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9화 〉1-4. 체스보드 (14) (39/88)



〈 39화 〉1-4. 체스보드 (14)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라쿠이르 번 전체에 쩌렁쩌렁 울릴 기세다.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대회 중 하나인 유성제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이기 때문이다.

유성제(幼星祭). 어린 별들의 축제라는 그 이름대로 루나칼립스 학원과 오르토스 학원의 어린 마법사들이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결투를 벌이는 행사로, 마법학원의 축제인 만월제의 대미를 장식하는 화룡정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학계의 초신성이라  수 있는 마법학원 학생들이 그동안 갈고닦은 성과를 아낌없이 피력하는 장면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제국 전체에서 참관자들이 밀려오다보니 관중석은 학원 관계자 외의 참관인들로 빽빽하게 차곤 한다. 그중에는 저명한 학자들은 물론 고위 기사나 유희가 필요한 귀족들도 자주 보인다.


초창기에는 실전 응용 능력 함양을 위한 경합이였는데 회차를 거듭하면서 학생들의 혈기를 발산할 친선 스포츠 대회처럼 변했다가, 마법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는 외부인들의 입소문을 타다 보니 언제부턴가는 제국 전체의 주목과 기대를 받는 연례 행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제국 전체가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루나칼립스와 오르토스 중 어느 학원이 더욱 강하고 실력있는가를 입증할 기회인 만큼 유성제 기간 동안에는 양쪽 학원의 자존심이 걸린 치열한 승부가 펼쳐진다.


우선 양쪽 학원의 학생이 서로 대결을 펼치기 전에, 각 학원의 학생들끼리 내부 리그를 통해 10위권 내의 챔피언을 선발한다. 이 내부 리그는 처음에는 같은 학년끼리 치뤄진다. 학생들에게 따라붙는 '학년 서열'이라는 수치는  용호쟁제의 학년별 내부 리그의 랭킹으로 매겨지는 것이다.


그렇게 양쪽 학원의 전력들의 랭킹이 매겨지고 나면 본격적으로 루나칼립스와 오르토스의 결투가 시작된다. 학년, 사회적 지위, 이론 성적 그런  모두 경기가 펼쳐지는 시간 동안은 의미를 잃고, 오직 두 마법사만이 남아 서로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지혜와 수련의 성과를 퍼붓는다.


이런 식으로 펼쳐진 경기의 승점으로 '전체 서열'을 정하는 것이다. 이 전체 서열은 루나칼립스와 오르토스 양쪽 학원을 통틀어서 자신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객관적인 수치로 나타낸 것이기에 전체 서열 순위권 안에 꼽힌 학생은 당연히 그에 걸맞는 인기와 영예를 누리게 된다.

'자! 꺼질 줄을 모르고 활활 타오르는 이 분위기~!! 이 기세를 몰아서 뜸들이지 말고 바로 다음 경기로 모시겠습니다! 전체 서열의 순위가 점점 윤곽을 드러내고 있어서 더더욱 흥미로워지는 대결 양상! 양쪽 학원 모두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지금, 자존심 강한  천재가 경기장 위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사회자가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며 경기를 이어나갔다. 방금 전 경기 때문에 스테이지 여기저기에 남은 마법의 잔해들을 청소하고, 관중석을 둘러싼 안전결계를 점검하는 동안 시간을 끌면서 관객들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하는 나름 막중한 임무였다.


'자, 자, 자, 자!!! 여러분  소리가 들리십니까?! 그녀가 왔습니다. 올해에도 또 동급생들을 손쉽게 정리하고 학년 서열 1위를 차지한 그녀가 어김없이 순위권 선발전에 그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모를 사람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소개합니다, 유리아~~ 릴.리.스!!!'


우레와도 같은 함성 소리가 유리아를 환영했다. 대기실에 앉아있던 유리아가 호명을 듣고 스테이지 위로 올라서자 눈부신 햇살과  찢어질 듯 우렁찬 응원 소리가 마구 뒤섞여 의식이 멍해지는 것만 같았다.

