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1-4. 체스보드 (11)
새벽 6시 무렵. 보호실에 억류되어 있던 아라한은 수사관에게 이끌려 취조실로 왔다. 취조실 안으로 들어가니 접이식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쟈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사관은 쟈네트의 맞은 편에 놓인 접이식 의자에 아라한을 앉힌 뒤 쟈네트에게 경례를 하고 나갔다.
"간밤에 잠은 잘 주무셨나? 좋은 데에서 자다가 이런 누추한 곳에 몸을 눕히니 어디 담이라도 들지 않았나 모르겠네."
쟈네트가 서류를 읽느라 아라한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라한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치 않으며 대답했다.
"한밤 중에 들이닥쳐서 잠옷차림의 학생을 잡아다 가두더니 이번에는 꼭두새벽부터 깨워서 앉혀놓는군요. 이렇게 강압적으로 공권력을 휘둘러대면서 민생을 수호하는 보루라고 불리면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목소리 좀 낮춰라. 몇 주째 야근의 연속이였더니 머리가 징징 울린다."
"유죄를 확정지을 증거도 없는데 사람을 이렇게 취급해도 되는 겁니까?"
"사람을 이렇게 취급해도 되냐고? 사람은 어떻게 취급해야 맞는 걸까?"
"무슨 의도로 그렇게 되묻는 거죠?"
"이 빌어먹을 거미 계급장 달고서 이리들 쳐잡으러 다니면 말이야...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까지 취급할 수 있는지 못 볼 꼴, 봐선 안 될 꼴 다 보게 되지."
쟈네트의 눈동자는 마치 굳센 의지로 밝게 타오르던 과거의 빛이 오랜 세월에 걸쳐 쌓여온 혼탁함에 잠긴 것만 같았다.
"그런 이리 새끼들을 끼니마다 거르지 않고 뼈까지 남김없이 꼭꼭 씹어먹다 보니 우리 성질머리도 덩달아 고약해지더라고."
아라한은 어째서 수사관들을 처음 보는 순간 이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음에도 이리와 같은 부류의 냄새가 나는지 깨달았다. 흔히들 말하는 괴물과 싸우다 보니 괴물이 된 존재라는 것이였다.
"먹어라. 앞으로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니까 할 수 있을 때 식사는 해둬야지."
쟈네트가 기름 묻은 갈색 종이 포장지를 책상 위에 올려놨다. 계란이 들어간 햄파이가 포장지 안에서 모락모락 튀김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두루 갖춘 손색 없는 한끼 식사에, 배를 든든히 채워주는 고열량인 데다가, 휴대가 간편하기 때문에 수사관이나 NPC 같이 야근, 외근이 잦은 직종 종사자들의 상징과도 같은 동반자로 자리 잡았다. 수사관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이 햄파이를 먹기 위해 일부러 수사 당국에 잡혀오는 이상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뜨듯할 때 먹어야 맛이 제대로다. 기름져서 그런지 식으면 별로더라."
쟈네트가 권했지만 아라한은 파이에 눈길도 주지 않고 쟈네트를 노려봤다.
"보기에는 그래도 바삭할 때 먹어보면 꽤나 중독된다. 아아, 한창 피부에 신경 쓸 나이인데 기름진 음식은 안 되려나? 그게 아니면 혹시 채식주의자?"
"용건이나 말씀하십시오."
쟈네트는 의자 등받이에 쭉 기대 앉으며 말했다.
"곧 치안관이 올 거야. 내가 보증하는 또라이다. 치안관들이야 으레 다 또라이지만, 이 인간은 그 중에서도 유별난 변태거든? 나처럼 신사적이지는 않을 테니까 잠깐 동안만이라도 오기를 접어두고 조사에 협력하는 게 좋아. 이건 요청이 아니라, 걱정하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자신이 신사적이라는 쟈네트의 말에 아라한이 못미더운 반응을 보였다. 그때 수사관 한 명이 취조실로 급히 들어오며 말했다.
“치안관 님께서 오셨습니다!”
“왔나...”
열린 문 너머로 수사관들이 벌떡 일어나 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경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국에 영광! 황제께 충성! 정의로운 주시자에 대하여 경례!!”
