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2화 〉2-1. 얕은 잠 (1) (42/88)


  • 〈 42화 〉2-1. 얕은 잠 (1)
     



    에반 플루토는 잠이 많은 편이다. 조금만 가만히 두면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고, 일정이 없거나 시간이 비면 생산적인 활동은 절대로 하지 않고 적당한 곳에 드러누워 잠부터 청한다. 잘때 환경에 예민하지도 않다. 조용하지 않아도, 어둡지 않아도, 따뜻하지 않아도, 뽀송한 침구류가 구비되어 있지 않아도 어디든 일단 머리만 대면 그곳이 곧 에반의 침대일 정도다.


    건강에 이상이 있어서 그런  아니다. 진균이나 바이러스 따위가 그의 몸을 망가뜨리는 건 불가능하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피로가 쌓여 그런 것도 아니다. 그는 무슨 일이건 적당히 하는 주의다. 애초에 초월적인 기술이 깃든 그의 신체는 피로라는 것 자체를 느끼지 않는다. 문제되는 것은 참극을 반복하면서 마모를 거듭해온 정신 쪽의 피로다.

    결국 에반 플루토는 잠을 자고 싶은 것이 아니다. 눈을 감고 싶은 것이다. 그리곤 다시는 뜨고 싶지 않은 것이다. 육체의 피로는 편한 자세로 누워서 눈만  감고 있으면 말끔히 해결되는데, 정신의 피로는 그렇질 못하다. 길고도  세월을 직시하며 후회와 한탄을 곱씹어온 정신은 대체 어디의 눈을 감으면 편안해지는 걸까?

    글쎄.  어떤 발버둥을 쳐도 정신은 잠드는 일이 없다. 정신이라는 것은 죽을 때까지 또렷하게 각성을 유지한 채로 스쳐온 모든 기억과 자극을 끌어안고 놓지를 않는다. 그렇기에 결국 에반은 무언가를 하는 걸 포기하고 드러누워 잠만 청하게 되었다. 기억을 늘리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것뿐이기에.


    에반은 불로불사를 꿈꾸는 마법사들을 셀 수도 없이 많이 만나왔지만 도무지 그들을 이해할  없었다. 만일 그들이 에반 플루토와 정신이 잠깐이라도 공유된다면 곧바로 자신의 연구실에 쌓인 불로불사에 대한 레포트들을 찢어버리겠지.

    단언컨대 죽음은 구원이다. 그러나 더 이상 이 세상에는 에반 플루토를 죽일 수 있는 존재가 남아있지 않다.

    그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 외에는 말이다.

    우습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을 이토록 망가뜨렸고, 또 아직도 놔주질 않는 그녀가 자신을 구원할  있는 유일한 존재라니.

    "후우..."

    잠  자고 싶은데 이런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헝클어놓는 통에 잠이 오질 않는다. 좁고 허름한 자신의 숙소에 누운 에반은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의 그는 학생들 앞에서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투여했던 혈청의 부작용 탓인지 예전보다 잠이 줄었다. 새벽에 갑자기 깬 이후로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며 쉽사리 잠을 이어나가질 못한  결국 창밖으로 동이 터오는  지켜보게 되었다.


    "아... 이렇게 일어나는 게 제일 기분 더러운데."

    다시 자기에는 기상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고, 그렇다고 일어나기는 싫고. 차라리 알람이 빨리 울렸으면 하는 마음과, 아예 울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끈적한 비율로 섞여서 정말 싫은 기분이였다.

    "하...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 존재하는 거 까지 포함해서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

    전형적인 닮아선 안  어른의 모습을 한 에반 플루토가 이불 위를 뒹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똑! 똑! 똑!

    "NPC 안에 있지? 좀 나와봐!!"


    그러나 세상은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는 그의 소망을 이뤄줄 생각이 없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까칠한 목소리가 기상 알람 보다도 빨리 에반을 깨웠다.


    "아아아 대체 뭐냐고. 이 꼭두새벽에 대체 누구야?"


