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0화 〉1-4. 체스보드 (15) (40/88)



〈 40화 〉1-4. 체스보드 (15)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온갖 종류의 스트레스를 수반한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누구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크고 작은 취미를 가지고 있다.

취미라고 하면 보통 운동을 한다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책을 읽는 것을 떠올리지만 취미라는 게 꼭 활동적이거나, 교양과 예술성을 갖춰야하거나, 생산적이여야 할 필요는 없다. 사소한 것이라도 정신을 환기시키고 기분전환에 도움이 된다면 뭐든 훌륭한 취미생활이다. 가령 큰맘 먹고 비싼 음식을 시켜서 미식으로 사치를 부린다거나, 지갑을 들지 않은 채로 상점가를 돌아다닌다거나, 일정을 비워두고 낮잠을 푹 자는 것도 엄연히 사회생활을 통해 누적된 스트레스를 청소하고 새로운 스트레스와 맞닥뜨릴 각오를 다지는 훌륭한 취미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유리아 릴리스는 근래에 들어 스트레스가 늘었다. 평소에도 그녀를 압박하는 것들은 많이 있었지만 요즘은 정도가  심해진 것 같다. 학생회장의 업무, 뎀피돈의 부작용, 정서적 불안정 등등 여러 요인들이 항상 그녀를 괴롭혀왔지만, 그녀는 불면증으로 잠이 오지 않는  동안 공부에 온 신경을 집중시킴으로써 다른 생각들을 비우는 식으로 스트레스를 덜어왔다. 그녀의 취미는 조용한 방에서 혼자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스트레스 요인이 늘어나면서 공부만으로는 정신을 안정시키질 못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늘어난 스트레스 요인으로는 언제 또 위험에 처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그때에는 자신도 손쓸 수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런 스트레스는 지금껏 받아온 것들 보다도 더 지독하게 그녀의 마음속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만큼 공부량을 늘렸더니 몸이 지쳐버리는 독작용이 따랐다.


유리아는 공부에 매진하는 것 말고도 다른 취미를 하나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에너지 넘치고 활동적인 걸 하는  좋지 않을 테고, 도구나 같이 즐길 사람이 필요한 종목도 탈락. 프릴처럼 독서를 즐기기에는 문학 작품을 감상하고 나면 생각이 너무 복잡해져서 싫었다.


쮸웁!  마신 딸기우유팩에서 빨대 소리가 났다. 아껴먹으려 했는데 역시 금방 혀가 간지러워져 홀짝이다 보니 아쉬울 때 바닥이 나버렸다.


"우선 처음에는 가볍게 단 걸 먹어보는 것으로 시작해 볼까. 군것질도 취미라면 취미겠지."

그렇게 학원 수업이 끝난 뒤 유리아는 평소라면 방에 틀어박혀 책을 펼쳤겠지만 오늘 만큼은 발걸음을 학교 밖으로 돌려 누르워로 향했다.

누르워는 군것질거리와 함께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좋은 가게들이 몰려있는 곳이기에 학원이 파하는 시간대가 되면 학생들로 붐빈다. 놀러 나온 동성그룹도 있고,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 2인 1조도 있지만 다들 하나 같이 즐거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거리 전체를 채운 이 달콤한 냄새가 사탕이 아니라 그들의 행복에서 나오는 것만 같았다.


유리아는 케이크 가게의 쇼윈도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조금의 웃음기도 찾아볼 수 없는 차게 굳은 표정이였다. 분위기에  맞게 혼자만 색깔이 다른 그 모습에 스스로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게 대체 뭐야? 슬픔마을 주민이 길을 잃는 바람에 행복마을로 잘못 들어온 것만 같아. 그녀는 또 스스로를 배척하며 자기 내면에 자기자신을 가뒀다.


쇼윈도 너머로는 케이크들이 늘어서서 부동자세로 패션쇼를 하고 있었다. 색깔 진한 과일들로 치장한 모습이 미술품 같아서 포크로 헤쳐놓기 아까울 듯했다. 유리아는 쇼윈도에서 물러나 걸음을 옮겼다. 케이크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같이 군것질을 하며 떠들 친구도 없기에 이런 곳에  일도 별로 없어서 단골가게 같은 건 없다. 그치만 생각이 미치는 곳이라면 한 군데 있었다.