“그래, 그래 이른 아침부터 고생들 많아. 됐으니까 난 신경 쓰지 말고 일들 봐.”
야근에 쩌든 수사 당국의 분위기에 안 어울리게 쾌활하고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넷은 어딨어?”
“호민경 님은 지금 취조실에 계십니다. 치안관 님을 기다리고 계시니 빨리 가보십쇼.”
“그… 어때? 자넷 화 많이 났어?”
“음… 그냥 마음을 비우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이런…! 아니야, 괜찮아. 선물 좋은 거 사왔으니까 넘어가 줄 거야.”
쾅!! 듣다 못한 쟈네트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쳐 큰 소리를 내며 문밖에 대고 소리쳤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빨리 들어와요!”
“으아! 갈게, 갈 거야!”
쟈네트가 윽박을 지르자 어느 남자가 취조실 안으로 황급히 들어왔다. 그가 문을 열고 취조실에 들어서자마자 담배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비록 담배 냄새 때문에 좋은 첫인상을 남기기에는 글렀지만 세련된 가죽 재킷을 멋드러지게 입고 있었고, 말끔하게 잘 면도된 얼굴은 미청년과 미중년 사이 중간쯤에 끼어있는 나름 반반한 얼굴이어서 담배만 안 피우면 잘 먹힐 법한 인상의 사내였다.
하지만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치안관 하면 떠올릴만한 냉철하고 근엄한 인상과는 거리가 멀다 못해 정반대였다. 재킷에 탈취제를 칙칙 뿌리다가 쟈네트에게 손을 흔들면서 인사하는 모습은 촐싹맞기까지 했다.
"이야~ 호민경 님을 기다리게 하다니 안 될 일이지, 안 될 일이야!"
"빨리 와서 앉기나 해요, 할일이 하도 많아서 쌓아놓으면 왕도에 탑 하나 더 생길 기세니까."
"어엉? 자넷 이러기야? 몇 달 만에 보는 건데 이렇게 인정머리 없어서는 쓰나?"
"아 빨리 와요! 그리고 내 이름은 쟈네트라고요, 어제 말했는데 그새 까먹었어요?! 솔직히 말해봐요 당신 일부러 그러는 거죠?!"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있나? 자, 자 내가 선물도 이렇게 사왔으니까 기분 풀어 응?"
치안관은 작고 예쁘게 생긴 상자 하나를 쇼핑백에서 꺼내들었다.
"이게 뭔데요?"
"짜자잔!"
치안관이 상자를 벌컥 여니 안에는 각기 다른 크기의 손목시계 셋이 있었다.
"자 여기 아빠 시계, 이게 엄마 시계, 그리고 이거는 애기 시계~ 셋이 합쳐서 화목한 시계가족이..."
텁! 쟈네트가 상자를 덮고 쇼핑백에 도로 쑤셔넣어 버렸다.
"마음에 안들어...?"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맨날 어디서 짝퉁만 골라서 사오고 있어."
"짝퉁이라니?! 이거 박하 상회 백화점의 디아모트 직영 매장에서 산 순도 200% 정품이거든?"
"데이모스에요. 디아모트가 아니라. 상표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슨 정품이야."
"어어?"
"그리고 박하 상회는 또 어디 있는 상회에요? 설마... 백화 상회랑 헷갈린 건 아니시죠?"
"어어...?"
"맞나보네. 일부러 이러는 거 맞다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남들은 찾아도 안 보이는 이런 짝퉁을 어디서 매번 찾아오겠어?"
"아니 빤딱빤딱한 게 빛깔부터가 다르길래 보자마자 딱 정품이라고 생각했지. 이거 봐봐!"
치안관은 짝퉁 손목시계 하나를 꺼내서 자기 손목에 찼다.
"어때? 걸쳐보니 번질번질한 게 모양새 괜찮지? 짝퉁이건 정품이건 보기에 그럴싸하면 그거로 된 거 아니겠어?"
"아 이런 거 좀 사오지 말라니까요!"
툭툭! 아라한이 책상을 두드려 소리를 내 두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촌극은 이만 끝내주시죠? 저도 바쁜 사람입니다."