    에반이 푸념을  사발 하는 동안에도 문 두드리는 소리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무슨 용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반이 자고 있었다면 깨워서라도 나오게 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노크였다.

    "예, 예 나갑니다."


    에반이 문을 열자 이 이른 시간에 벌써 깔끔하게 단장을 마친 학생이 까칠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뉘신지요? 아직 영업 시간 아닌데."

    "허! 여전히 방자한 태도로구나! 고개 숙여 예의를 갖춰도 모자랄 망정!"


    고압적인 태도와 오만한 말투, 거기에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데에 익숙한 사람만이 지을  있는  표정. 척봐도 귀족 집안의 영애였다.

    "거 뭣땜시 아직 출근시간도 아닌 사람 깨우는 거냐? 니가 시간  근무 수당이라도 줄 거야?"

    "뭣이?! 감히 어디서 반말을 하는 게냐? 그 천한 입버릇을 고쳐야 쓰겠구나. 내가 누군지 알고도 그런 얼빠진 얼굴을  수 있을까?"

    에반은 피로가  밀려오는 게 느껴졌다. 여태 잠을 못 이루고 뒤척였지만 지금이라면 이불  덮는 순간 렘수면 생략하고 깊이 잠들 자신이 있었다.

    "잘 들어라. 내가 바로 콜테르 공작가의 장녀 슈나 콜테르다!"


    콜테르(Kolther). 황제를 섬기는 전사를 뜻하는 아민어다. 이름이 나타내는 대로 콜테르 가문은 오랫동안 황제의 최측근에서 왕실을 보좌하며  전쟁을 주관해왔다. 그렇기에 황제에게서 장대하고도 비옥한 영토를 하사 받았는데  영토가 바로 아그루스 제국의  1번인 콜테르. 이 콜테르는 번의 이름만 봐도  수 있듯이 콜테르 공작 가문이 대대로 지배하고 있다. 11개의 번 중 첫번째답게 왕도의 바로 서남쪽에 인접해 있으며 아그루스 제국의 경제, 산업, 행정의 중심지로 꼽히는 '제국의 코어'  하나이다. 지금 에반이 심기를 건드린 학생은 그런 곳을 영토로 삼은 어마어마한 공작가의 장녀였던 것이다.


    물론 에반은 쥐뿔도 관심 없지만.

    "아  그러십니까. 그래서. 새소리도 아직 안들리는 이 새벽 부터 무슨 일로 이런 누추한 곳 까지 행사하셨대요?"


    "그게 말이지!"


    에반은 대충 대답했다. 하지만 태도야 어찌됐건 일단 존댓말을 썻으니 슈나는 넘어가기로 한 모양이다.


    "빨래를 해야하는데 세탁기가 고장났어."

    "....허...."


    에반은 실소 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이른 시간부터 찾아와서 사람을 깨운 거란 말인가? 그나마 안 자고 있어서 망정이였지 한창 꿀잠 자면서 좋은  꾸고 있는 도중이였다면 그의 멘탈이 살균세탁 당했을 것이다.

    "이따 출근하면 고쳐놓을 테니까 들어가 주무셔."


    에반은 그렇게 말하고선 다시 숙소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문을 닫으려고 해도 문이 당겨지지 않는다.

    "자, 잠깐만!!"


    슈나가 문을 붙잡았다.

    "정말 무례하구나!! 지금 당장 뛰쳐나와서 고칠 생각을 해야지!!"

    "아니 이렇게 이른 시간에 굳이 아직 일할 시간도 아닌 사람을 깨우고 싶은 건가?"


    "그 틈에  반말을 하는구나!"


    "혼잣말, 이거 혼잣말."


    "아아 혼잣말...어어? 음...음... 아. 혼잣말인가."

    바보인 건가. 유독 권력을 휘두르는 애들일 수록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을 상대해본 경험이 별로 없다보니 에반 앞에선 하나같이 나사가 풀린다.

    "빨래를 꼭 지금 해야 하나?"

