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1-4. 체스보드 (9)
국제교류 학관은 장소가 장소인 만큼 일반 학생이나 교직원의 발길이 여간해선 닿지 않는 곳이다. 에반 플루토가 국제교류 학관에 가는 길부터 시작해서 아라한의 집무실에 도착하기 까지 얼마나 많은 유학생들이 경계 어린 시선을 보냈는지 다 세지도 못한다.
집무실의 응접 테이블에 앉아있는 에반에게 허설이 차를 내어왔다. 무표정한 얼굴로 에반을 슬쩍 흘겨보는 눈길에서 그를 의심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에반은 찻잔을 스윽 밀어서 테이블 한쪽으로 치웠다.
"이번에도 허설 양이 기껏 준비한 차를 외로이 식어버리게 하시는군요. 혹여라도 그녀가 차에다 무슨 짓을 했을까봐 그러시나요? 그럴 리는 없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죠."
"너 이름 없잖아."
"하하, 여전히 재밌는 분이시네요."
촤르륵! 아라한이 부채를 접어서 허리 뒤춤으로 감추듯 내리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다가왔다. 에반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녀의 적안이 그를 응시했다. 허설을 비롯해서 곤룡회의 대원들은 모두 의심과 경계의 눈으로 에반을 봤지만, 아라한의 적안에는 그러한 경계심이 담겨있지 않았다.
"수고했어요, 허설 양. 저는 지도원 님과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이만 자리를 비워주세요."
"....."
"허설 양?"
"이런 말씀 드리기 외람되지만... 이 자를 수장님과 둘이 남겨두기에는 위험합니다. 수장님 곁을 지키게 해주십시오."
"걱정하지 마셔요, 허설 양. 지도원 님은 저희 같은 애들 상대로 적의를 가질 만큼 유치한 분이 아니니까요. 잠시 물러나 계시겠어요?"
"....."
허설이 결국 마지못해 집무실을 나갔다. 미닫이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허설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에반을 노려봤다. 허설이 나가고 나자 에반과 둘이서 남은 아라한이 느긋한 목소리로 화제를 던졌다.
"지도원 님께서 먼저 저를 찾아오실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지금은 학관에 유학생들이 많이 모여있을 시간대인데. 여기까지 혼자 오시는 동안 별 일 없으셨습니까? 혹여나 저희 쪽 사람들이 실례를 범하지는 않았는지요?"
"너의 바둑 선생이 교통 정리 해줘서 부딪힐 일 없었지."
"아, 천의 양이군요. 지도원 님도 언젠가 그녀와 한 수 둬보면 어떻겠습니까? 약소한 성의를 보이며 대국을 청하면 분명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저로써는 꼭 관전해보고 싶군요."
아라한은 에반이 마시지 않고 밀어놓은 찻잔을 집어들고 홀짝 혀를 축였다.
"역시 허설 양이 내어오는 차는 한결 같아요. 동방에 대해 잘 아신다면 다도에 담긴 철학도 이해하고 계시겠죠? 이 잔에 담긴 향기는 곧 허설 양의 마음이랍니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고 그냥 가시는 지도원 님이 안 됐습니다."
"상황이 긴박했다는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오염생물을 풀어놓는 그런 미친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마."
"으음? 여전히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시네요. 우리 사이가 좀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저 혼자만의 착각이였나요?"
"네가 싸움을 건 그 이리들은 너하고 곤룡회 애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였다. 그럼에도 너는 주사위를 던졌지. 내가 널 도와주러 개입할 것이라는 믿음에 목숨까지 걸고 말이야. 네 모험수에 얼마나 많은 애들이 위험에 처했는지 알기나 해?"
"지도원 님, 제 믿음은 결코 가볍지 않아요. 제가 저 스스로를 위험에 빠지게 할 만한 수를 둬가며 누군가를 믿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단 말이죠. 그리고 역시나 지도원 님은 제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셨어요. 저는 지금 기분이 매우 좋답니다.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다음부터는 좀 더 솔직해지겠다고 약속 했었죠?"
아라한은 접힌 부채를 테이블 한 구석에 놓고 생글거리는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표정, 눈짓, 몸짓, 목소리, 말을 전부 진심이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좀 더 솔직해졌다 해도 뱀이 허물을 한 겹 벗어봤자 무늬가 달라지거나 독니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유리아 녀석을 비롯해서 너 때문에 큰일날 뻔했던 애들 기억하냐? 배당금 나눠 먹을 거 아니면 네 목숨만 베팅할 것이지 여러 사람 말려들게 하고 말이야."
"전 그런 적 없는 걸요? 그 자리에 저와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의 강요도 없이 모두 자기가 선택해서 발을 들였어요. 위험하다는 걸 몰랐을 리도 없고요."
"말하는 방식이 내가 정말 싫어하는 누군가를 닮았네."
에반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위험천만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너는 제국과 학원의 마법 연구에 감춰진 비공개적인 프로젝트가 있다는 걸 알아냈지. 엄청난 성과다. 게다가 백화 상회 내에서도 극비인 유리아 릴리스의 비밀을 쥐기까지. 여차하면 학생회장인 유리아의 이미지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도 있겠네, 그렇지?"