이리들이 습격했었던 그 날, 에반과 이곳을 찾아왔을 때 들렸던 천설당이라는 이름의 설국과자 가게가 떠올랐다. 유리아는 기억을 더듬어 그곳을 찾아갔다. 다시봐도 입지가 좋다고는  못할 후미진 골목이였지만 오히려 그 점이 유리아에게는 좋았다.

딸랑! 가게의 문을 열자 문에 달려있던 방울이 딸랑딸랑하며 손님을 환영하는 노래를 불렀다.  소리를 들은 천설당의 점장이 주방에서 나와서 유리아에게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점장은 유리아보다 머리  개는  얹어야 할 정도로 거대한 키에 우락부락한 근육이 돋보이는 남자였다. 저번에 왔을  자세히 못봤지만 혼자 와서 1대 1로 대면해보니  위압감이 엄청났다. 힘조절 잘못했다가는 오븐 뚜껑이 뜯겨날 것만 같은 저 팔로 밀가루 반죽을 주무르면 있어선 안  글루텐도 생겨나는 바람에 모든 과자가 다 쫄깃해지지 않을까?

"어, 아가씨는 그때 왔다가 그냥 나갔던 그 아가씨 아냐? 맞지?"

가게주인은 유리아를 알아보았다. '그때' 라면 이리에게 습격 당했던 그날을 말하는 거겠지. 그때 유리아는 에반과 프릴을 남겨둔  가게를 박차고 나갔었다. 유리아는 가게주인에게 꾸벅 인사하며 사과의 말을 덧붙였다.

"그때는 실례가 정말 많았습니다. 영업에 누를 끼친 점은 정말 죄송합니다."

"아냐, 누를 끼치긴 무슨!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분명히 같이 왔던  더벅머리 놈이 잘못한 거겠지."


'그 더벅머리 놈' 은 분명 에반 플루토를 가리키는 것이겠지.


"그 썩을 놈. 내가 옛날 성질머리였으면 진작에 내 주먹이 그놈 뒷짱구를 뚫고 나왔을 텐데. 나도 많이 죽었어."


"아... 그렇습니까?"

확실히 저 팔뚝에 힘을 주고, 저 체중을 실어서,  주먹을 휘두른다면 얼굴에 크레이터가 파이겠지.


"이런 이런! 손님을 세워놓고 딴소리나 하고 있었잖아. 어서, 앉으렴."


"네. 실례하겠습니다."

유리아는 1인용 테이블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인용 테이블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다과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라면, 1인용 테이블바는 요리사 앞에 앉아서 자신이 주문한 것이 완성되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요리사와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구조이다. 유리아가 앉자 가게주인은 바로 온장고와 냉장고를 열어서 재료들을 몇 가지씩 꺼내기 시작했다.


"우선 저번에 왔을 때 그냥   아쉬우니 내 특별히 서비스를 하나 해주지. 일단 먹으면서 찬찬히 주문을 결정하라고."


"아, 네. 감사합니다."

이미 재료가 섞이고 있었던지라 사양하기에는 늦었다. 유리아는 감사를 표하고 서비스로 나온 것을 받았다. 달게 졸인 팥을 차게해서 만든 빙과였다. 유리아는 한 숟가락 작게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아...."

혀가 순간 놀라 움츠러들 정도로 달았다. 입안의 온도로 충분히 녹아 퍼지자 그 단맛은 더욱 배가되었다. 그러나 무작정 달기만 한  아니고  특유의 맛도 충분히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래도 복약중인 몸이다보니 평소에 건강 생각하느라 단 걸 피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과격하게 단  먹으니 거부반응을 느끼진 않을까 걱정 됐지만, 그녀의 입맛은 놀라울 정도로 금방 단맛에 적응해서 다음 한 숟가락을 종용했다.


"어때? 괜찮지?"


"마음에 드는군요."

"하하! 그거 내가 다 기쁘구나!"


"네? 사장님이 만든  아닌가요?"

"그 팥은 말이야, 내 아들 녀석이 졸인 거야. 어렸을 때 가르쳐줬는데 지금은 나보다 더 잘 해서 그냥 아예 녀석에게 맡겼지. 이게 별 거 아닌 거 처럼 보여도 엄청 오랫동안 센 불 앞에서 휘젓고 있어야 그 맛이 나온다고. 조금이라도 요령 피웠다가는 팥맛은 다 무너지고 그냥 물엿 맛이 되어버리지."

