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5화 〉1-4. 체스보드 (10) (35/88)



〈 35화 〉1-4. 체스보드 (10)

아라한은 말없이 바둑판을 내려다 보며 자신의 부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허설이 그녀에게 차를 한  내어왔으나 그녀는 입에 대지 않았다. 에반 플루토와 이야기를 나누고 집무실에서 나온 뒤로 줄곧 이런 상태였다. 그녀가 걱정된 허설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수장님. 상념이 깊으신듯합니다. 아까 그 지도원이 수장님께 허튼소리라도 했습니까?"

"염려를 끼쳤군요. 전 괜찮습니다. 잠시 생각에 좀 잠겼을 뿐이에요."

"준비해 드렸던 유리아 릴리스의 청문회 서기록은 확인해 보셨습니까?"


"다 읽었습니다. 역시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건 없더군요."


"혹여라도  사건 이후로 유리아 릴리스나 그녀의 상회에서 수장님께 접납(接納)을 요청하지는 않았는지요?"

"그런 건 제가 안배할 부분입니다."

"네..."


딱 잘라 대답한 아라한은 다시금 말이 없어졌다. 저렇게 홀로 묵묵히 앉아서 검은 돌과 흰 돌이 뒤섞여 놓인 바둑판을 내려다 본지도 한참이 지났다. 그녀는 지금 대국 연습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명상에 잠긴 것도 아니였다.


"수장님의 그런 표정은  이상 보고싶지 않습니다. 말씀만 하신다면 수장님을 근심하게 하는  무엇이든 바로  쪽을 내놓겠습니다."

"제 근심은 으레  스스로에게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일  구원하기 위함이라면 절 도끼로 내리찍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


아라한은 검은 돌 하나를 바둑판에 툭 던지듯 놓았다. 보통 바둑에서 돌을 던짐은 상대방의 불계승을 선언하는 승복의 표시지만 이렇게 누구를 이기려는지, 누구와 겨루는지  수 없는 무의미한 판 위에서 던져진 돌이라면 무슨 의미를 가질까?


"이만 수침(睡寢)하고자 합니다.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네... 부디 만안(晩安)하시기를."

아라한이 겉옷을 벗어서 옷장에 걸어두고 침대에 앉는 동안 허설은 갈 곳 잃어 홀로 식어가는 찻잔을 치운 뒤 바둑판을 정리했다. 아라한은 자신의 숙소에서 나가려는 허설을 불렀다.


"허설 양."

허설이 아라한의 부름에 뒤돌아봤다. 허설의 얼굴은 변함없이 한결 같은 무표정이었다. 겉으로는 감정이 드러나는 일이 좀처럼 없지만 그녀의 가슴속에 얼마나 많은 응어리들이 엉켜있는지 아라한은 알고 있다.

"제가 할 말이 아니지만, 가끔은 스스로를 보살피기도 하세요. 제가 언제까지고 당신에게 명령하는 수장으로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수장님."


허설은 아라한의 말이 마음에 걸리는 듯한 기색을 비추며 물러났다. 아라한의 숙소를 나와 자신의 숙소로 돌아온 허설이 불을 켜니 정갈하다 못해 허전한 방이 나타났다. 꾸밈도 없고, 어지럽힐 일도 없는, 최소한의 생필품과 옷가지가 전부인 좁은 생활공간이었다.


침대에 누운 허설은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는 천장을 멍하니 올려봤다. 국제교류 학관의 숙소는 시설이 편하고, 혼자 생활하기 딱 적당하지만, 심적으로는 어딘가 답답해진다. 머리가 복잡해지기 전에 빨리 불을 끄고 잠을 청하는  좋을듯 싶었다.

"....."

무언가 낌새를 느낀 허설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몸을 숙이고 자신의 침대 밑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는...

"끄아아아악?! 아야얏!"


침대 밑에 숨어있던 아선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냈다.


"아파, 아파요옷!! 뜯어져 버려엇!! 으갹?!!"

침대 밑에서 아선을 끄집어낸 허설이 아선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려 침대 위에 내동댕이 쳤다.


"아야야... 하여간 박력 있으셔라."

"여긴 뭐하러 왔어?"

"무서운 꿈을 꿀 예정이므로 오늘은 같이 자도록 하겠습니다!"

와당탕!! 아닌 밤중에 복도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자 숙소에 있던 곤룡회 대원들이 황급히 뛰쳐나와 주변을 살폈다. 이윽고 그들은 물구나무 서듯이 뒤집힌채로 벽에 기댄 자세로 널브러져 있는 아선을 발견했다. 상황 파악을 마친 곤룡회 대원들은 다시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아으으윽..."


아선이 쭈욱 늘어지더니 철푸덕 바닥에 엎어졌다. 끼이익! 허설의 방문이 닫히려 하자 아선은 퍼뜩 일어나서 달려들어 문틈 사이로 끼어들었다.

"자, 잠깐만요 언니!"


"하숙촌으로 돌아가. 당장."