'와아아~~!!'


"유리아! 유리아!'

'저 버릇없는 오르토스 녀석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세요!'

'.....'

평소에는 품행에 신경을 쓰느라 열정을 억제했지만  고삐가 합법적으로 풀리자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있겠냐는 듯이 고성방가가 그칠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그런 열정의 도가니 속에서도 유리아는 표정이 변하질 않았다.

'여전히 평소와 똑같은 표정이네요.'

'역시 긴장 같은 걸 하지 않으시나봐. 저 차분함, 여유. 어른스러워서 너무 멋져!'

'유리아! 힘내!!!'

군중의 기대와 환호를 한몸에 받고 있음에도 유리아는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다들 뭐가 그렇게 신나는 걸까? 다들 이런 하찮은 장난에 열광하는 이유가 뭘까? 학생의 전투력만으로 서열을 정하다니 왜 아무도 이런 게 잘못 됐다고 말하지 않는 거지? 무엇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난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 거지? 이렇게 셀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데 그 감정에 혼자 동참하지 못하는 나는 얼마나 망가진 거지?

정정당당한 승부를 위해 뎀피돈을 끊었던 탓에 금단증상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이래서 유성제는 싫다. 우리쪽 학생들과 오르토스 학생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간인데 그걸 명분없는 결투로 쓰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거기에 끌려다니느라 다른 학생을 쓰러트리는 것도 싫고, 전체 서열이니 뭐니 상위권을 석권하기를 바라는 기대의 눈빛도 싫다. 싫다. 싫다.


세상은 왜 이렇게 싫은 것 투성이일까? 이렇게까지 뭐든 싫어하는 내가 잘못된 거겠지? 그렇다고 해도 도무지 이해하질 못하겠다. 왜 마법이라는 심오한 신비를 헤아리고자 책상에 앉은 이들이 학생이건 어른이건 현명함과는 거리가 멀까? 이들에게 마법이란 결국 이런 걸까? 누가 누가 더 많은 사람을 쓰러트릴 수 있나 보여주는 거? 누가 더 굉장한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나 자랑하는 거? 누가  화려한 원소의 폭죽을 쏠 수 있나 자기과시하는 거?

바보 같아. 멍청해. 한심해. 유치해. 깊이 얕아.

뎀피돈의 부작용으로 기쁨도, 즐거움도, 웃음도 날이 갈수록 무뎌져가는데 이런 권태와 지겨움만은 조금도 녹슬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다른 긍정적인 감정들의 견제가 약해지자 더욱 더 기승을 부린다.


잡음의 벽이 둘러싼 머릿속에 더러운 물이끼만이 껴간다.


'계속해서 이번에는 오르토스  선수를 소개합니다! 이번이  출전인 신인 참가자인데요. 세상에나 이거 이거 전적이 비범한 거 아닙니까?!! 유성제 첫 참가인데 오르토스 내부 리그를 무패 전승!! 학년 1위의 자리를 단번에 꿀꺽!!'

보아하니 이번 경기는 루나칼립스의 학년 1위와 오르토스의 학년 1위가 마주보고 선 외나무다리였다.

'거기에다가 전체 서열 2위를 굳건하게 지키는 고등부 3학년 '침묵의 이스민'을 상대로 무려 12분 씩이나 버티는 비범함!! 저도  경기를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만 정말이지 졌지만 잘싸웠다, 승리 보다 멋진 패배란 이런 거구나! 하는 경기였죠. 아아 흥분하는 바람에 설명이 길어졌군요. 그럼 눈으로 직접 보시죠! 소개합니다. 시엘 밀리우스!!!!'


사회자의 거창한 소개가 끝나자 유리아의 맞은편에 있는 통로가 열리더니 곧 그와 결투를 벌이게 될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는 유리아보다 살짝 작았고, 체격도 남학생 치고는 다부지지 않았다. 스테이지 위로 올라와서 유리아와 가까이 마주보고 서자 보인 얼굴은  곱상했다. 그것이 유리아와 시엘의 첫만남이였다.