"아드님이 끈기가 있으신 분이군요."


"끈기야 있는데... 어휴 좀 다른 방향으로 고집을 부렸으면 좋았거늘."

가게주인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내 슬하에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있어. 딸 녀석은 의젓한 아가씨로 자라준 건 고맙지만 너무 철들었고, 그에 반해 아들 녀석은 언제 철들건지 하루가 멀다하고 말썽을 피우고 다니지. 오늘도 학원에서 생활지도 권고 안내문이 왔지. 대체 여자 학원에 왜 자꾸 기어들어가는 거야?! 미치겠네!"

가게주인은 혼자서 가정사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유리아는 물어보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지만 그냥 혼자 떠들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솔직히 이런 조그만한 가게 수입으로는 비싼 학원비 감당 못해. 설국에서 이쪽으로 이주해  때 챙겨온 재산으로도 적자 메꾸기 힘들어. 아들 녀석은 평소엔 그렇게 철없이 굴면서 그런 건  어떻게 눈치챘는지 학원 그냥 때려치겠다고 어찌나 말이 많던지! 하지만 내 등골이 휘는 한이 있어도 내 자식  배웠다는 소리는 절대로  들어! 암 그렇고 말고."

유리아는 물질적 풍요에서 벗어난 삶을 잘 알지 못한다. 솔직히 지금 당장 이 가게주인이 평생 동안 일하지 않아도 생활비, 자식 양육비, 노후자금 고민을 할 필요 없을 정도로 돈을 퍼주더라도 그 정도로는 유리아에게 지출 축에도 끼지 못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타인의 삶을 바꿔놓을 정도로 경제력을 행사하는  그 사람의 인생에 자기 멋대로 가격표를 붙이는 것이기에 그녀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팥을 입에 물고 귀로는 가게주인의 말을 들었다.


"미안허이. 단걸 먹으러 찾아온 손님을 앞에 앉혀놓고 씁쓸한 인생사나 떠들고 있었네. 이래서야 왔던 손님도 다시 오기 싫어지겠지."


"아뇨, 부담 갖지 마세요. 저 역시 고민이 많아서 단걸 좀 먹고 싶어진 것이니 고민 있는 사람끼리 얘기 나누는 거죠."


"하하! 루나칼립스 학원의 여학생들은 하나 같이 예의 바르고 조숙하다니깐. 물론  딸도 포함해서 말이야."


넉살좋게 한바탕 웃던 가게주인이 갑자기  침울해졌다.

"하아. 자식들에게 이런 부담을 느끼게 하다니 아비로서 항상 미안하더군. 이게 다 내가 힘이 약해서 이렇게 된 거야."

라고 말하는 가게주인의 유리아 허리보다 두꺼운 팔뚝 근육에서 힘줄이 솟아났다. 보고 있던 유리아는 당신이 힘이 약한 거면 대체 누가 강한 건지 묻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여서 참았다.


"아 이런! 그러고보니 지금 얼음창고 정리를 해야하는데... 미안하지만 아가씨. 오늘은 나 대신 내 아들 녀석이 챙겨줘도 괜찮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 녀석도 꽤 하니까."

"전 딱히 누가 만들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게다가 이런 팥을 만들 정도로 정성을 들이는 분이라면 무엇을 주문하건 성의껏 만들어주시겠죠."


"이해해줘서 정말 고맙구나! 미안해. 다음번에는 꼭  손수 대접해줄게. 그럼 아들 녀석을 불러올 테니 잠깐만 앉아서 기다리렴."


가게주인은 주방 뒷편에 있는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천장에 닿을 기세로 키가  탓에 문을 지나갈 때에도 고개를 숙여야했다.


"저 사장님의 아들이면 또 얼마나 우락부락할까? 설마 훨씬 더  덩치가 오는  아니겠지?"


만일 그런 거라면 저렴한 가격과 높은 퀄리티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적은 이유는 입지가 안좋아서가 아니라 손님들이 겁먹어서겠지.


"아 그러게 아까 정리하자고 할  같이 했으면 됐던 걸 아빠도 참. 네, 죄송함다 손님! 오래 기다리셨...어어?"