"아아~ 그렇지, 그렇지!"
치안관은 쟈네트 옆에 접이식 의자를 하나 깔고 앉았다. 그리고는 아라한이 손대지 않은 햄파이를 집어서 한입 베어물었다. 바사삭! 잇자국 너머로 반숙 계란 노른자와 햄이 충실하게 차있는 파이 단면이 드러났다. 치안관은 한입 먹은 파이를 포장지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치안관 유티스라고 해. 명함은 안 줘도 되겠지? 내 동전 가지고 있을 테니까."
팅! 아라한은 어제 쟈네트에게서 받은 단안(單眼) 주화를 치안관 유티스에게 튕겨 던졌다. 유티스는 동전을 낚아채고 주머니에 챙겨넣었다. 아라한은 자신의 부채를 촤르륵 펼쳐 얼굴을 가리고 조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치안관을 직접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만, 제국에 단 16명 뿐인 주시자가 이렇게 경박한 익살꾼일 줄은 더더욱 상상 못했습니다. 정점에 서있으면 풍경도 우스꽝스럽게 바뀌는지요?"
"정점은 무슨. 나락이겠지."
유티스는 자조적인 블랙 조크로 받아치면서 책상 위에 수사 당국에서 정리해놓은 자료들을 펼쳤다. 업무에 본격적으로 착수했지만 그는 여전히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꼬리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저렇게 보여도 수사 당국에서 가장 높은 계급인 치안관이다. 관할 지역의 모든 수사관을 지휘하고, 일그러진 별들의 동태를 주시하고, 증거가 충분하다면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까지 황제 앞에 끌고 가 추궁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존재다. 게다가 오로지 황제만이 직접 임명하는 직책이기 때문에 연줄이나 뒷돈으로 낙하산 탈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겉으로는 어수룩해 보이지만 달고 있는 계급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라한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묘한 심리전에 말리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부채를 잘 쥐었다.
"이름은?"
"그 자료들 중에 제 프로필도 있지 않습니까? 직접 확인해보세요."
"으흠."
유티스는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쪽 애들이 누르워 뒷골목을 전부 케어하고 있다며? 그 골목에 내장국밥 맛있게 잘하는 곳 있던데 이래서야 나중에 너희 애들 마주쳤다가 어색하겠어. 그런데 그 동네 원래 종교쟁이들 영역이였던 건 알지? 걔들이 미친짓 하려고 키우던 오염생물이 저번 총기 난사 사건 때 갑자기 깨어났었는데 뭐 아는 거 없어?"
"묵비권 행사하겠습니다."
"총기 난사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잖아? 그 이리들이 노리던 것에 대해 짚이는 거라도 있어?"
"진술 거부합니다."
"너도 그렇고, 이번 사건의 이리들도 그렇고 다들 유리아 릴리스와는 무슨 접점이 있는 건지 네가 알고 있는 걸 듣고 싶은데."
"저는 들려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사건 해결을 위한 조사일 뿐이니 너무 경직되어 있을 필요 없어."
"이렇게 폐쇄된 환경에서 이뤄진 진술이 어떤 식으로 왜곡되어 절 불리하게 만들지 모르는데 무슨 수로 경직을 안 하죠? 주재관의 보호를 받기 전까지 저는 계속해서 묵비권을 행사할 것입니다."
"흐음."
"당신들이 원하는 것은 사건의 해결일 뿐, 저와 제 사람들의 인권이나 안전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것 쯤이야 알고 있..."
탁! 유티스가 손짓하자 흐름을 종잡을 수 없는 미지의 진동이 아라한의 손목을 쳤다. 그 바람에 그녀가 쥐고 있던 부채가 멀찍이 튕겨져나갔다. 아라한이 얼굴을 가리던 부채를 치운 유티스가 그녀의 적안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깝게시리 예쁜 얼굴을 왜 자꾸 가리나 했더만... 이런 능구렁이 같은 입꼬리를 숨기고 있었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동방이 보낸 첨병(尖兵)이라는 건가?"
"....."