    "당연하지! 그럼 다른 아이들도 있는데 세탁물을 방안에 방치해두란 말이야? 지금 해둬서 건조기

    돌려야 딱 맞는다고."


    "하아아 거  까다롭기는."


    에반은 귀찮았지만 상대가 이대로 물러날  같지도 않고, 어차피 다시 잠을 청하기엔 글러먹은 시간이였기에 마지못해 공구가방을 꺼냈다. 부잣집 애들이  유리아 같이 올곧고, 귀족 애들이  프릴 같이 순둥이였으면 세상이 이렇게 살기 각박하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속으로 푸념하며 세탁실로 향했다.

    의욕없이 쳐진 에반의 걸음걸이를 못마땅하게 째려보던 슈나가 말했다.


    "콜테르 공작가의 이름도 알아듣지 못하다니 네 녀석은 참 세상 물정에 귀가 어두운가 보구나. 하긴. 그러니 이런 잡심부름이나 하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거겠지."


    "내  어두운 거랑 잡심부름 하는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이 있냐? 직업에 귀천 없고 다 자기 재주로 밥벌어 먹으며 사는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니 이름 기억하려고 태어난 줄 아니?"

    슈나는 그 자리에 굳어 섰다. 그리고는 말도 안 되는 것이라도 본 양 충격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했다. 그 목소리는 살짝 떨리기 까지 했다.

    "감히 어디서 말대답이지?! 게다가 이젠 대놓고 반말을 하는구나!"


    "어이. 슈나 콜테르 씨."


    "....?!!"


    "댁이 공작가의 장녀건, 월셋방의 이민자건 내 알 바 아니야.  눈에는 어차피 똑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라고. 그러니 나한테 입에 발린 말은 기대하지 말라고."

    "건방진 것!! 여기서 계속 일할 생각이 없나보구나!!"


    "그래, 없어."


    "어? 어라...??"


    "어라는 뭘 어라야,  보면  보이나? 뒷탈 안 나게 무사히 짤리는 게 내 목표다. 그런 내가 출근 시간도 아닌데 일어나서 세탁기 고쳐주는 걸 고맙게 생각하라고."


    "이, 이런!! 방자하기 짝이 없구나! 두고 봐! 내가 반드시 버릇을 고쳐놓겠어!"

    슈나가 옆에서 씩씩거렸지만 에반은 무시한 채  갈길을 서둘렀다. 기숙사의 사생들은 1층에 있는 세탁실에서 각자의 빨래를 해결한다. 그러고보니 세탁실에는 공용 세탁기가 여러 대 있는데 고장난 게 있으면 멀쩡한  아무거나 쓰면 될 것을 왜 굳이 고쳐달라고 하는 걸까?

    모르겠다. 어차피 연장 다 챙겨서 나온 거 이제 와서 물어본들 뭐하겠나? 더욱이 저렇게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애한테 더 말 걸어봐야 유쾌한 대화가 오고 가겠는가?

    에반이 세탁실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빨래를 하려는 학생은 슈나 혼자가 아니였다. 세탁물 바구니를 들고 있는 유리아 릴리스가 난색을 표하며 서있었다.

    "어어. 유리아냐?  그러고 서있어?"


    "아, 에반 플루토 씨. 마침  됐군요. 세탁기가 작동이 안 돼서 곤란한 참이였습니다.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고는 싶었지만 아직 주무실 시간이라 그러질 못하고, 저 혼자서는 원인도 모르겠고 참 난감했죠."

    "그으래? 어디 사는 누구씨는 내가 자건 말건 문 두드리던데. 정말 비교된다."

    "잠깐?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지?!"

    "진짜 하기 싫었는데 유리아가 곤란해 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서야지. 아까까지만 해도 진짜로 진짜 하기 싫었거든."

    "왜,   보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제 역할을 하란 말이야!"

    에반은 발끈하는 슈나를 무시하고 공구박스를 내려놓았다.


