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Session 0
NPC 파견 업체 No Problem Company 본사의 지하 가장 깊은 곳에는 정원이 하나 있다. 크고 호화로운 정원은 아니다. 그러나 화훼들의 배치와 풀잎들의 생기를 보면 정원사가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정원을 돌보는지 알 수 있었다. 정원 한 가운데 나무 한 그루가 아름드리 서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고,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새장 속에서 작은 새가 어여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햇빛 한 줌 닿지 못하는 깊은 지하에 어떻게 이토록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고, 싱그러운 풀빛이 생명의 향기를 낭송할 수 있는걸까? 그야말로 마법과 같은 풍경이다. 하지만 이 풍경을 직접 감상하는 것은 고사하고 정원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자는 NPC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이며 이들 역시 허락 없이는 정원에 접근하지 못한다.
정원 한 가운데에는 은색 단발의 여인이 홀로 서있었다. 머릿결도, 피부도, 걸치고 있는 옷도 전부 새하얀 색이라 순백의 신부와 같았다. 여인은 자신의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나무 쪽으로 돌아서서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Hal adna hamiso tagnu un kano arhendal idirid aku el jahid kod."
아민어 가사를 흥얼거리는 맑은 목소리에는 듣는 이로 하여금 슬픈 감정에 사로잡히게 하는 영혼의 떨림이 깃들어 있었다. 그때 정원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도록 로브를 뒤집어 쓴 청년 남성이었다. 그는 순백의 여인의 뒷모습에 대고 공손히 무릎을 꿇고서 말했다.
"우리의 구원자시여."
순백의 여인은 대답이 없었다. 뒤돌아서서 얼굴을 보이지도 않았다.
"세 명의 S급 NPC 중 두 명이 이번 세션에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도 한결같이 세션에 참가하는 걸 거부한 S급 NPC는... 에반 플루토입니다."
에반 플루토라는 이름을 듣고 나서야 여인이 목소리를 냈다.
"플루토에게서 답장이 왔나?"
"오긴 왔습니다만... 분명한 거절 의사를 표하고 있는 것 만큼은 확실합니다."
여인이 보낸 편지의 내용은 이제 곧 세션이 있을 예정이니 일정이 비는 시간을 보고하라는 지시였다. 세션이란 S급 NPC들이 본사의 정원으로 찾아와 개인 면담 시간을 갖는 것이다. 여인에게 편지를 받은 에반 플루토는 답장을 보냈다. 그가 보낸 답장에는 큼지막한 凸자 하나만 덩그러니 쓰여있었다.
"우리의 구원자시여. 에반 플루토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는 너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계속 이렇게 천횡(擅橫)을 일삼게 두어야만 하는 겁니까?"
"다음 번 세션엔 그가 찾아올 것이다. 내가 부르지 않아도, 본인의 의지로 스스로. 지금은 참가 의지를 보인 두 명의 일정만 조율하라."
"어리석은 저희는 당신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으니 그저 따를 뿐입니다."
정원에 찾아왔던 이가 떠나자 다시 여인이 홀로 남았다. 여인이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마치자 그녀의 형상이 고장난 홀로그램처럼 치지직거리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녀도, 정원도 모두 한 순간에 사라졌다. 정원이 사라지자 좁은 공간 안에 어둠만이 남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여제석이 음산한 빛을 발했다.
좁은 공간의 바닥이 열리자 그 밑은 바닷물로 가득한 원통 모양의 깊은 우물이였다. 여제석은 천천히 바닷물에 잠겼다. 여제석이 완전히 우물 바닥에 가라앉았을 때 바닥이 다시 닫혔고 좁은 공간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루나칼립스 학원 기숙사의 허름한 숙소. 에반 플루토는 찾아올 이 없는 숙소에 혼자 남아서 낡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있었다. 책상 위에는 그가 몹시도 싫어하는 곳에서 온 통지서 한 장이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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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등급 NPC 에반 플루토 앞
No Problem Company 총괄이사회에서 현장직 NPC 에반 플루토에게 전합니다. S급 NPC를 대상으로 한 세션의 일정을 고지하오니 하기(下記)된 기간 이내로 답장을 요합니다.
아울러 귀하는 수 차례에 걸쳐 합당한 이유 없이 세션에 불참했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리오니 금번 세션에는 필히 참석하여 추후 인사상 불이익이 없도록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NPC에게 맡겨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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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익! 에반은 통지서를 갈기갈기 찢어서 휴지통에 버렸다. 인사상 불이익이라고 무서운 단어를 들먹여봤자 에반은 아쉬울 게 없었다. 꼴보기 싫은 통지서를 찢어버리고는 책상을 내려다봤다. 그의 책상에는 오랫동안 찾는 이 없이 방치되어 있던 체스판이 놓여있었다.
치직! 치지직! 학원에서 내선으로 깔아둔 교내 연락망 수신기의 스피커에서 잡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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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중 착신이 1건 있습니다. 음성 메모함을 확인해주세요.
<유리아 릴리스> 님으로부터 1건의 메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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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이 재생버튼을 누르자 유리아가 남겨둔 음성 메모가 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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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 플루토 씨, 유리아입니다. 앞으로 가끔 연락 드릴 일 있으면 수신기로 음성 메모를 남겨드릴 테니 이 내선 번호를 저장해두셨으면 합니다. 아, 그래도 일단은 학생회 번호니까 저희의 동아리 활동과 관련된 음성 기록이 저장되지 않도록 답장을 남기지 말아주세요. 확인한 음성 메모는 잊지 말고 꼭 삭제하시고요.
동아리 연합회에 체스부의 신규 동아리 개설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승인이 나는대로 루에리아 양, 아라한 양, 시엘 군에게 입부 신청서를 배부해야겠죠. 그리고... 고마워요. 당신의 조력이 없었더라면 저 혼자서는 나머지 세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없었을 겁니다.
단순히 체스부를 만들 수 있게 협력해줘서 감사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지켜봐달라는 제 부탁을 진지하게 기억해주셔서 감사하는 겁니다. 그... 이런 얘기는 직접 만나서 하는 게 예의인데 미안해요. 앞으로도 당신을 의지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기겠죠. 모쪼록 잘 부탁 드립니다.
확인한 음성 메모는 꼭 지우는 거 잊지 말아주세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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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 재생을 마친 수신기가 잠잠해졌다. 적막한 방 한 구석에 홀로 앉은 에반은 수신기를 한 쪽으로 치웠다. 말없이 체스판을 지켜보던 에반이 검은색 나이트를 집어들었다.
탁!! 에반이 집어든 검은색 나이트가 흰색 퀸을 쓰러트렸다. 쓰러진 흰색 퀸이 흑백의 격자무늬 위를 또르르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