아라한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 내팽개쳐진 자신의 부채를 보며 손목을 매만졌다. 이럴 때에도 자신이 내비치고 싶은 감정이 아니라, 유리하게 상황을 이끌기 적절한 감정을 끄집어내야 한다는 건 상당한 수련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당신들은 제국 공직자의 신분임에도 직함에 걸맞지 않은 행위로 제게 부당한 피해를 끼쳤고, 그 결과 제국에 적법하게 거류하는 외지인의 권리를 침해했습니다. 이게 당신들의 관행인지, 동방인에 대한 차별 대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외교적 응징을 각오하십시오."
"그거 알아? 난 쥐뿔도 상관 안 해. 네가 한 말 거의 다 맞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정확하게 짚은 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은 사건의 해결일 뿐이라는 거야."
유티스가 그렇게 말하고는 재킷의 안경집에 보관하고 있던 검은 뿔테 안경을 썼다. 안경을 쓰는 순간 인상이 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풍기는 분위기가 일순 변한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티스는 검지와 중지로 안경이 콧등에 잘 자리잡고 앉게 정리했다.
"너에게도 줄 선물이 있다. 안심해. 네껀 짝퉁이 아니라 찐품이니까."
유티스가 특수 보관함의 봉인을 풀고 안에서 엄지손톱 정도 크기의 작은 보석을 집어들었다. 보석을 알아본 쟈네트가 순간 표정을 찡그렸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아라한에게 유티스가 말했다.
"룬탈륨이야. 월광석(月光石)이라고 말하면 알아들으려나?"
보석의 이름을 들은 아라한이 그제서야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사 활동을 위해 발품 팔아 손에 넣은 거라 도떼기 시장에서 파는 것과는 비교가 안 돼. 빤딱빤딱한 게 빛깔부터가 다르지?"
"당신... 제정신입니까? 이러고도 당신이 정의로운 주시자입니까?"
"아니. 난 경박한 익살꾼이야."
유티스가 룬탈륨을 꽉 쥐자 눈이 멀 것 같이 찬란한 마력의 광휘가 취조실 안을 뒤덮었고 극심한 두통이 아라한을 덮쳤다. 눈부심과 두통 때문에 눈을 질끈 감고 움츠러들었던 아라한이 마력이 잠잠해진 걸 느끼고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그곳은 더 이상 취조실이 아니였다. 하지만 낯익은 장소였다.
"여긴...?!"
무너졌던 예배당이 말끔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아라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주변을 살폈다. 한쪽 벽면의 기괴한 우상 조형물과 먼지 쌓인 장의자들. 분명 뒷골목 심층부의 그 예배당이 맞았다.
또각또각. 소름끼칠 정도로 익숙한 발소리가 아라한의 귓가를 스쳤다. 아라한이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돌아보니 그곳에는 아라한 자신이 서있었다.
"..."
거울을 통하지 않고 자기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그러나 예배당 안의 아라한은 취조실에서 넘어온 또 다른 자기자신이 보이지 않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냥 휙 지나쳤다.
스윽! 예배당 안의 아라한이 단검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익숙한 장면이다. 이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지켜보고 있는 아라한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제단의 성배에 고이게 하자 흉측한 살점들이 예배당 곳곳을 뚫고 나왔다.
"역시 오염생물은 네가 한 짓이 맞았네."
"...!!"
등 뒤에서 들려온 유티스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아라한이 반사적으로 뒤돌았다. 유티스는 오염생물 군집으로 가득 채워져가는 예배당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신...! 정말로 법치 사회를 수호하는 심판자가 맞습니까?"
"글쎄. 한 가지 확실한 건 말이야, 제국의 형법에 따르면 주거침입죄의 범주에 다른 사람의 주택, 선박, 차량 외에 꿈속도 해당된다는 조항은 없거든. 같은 꿈을 꿨다고 해서 한쪽을 처벌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기억 속의 아라한이 부채를 펼쳐 휘두르자 살점으로 뒤덮인 우상이 잠에서 깨어나듯이 눈을 번쩍 뜨고 파동을 내뿜었다. 파동이 휩쓸고 지나가자 유티스의 몸이 흐릿해졌다.