'댁이 그 유리아 릴리스야? 만나서 반갑다고.'

'.....'


'뭐야? 인사 정도는 받아줘도 괜찮잖아?'


'저희 둘은 이제부터 싸울 사이 아닌가요? 정답게 차 한잔 마실 생각으로 여기 서있는 거였다면 진작에 제 쪽에서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겠죠.'

'쳇 딱딱하기는. 그럼 나중에 언제 한  마시자고. 댁 입맛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좋은 차로 한 잔 타줄 테니까.'


'기대는 안 합니다만 일단 호의는 받아들여 두겠습니다.'

'너 친구 없지?'


'.....'

'말하는  보니 친구 없을 거 같은데. 아닌가? 네 뒤의 저 응원단들을 보니 인기 없지는 않은가 보구나.'


'제가 인기인이건 아니건 당신이랑은 상관 없잖습니까?'

'뭐 그렇네. 근데 보시다시피 난 친구가 없어서.'


시엘이 그렇게 자조적으로 중얼거리자 유리아는 그제서야 위화감을 눈치챘다. 경기장이 떠나갈 정도로 환호하는 루나칼립스 쪽과는 달리 오르토스 쪽 관중석은 반응이 너무 미지근했다. 응원도 찬사도 보내지 않았고, 그의 이름이 적힌 깃발을 휘두르며 응원가를 부르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출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아무튼  그닥 신사가 아니라서 여자라고 봐주지 않아. 그러니 댁도 살살하지 말아 달라고.'


'그런 대사 유성제 때마다  번을 듣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자들은 다 똑같은 건가요?'


'아아 젠장. 나름 멋있는 대사라 생각했는데 이미 누가 선수쳤구나.'


'부탁하신대로 그만해달라고 빌게 해드리죠.'

'내가 그렇게 부탁했었나?  아무튼 기대 되네.'


시엘은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미소를 씨익 지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자리에 섰다. 유리아도 자신의 포지션을 사수했다.

'자 두 학원의 학년 서열 1위간의 치열한 대결답게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군요! 정말 기대가 되는데요? 그럼  선수 각자..... 스탠바이!!'


스탠바이.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주어지는 짧은 준비시간. 1분 남짓의 시간 동안 각 선수는 자신의 아티팩트를 발동시키거나 변신 마법을 사용해둬야 한다. 그 1분 동안의 임팩트가 관중들에게는 기억에 잘 남다보니 학생들 중에는 스탠바이 때 취할 동작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유리아는 그 어떤 아티팩트의 힘도 빌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보통 학생들이라면 부모가 돈 좀 써서 아티팩트를 쥐어주는 게 일반적인데 유리아는 온전히 자신의 마법만으로 승부에 임한다. 그렇기에 스탠바이 시간 동안 찬찬히 상대방의 준비 동작을 감상하는 건 이미 그녀의 캐릭터로 굳었다.

'상대가 무슨 재롱을 부리나 지켜보는 거 같지 않아요?'


'아무것도 안하기에 오히려 여유로워 보여서  위압감이 느껴지는 거 같아!'

'정말 그러네! 오르토스 남자애들은 스탠바이 동안 온갖 폼을 다 잡아대서 웃기는데.'


'저 아이는 어떻게 나오려나?'


시엘은 스탠바이 신호가 울리자 잠시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순간 유리아는 자신의 피부에 차가운 공기가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탓인  알았던 그 오한은 시간이 지나자 선명해졌다.


'숨쉬어라, 우즈라스.'

시엘의 부름에 응답한 얼음결정이 그의  주변을 아른거렸다. 시엘이  얼음결정을 손으로  붙잡자 유리아는 갑자기 계절이 바뀌는 듯한 추위를 느꼈다. 이윽고 시엘의 손에서 얼음의 창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시엘은 자신의 키보다 큰 얼음의 창을 능숙하게 한번 돌리고는 창끝이 하늘을 향하게 한 뒤 힘껏 바닥을 내리찍었다.

