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8화 〉1-4. 체스보드 (13) (38/88)



〈 38화 〉1-4. 체스보드 (13)

루나칼립스 학원은 지금 학생이나 교직원이나 할 거 없이 점심시간이 한창일 무렵이다. 그러나 여기 식사도 못하고 사감실에서 점심시간을 날려먹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


"젠장!! 이거 풀라고! 학생을 이렇게 대해도 되는 줄 알아?!"


의자에 앉은 자세로 포박용 사슬에 팔과 몸통을 꽁꽁 묶인 시엘 밀리우스와


"얼씨구? 니가 제정신 박힌 학생이면 지금 이곳에 있었겠냐?"

그런 시엘 바로 맞은편에 소파를 가져다놓고 앉아서는 시엘에게 면박을 주는 에반 플루토였다. 그는 시엘의 이마를 주먹으로 가볍게 쥐어박았다. 약이 오른 시엘이 사슬을 풀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체력만 빠질 뿐이였다.


"아니 대체 왜 지도원이 포박술을 이렇게 능숙하게 할 줄 아는 건데?!"


"어허 이거 아직 투 포인트다? 파이브 포인트로 묶기 전에 알아서 얌전해지는 게 좋아."

포박술을 쓸 때  손과 몸통을 묶는 게 투 포인트. 거기서 입까지 막아버리는  쓰리 포인트. 눈까지 가리면 포 포인트. 마지막으로 자루나 운송용 가방 등에 넣어 포장하는  파이브 포인트. 알아두면 불이익만 따를 뒷세계 용어 사전.

"대체 날 묶어서 어쩔 셈이야?!"


"어떡하긴. 지도원다운 일을 해야지."


"사슬로 학생을 묶어놓은 시점에서 지도원답기는 글렀거든!"


"자, 그럼 재판을 시작해볼까?"


"재판?"

"제국에 가면 제국의 법을 따르라. 넌 루나칼립스에 기어들어왔으니 루나칼립스의 교칙으로 알맞은 처벌과 그 무게를 정해야겠지."

그렇게 말하며 에반은 엘리아의 문서함에서 꺼낸 벌점 관련 매뉴얼을 펼쳐서는 읽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보자. 죄수번호 1214. 이름은 미엘 실리우스."


"시엘 밀리우스거든?! 일부러 그런 거지?!"

발끈해서 소리치는 미엘, 아니 시엘을 무시하고 에반은 자기 할말을 이어나갔다.

"지금부터 니가 위반한 교칙과 그에 상응하는 벌점을 고하겠다. 우선 이성 학생의 공간에 무단 출입 벌점 25점, 월담 행위 벌점 10점, 교직원의 지시를 의도적으로 무시 혹은 불응 벌점 40점, 교직원에 대한 태도불량 벌점 15점, 욕설  비속어 사용 벌점 10점, 풍기문란 벌점 4000점, 나 점심도  먹고 귀찮게 한 거 벌점 8000점..."


"뭐, 뭐야 그게?!"

"그 밖에도 이것저것 있을 테니 2000점 추가."


라고 말하며 징계 기록부를 작성하는 에반이였지만, 실제 루나칼립스 교칙에 있는 모든 항목의 벌점들을 전부 한 번씩 받는다 가정해도 1000점이 안 넘어간다.


"억지야! 횡포라고!!"


"시끄럽네. 루나칼립스 학원의 교칙을 따르면 1만점 이상의 벌점이 쌓인 학생은 사형에 처하는 거 알지?"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사형이라고?!  죽일 셈이야?!!"

"이게  말썽 많은 학생을 초기에 단호하게 지도해서 잘못된 길로 더 빠지지 않도록 하는 어른들의 중요한 임무라고. 그렇기에 나처럼 막중한 책임의식을 가진 어른에게만 교육의 임무를 맡기는  아니겠어?"


"교육이고 자시고 사형이면 죽잖아!!"


"어쨌건 잘못된 길로 더 빠지진 않을 거 아냐. 그런 점에서 보면 무조건 성공하는 가장 확실한 훈육이 바로 사형 아니겠어?"

"말이 된다고 생각해?!! 잠깐? 뭐하려는 거야? 가까이 오지마!! 저리가란 말이야!!"


소파에서 일어난 에반이 형을 집행하기 위해 시엘에게 다가서자 시엘이 의자가 덜컹거릴 정도로 몸부림을 쳤다.

"그쯤 해두죠."