"오염생물을 깨운 것까지는 예상했는데, 조종까지 하는 건 예상 밖인 걸?"
투명해져가는 유티스가 그렇게 말하고는 프스슷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뒤이어 마구잡이로 솟구쳐오른 오염생물의 살덩이들이 예배당을 휩쓸고 아라한까지 집어삼켜 버렸다.
"으읏...?!!"
아라한이 예배당을 가득 채울 기세로 밀려드는 오염생물에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갑자기 왜 그러시죠? 괜찮으신가요?"
그때 조용하고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낯익은 음성에 아라한이 눈을 떠보니 오염생물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고 아라한은 지금 유리아 릴리스와 카일을 마주 보고 있었다.
"얼빠진 표정을 짓는군. 또 무슨 허튼 짓거리가 떠올랐나?"
죽은 카일이 멀쩡한 모습으로 서서 아라한을 째려봤다. 그리고는 곧 바로 유리아에게 시선을 옮기고 손을 내밀었다.
"됐으니까, 유리아, 빨리 물건이나 내놔라."
유리아가 품에서 뎀피돈이 든 비닐을 꺼내서 카일에게 건넸다. 툭!! 어디서 다시 나타난 건지 모를 유티스가 중간에 뎀피돈을 가로챘다.
"이게 뭐야? 이거 찾겠다고 이리들이 학원에서 총질하고 그 난리를 쳤다 이거지?"
유티스는 비닐 안에 든 하얀 가루를 살펴봤다. 아라한은 눈앞에서 유티스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속수무책으로 기억을 정탐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딱 봐도 무슨 약 같은데... 몸매 관리의 비결인 박하 상회 특제 보충제 같은 건 아니겠지."
유티스는 비닐 포장을 뜯어서 자신의 손바닥 위에 가루를 쏟아봤지만 가루는 유티스의 손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사라져 버렸다. 이곳은 아라한의 기억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공간이기 때문에 가루의 촉각이나 냄새 같은 것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박하 상회에서 굴리는 제약 회사의 규모를 생각하면 어디서 무슨 이상한 약을 개발하고 있을지는 일일이 다 의심하기도 불가능한 일이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서 의심하기도 귀찮고."
"이런 방식으로 얻은 증거는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상관 안 해. 내가 증거나 모으려고 이런 방식을 쓰는 게 아니거든. 솔직히 나는 이리들이 학원에서 총을 쏴질렀건, 개발 단계의 신약을 훔쳤건 신경 안 써. 내가 그런 거나 수사하러 이 먼길 마다않고 달려올 짬이겠니? 내가 신경쓰는 건 단 두 가지 뿐이야."
유티스는 뎀피돈이 든 비닐을 무심하게 던져버리고는 뒤로 휙 돌아섰다. 가는 길에 정지 화면처럼 굳은채 서있는 카일의 머리통을 툭 치자 카일의 형상이 파스스 사라져버렸다.
"일단 첫번째로 킬링 이터인데. 킬링 이터는 이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게 확실하다. 그저 눈에 띈 카그루를 잡아먹고 본 것이겠지. 3년 동안 어디서 뭘 하다가 이런 동네에서 나타났는지가 궁금하지만 그건 나중에 알아볼 일이지."
유티스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불결한 살점에 뒤덮인 우상 조형물이었다. 살덩이들을 따라 오염생물의 촉수 다발이 말미잘 마냥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 대체 뭐에 당했길래 저렇게 기운 좋은 오염생물이 말라죽고도 과학팀 똑똑이들이 사인을 규명할 수 없는 것인가. 생명활동 지속 불가의 타당한 원인 하나도 없이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이들 중에서 단 한 분 뿐인데."
유티스가 손을 들어올리더니 손가락을 튕겨 딱!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또 다시 예배당의 풍경이 바뀌고 아라한과 유리아가 카일과 맞서 싸우는 장면이 재구성 됐다. 느긋하게 싸움 구경을 하는 유티스는 햄파이를 가져와 먹으면서 볼 수 없는 걸 아쉬워했다.
그때 아라한이 부채를 들어올려 우상의 힘으로 강렬한 정신 파동을 일으키고, 유리아도 악성 이명을 내뿜는 장면이 재구성 됐다. 파동과 이명이 충돌하면서 일어난 충격파가 예배당을 휩쓸자 이변이 일어났다.