캉!!!! 바닥을 찍는 소리가 경기장 내에 울려퍼졌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시엘은 유리아를 노려보며 무릎을 반쯤 굽히고 상체를 틀어 독특한 자세를 취하더니 입을 열었다.

'Миллыюсо!! Нахчта Хектан Краль Кахад Тожедаут!!!'

 작은 덩치에서 나온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가 경기장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 엄청난 성량에 관중들은 물론 유리아 까지도 움찔 놀랐다.

하카(Xaka). 설국의 전사들이 전투에 임할  자신의 기백과 투지를 상대방에게 과시하며 외치는 함성으로 부족마다 고유의 하카가 전래되어 온다고 한다. 근육이 우락부락한 것도 아니고, 체격이 다부진 것도 아니고, 거구에 장신인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시엘의 하카에서는 강렬한 기백이 느껴졌다.

시엘의 함성소리에 머릿속 잡음이 좀 걷어졌는지, 유리아는 눈 앞의 상대를 보고 처음으로 결투에 대한 흥미를 느꼈다.

'다시 봐도 여전히 박력있는 외침소리입니다! 자, 그럼 양 선수 준비가 모두 끝났으니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습니다 까지 말할 것도 없었다. 시작의 ㅅ에서 이미 유리아와 시엘은 격돌했고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경기장을 지배했다.


유리아는 시엘의 실력에 감탄했다. 그는 설국의 전사답게 창술과 체술이 아주 능숙했다. 게다가 빙결 마법을 절묘한 순간 공격이나 방어를 보조하는 데에 써서 전투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있었다. 마법사의 가장 고치기 어려운 문제점이 마법에 의존한다는 점인데 시엘은 순수히 자신의 신체 능력으로 전투에 임하고 부족한 점과 한계치를 마법으로 보강했다.  마법의 활용 센스는 유리아도 본받고 싶을 정도였다.


'양측 모두 물러서지를 않는 팽팽한 대결의 연속! 정말 명경기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시엘 선수, 저번에는 상대가 이스민 선수라서 부각이  되었을 뿐 이번에는 진면모를 보여주는 듯 놀라운 실력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경기는 아주 오래 걸렸다. 학년 1위 끼리의 대결 답게 양측 모두 호각의 실력자다 보니 자연히 경기 시간은 길어질  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유리아는 시엘의 전투방식을 파악했지만, 시엘은 유리아가 구사하는 마법을 종잡을 수가 없었기에 시엘 쪽의 데미지와 체력 손실이 갈수록 늘어났다.

'헉.... 허억.... 으윽!!'


상처투성이의 시엘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창을 잡은 두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이제 그만 하죠. 이미 결과는 나왔어요. 당신이 인정하냐 마냐의 문제일 뿐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후우... 웃기는 소리.'


'하는 수 없군요. 그럼 당신이 부탁한 대로 살살은 안하겠습니다.'


유리아가 손짓하자 시엘의 귓가에 노이즈가 들려왔다. 물론 청각적인 의미의 노이즈가 전부가 아니다. 마치 공간이 굴절이라도 하는 듯 유리아 주변의 배경이 휘어지더니 지지직 거리는 티비 화면에서 튀어나온 듯한 화이트 노이즈가 시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속도도 빠르겠거니와 궤도도 변칙적이였다. 방어할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시엘의 몸통을 들이받았다.


'억?!!!'

뭐를 날렸고 뭐에 맞은 건지도 몰랐다. 그냥 어느샌가 충격이 파고들었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 널브러지는 바람에 시야가 파란 하늘로 가득차 있었다.

'결정타!! 이거로 승부가 났습니다!!'


'무슨 소리야!! 아직이야!!'

시엘이 발악을 하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으로 역시 좀 심했나 같은 생각을 하던 유리아는 다시 일어나는 시엘을 보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프지도 않으십니까??'