"이 늦은 밤에 저 혼자서 어떻게 깜깜한 뒷골목을 지나요? 그러지 말고 침대도 넓은데 하룻밤만 재워줘요, 제 베개랑 인형도 다 가져왔단 말이에요!"

철퍽! 아선의 얼굴에 허설이 던진 베개가 날아왔다. 아선이 얼굴에서 베개를 치우자 뒤이어 날아온 찹쌀너구리 인형이 아선의 머리에 맞고 튕겨나면서 삐꾹! 하는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냈다.


"잠깐만요, 언니! 문 닫지 말아봐요! 저 진짜로 요바이(夜這) 할 생각으로 온 것만은 아닌데...!!"

텁! 허설이 아선의 양쪽 관자놀이를 손아귀로 잡았다. 그리고는 한 마디 했다.


"또 헛소리 하면 이번에는 창문 밖으로 집어던질 거다. 뭐 하러 왔어?"

"말했잖아요. 분명 무서운 꿈을 꾸게  예감이 든다고.... 아니이이 잠깐만요! 히, 힘 빼셔요, 던지면 안 돼요! 끝까지 들어봐요!!"

관자놀이를 쥔 허설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아선이 필사적으로 파닥거렸다.


"하아... 무슨 무서운 꿈?"


"불온한 흐름이 느껴집니다."

아선은 아라한의 몸짓과 말투, 목소리를 흉내냈다.

"어때요? 똑같지 않아요?"

"무슨 흐름이 느껴지지?"

"으음... 구체적으로는 특정 못하겠는데 아마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 촉이 왔어요."


"무슨 일?"


"글쎄요. 막연하지만 수장님께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내가 있는 이상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게 두지 않아."


"그쵸? 그러니 저도 비상시에는 옆에서 거들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아선이 다시 허설의 방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곧바로 매몰차게 문이 닫혀버리자 아선이 쾅쾅 두드리며 간절하게 허설을 불렀다.

"열어주세요, 언니! 설마 사랑스러운 후배를 복도에서 자게  생각은 아니시죠? 그쵸?!"


쾅쾅! 아선이 허설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 외에도 또 다른 소리가 복도 끝에서부터 소란스럽게 커져왔다. 여러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였다. 아선이 복도를 보니 다른 대원들이 누군가를 막아서며 옥신각신 하고 있었다.

"당신들 누구야! 여기가 어딘  알고 막 들어오는 거야?!"


"당장 나가지 않으면 당직 지도원을 호출하겠어요!"


소란스럽게 웅성거리는  들은 허설이 문을 열고 나와 상황을 살폈다. 그녀가 나오자 아선이 허설 옆에서 깐족대며 히죽거렸다.

"이야, 이 정도로 빨리 제 촉이 적중할 줄은 몰랐는데. 저도 제법 흐름이라는 걸 잘 읽는 거 같지 않아요?"

그러나 허설은 아선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실랑이가 벌어진 쪽으로 걸음을 향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교직원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세 명의 성인 남녀가 곤룡회 대원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국제교류 학관에 쳐들어온 그 세 사람은 이리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이리와 같은 부류의 냄새를 물씬 풍겼다.


 사람  가장 고참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허설과 눈이 마주쳤다. 고고하게 뻗은 난초를 닮은 청록색 머릿결이 인상적인 시크한 분위기의 여성이었다. 퀭하게 힘이 풀려있는 두 눈은 언뜻 보면 그냥 피곤에 쩌들어 있는 듯 보이지만, 싸움꾼인 허설은 그 눈에 깃든 노련함을 알아볼 수 있었다. 허설은 눈빛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 눈을 부릅뜨고 그 여성을 노려봤다.


"허설 선배님!"


"허설 선배님이 오셨다!"

곤룡회 대원들이 허설을 발견하자 그녀 앞에서 인파가 반으로 갈라지듯 물러서며 길을 텄다. 허설은 위협적인 태도를 감추지 않고 세 사람을 향해 나아갔다. 허설이 주시하던 여성이 주머니에서 붉은 거미 계급장이 새겨진 동전을 꺼내 보여주고는 터프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사 당국의 호민경 쟈네트다. 사진 속 인물을 찾고 있는데 공무에 협조하길 바라지."

쟈네트가 그렇게 말하며 까딱 손짓하자 옆에 서있던 부하 수사관이 사진을 한 장 꺼내서 허설에게 내밀었다. 그 사진은 자신의 수장인 아라한의 프로필 사진이었다. 항상 표정이 없는 허설이지만 수사관에 손에 들린 아라한의 사진을 본 순간 눈썹을 미묘하게 찡그렸다.

“돌아가십시오.”

“공무집행 방해는 사안에 따라 불충죄로 적용될 여지도 있는…”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휙!! 허설이 숨겨둔 손도끼를 꺼내 들며 수사관들을 위협했다. 한 순간도 연마를 게을리 한 적 없는 도끼날이 서슬 퍼렇게 예기를 과시했다. 쟈네트가 자신의 목 밑에 닿은 도끼날의 서늘한 금속질 감촉을 느끼면서 귀찮다는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방해하지 말고 비켜라.”