그때 지금까지 테이블에 앉아서 조용히 점심을 먹던 엘리아가 에반을 저지했다. 그녀는 막 식사를 마친 참이였는지 냅킨으로 입술을 잘 닦은  테이블을 정리하고는 불그스름한 화장품으로 입술의 색을 고쳤다. 그리고는 아까부터 자신이 업무를 보는 공간에서 소란을 피우던 두 사람을 보고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사감실에서 소란을 피우셔야겠습니까?"

"아 미안. 나한테도 당직실이 있었으면 이럴 때  좋았을 텐데 말이야. 좁아터지고 낡은 숙소 하나가 전부라서 말이지."


"장소만 문제 삼을  아니에요. 행위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교칙을 멋대로 왜곡해서 없는 사형제도를 도입하더니, 이젠 학생을 괴롭히시려는 건가요?"

"괴롭히다니 섭섭한 말씀하네. 괴롭히는 게 아니라 그냥 사형에 처하는 거야."


"그게 괴롭히는 것보다 훨씬 심하잖아!!"

"그러면 괴롭히는 쪽으로 해줄까?"


"무, 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그 학생이 무슨 잘못을 했던 간에 지금 당신의 지도 방법은 옳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여리고 가냘픈 학생을 이런 우악스러운 도구로 결박하다니요."

"누, 누구더러 여리고 가냘프다는 거야?!"


"어따대고 큰소리냐? 편들어주는 사람한테도 난리여."

꽝! 에반이  한번 시엘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자 엘리아가 그런 에반을 만류하며 말했다.


"숙녀의 머리를 함부로 때리시다니. 당신에게 기숙사를 맡기려고 한  기대를 재고해야 하는 걸까요? 여러모로 실망스럽군요."

"뭐라는 거야? 엘리아 너 얘 누군지 몰라?"

"저희 기숙사 사생은 아닌 게 확실합니다만.... 자세히 기억나진 않는군요."

"허이구...."

에반이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저번에 내가 야간점호 맡았을 때 여장을 하고 왔던 오르토스의 남자애 기억해?"

"당연히 잊기 힘들죠. 워낙 감쪽 같았던지라 당신이 어떻게 여장이라고 눈치챈 건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얘가 걔야."

"...??"

엘리아는 여전히 침착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동공이 세찬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시엘 밀리우스라는 이름, 왜 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 싶었는데  이유를 깨달았다.

엘리아는 말없이 뒤로 돌아서는 자신이 업무를 보는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중요한 물건을 넣어놓는 책상 서랍의 자물쇠를 풀고는  안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저번에 에반이 천설당에서 선물로 사왔던 로쿰이였다. 병에서 로쿰 한 덩이를 꺼낸 엘리아가 입안에 살며시 집어넣고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서 코로 심호흡을 했다.


"후우우..."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쉴  마다 엘리아의 어깨가 눈에 확 띄게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앉았다. 짧은 명상을 마친 그녀는 이내 곧 감았던 두 눈을 살며시 떴다. 그리고는 시엘의 얼굴을 보았다.

눈이 내려앉은 설산과 같이 희고 깨끗한 머릿결이 찰랑거리고 있었고, 그 머리카락 틈으로 가려진 눈동자는 수정처럼 맑은 얼음을 닮았다. 옅은 화장이 잘 먹은 피부는 엘리아가 봐도 바꿔 가지고 싶을 정도로 고왔고, 손을 대면 체온 대신 서늘함이 느껴질 것만 같은 쿨한 인상이였다.


"후우...!"

찬찬히 시엘을 살펴보던 엘리아가 머릿속의 코드가 좀 꼬여서 정리가 안 되는지 다시 거칠게 심호흡을 하며 명상에 들어갔다. 이윽고 진정이 좀 됐는지 명상을 마치고는 말했다.

"저번보다 훨씬 발전했군요. 여장이."


"그러게나 말이다. 그렇게 이 학원에 들어오고 싶은 거라면 내가 좀 거들어줄까? 다리 사이에 걸리적거리는 걸 떼버려서 말이야."

"그만둬!! 당신이라면 진짜로 그렇게 할 거 같아서 무섭단 말이야!"


시엘이 식겁하며 소리쳤다. 엘리아가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들며 물었다.

"그런데 시엘 양, 아니 시엘 군은 왜  시간대에 루나칼립스 학원을 찾아온 것이죠?"

"낸들 알겠어? 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건 정당한 용무가 있어서 온 거라면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왔지, 이렇게 정성을 들여 여장을 하고는 담을 넘어서 숨어들어 왔겠어?"