뒷골목에서 유리아를 도와 싸우던 설국인 소년이 가게 유니폼 차림을 하고 있었다.  사람 모두 이 우연한 재회에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유....유리아?!!"


시엘 밀리우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에 입이 떡 벌어졌다. 유리아 역시 상상도 못한 점원의 정체에 순간 말을 잃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여기 우리 아빠 가게거든?"


"당신은... 어머니를 닮았나 보군요."


"무슨 말하려는 건지 잘 알겠으니까 그 이상은 말하지 말아줘...."

시엘이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어느 정도 침착함을 되찾았는지 물로 손을 깨끗하게 씻은  위생타올로 손의 물기를 제거하고서 유리아 앞에 섰다.

"주문은 뭐로 하시겠어요?"


"배달부인줄 알았는데 직접 손님 대접도 하시는 건가요?"

"배달은 가끔 물건 필요할 때 내가 아빠 대신 발품 팔러 뒷골목 전전하는 거야."


"그랬군요. 아무튼 주문은   개로 하겠습니다."


"어디 보자, 당근 케이크랑 단팥크림 카스테라. 아주 좋아! 이게 딱 내 전공인  어떻게 알았나요?"

시엘은 보관된 재료를 꺼냈다. 그리고는 재료들을 하나 하나 조금씩 살펴보며 신선도를 체크했다. 시엘의 가늘고도 고운 손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재료들을 손질하고, 밀가루를 체치고, 우유 거품을 일으켰다. 유리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정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올려본 시엘의 얼굴은 집중을 하기 위해 차분한 표정을 지키고 있었다.


"저번에는  번이나 절 도와주셨는데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군요. 위험에 말려들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냐! 사과하지 마. 도움이 될  있어서 다행이다."

시엘이 쑥쓰러워 하며 대답했다.

"그러고보니 저희 통성명도 아직이죠? 이름을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엉...??"


멋쩍은 듯 웃던 시엘이 유리아의 질문에 그대로 동작이 굳어버렸다. 그리고는 넋나간 얼굴로 유리아에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이미 통성명 다 했잖아?"


"네? 그랬나요...? 죄송합니다. 기억이 없습니다."


"두 번이나 했어! 유성제 때 한 번! 그리고 네 기숙사 방 앞에서 또 한 번!"

".....?"

띵!! 유리아는 또 한 번 머릿속이 띵해지는 걸 느꼈다. 그 난잡하고 비상식적이기 짝이 없던 기억들이 아귀가 맞물려 떨어지자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왔다.


"그..... 여장변태?"

"여장변태라 하지 말아줘!! 오늘은 정말로 중요한 사정이 있었단 말이야! 그보다도 어떻게 기억 못 할 수가 있는 거야?!"

"아니 그게... 유성제 때를 제외하면 학원 안에서 당신을 만난 건 여장한 모습 뿐이라 설마 동일 인물일 줄은 몰랐습니다."


"으윽! 그래도 조금은 원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잖아?"

"아뇨, 전혀요. 워낙에 감쪽같고 잘 어울려서 여장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원래 남자였다고는 상상  할 정도였습니다."


"으으윽?! 이렇게 격하게 칭찬을 받고도 하나도  기쁘기는 또 처음이다."


"어째서 아까 에반 플루토 씨에게 붙잡혀 왔을 때 말하지 않으셨던 건가요?"


"뭐를?"

"제가 했던 말이 서운하셨을 텐데요.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두 번이나 도와줬는데 말이 너무 심한  아니냐' 는 식으로 따질 수도 있었잖아요?"


"도와준 건 도와준 거고, 여장한채로 잡힌  그거랑 전혀 상관 없는 얘기지. 따져봤자 꼴사납기 밖에 더해?"

"그렇군요... 대단한 사고방식이네요."

"비꼬는 거야?"

"아닙니다. 칭찬하는 겁니다."

"그, 그래?"

분위기가 급격하게 어색해졌다. 시엘은 유리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케이크를 마저 만들었다.


"팥. 맛있었습니다."

"뭐라고? 아, 아, 아니지. 정말요?"

"어색하니까 편하신대로 하죠. 어차피 저희 둘 뿐이잖습니까."

"네가 정 그렇다면."

