳐서 조제한 약품을 제외하면 마력은 음식물을 통해 경구 섭취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신이라는 게 다 그렇듯이 이론적으로 증명한다고 해서 이미 뿌리박힌 두려움을 불식시킬 수 있는  아니다.

결국 마법에 재능도 지식도 없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마법을 두려워한다. 마법사가 악한 뜻을 품으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또 이명 때문에 망가진 뇌는 회복이 안 된다는 괴담도 파다하다 보니 마법은 철저하게 일반적인 생활과 분리되는 게 통념으로 굳어있다.

그말인 즉슨 에반은 모든 설거지를 다 수작업으로 해야 한다.

"당신이 힘을 낼  있도록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죠."


"지금의 나한테는 식기 세척기 외에 좋은 소식이 없을 거 같은데."

"아쉽게도 식기 세척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번 들어보세요. 오늘 새벽에 우편함을 확인해봤는데 당신 앞으로 선물이 와있더군요."


"선물?"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 사람이  학원에 있다고? 에반이 궁금증이 생겼는지 바쁘게 접시를 닦던 손을 멈추고 엘리아 쪽을 돌아봤다. 엘리아는 호화스럽게 포장된 작은 상자를 에반에게 보여줬다.


"누가 보낸거야?"


"수취인만 적혀 있을 뿐 보내는 사람은 적혀있지 않더군요. 익명 희망이라는 것이겠죠."

"그래서 그게 뭔데?"


"쇼콜라 케이크입니다. 우편함에 케이크를 몰래 넣어놓다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참 깜찍한 아이군요. 아아, 어엿한 아가씨들인 사생들을 상대로 아이라는 말은 안쓰려고 했는데 이런 건 너무 귀여운 것 같지 않나요?"


"하...하하..."


에반은 지금까지 자신이 이곳의 사생들에게 받아온 눈초리와 경멸어린 시선들을 떠올리며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웃음소리에 피가 섞인 것만 같았다.

"그거. 독은 없겠지?"


"실례되는군요. 당신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면 안 돼죠."

"아니, 아니, 아니, 그도 그럴 게  여기서 엄청 미움 받고 있잖아?  내가 여기서 근무하는 거 불만이잖아? 근데 나한테 선물을 줄 리가 있겠어?"


"너무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두세요. 무엇보다 저희 학생들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독을 담은 음식을 먹일 정도로 영악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냥  먹어. 난 케이크  좋아해. 너 단거 엄청 좋아하잖아?"

"기껏 선물한 학생의 마음을 무시하는 행동은 삼갔으면 합니다."

"다음부터는 얼굴 마주보고 전해달라고 답장하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잖아."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마시고 솔직하게 기뻐하세요. 당신에게 호의를 가진 학생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잖습니까?"

"아아 그렇지! 엘리아 너도 학생에게 선물 같은 거 받은  많지? 혹시 이번처럼 케이크를 준  있었어?"

"역시 누가 준 것인가는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케이크라. 그러고보니 루밀리 양에게 올리브 컵케이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오, 올리브 케이크?? 뭐야 그게."

"말그대로 올리브가 듬뿍 들어간 컵케이크죠. 다소 생소한 맛이였습니다만 의외로 나쁘진 않더군요."


에반은 자신은 그런  절대로 못 먹겠다는 말과 함께 표정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그렇다고 해서 이 케이크를 준 사생도 루밀리 양이라고 단정 지으셔선 안 됩니다."

에반의 머릿속은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대체 누굴까? 나한테 케이크를 선물할 만한 사람이  학원에 누가 있지? 유리아? 절대 아니겠지. 아라한? 그럴  같지도 않겠거니와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케이크가 아니라 동방식 선물을 준비했겠지. 시엘? 만약 시엘이라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을 것이다.

"대체 누굴까?"

"아무래도 당신이 좀전에 제게 냈던 수수께끼 보다도 훨씬 어렵겠군요. 궁금한 건 이해하지만 학생들에게 실례되는 언동 만큼은 삼가주세요."

"알았어."

"그럼 설거지 마무리를 부탁하겠습니다. 좀 이따 뵙도록 하죠."

"그래. 오늘 하루도 수고하라고."


에반에게 꾸벅 인사한 엘리아가 주방  쪽에 선물로 온 쇼콜라 케이크를 내려놓고 나갔다.

엘리아가 나가자 에반은 마법을 살짝 써서 남은 설거지를 후딱 해치울까 하는 유혹이 들었지만 어떻게든 참아냈다. 지금 여기서 엘리아의 신임 마저 잃는다면 이 학원에 그의 편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기 때문이였다.

"어휴.  어떤 상상도 현실로 끌어들일 수 있는 신비의 학문이니 뭐니 하면서 마법을 숭상하면 뭐하냐? 이렇게 설거지 하나 마법으로 못하고, 비를 피하는 방법이 우산 밖에 없는데. 바보인 거야, 멍청한 거야?"