"으음?"
파치직! 치지지지! 유리아의 악성 이명이 폭발적으로 퍼질 때 뇌회랑이 이명에 노출되는 바람에 룬탈륨의 기억 재구성이 불완전해졌다. 마치 망가진 고물 전자기기의 화면 마냥 지지직 거리는 예배당 풍경을 본 유티스가 안경을 고쳐쓰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명을 무기로 쓴 거야? 이거는 쪼끔 소름끼치네."
그때 예배당 안에 다른 이의 형체가 끼어들었다. 이명 때문에 목소리도 안 들리고, 지지직거리는 실루엣 밖에 안 보여서 신원을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었지만 긴머리를 한 작은 체구의 소녀와 민첩한 소년이였다. 그리고 뒤이어서 눈에 거슬릴 정도로 새카만 실루엣이 저벅저벅 걸어들어왔다.
"으음? 저 곱슬머리 어디서 많이 봤는데?"
홀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깊은 어둠의 실루엣을 본 유티스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검은 실루엣은 우상 조형물 앞에 서서 손을 뻗었다. 에반 플루토가 오염생물을 처리하던 장면이었다. 에반이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라 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온몸의 감각은 그때 느꼈던 흐름의 비틀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아라한도 유티스처럼 넋을 놓은채 뒤이어 벌어지는 일을 지켜봤다. 번득! 검은 실루엣의 얼굴에서 황금빛 금안 한 쌍이 안광을 발했다. 뒤이어 검은 실루엣이 팔을 휘두르자 예배당 전체가 갈기갈기 찢겨지더니 모든 게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꺄아앗?!!"
바닥이 사라져버리자 아라한은 밑도 끝도 보이지 않는 무저갱의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빨리 바닥에 떨어진 아라한이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펴보니 오염생물도 예배당도 온데간데 없었고 다시 수사 당국의 취조실로 돌아와 있었다.
유티스는 접이식 의자에 앉아서 자신의 손을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는 빛을 잃고 부숴진 룬탈륨이 있었다. 부숴진 룬탈륨을 본 쟈네트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 속에서 무얼 본 거죠?! 대체 뭘 재구성하려 했길래 룬탈륨이 이렇게...?!"
"오셨어..."
"뭐라고요?"
"그분이 오셨어. 그분이 오셨다고! 하하하!! 틀림없이 그분의 눈이야!"
"이 인간이 또 왜 이런데? 오시긴 누가 오셨다는 거야?"
신이 난 목소리로 웃어대는 유티스 옆에서 쟈네트가 고개를 저으며 짜증냈다. 그때 수사관 하나가 취조실의 문을 두드렸다.
"치안관 님, 호민경 님. 공무중 대단히 실례합니다만, 참고인 신분으로 임의동행한 유학생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루나칼립스의 여학생입니다."
"그런 걸 우리가 왜 직접 대면해? 민원 접수하라고 서식 주고 너희 선에서 해결 봐. 아니 무슨 학원측 교직원이나 영사 당국 주재관도 아니고 학생이 왔어?"
"루나칼립스의 학생회장이라고 하던데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여기 국장이다."
"들여보내."
"치안관 님??"
"들여보내. 이른 아침부터 친구 돕겠다고 먼길 찾아왔는데 얼굴 정도는 보게 해줘야지."
"하지만! 하아... 알겠습니다."
쟈네트가 수사관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수사관이 방문객을 취조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유리아 릴리스가 취조실에 들어와서 무표정한 얼굴로 아라한과 유티스를 번갈아 봤다. 유티스는 먹다 만 햄파이를 마저 우적거리며 유리아에게 물었다.
"의리가 굉장하네. 아직 얘네 담당 교직원도 출근을 안 한 시간인데 여기까지 다 찾아오고. 곤란한 학생이 있으면 어디든 언제든 달려가는 학생회장이신가?"
"수사 당국에 억류 조치된 학생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이 학생은 이번 사건의 이리들과 관련이 없습니다."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가 수사해서 입증할 부분인데."