"글쎄요. 저희의 주장을 제국인 학생들이 진지하게 들어주겠어요?"
"뭐하러 네가 직접 입 아프게 나서? 로제 녀석에게 슬쩍 찔러주면 전문가가 알아서 판 벌려줄 텐데."
"전 이리들의 표적이 된 릴리스 양을 총탄도 맞서가며 도왔어요. 칭찬을 들을 생각으로 앉았는데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다니 섭섭해지려고 하네요. 그보다도 이런 얘기는 재미 없어요. 달리 할 말 없으신가요?"
"난 너한테 조심하라는 말을 하러 왔다."
"조심...하라니요? 무얼 말이죠?"
"과감하게 판을 깔고, 치밀하게 수를 쓴 건 대단하지만 말이야... 네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막판에 끼어들었거든?"
에반이 테이블 위에 갈색 종이봉투를 올려놓고 아라한 쪽으로 밀어보냈다. 그러고는 내용물을 확인해 보라는 눈짓을 했다. 아라한이 봉투를 뜯어서 안에 든 서류를 꺼내봤다.
"아그루스어 읽을 줄은 알지? 어려운 내용의 원서인데 독해력이 되려나?"
"곤룡회의 수장을 물로 보시면 곤란합니다."
서류는 수사 당국에서 작성 된 범죄 수사 경과 보고서였다. 루나칼립스 학원 내 총기 난사 사건, 누르워 뒷골목에 출현한 오염생물, 그리고 외곽에서 발견된 카일의 시신. 일련의 사건들의 연관성을 짚어내기 위한 수사의 결과가 정리되어 있었다.
"뒷골목 사람들이 수사관들을 두려워하는 건 사실이고, 곤룡회 입장에서도 수사관들과는 되도록 마주칠 일 없도록 하고 싶지만 이 정도야 이미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도 뒷골목에 찾아온 수사관들과 잘 해결 봐서 돌려보낸 적도 몇 번 있고, 이번 일 역시 충분히..."
"C-I-14."
"네...?"
"C-I-14."
에반이 일련번호를 불렀지만 아라한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카일이라고 했었나? 외곽에서 죽은 그 이리. 킬링 이터에게 잡아먹혀 죽었어."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그나저나 킬링 이터라니 안타까울 정도로 멋없는 작명이네요. 제가 악당인데 그런 별명이 세간에 퍼진다면 흑역사가 더 늘기 전에 악당 그만두고 전향할 겁니다."
"킬링 이터는 수사 당국에서 지정한 일그러진 별이다. 원래 출몰지인 그롬과는 한참 떨어진 이곳에서 3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지라 지금 북부 지역 수사 당국에 비상이 걸렸어. 그런 놈이 엮였으니 이제 네가 만나게 될 수사관들은 지금까지 겪어본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경할 거다. 일그러진 별이 관련된 사안인 만큼 치안관이 직접 나설 가능성도 충분하지."
치안관이라는 말에 아라한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녀는 여전히 생글맞은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있었지만 그런 포커 페이스로 에반의 눈썰미를 속일 수는 없었다. 에반은 아라한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한 마디 묵직하게 던졌다.
"판 꼬였어."
"....."
아라한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빙긋 미소를 지키고 있다가 테이블에 올려뒀던 자신의 부채를 다시 집어들었다. 촤르륵! 그녀는 부채를 펼쳐 자신의 얼굴을 살포시 가렸다. 미소를 싹 거둔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볼 수 없었다.
"전 보기보다 여리답니다. 겁주러 오신 거라면 이쯤에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미리 못 박아 말해두는데 이번에는 내가 어떻게 못 도와준다. 지도원이 치안관을 상대로 깽판 쳤다가는 학원이 어떻게 될지야 뭐 알지?"
"...."
"반대로 곤룡회가 치안관을 상대로 깽판 쳤다가는... 그날부로 학원 내에서의 곤룡회 입지는 바로 끝장이야. 그게 아니라면 치안관 손에 물리적으로 끝장나던가 둘 중에 하나겠지."
"통쾌하신가요? 제가 곤경에 처하게 되어서."
"내가 왜? 그럴 이유가 뭐 있다고?"
"그게 아니라면 절 찾아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저의가 무엇이죠?"
스륵. 아라한은 바늘을 하나 꺼내더니 자신의 어깨와 뒷목이 이어지는 부위의 혈자리에 침을 놓았다. 그리고는 후우... 심호흡인지 한숨인지 모를 깊은 날숨소리를 한 번 냈다. 에반이 그녀에게 말했다.
"동방의 방식이나 곤룡회의 방식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때도 분명 존재한다. 그럴 때 다른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도와줄만한 사람을 곁에 두는 게 좋을 거다."
에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라한은 생각에 빠져서 에반을 배웅해 줄 겨를도 없는지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있었다. 에반은 그녀에게 넌지시 말했다.