에반은 푸념을 늘어놓으면서도 결국 설거지를 끝마쳤다. 식기들을 건조대에 잘 정리해놓고, 고무장갑도 집게로 잘 고정해서 물기가 떨어지게 해두고, 바닥의 물기도 대걸레로 말끔하게 닦아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다는 희망과는 반대로 몸은 착실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기뻐해야 하나, 서글퍼해야 하나 갈피잡지 못하던 에반의 곁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선생님. 음... 지금 바쁘신가요?"

잔잔한 호수의 물결처럼 차분하게 컬이 잡힌 은발에 리본 장식으로 포인트를 더한 헤어.  큰 사람은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시야에 리본 밖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작고 아담한 키. 다가가면  도망쳐버리는 다람쥐처럼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거리감. 프릴 루에리아였다. 그녀는 주방을 정리하는 에반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대충 마무리 됐어. 무슨 일이야?"

"저,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바쁘시다면 다음에 찾아올게요."


"그냥 지금 말해. 일단 용건을 듣고 나서 시간이 걸릴 만한 일이면 내가 다른 때에 약속을 잡아줄 테니까."

"네. 그럼 지금 말씀 드릴게요."


프릴이 다소 상기된 얼굴로 안절부절 못하는 듯한 몸짓과 함께 말했다.

"저 생각해보니. 단어장을 찾아주신 거에 대한 답례를 아직 못했거든요. 그래서...."

프릴은 거기까지 말하고서는 다시 우물쭈물 말을 더듬었다.

"그래서 이 케이크를 나한테 준 거구나?"


"네?? 케이크요??"


"엉??"

"네??"


"어....."

"어......"

"너 아니니?"

"저 아니에요."

둘 사이에 다소 뻘쭘한 공기가 맴돌았다. 헛다리 짚은 에반은 프릴에게 자신이 받은 케이크를 보여줬다.

"그게 말이야. 누가 우편함에  앞으로 케이크를 넣어놨더라. 근데 익명이라 누군지 모르겠단 말이지. 그래서 난 방금 네 말을 듣고 네가 넣어놓은   알았어."

"아 그랬던 것이군요. 제가 넣은 건 아니에요. 만약 저였다면 우편함이 아니라 선생님에게 바로 드렸을 거에요."


"착한 아이구나."

에반은 주방에서 티스푼과 포크 몇 개를 집어들고 프릴에게 말했다.

"일단 나머지 얘기는 먹으면서 할까?"

"네?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선생님이 선물로 받으신 거잖아요."

"나 이거  못 먹어. 단거 잘  먹는 편이라서. 그래도 선물로 받은 거니까 남겨서는  되잖아?"


에반은 프릴을 아무도 없는 기숙사 식당의 식탁 한쪽에 앉게   자신이 선물받은 케이크를 올려놨다. 가까이서 케이크의 포장 상자를 확인한 프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이거 프라우드에서 만든 거네요?!"

"프라우드? 그게 가게 이름이야?"

"가게라고 불러야 할까요? 미리 만들어둔 걸 진열해서 파는 게 아니라 주문이 들어오면 그 요구에 맞춰서 만드는 방식이에요. 그런데 프라우드라는 브랜드 명칭만 봐도  수 있듯이 파티시에가 자부심이 엄청나다네요. 그래서 케이크 하나를 만들어도 들이는 정성과 고집이 남달라요. 오죽하면 자기 기준에 부합하는 재료를 찾지 못하면 찾을 때 까지 영업을 안한다네요. 자기 결과물에 흠이 있는 꼴은 절대 못보겠다나?"

"장인정신이라는 거네. 그치만 그런 식으로 해서 장사가 되나?"

"주문이 워낙 밀려 있어서 한번 예약하려면 보통 10개월 정도 기다려야 해요."

"10개월?! 케이크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낳는 거 아냐?"

"아,  표현 재밌네요."

"고맙다."

유리아나 엘리아였으면 무반응이였겠지.


"무튼 그런 거 많지. 디저트가 식사 보다도 비싼 거. 이 케이크도 어지간한 밥한끼 보다도 비쌀 거 아니야?"


"밥한끼요? 잠시만요."

프릴이 포장지 밑쪽에서 가격표를 확인했다.

"220만룬이에요."


"2,200,000룬?!!"


에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람에 앉아있던 프릴도 깜짝 놀라 움츠러들었다.


"이 케이크  조각이 지도원 월급이랑 맞먹는다고?!"


"그래서 붙은 별명이 '먹는 보석' 이나 '식탁에 끼우는 반지' 에요."


"하여간 부자들 생각하는 건 이해를 못하겠어."


"그런데 이렇게 얻기 힘든 비싼 케이크를 선물한  보니 누군진 몰라도 선생님이 정말 마음에 들었나봐요."

평정심을 되찾고 생각해보니 이 케이크가 비싼 건 파견직 월급쟁이인 에반에게 해당되지 이곳 루나칼립스 학원이라면 케이크 한 접시에 그 정도 돈을 쓸 학생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누르워에서 팥빙수나 먹다가 갑자기 이런 걸 받으면 놀라지 않을  없는 노릇이다.