"큭!!"

정곡을 찔린 시엘이 반론을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큰소리를 쳤다.

"이게  당신이 내 창을 망가뜨려서 이렇게 된 거라고!"


"뭔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니가 여기 기숙사에 무단 침입한 걸로도 모자라 나를 찌르려다 그런 거잖아."


"으으윽."


맞는 말 뿐이라 뭐라 대꾸하지도 못하고 더더욱 움츠러들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엘리아가 서류함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더니 펜을 뽑아 무언가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오르토스 학원 쪽에 확실한 교육과 지도를 건의해야겠어요."


"소용 없어. 이미 그쪽에서는 두손 두발 다 들고 포기한 망나니로 소문났던걸. 하다못해 여기에 기어들어와 있는 동안 만큼은 여기 교직원들이라도 얘를 확실하게 교육시킬 필요가 있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육시키실 건가요?"


"아까도 말했잖아. 사형이지."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사형이 뭔지 모르는 거야? 교육이고 자시고 내가 죽는다고요!"


"어쨌건 여길 다시 오는 일은 없을 테니 교육의 목적은 달성하는 거잖아? 조금 전에 말했던 거랑 완전히 같은 맥락이지."

"그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고오?!"

시엘은 슬슬 힘이 부쳐서 몸부림도 팔딱팔딱 치지 못했다. 마저 형을 집행하려던 에반을 엘리아가 한번 더 만류했다.

"아무리 잘못을 한 게 분명한 데다가 반성을 하는 태도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거기에 일일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지도원에 걸맞는 그릇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대우는 해주는 선에서 지도해야 합니다."


"아아. 그래. 알았어."

에반은 엘리아의 말에 뒷통수를 한번 벅벅 긁고는 시엘에게 말했다.

"사감에게 감사히 여기라고. 엘리아가 저렇게 말해서 특별히 감형해주는 거니까. 참수형에서 교수형으로."

"결국 사형이잖아!!"


시엘은 다시 사슬을 풀려는 덧없는 꿈틀거림을 재개했고 엘리아는 그러면 그렇지 싶은 얼굴로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생각해보니 시엘 군의 처분을 굳이 저희가 맡을 필요가 있을까요? 저희는 어디까지나 기숙사를 맡았고, 시엘 군은 저희 기숙사의 사생도 아닌 걸요. 그냥 교무부나 생활지도부로 회부하는  제일 편하고 적절한 조치겠네요."


"글쎄. 그렇다 하더라도  녀석은 내 손으로 조져야겠어."


"히익!!"

에반은 사슬에 묶인 눈앞의 희생양을 어떻게 요리할지 고민했다. 그러던 에반의 뇌리에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이."

"왜.... 왜?!"


"사형 말고 교내 봉사 처분이 좋겠어. 마침 딱 자리가 비어서 인력이 급히 필요한 곳이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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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습니다."

루나칼립스 학원 학생회실. 유리아 릴리스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아직 다 설명도 못한 에반이 말문이 막혔다.


"왜?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도대체 어떤 점에서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애초에 당신 생각을 제가 이해할 날이 올 것 같지도 않지만 말이죠."


유리아는 자신을 찾아온 에반과 시엘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싫은티를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에반과 시엘이라니 대체 이게 무슨 조합이란 말인가? 쉬고 있던 자신을 찾아와서는 긴히 할 얘기가 있다길래 자리를 마련했거늘 한다는 말이 시엘을 유리아가 만들고자 하는 동아리에 입부시키자는 것이였다.

"동아리 만들려면 고문을 제외하고 최소한 4명의 학생 구성원이 있어야 하잖아. 근데 지금 너, 프릴, 아라한 이렇게  뿐인데? 그것도 프릴이랑 아라한이 너의  무모하고도 대담한 프로젝트에 동참할 생각이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야."


"만약 아무도 저와 함께할 생각이 없다면 동아리는 없던 얘기로 하고  혼자서 움직이면 그만입니다. 굳이 아무나 끌어와서 어중이 떠중이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뭐야 그러면 그 둘이 참가한다고 치고, 나머지  명 비는 자리는 어떻게  생각이였던 거야?"


"적당히 아무 이름이나 채워 넣어서 유령부원을 만들면 그만이죠. 동아리 쪽에서 부활동 예산 지원을 요구하지만 않으면 소규모 동아리의 명단 같은 건 아무도 자세히 조사하지 않습니다."