'아프다고... 젠장 네가 이스민 보다 훨씬 맵잖아.'

자세를 갈무리한 시엘은 창을 다시금 꽉 쥐고는 유리아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시엘의 공격수단과 그 파훼법을 간파한 유리아는 간단하게 시엘을 다시 쓰러트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쓰러진 시엘은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또 다시 먹힐리 없는 돌진을 반복했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뒹굴고, 쳐박히고도 다시 일어나서는 창을 고쳐잡는다. 이러다 유리아의 마력이 먼저 동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끈질기게 일어나는 시엘을 보니 유리아도 점점 초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대체 왜 자꾸 일어나는 겁니까?'

'당연한  왜 물어봐? 아직 일어날 수 있으니까 일어나는 거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왜 그래? 아까 나한테 분명히 말했잖아. 내가 그만해달라고 빌게 만들 거라고. 자기가 말한 건 지켜야지?'

시엘은 다시 창끝을 유리아에게 겨누었다. 그런 시엘의 모습을 보며 초조함을 느끼는 건 유리아 뿐만이 아니였다. 용호쟁제의 진행을 맡은 사회자 역시 초조함을 느꼈다.


이렇게 계속 장기전으로 끌고 갔다가는 경기가 너무 길어질 테고, 그러다보면 선수들이 지쳐서 경기 초반 만큼의 화끈한 모습을 연출할 수 없으니 관중들도 쳐지게 된다. 그렇게 늘어지는 양상으로 경기를 끌다가 소모전으로 넘어가게 되면 경기의 결말이 전혀 극적이지 않아서 재미가 없어진다. 사회자는 경기에 위기감을 불어넣기로 했다.


'시엘 선수! 불리한 가운데에도 포기를 모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저번의 경기 때도 이스민 선수를 상대로 끝까지 기권을 거부하다가 결국 의식을 잃어서 경기가 종료 되었는데요, 아직 그 후유증도 남아있는데 너무 무리하는  아닐까요?'

사회자의 해설은 언제 끝나나 지켜보고 있던 관중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다만 엉뚱하게도 유리아 역시 위기감을 느낀 건 매한가지였다.


'의식을 잃을 때 까지 경기를 계속한다니 당신 제정신인가요? 승부는 결정이 났으니 어서 기권하세요!'

'뭐야... 컥!!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내가 아니라 네가 그만해달라고 비는 건데? 하하하.'


바닥에 늘어진 시엘은 너덜너덜해진 몸을 이끌고도 자신의 창을 지탱해서 기어코 다시 일어섰다. 그러는 와중에 웃기까지 하면서.

'당신의 근성은  알겠습니다. 다만 결과에 승복하는 것도 승부의 한 부분입니다. 어서요.  이상 당신에게 무의미하게 상처를 늘리기 싫습니다.'

'무의미하지 않아. 그리고 난 분명히 살살하지 말아달라고 했잖아?'

'왜 그렇게 까지 하시는 거죠? 이 유성제가 당신에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아니면 그렇게 다치는 한이 있어도 여자를 상대로 기권한다는 건 용납 못하는 겁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대체 뭡니까? 뭐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유성제고 나발이고 나한텐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서열 같은 것도 관심 없고. 애초에 뭘 기대하는 게 있어서 이러고 얻어터지면서 버티는 게 아니야. 난... 난 내 입으로 패배를 받아들이는 건 죽어도 싫단 말이야.'


다리는 힘이 풀려서 떨리고,  몸은 상처로 가득해도 시엘의 두 눈 만큼은 매서운 힘을 품고 있었다. 그 눈동자를 본 유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치면 쓰러질 만신창이를 상대로 어째서 무의식 중에 뒷걸음질을 친 걸까?

'하아... 나 참 꼴사납네. 그 놈.... 헥타논 놈을 쓰러트려야 하는데 고작 이 정도 밖에 안 된다니.'