갑자기 먼저 말 걸어서 놀랐는지 시엘은 살짝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당신이 팥을 만든다고 들었습니다. 입맛에 잘 맞았기에 단팥이 든 카스테라를 주문했죠."

"그거 다행이네. 그 고생하면서 땀 뻘뻘 흘려 휘저었는데 맛없으면 허탈하지. 아무튼 입맛에 맞는다니 기쁘다."

시엘이 멋쩍게 웃으며 완성된 케이크와 카스테라를 유리아에게 건냈다. 우선 비주얼은 상품으로써 손색이 없었다. 학생이 부모의 일을 돕는 김에 만든 거라고는 생각 못할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형태도 안정적이였고, 크림도 예쁘고 고르게 발라져 있었고, 특히 당근칩으로 그린 데코레이션 그림도 전혀 어설픈 구석이 없었다.

유리아가 포크를 들자 시엘은 마치 심사위원 앞에  것처럼 뻗뻗하게 굳어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유리아는 어쩐지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성제 때도 안하시던 긴장을 여기선 하시네요?"

"뭐? 아니야! 긴장했다니 누가?!"

유리아는 그의 반응을 즐기며 카스테라를  찍었다. 입에다 집어넣으니 그 폭신폭신하고도 촉촉한 감촉이 마치 계란으로 구름을 빚은 것만 같다. 안에 꼭꼭 숨어있었던 단팥과 크림의 앙상블은 한쪽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알맞은 비율로 퍼져나갔다.


만약 뎀피돈의 부작용이 없었다면 자신은 분명히 감탄해서 두 눈이 휘둥그레졌겠지. 열심히 만든 보람을 느낄 만큼 분명한 리액션을 보여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였다.

"제과제빵이 취미라는  사실이였군요."

"그런 걸 거짓으로 말할 이유야 없지. 확실히 재밌더라. 세상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 뿐인데 빵이랑 과자는 열심히 하면 하는 만큼 맛으로 표가 나게 보답을 해줘서 그런 거 같아."

"그렇군요. 그치만 당신 같이 끈기 있으신 분이 아무리 노력해도  되는 것들 뿐이라고 말하는 건 좀 의외네요."

"엉? 내가 끈기 있다고?"


유리아에게 칭찬을 들은 게 믿기지가 않아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시엘이였다.

"네. 당신의 근성은 유성제 때 확실히 봤었죠. 그때로부터 시간은 좀 흘렀지만  팥을 맛보니 아직 그 근성은 그대로 남아있나 봅니다."

"그게 내가 살아나갈 유일한 방법이니까."

"무슨 말씀이시죠?"


"보다시피 나는 이렇게 왜소하고 보잘  없어. 태어날 때 아빠 유전자를 좀  챙겼어야 했는데 엄마 뱃속의 나는  게을렀나봐. 내가 살던 설국은 전사부족 사회다 보니 힘이 전부고, 약한자는 살아갈 자격을 인정 받지 못해. 그치만 난 죽기 싫단 말이지? 이렇게 태어난 것도 억울한데 죽으라니 너무하는  아냐? 그러니 난 스스로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게 전부야. 아무리 얻어맞고, 짖밟히고, 걷어 차이고 주제를 알라는 욕을 들어도 절대로 약함을 인정하면  돼. 인정한다는 것은 그냥 죽겠다고 받아들이는 거니까."

"당신은 약하지 않아요. 그때  당신을 상대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결국 졌잖아? 거기에다가 상대방에게 경험치까지 줘버렸다면 더 나쁘지."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셔요. 여기는 설국이 아니니까요."

"여기도 똑같아. 넌 집이 부자라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입장에서는 여기나 거기나 똑같아."

시엘의 목소리에서 어두운 음영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유리아는 시엘의 말을 경청했다.

"아그루스는 마법사가 가장 풍족하게 살고, 잘나가는 곳이잖아? 그래서 아빠는 무조건 내가 아그루스의 마법사로 인정을 받기를 원하시지. 그래서 아그루스로 이민올 때 챙긴 재산을 털어가면서까지 나와 우리 누나를 마법학원에 입학시켰어."


평소의 여장을 위해 입던 루나칼립스 교복은 누나가 입던 것인가. 유리아는 맥락과는 관계없는 엉뚱한 깨달음을 얻었다.