"멋지군. 회장님께서 솔선해서 교칙의 허점을 이용해 빠져나가는 모습이란."


"그보다도 에반 플루토 씨. 당신은 괜찮으시겠습니까? 저 여장변태를 동아리에 입부시켜도."

"누, 누굴 보고 여장변태라고 하는 거야!!"

"너 말고 달리 있냐?"

"당신 말고 달리 있습니까?"

"...."

차마 부정하지 못해 울컥한 시엘이였다.


"아무튼 얘를 입부시켜도 내가 괜찮겠냐는 건 무슨 의미야?"

"모르시는 겁니까? 오르토스의 학생을 입부시킨다는 건 시리우스 동아리 연합회에 등록된 연합 동아리를 개설하겠다는 의미에요. 그러려면 동아리 연합회에 주기적으로 활동 계획서 및 보고서를 제출하고, 연합 회의에 참석도 하고, 만월제 때 출품할 부스도 준비해야 하는 등 일반 동아리 보다도 당신이 할 일이 많아지죠."


"아니 뭐라고? 네가 만들자고 한 동아리니까 네가 부장일 테고, 네가 부장이니까 당연히 그런 건 네가 다 맡아서 해야하는  아니야?"


시엘은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에반을 쳐다보았다. 이런 사람이 좀 전에 자신을 묶어놓고 막중한 책임의식을 가진 어른이 어쩌고 교육의 임무란 저쩌고 떠들었단 말인가?

"뭐 안타깝게도 에반 플루토 씨 당신 말이 거의 사실이군요. 주된 일은 부장이 도맡으니까요. 그래도 담당 고문의 역할이 확대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뭐 그 정도 까지는 괜찮아."


"제가 안 괜찮습니다."

"아 왜?!!"


"연합 동아리를 개설하느라 할일이 더 늘어나는 건 괜찮습니다. 오르토스의 학생을 입부시키는 것 자체가 싫은 것도 아니고요. 다만 저는...."

유리아가 시엘을 째릿하고 흘겨보았다.

"저는 그냥 저 학생이 싫습니다."

유리아의   마디에 쇼크를 먹은 시엘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러나 유리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연속 공격을 퍼부었다.

"왜 하필 이 여장변태죠? 저번에  기숙사 방을 찾아왔을 때도 소름이 돋았는데 그때보다도 여장이 더 발전했네요. 잘도 이런 걸 남학생이라고 간파하셨군요, 에반 플루토 씨."

"으윽..."


"그런데 이 학생이 지금 왜 여기 있는 거죠?"

"오다가 주웠다."


"학생회실이 쓰레기통입니까? 이런 건 주우셨으면 저 갖다주지 마시고 원래 있어야할 곳에 던져놓고 오셔야죠."

"잠깐?! 내 취급이 왜 이런 거야?!!"

"왜 이런 거냐니요? 정말 궁금해서 물으시는 겁니까? 제가 당신을 평가하는 요인이 된 인상들  지금까지 주어진 게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여장, 이성 기숙사 침입, 난동 피우기, 친구 없냐고 묻기, 지도원에게 선빵 치기, 더욱 발전된 여장으로 학원 침입. 그 외 기타 등등  있겠지만 떠올려봐야 떠올릴수록 평판은 반비례하게 낙하할 것이다.

"하..."


시엘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에반은 완고한 유리아를 설득하기 위해 용을 쓰고 있었다.

"자, 자, 그러지 말고, 유리아. 지금은 비록 이런 꼬락서니를 하고 있지만 나름 사나이다운 면모도 보여줬잖아."


"뭐라고요?"


"아니 왜 그렇게 정색하고 그래...? 좋은 방향으로도 생각해 봐. 오르토스 학원 쪽에도 눈이 하나 있는  좋을 거 아니야? 루나칼립스 쪽 정보만으로는 진전이 안 되는 걸 오르토스 쪽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씀 자체는 분명히 타당합니다만, 좀 건전한 취미 생활을 향유하는 남학생으로 데려오시면  되겠습니까? 여장 같은 불건전한 취미를 즐기는 수상한 학생은 필요없습니다."

"취미라니! 나라고 해서 좋아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야!"

"어이구. 차라리 어설프기라도 하면 설득력이 있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렇게 높은 완성도를 보이려면 얼마나 연습을 하고, 코디를 해야 했겠어요? 즐기지 않고서는 무리죠."

"아니야! 오해니까 날 그렇게 단정짓지 말아줘!! 나에게도 건전한 취미생활이 있다고!"


"그게 뭐죠?"