    "혹시 고장이 어떻게 났어? 물이  나온다면 수도 파이프에 문제가 생긴 거고, 회전통이 안 돌아가면 기계를 뜯어내봐야 하는데.  까가각하고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거라면 깜빡하고 세탁물 주머니에서 못뺀 물건이 어딘가에  거야."

    "그런 오작동은 아닙니다. 아예 전원 자체가 안 들어옵니다."

    "아이고, 전기 쪽이구나. 벌써부터 귀찮아질 예감이 팍팍 드는데. 그래서? 어느 녀석이 말썽이야?"

    "전부 다요."


    "엉?? 여기 있는  전부 다?"

    "네."

    에반은 공구함을 뒤적거리던 손을 멈추고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세탁기들을 쳐다봤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어제 부대시설 점검 한 바퀴 싹 돌았는데 별 문제 없었단 말이야. 한 놈만 그런 게 아니고 여기 있는 것들이 전부  맛탱이가  정도면 보통 배전 시설 문제인데. 허허... 그렇다면 일이 더 귀찮아진단 말이지."


    에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배전함을 열어봤다. 그러나 전선들도 꼬이거나 끊어진 부분 없이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고 전력 공급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큰 공사가 될 것이라는 각오를 굳힌 채 어떤 참상이 기다리고 있어도 의연히 마주하리라고 결의했거늘 오히려 상태가 너무 양호해서 당혹스러웠다.

    "이게 뭐야? 멀쩡하잖아?"


    어안이 벙벙해진 에반은 배전반을 닫고 세탁기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분명히 외관은 멀쩡하다. 어제 점호를 마치고 시설들을 한번 점검했을 때 봤던 그 상태 그대로다. 기계 내부의 이물질 청소 상태도 양호하고, 부품 결합에 이상도 없다. 다만 예비 전력을 너무 낭비하고 있길래 콘센트를 뽑아뒀을 뿐 이렇다  문제는 없었... 어라? 잠깐만?

    에반은 설마하는 심정으로 플러그를 살펴봤다. 제발 아니길 하고 속으로 빌면서 콘센트가 제대로 꽂혀있나 확인해봤다. 그 결과, 어제 에반이 점검하면서 절전을 위해 뽑았던 상태 그대로였다. 울컥하는 심경과 함께 그의 체온, 맥박, 호흡, 혈압 모든 바이탈 사인이 가파르게 치솟았다.


    "아니!!! 콘센트를  꽂았잖아!! 바보들이냐?!! 내가 이거 꽂으려고 이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나서 여기까지 와야겠어?!!"


    "콘센트?"


    "어디다 대고 언성을 높이느냐?! 그리고 콘센트라니 그게 뭐냐?"

    "니들은 마법 말고는 모르는 거야? 기계가 돌아가려면 동력이 필요하고, 그 동력을 공급하는 선이 바로  콘센트다! 설마 이것도 살펴보지 않고 고장이 났다고  줄이야."


    "그,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 애초에 본가에선 시녀들이 빨래를 다 맡았는데!! 잘못이 있다면 시녀를 들이지 못하게 하는 이 기숙사 규칙이 잘못된 거야!! 공작가의 장녀가 손수 빨래를 해야 하다니 도대체가 날개 계급의 체통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 그럼 집에서 통학하시지 왜 굳이 기숙사에서 안 쓰던 세탁기 쓰면서 고생하셔요, 콜테르 공주님?!"

    "우문이구나! 콜테르 번에서 여기까지의 거리가 얼마인 줄 모르는 게냐?!!"

    "라쿠이르 시내에 별장 하나 얻어서 통학하면 되잖아! 그렇게 학원 다니는 애들도 많더만!"

    "나도 그러고 싶었지! 그치만... 그치만 입학 선물로 별장 대신 레스토랑을 선택해서... 아니, 아니 잠깐만 이 얘기를 내가 왜 하는 거지? 아무튼!!"

    서로 으르렁거리며 혈압을 올리고 있는 에반과 슈나 사이로 유리아가 끼어들었다.