"너도 알잖아? 루나칼립스건 오르토스건 서열 매기는  엄청 좋아하는 거. 근데 그게 마법실력으로 매긴 서열 까지야 그렇다 치더라도 입에 물고 태어난 수저로도 서열을 매긴단 말이지. 왕족, 귀족 애들은 교사들도 껌뻑 죽어서 벌벌 기고, 반면에 상인 집안의 애들은 어딜가나 노골적으로 무시 받고. 그렇다면 나처럼 작은 과자가게집 아들은, 그것도 이민자 출신인 나는 얼마나 무시를 당할까? 넌 상상이 가니?"

유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시엘이 말하는 건 모두 분명한 현실이였다. 당장에 유리아 역시 백화 상회의 규모가 그렇게 거대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학생회장의 자리에 앉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였다.

유성제  오르토스 쪽이 시엘을 응원하는 않았던 이유는 이거였구나. 그들은 비천한 이민자가 동급생들을 모두 꺾고 학년 1위를 석권한  아니꼬왔던 것이다.

"난 아무도  무시하게 두지 않아. 그게 호족이건, 귀족이건, 교사건 뭐건 날 무시한다면 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얻어맞는 것도, 짓밟히는 것도, 발길질 당하는 것도 이골이 나서 맷집 하나는 자신 있다고. 이런  망나니에 천방지축이라 불러도 신경 안 써. 어차피 내가 말 잘 듣고 예쁜 짓만 골라서 하더라도 '천민이 제 주제를 잘 파악하는구나' 이런 소리밖에 못들을 거 아냐?"

유리아는 당근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시엘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시엘은 말을 다했는지 다시 손을 씻고는 찬장 쪽으로 이동했다. 짧은 시간 뒤 돌아온 시엘은 도자기로 된 찻잔을 유리아에게 건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허브차가 신기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서비스야. 어머니가 좋아하셨다는 눈보라꽃잎으로 만든 차야. 누나도 이걸 좋아하던데 난  모르겠어. 아무튼 저번에 유성제에서 처음 만났을 때 말했잖아? 네 입맛은 모르겠지만 좋은 차로 한 잔 타주겠다고."


"아아. 그랬었죠. 기대는 안 한다고 말했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올 줄이야. 감사히 받겠습니다."


유리아는 찻잔을 호호 불고는 한 모금 음미했다. 충분히 혀를 골고루 적시게 한 뒤 목너머로 흘려보내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시엘을 응시했다.


"왜,  그래? 맛이 별로야?"


"시엘 밀리우스 씨. 당신은 당신에게서 무언가를 빼앗거나, 일상의 평온함이 깨뜨리려는 사람이 학원 내에 숨어 있다면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여태 말했잖아? 그게 귀족이건, 호족이건, 교사건, 설국의 왕이건 절대로 가만히 안 있을 거라고."

"좋습니다."

유리아가 시엘의 푸른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당신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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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가 제안한 3일의 시간이 지났다. 에반 플루토는 입으로는 열심히 궁시렁궁시렁 푸념을 늘어놓으면서도, 몸은 이미 학생회실의 문 앞에 서있었다.


유리아는 학생회실을 비어놓을 테니 자신과 뜻을 함께할 생각이 있다면 이 시간에 학생회실로 와달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함께할 뜻이라는  대담하다 못해 간이 배밖으로 나온 것이다. 동아리를 명목으로 모여서 각자가 수집한 정보를 교환하고, 학원 내의 인물 중 수상한 흉계를 꾸미고 있는 이들을 찾아내 축출하는 것이라니. 그런 부담감 넘치는 프로젝트에 누가 참여하겠는가?


아무도 안 와서 혼자 침울해 하고 있는 유리아가 자신이라도 와주자 분하지만 표안나게 고마워하는  아닐까? 그런 걸 은연중에 기대하고 있는 에반이였다.

하지만 에반은 알고 있었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게  광경을. 피식 하고 작게 웃은 에반이 학생회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선생님! 역시 오셨군요!!"

"여전히 늦게 오는 걸 즐기시는군요, 지도원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에반 플루토 씨."


"쳇! 역시  인간도 끼는 거였어?"


역시나. 프릴, 아라한, 시엘 까지 한 녀석도 빠짐없이 앉아있지 않은가. 에반은 낄낄 웃으며 말했다.