"그럼 적절한 절차라는 것이 있잖습니까? 구속 영장 아니면 참고인 소환 영장을 발급하여 학생지도부나 교장에게 제출하셨어야지, 이런 식으로 학생 상대로 권한을 휘둘러 찍어누르는 것은 루나칼립스 학원에 대한 심각한 결례입니다. 학생회는 이런 무례를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습니다."
"몰랐네, 몰랐어. 학생회에서 말썽쟁이 유학생들까지 케어해줄 줄은 정말로 몰랐는 걸."
"제가 할 일일 뿐입니다. 혹시라도 학생 대 학생이라는 공적 관계 이외의 사적인 관계를 이번 사건과 연관지으실 생각이라면 이게 제 해명입니다."
탁! 유리아가 책상 위에 서류더미를 하나 올려놨다. 표지에 눈에 띄는 큼직한 글씨로 <누르워 뒷골목 재개발을 통한 음지 경제의 양지화 구상안> 이라는 제목이 쓰여있었다.
"백화 상회는 라쿠이르 지역 경제의 중심 상권인 누르워에 역시 사업을 뻗고 있습니다. 누르워 뒷골목의 녹화(綠化) 사업 역시 몇 번이고 도마에 올랐죠. 그러니 뒷골목을 관리하는 이 학생과도 필연적으로 학생 이외의 접점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저 그뿐입니다. 이 학생이 총기 난사 사건을 겪으면서까지 저를 도우려 했던 것도, 이리들을 끌어들인 것도 지극히 개인적인 이해 관계에서 비롯되었을 뿐 이리들과의 연관성은 없습니다."
유리아의 서류를 살펴보던 쟈네트가 코웃음을 치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런 자료 그리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작성 일자를 조작하는 것도 간단한 일이고. 이렇게 급조한 티 팍팍 나는 조악한 누더기로 얼버무릴 수 있을 만큼 수사관이 어리숙해 보이니?"
쟈네트에게서 자료를 낚아챈 유티스가 읽어보지도 않은 자료를 휴지통에 꾸겨버리며 말했다.
"그거 알아? 난 쥐뿔도 상관 안 해. 어차피 진범들은 뒈졌고, 이미 뒈진 새끼들 범행 동기 따위 궁금해 할 가치도 없잖아? 그러니까... 데려가."
데려가라는 말에 쟈네트는 물론이고 유리아와 아라한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티스를 쳐다봤다.
"데려가. 이 능구렁이 동방 아가씨 말이야."
"치안관 님?!"
"이제 우리가 더 붙잡아 둘 필요 없어. 이 꼬마 숙녀들 더 들볶아봤자 킬링 이터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충 궁금한 건 아까 다 알아냈어."
"그렇지만 아직 조사할 게 남았고 무엇보다 절차라는 게... 하아... 그런 걸 당신에게 따지는 건 아무 의미 없겠죠. 나중에 다 설명해주세요."
쟈네트는 유리아와 아라한을 취조실 밖으로 내보냈다. 수사관들이 없는 곳으로 나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유리아와 아라한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돌았다. 서로의 발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불편한 고요를 먼저 깬 것은 아라한 쪽이였다.
"누르워 뒷골목 양지화 계획? 그런 허무맹랑한 말까지 지어내 가면서 저를 도운 의도가 무엇이죠?"
"의도라고요? 그게 새벽부터 운전기사 깨워서 차 타고 달려와 도와준 사람에게 할 말입니까?"
"이 빚은 잊지 않고 기억해 두겠습니다."
"빚이라고 하지 마세요. 난 당신에게 아무 것도 청구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운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저는 말이죠, 이렇게 보여도 단순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당신처럼 매 순간마다 대체 누구를 이기려는 건지 모를 심리전에 홀로 빠져 살 자신 없습니다."
아라한의 말문이 막혔다.
"그럼 전 먼저 들어가 볼테니 나중에 학원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유리아가 수사 당국 앞에서 진을 치고 농성중인 곤룡회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허설이 아라한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달려왔다. 아라한은 마차에 오르는 유리아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촤르륵! 아라한은 부채를 펼쳐 얼굴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