    "한 가지 궁금한  있습니다, 에반 플루토 씨. 왜 세탁기의 콘센트가  뽑혀있던 것이죠?"


    "내가 어제 점검하면서 뽑아놨지."


    "왜 그런 거죠? 기계가 돌아가려면 동력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으면서 어째서 동력원을  뽑아놓은 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기를 절약하기 위해서야. 콘센트를 계속 꽂아놓으면 세탁기의 작동 상태를 유지시키느라 예비전력이 지속적으로 소비 되는데 이게 당장은  거 아닌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꽤 낭비되는 전력량이 많단 말이야. 그러니 아무도 사용하는 사람이 없는데 밤새 전기를 낭비할 필요 있겠어?"

    "아... 그런 것이군요."


    에반은 한숨을  쉬며 공구 상자를 도로 닫았다.

    "하기야 백화 상회의 차기 회장님이랑 콜테르 번의 공주님이 절약이   알기나 하겠어?"


    "뭐, 뭐라고?!"


    또 다시 에반이랑 으르렁거리는 슈나와 달리 유리아는 반박을 하지 못했다.

    "어휴, 유치원도 아니고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에반은 '절전! 미작동 시 플러그를 확인해주세요.' 라고 쓴 종이를 세탁기와 건조기 마다 붙여놓으며 궁시렁거렸다.

    하지만 이른 아침의 세탁실 소동은 시작에 불과했다. 기숙사 식당에서도 많은 사생들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웅성거리고 있었다.


    루나칼립스 학원의 기숙사는 평일 동안에 조식을 제공한다. 먹을지 안 먹을지는 자유지만 대체적으로 아침을 챙겨먹는 사생들이 많은 편이다. 이 조식 메뉴는 조찬 업체에서 매일 준비해주는 도시락으로 제공된다. 그런데 오늘 아침 식사를 위해 기숙사 식당을 찾은 사생들을 기다리고 있는  도시락이 아니라 자율배식대였다.

    유리아 역시 아침을 먹기 위해 기숙사 식당을 찾아왔다가 평소와는 다른 풍경에 섬칫 멈춰섰다. 사생들이 선뜻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어느새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출근한 에반이 사생들에게 말했다.


    "다들 사전에 공지를 못해서 미안해. 나도 시간이 걸릴 줄 알았던 조식 개편이 이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은 몰랐거든. 그러니까 말이야, 이제 앞으로 기숙사 조식은 자율배식으로 바꿀 거야. 그도 그럴 게 사생들마다 아침 식습관이 차이가 많이 나거든. 누군 빵을 주로 먹고, 누군 과일이랑 샐러드를 선호하고, 누군 우유 한 잔이 제일 좋고, 누군 든든히 먹어두고 싶어하고. 그런데 사생들에게  똑같은 도시락을 일괄 지급하다 보니까 다들 거의 남기는 데다가, 임자 못 만난 도시락들도 원칙적으로 버려야하다보니 음식물 쓰레기가 엄청 나오더만."

    물론 그 음식물 쓰레기의 처리도 에반 몫이다. 설명하다가 몸서리를 치는 모습을 보니 그간 음식물 쓰레기 처리로 겪은 고초가 이만 저만이 아닌 듯했다.

    "아무튼 루나칼립스 기숙사의 음식물 쓰레기 배출량은 너희들도 좀 자각을 해야 하는 부분이야. 손도 대지 않은 멀쩡한 음식들이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데다가 그걸 처리하는 비용도 다 기숙사의 예산이라고. 다행히 평소에 도시락을 준비하던 조찬 업체에게 자율배식으로 바꿀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해주더라고. 그러니 이제부터는 남기지 말고 먹을 것만, 먹을 만큼 집도록 해. 아 참 그리고, 이거. 조식으로 주로 먹고 싶은  뭔지 조사하는 설문지야. 작성해서 여기 박스에다 넣어놓으면 내가 이번주 안으로 조찬 업체에 제출할게. 그럼 식사들 맛있게 하라고."