시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창끝을 유리아에게 향한 채로 거리를 좁혀왔다. 힘이 다 빠져서 맹렬히 돌진하지는 못했다. 유리아는 마음을 단호히 먹고는 시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노이즈에 휩싸인 시엘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경기 초반에는 이 정도 염동력은 자력으로 풀어냈지만 지금은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유리아가 공중에  시엘을 향해 뻗고 있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쿵! 하고 시엘의 몸이 바닥에 찍혔다. 반동으로   바퀴 몸을 튀기며 구르던 시엘은 이번엔 다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경기 종료!!!!'

유리아는 중등부 때부터 유성제에 참여하면서 수많은 경쟁자들과 대결을 펼쳤지만, 시엘 만큼 그녀에게 색다른 인상을 남긴 상대는 없었다. 지금까지 유리아가 상대해온 이들은 하나같이 남들에게 자신의 힘을 보여줄 생각 뿐이였다. 그러나 시엘은 남들 따위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기자신에게 스스로의 한계를 부정해 보이기 위해 대결에 임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시엘은 이런 성향 때문에 마법사로서는 훌륭하지만 학생으로서는 정말 말썽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오르토스의 교사나 다른 학생들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오르토스야 어떻게 되었건 루나칼립스 학원은 그를 기억하게 되었다. 유성제라는  아무리 자존심을 건 결투라고 해도 두 학원이 공식적으로 교류를 하는 몇  되는 행사다 보니 많은 청춘 로맨스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더욱이 자신이 갈고 닦은 마법을 선보이다 보니 이성 학생에게 자신을 어필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것이 유성제다.

수려한 비주얼의 얼음창, 화려한 빙결마법, 현란한 격투술, 박력있는 하카,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는 끈기, 게다가 꽃같이 잘생긴 미모의 얼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어필한 시엘은 유리아와의 대결에서 탈락한 이후로 루나칼립스의 학생들로부터 쇄도해온 무수한 데이트 요청에 휩싸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그는  모든 여학생들의 러브콜을 다 거절했다고 한다.


"....."


학생회실에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기다 보니 어느샌가 유성제 때의 기억까지 회상하게 됐다. 뒷골목에서 자신을 도와줬던 설국인 소년의 얼굴이 왜 전에 어딘가에서 본 적 있는 얼굴 같나 싶었더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유성제  치열하게 대결을 펼쳤던 오르토스의  새하얀 남학생의 얼굴과 닮았다.


회상을 마친 유리아는 창밖을 보았다.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려다보니 루나칼립스의 교복을 입고 여장한 시엘이 에반 플루토에게 귓볼을 잡힌 채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저 여장변태의 목소리가  익숙한가 싶었는데 유성제  들었던 우렁찬 외침소리와 비슷해서였다.

'순위권 진출전에서  분명히 빙결마법을 주력으로 쓰는 얼음의 창을 든 마법사를 상대했었는데.'

'그래 맞아! 그게 바로 나라구!!'


'그렇지만 그 빙결 마법사는 오르토스 학원의 학생이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남학생일 터.'

'난 남자라니깐.'

'그럼 그 교복은? 스커트는? 스타킹은?'

'여장이지.'

"....응??"


띠잉. 유리아는 머릿속에서 뭔가가 맞물리려다 어긋나는 바람에 머리가 띵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투지로 넘치던 어린 용사와 흰 스타킹이 잘 어울리는 여장변태가 동일 인물이라는 말인가? 설마 그럴 리가... 만약 그렇다면 그는 대체 왜, 대체 무슨 용건으로 여장까지 해가면서 기숙사에 찾아와 문을 두드렸는가? 재대결을 신청할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멀쩡한 방법이 있을 텐데.


모르겠다. 요즘 왜 이렇게 생각할 게 많아진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진 유리아는 혈당치가 뚝뚝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쪼로록! 빨대를 입에 문 유리아가 에반 플루토에게 받았던 딸기우유를 한 모금 빨아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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