“경고는 충분히 했어.”

휘익! 허설이 도끼로 쟈네트를 내려찍었다. 쿠웅! 쟈네트가 제압봉을 들어올려 허설의 도끼를 막았다.

"허설 선배의 공격을 정면에서 막았어...?!"


철인이 감정을 담고 무게를 실어 내리친 살벌한 일격을 무례하리 만큼 가뿐하게 막은 쟈네트가 전의로 이글거리는 허설에게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 녀석이 몸에다가 무슨 짓을 했길래 힘이 이렇게 우악스러워?"

도끼를 막고 있는 제압봉에서 푸른 빛이 나타났다. 툭! 쟈네트가 제압봉을 쥔 손목을 살짝 틀었을 뿐인데 도끼가 허설의 악력으로 못 붙잡을 만큼 강하게 휙 튕겨져나가 천장에 박혀버렸다. 쟈네트는 제압봉을 내리고 허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니들 수장인지 뭔지도 사실 지금 다 지켜보고 있지? 빨리 나오라고 해."

덥썩! 무기를 잃은 허설이 한손으로 쟈네트의 멱살을 붙잡고 반대쪽 손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망설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 두세요, 허설 양.”


그때 복도로 나온 아라한이 허설을 만류했다. 상대가 수사관이여도 물불 안 가리고 날뛰던 허설이 아라한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움찔했다.


“수장님…”


“놓으십시오.”


"....."

허설은 쟈네트의 멱살을 잡은 손을 풀고 수사관들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쟈네트는 허설 때문에 흐트러진 자켓의 매무새를 태연한 표정으로 정리했다. 아라한이 앞으로 나아오며 곤룡회 대원들에게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물러나 계셔요. 이건 제가 맡을 일입니다.”

아라한은 수사관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따지듯이 말했다.


“공권력 행사하시려면 영장부터 보여주시죠. 저희가 손에 핏물도  닦은 채 엉거주춤 서있는 현행범들입니까? 이런 식으로 아닌 밤중에 다짜고짜 들이닥치시면 곤란합니다.”

“체포하러  거 아니니까 인상 풀어라. 수사 당국까지 임의동행 하여 조사에 협조해 줘야겠다.”


“거절합니다.”

“앵무새 마냥 했던 말 자꾸 반복하기 싫거든? 공무집행 방해는 사안에 따라 불충죄로 적용될 여지가…”

“지금 이게 적법한 절차로 집행되는 공무입니까? 아무리 상대가 외지인이라 해도 너무 노골적으로 바보 취급하시는  아닌지요? 임의동행은 용의자 혹은 참고인의 동의를 필수 전제로 하지만 저는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영장도 없이 저를 연행한다면 그것은 임의동행이나 구속조치가 아닌 감금이며, 감금 상태의 대상을 수사하여 얻는 모든 증거들은 제국형법상 위법수집증거배제원칙에 의거하여 증거 능력이 부정됩니다. 어떻습니까?”

“…..”

“제국의 수사관이라는 분들이 외지인 유학생보다 아그루스 법률에 무지하다니 가소로운 일 아닙니까?”

“가소로운지는 모르겠고 이거나 받아, 아가씨.”

팅! 쟈네트가 아라한에게 던진 동전 한 닢이 허공에 튀어 올랐다. 아라한은 동전을 낚아챘다. 동전을  손바닥을 펼친 순간 아라한은 동전에 새겨진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 치안관의 신분과 권위를 상징하는 단안(單眼) 계급장이었다. 눈이 새겨진 앞면을 뒤집어보니 뒷면에는 치안관의 서명이 각인되어 있었다.


“치안관…”


“치안관의 구두명령과 서면통보는 그 자체로 영장으로서의 법적 실효성을 발휘한다. 그러니 위법성 따지고 싶으면 나중에 그 동전 주인을 상대로 소송 걸던가 해라.”


“….”

아라한은 동전을 꽉 쥐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곧 표정을 풀고 정신을 가다듬은 뒤 허설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허설 양, 제가 부재중인 동안 천의 양과 함께 대원들을 잘 관리해주세요.”

“수장님?! 그, 그게 무슨?”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원만하게 해결하고 금방 나올 테니까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으세요.”


수사관  명이 양쪽에서 아라한의 팔을 잡고 그녀를 연행했다. 허설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곤룡회 대원들이 술렁거리며 몰려왔다.

“수장님…? 수장님!!”

“수장님을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당장 그  놓지 못해?!”


곤룡회 대원들이 큰 목소리로 반발하며 거세게 저항했지만 아라한이 제지하자 어쩔  없이 길을 터줄 수밖에 없었다. 잠잠히 사태를 지켜보던 천의가 웅성거리는 대원들을 각자의 숙소로 해산시킨 뒤 실의에 빠져있는 허설을 끌고 돌아갔다. 허설은 수사관에게 잡힌  멀어져가는 아라한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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