    에반의 절약 프로젝트는 거기서 끝이 아니였다. 루나칼립스 기숙사 이곳 저곳에 전기를 아끼자, 물을 아끼자, 마력은 무한동력이 아니다 등의 종이가 붙었다.


    날이 밝았으니 복도를 돌아다니며 소등을 하고 있는 에반의 등뒤로 유리아가 다가왔다.

    "근래에 느낀 점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을 평가하려면 오랜 시간과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더군요. 그렇지 않으면 그저 치우친 선입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치우친 시선으로는 그 사람이 가진 많은 가치를 놓치게 되더군요."

    "뭐냐? 갑자기 왜 내 앞에서 독후감을 쓰고 그래?"

    "당신을 다시 봤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오늘의 당신은 어엿한 지도원 같습니다."

    "오호 그러냐? 드디어 내 진가를 알아보고  인정해주는 것이구먼!"

    "아뇨 그건 아닙니다. 아직이에요."


    "쳇! 어렵기는."

    "무슨 계기로 이렇게 절약 캠페인을 벌이시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엘리아가 기숙사 예산 장부를  수 있게 허락해줬어. 근데 솔직히 처음 딱 봤을 때는 어이가 없더라고. 사실 생각해보면 다들 부잣집 애들이니 당연한 거지만, 낭비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더라. 그 때문에 습관만 조금 바꿔도 안 써도 되는 돈이 줄줄줄 예산에서 새나가고 있었지."


    "그 점은 저도 오늘 통감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저는 꼭 필요한 곳에만 지갑을 여는 것이 절약의 전부인  알고 있었죠. 하지만 제 사소한 습관 하나 하나가 모두 불필요한 지출에 관여하고 있었군요."


    "어... 너는 좀 펑펑 쓰는 쪽이 낙수 효과에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다만, 아무튼 배운 게 있다니 잘 됐네."


    "그러면 그렇게 절약으로 아낀 기숙사 잉여 예산은 어떻게 하실 건지 계획이 있으십니까?"


    "물론 있지!"


    "흥미롭군요. 그게 무엇인지 물어봐도 괜찮은지요?"

    "식기 세척기다!"


    "네...?"

    유리아는 대체 무슨 대답을 기대했던 걸까? 사실 딱히 기대하거나 예상이 가는 건 없었지만 그럼에도 식기 세척기는 다소 뜬금없는 대답이였다.

    "식기 세척기요?"


    "그래! 맨날 애들 조식  먹고 나면 컵이랑 포크랑 앞접시들이랑 닦는 거 엄~청 귀찮거든? 근데 이제 식기 세척기 하나 뙇! 놓으면  고생도 안녕이라고."

    "결국은 그냥 설거지를 하기 싫으셨던 것입니까?  일념 하나로  캠페인을 벌이고 조식까지 개편하신 거라면  무서운 행동력이군요."


    "왜 그래? 이것도 중요한 문제라고. 내가 설거지 같은 단순노동에 할애하는 시간이랑 체력이 줄어들잖아? 이미 엘리아도 설득 다 해놨다고."

    "그건 그렇네요. 그럼 식기 세척기로 얻게 된 시간과 체력은 어디에 쓰실 겁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낮잠을 더 자야지."

     전에 본인 입으로 말한 거지만 사람을 평가하려면 많은 시간과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역시 섣불리 이 인간을 지도원으로 인정하지 않길 잘했다.


    "어휴... 예전의 저였으면 당신을 또 경멸했겠죠."


    "뭐야? 그럼 지금은 경멸 안 한다는 거야?"


    "목적은 불순하지만 그걸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지극히 유익하니 이번에는 당신을 지지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흐흐. 식기 세척기. 기다려라."


    에반이 흑심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조식이 도시락에서 자율배식으로 바뀌면서 음식물 쓰레기는 줄어들었지만 설거지할 게 늘어났다는 사실을. 본전이라도 건지려면 더 간절히 절약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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