"허이구. 이게 뭔 오합지졸이냐?"

에반은 소파의 빈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심퉁맞은 표정의 시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유리아에게 말했다.

"너 분명히 저번에 쟤 싫다고 말했잖아? 다시는 학원 안에서 마주치지 말자고 했던 거 같은데 내가 잘못 들었던 건가?"

"다소간의 오해를 풀었을 뿐입니다."

"허허 그러셔요? 그럼 저에 대한 오해도  풀어주시죠?"


"그건 저만 노력할 문제가 아닌 듯 하군요."

"쳇."


앉아있던 프릴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그래서 우리 동아리의 명칭과 표면적인 활동은 어떻게 할 건가요?"


"이제 모든 멤버가 모였으니 회의를 해서 정하도록 하죠."

"이 미친 개성파들을 모아놓고 의견이 통일이 되려나?"

에반의 말대로 학생회실에 모인 이들은 교집합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살아온 삶과 지향하는 길의 차이가 뚜렷했다. 일단 남자와 여자 두 성별이 있다. 게다가 다섯 명의 멤버가 각각 아그루스 제국인, 혼혈인, 동방인, 설국인으로 전부 다른 문화권 출신인데다가 신분차도 뚜렷하다. 거대 상회의 유리아, 영세 자영업자 집안의 시엘. 귀족인 프릴, 이방인인 아라한. 성격이 제각각이라는  말할 것도 없었다.


"좋은 방향으로 생각합시다. 지금 이 학생회실에 하늘 아래 있는 모든 세계들을 압축해 놓은 셈이에요."


"와아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멋진데요?"

프릴이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에반은 찬찬히 멤버들을 둘러보고는 피식 웃었다.

"에반 플루토 씨.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즐거우신 거죠?"

"아 미안, 미안. 그냥 뭐랄까 이렇게 모아놓으니 뭔가 체스판 같아서."


"체스판이요?"

"그치 않냐? 나하고 유리아는 온통 검은색이고, 프릴이랑 시엘은 온통 흰색이고. 거기에 아라한은 두 가지 색 모두 다 있고."

"재밌는 관찰이군요. 전 바둑이나 오목 밖에 둔 적이 없어서 체스의 룰은 자세히 모르지만 매력적인 대국이라고 봐요. 체스에는 기사, 성직자, 왕, 여왕 등 신분이 다른 기물들이 있고, 기물들은 각자가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이  다르죠. 하지만 신분에 관계 없이 모든 기물들이 전략적인 가치를 가지고, 피스의 동선이 제각각 다르더라도 궁극적인 목적은 모두 하나입니다. 어쩌면 여기 모인 우리도 그래야하지 않겠어요?"


"좋습니다. 그럼 동아리는 체스부로 하죠."

"그렇게 간단히 정하기냐? 팔랑귀야?"


"어차피 명칭 같은  명목상일 뿐이니까 굳이 오래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아니면 에반 플루토  당신에게 다른 좋은 안건 있습니까?"


"있지. 예를 들면 아자아자 힘내자부 라던가....."

"체스부로 결정하는 데에 이의가 있으신 '학생'은 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에반 플루토가 열심히  손을 들었으나 유리아는 이의가 있는 '학생'은 손을 들어달라고 말했기에 소용 없었다.

"전 좋다고 생각해요!"

"괜찮네. 난 체스 둘  모르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겠습니까?"

나머지 세 학생은 체스부로 결정하는데에 찬성했다.


"쳇... 필요해서 고문으로 앉혀놓고는 벌써부터 찬밥이냐."


에반 플루토가 툴툴거렸다.

"그럼 오늘은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무리한 제안이였음에도 저와 함께해 주시겠다는 뜻을 보여주셔서 기쁠 따름입니다. 지금까지의 저희들은 여러가지 문화적 차이, 입장 차이, 선입견과 오해 등으로 마주하기 어려운 사이였지만, 앞으로는 서로를 잘 이해하고 그 가능성을 인정하며 힘을 합쳐 더 나은 학원을 만들어나가기를 희망합니다."

이런저런 아수라장을 겪었지만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다섯 명의 멤버가 한 팀으로 묶였다.


그렇게 판이 깔린 체스보드.  위에 흑백의 주역들이 올라섰다.

 

Chapter 1. <오프닝>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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