"역시 이건 선생님이 혼자서  드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냥 평범한 케이크인 줄 알았어요."

"신경쓰지 마. 비싸건 아니건 나 혼자서 다 못 먹는 건 매한가지니까."


에반이 포장을 열어보았다. 모습을 드러낸 프라우드의 쇼콜라 케이크는 확실히 데코레이션의 배치 하나 하나가 미적인 감각이 돋보였고, 향기도 어찌나 진한지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을 뿐인데 이미 초콜렛을 한입 먹어서 목으로 넘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빛깔은  좋네. 맛은 어떠려나?"

에반과 프릴은 포크로 케이크를 살짝 쪼개서 집었다.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서 혀위에 올렸다. 부드럽기 때문에 이로 씹을 것도 없었다. 혀로 눌러서 입천장에 문지르는 것 만으로도 사르르 풀어져서 입안 골고루 섞였다. 이윽고 입안 전체에 빈틈없이 파고드는 무게 있고도 깊은 단맛. 충분히 음미한  사람이 감상을 말했다.

"맛있네."


"맛있네요."


"...더 강렬한 감탄사는 없어?"

"그, 글쎄요."

두 사람 모두 보석을 한  베어문  치고는 심심한 반응이였다. 에반은 슬며시 포크를 내려놓고 프릴을 봤다.


"우리 하던 얘기를 마저 하자면. 나한테 보답을 하고 싶다고 했지?"

"네. 그때 누르워에서 먹었던 과자도 결국 선생님이 계산하셨죠."


"보답 같은 거 필요 없다고 해도 할 거지?"

"네. 그래서 선생님이 좋아할 만한 걸 물어보려고 찾아왔어요."


"그래, 여전히 고운 마음씨구나. 뭐가 됐건 다 좋으니 너무 비싼 것만은 주지 말았으면 해."

"선생님은 지금 갖고 싶은 게 무엇인가요?"

머릿속에는 식기 세척기 밖에 없지만 그대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에반은 적당히 둘러댔다.


"그냥 잠이나 좀 더 편하게 자고 싶을 뿐이다."

"잠을  못 주무시나요?"


"그런 건 아닌데. 아무리 자도 얕은 잠 밖에  자서 말이지."

얕은 잠. 눈만 살짝 감았을 뿐인 몸 뿐인 잠. 머지 않아서 결국 다시 깨어나게 되는 잠. 더 이상 머리 맡에서 온화하게 웃으며 자장가를 불러줄 이도 남아있지 않기에, 영혼의 눈은 부릅뜬 채로 한없이 충혈되어 가는 그런.....

얕은 잠.

"선생님? 괜찮으세요?"

"아. 미안."

"피곤하신가요?"

"아니야."


어느덧 에반은 포크를 내려놓고 멍하니 앉아서 프릴을 구경하고 있었다. 입가에 초코크림이 묻은 프릴이 그 시선에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했다. 그러나 에반은 곧 시선을 프릴에게서 거두고 텅 빈 천장을 멍하니 쳐다봤다.


"선생님. 실례되지 않았으면 하는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그....."


프릴은 물어봐도 괜찮은 걸까 잠시간의 내적 갈등을 겪은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에반 플루토라는 건 역시 본명이 아니죠?"


"왜 아니라고 가정하는 거지?"

"자기 아기에게 '검은 죽음' 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부모가 어딨겠어요?"

"요즘도 아민어 공부 열심히 하고 있나 보구나."


에반이 비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생각에 빠졌다.


"그래. 지금의 이름은 내가 받은 이름이야. 그것도 내게 있어서 부모보다도 더 큰 존재에게서 받았지."


"부모보다 더 큰 존재요? 그렇지만 검은 죽음이라고 이름을 붙인  애정을 담은 작명은 아니겠죠?"


"애정? 글쎄. 이토록 마음에 안 드는 이름을 굳이 안 버리고 살아가는  보면 애정 보다도 더 끈쩍하고 성가신 무언가겠지."


"음.  모르겠어요."


"쉽게 설명해주마. 난 내게 이 이름을 붙여준 그녀가 누구보다도 소중해. 그래서 내 죄목이나 다를 바 없는 내 이름을 낙인처럼 달고 살기로 했어."


내가 지금 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거지? 에반의 머리가 지끈하고 아파온다.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듯이 다시금 잊기 싫은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흰옷이 그토록 멋지던 네가 어찌도 이리 검게 물들었느냐? 나는 내 온 생애를 바쳐 네게 삶에 대해 가르쳤거늘, 너는 내 삶을 통해 죽음을 깨우쳤구나. 비록 어긋나고, 실수하고, 헛돌더라도 나를 그리워해주지 않겠니? 나의 오랜 친구, 나의 제자, 나의 남자, 그리고 나의......


검은 죽음(Evano Plutia)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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