"제과 제빵."


"흠...."


유리아는 머릿속으로 시엘이 과자나 빵을 만드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려보았다. 흰 앞치마를 두른 메이드복 차림으로 수제 쿠키를 정돈하며 손님이 올 때 마다 '어서오세요~' 하고 애교를 부리며 그 발걸음을 사로잡는 시엘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불순하군요."


"왜?!! 제과 제빵이 뭐가 어때서어?!"

시엘의 목소리는 갈수록 울음이 섞이는  했다. 그도 그럴 게 좋아하는 상대의 앞에서 이렇게 창피를 겪으며 매도를 당한다니, 자존심이 무참하게 찢겨나가고 있었다. 에반도 그 모습이 조금은 불쌍했는지 유리아를  설득했다.

"그러지 말고 생각  해봐."

"생각하면 할수록 싫어질  같습니다. 빨리 원래 있던 자리에 놓고 오세요."

"아 걱정 하지마. 내가 데려온 거니까 내가 책임지고 커버 한다니깐?"

"그 말을 제가 어떻게 믿죠? 당장 본인의 일부터 책임지고 커버하지도 않는 분이."

"앞으론 진짜 잘 할게. 기숙사 청소도, 설거지도, 용모단정도. 그러니까 한 번만 허락해줘, 응?"

"그건 저랑 거래를 위해 내걸 조건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당연히 잘 해야 하는 기본적인 업무죠."

"아 너무 복잡하게 굴지 말고. 어쨋건 이거 봐봐. 귀엽잖아?"


"저게 뭐가 귀엽습니까? 하나도  귀여워요."

대화가 마치 길가에 버려져서 주워온 동물을 집에서 키우겠다고 엄마에게 떼쓰는 모양새였다. 지켜보던 시엘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무튼 굳이 불필요한 인물을 추가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더욱이 에반 플루토 씨 당신이라면 이번 한 번으로 안 끝나고 또 어디서 이상한 사람을 주워올 것 같단 말이죠."

"오히려 그러면 나한테 고마워 해야지. 내가 NPC라 인력회사에서 오래 일해서 아는데 한 사람 인력 더 붙고 안 붙고 차이가 엄청 크다고."

"불필요한 사공 늘려봐야 배가 산으로 갈 뿐이죠. 아무튼 저는 더 이상 당신의 장난에 어울려  시간 없으니 당장 데리고 나가주시겠습니까?"

"허 참. 나도 장난치는 거 아닌데."


에반과 유리아는 옥신각신 하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시엘은 그 둘의 이야기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아까 전엔 교내 봉사 처분이니 뭐니 했는데, 이번엔  연합 동아리 얘기를 하고 있으니 전혀 따라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저기... 아까부터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분명히 날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말하는 거 같은데 왜 난 하나도 감이  잡히는 거지?"


"에반 플루토 씨. 당신 동아리에 대해선 자세히 설명 안했나보군요."

"안 했지. 그냥 교내 봉사 처분 명목으로 부려먹을 만한 자리가 있다는 식으로만 얘기했어."


"생각은 있으신 모양이네요. 외부자에게 이것 저것 떠들으셨다면 아무리 저라도 화가 많이 났겠죠. 가볍게 발설하지는 않으시는  보니 다행입니다."

"그냥 설명하기 귀찮았던 거지."


유리아는 시엘을 다시 쳐다보았다. 움찔 놀란 시엘이 똑바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했다.  역시 에반에게 끌려다닌 데다가 여러 스트레스 때문에 지쳐보였다. 유리아는 시엘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오고 갔던 대화는  잊으셔도 무관합니다. 당신이 또 어쩌다 에반 플루토 씨에게 잡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교내 봉사 처분이든 뭐든 제가 당신의 징계 수위에 관여할 여지는 없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시죠. 그리고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이제 다시는  학원 안에서 당신을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


유리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사형 선고보다도 무겁게 시엘의 가슴을 망치질 했다. 최악이다. 그의 얼굴은 언어를 빌리지 않고도 그렇게 분명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쳇. 하여간 고집하고는."

에반은 툴툴거리며 시엘을 데리고 학생회실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이 나가고 학생회실의 문이 닫히자 혼자 남은 유리아는 정적에 잠긴 학생회실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그 여장변태의 목소리... 어디서 들어봤던 목소리 같은데? 어째서일까?"

유리아는 곰곰히 기억을 되감아 봤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학생회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어딨는가?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하니 에반이 또 이상한 일을 꾸미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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