"네 주변 사람들을 네가 파악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친구가 될 수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해 봐. 삶이란 건 네가 이겨야만 하는 대국 같은 게 아니야. 너 스스로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적과 수싸움 하는데에 사로잡혀 있으면 넌 언제까지고 네 마음속 그 비좁은 바둑판 안에 갇혀 살겠지."
에반이 아라한을 보며 말했지만 그녀는 보기 드물게 상대방과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에반은 식어버린 찻잔과 말이 없는 아라한을 뒤로 하고 집무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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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당국의 수사관들이 오늘도 여전히 제국의 치안을 걸고 분주하게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제국 영토 보호, 민생 안전 보장, 치안 질서 유지. 이런 주요 역할은 기사와도 일치하지만, 기사와 수사관은 직무의 성격이 천지 차이로 대조된다. 기사들은 귀족들과 주종 관계를 맺어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고, 부자들을 비호하여 물자 후원을 받지만, 수사관들은 상류층을 주요 타겟으로 겨냥하여 권력 유착형 범죄와 사회적 부조리에 노출되기 쉬운 서민들을 보호한다.
본디 아그루스 제국은 철저한 위계 신분을 핵심 질서로 여기는 수직 사회다. 그런 위계 사회에서 상류층을, 심지어 귀족을 적으로 둔다는 게 상상이 안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사관들은 황제와 상급 수사관 외에 그 누구에게도 복종해선 안 되는 이른바 <특수 계급으로써의 위계 이탈 고립 의무>를 부여 받았다. 이러한 의무를 지키기 위해 수사관들은 그 어떤 후견인이나 비호 세력도 두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힘으로 지배계층과 맞서며 살아가다 보니 그 팔자가 험난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제국의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여 서민들을 지킬 유일한 보루인 수사관 계급은 황제의 칙령(勅令)과 형법으로 그 존재 및 활동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보장받는다. 그렇기에 아무리 이들이 눈엣가시더라도 귀족들조차 이들에게 직접적인 제재를 가하지 못한다. 그러니 귀족이나 부자들과의 유착 관계 때문에 기사들이 암묵적으로 잡지 않는 이리들을 수사관들은 일말의 타협도 묵인도 없이 잡아버린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이리와 엮이기 쉬운 뒷골목의 주민들도 수사관이 나타나면 거처를 잃을 불안에 떨기 마련이다.
“호민경(護民卿)님께서 오셨습니다.”
수사관 하나가 수사 당국으로 들어오며 고참 수사관의 도착 소식을 알렸다. 그러자 분주히 업무를 보고 있던 수사관들이 자리에 일어나서 부동 자세로 섰다. 이윽고 붉은 계급장이 달린 고참 수사관이 안으로 들어오자 모든 수사관들이 한 목소리로 경례했다.
“제국에 영광, 황제께…”
“됐으니까 하던 일들 마저 해.”
호민경 계급의 고참 수사관은 경례를 무시하고 지나갔다. 수사관들은 자리에 앉아 업무를 재개했다. 고참 수사관이 집무실에 들어가자 수사관 두 명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고참 수사관은 집무실에 앉자마자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후우….. 나도 체력이 예전 같지가 않아. 이스티아에서 칼질 할 때 보다 지금이 더 힘든 건 업무량 차이 때문일까, 내가 나이가 든 걸까?”
“마실 걸 준비해 드릴까요?”
“커피로 부탁하지.”
“네, 블랙이죠?”
“시럽 있나? 짜증이 나서 그런가 아까부터 자꾸 당이 떨어지네.”
“있습니다. 투샷이면 되겠습니까?”
고참 수사관은 부하가 내어온 커피를 찬찬히 한 모금 맛보고는 책상 위에 제출된 서류들을 검토했다.
“외곽의 식인 현장에서 발견된 카그루 생체 샘플의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유전자 정보가 일치합니다. 일그러진 별 지정번호 C-I-14 : <킬링 이터>가 맞습니다.”
“후우….”
고참 수사관은 한숨을 푸욱 쉬고는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그 무너진 종교 시설 쪽은?”
“제단, 성소의 일부, 우상 등을 파손된 형태로나마 확보했는데, 최근까지도 술식이 유지됐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파손된 조각을 맞춰서 교단을 상징하는 문양을 복원했습니다.”
고참 수사관은 서류에 첨부되어 있는 문양을 알아봤다.
“검진교…”
“네, 그렇습니다. <검은 진리 교단>입니다.”
“또라이 교단 놈들 결국 라쿠이르까지 기어들어왔구나. 그 오염생물은?”
“교단에서 밀교 행위를 위해 사육하던 것은 확실합니다만, 교단이 뒷골목에서 물러났는데 어떻게 술식이 유지되고, 다시 풀어놓을 수 있었는지가 현재 수사 단계에 있습니다.”
“그런 건 궁금하지 않아. 그렇게 큰 오염생물을 누가 처리했지?”
“그게… 현재 수사 단계에서는 불명입니다.”
“불명? 과학수사팀에 샘플 분석 의뢰 안 했어?”
“아닙니다! 현장에서 고사한 오염생물의 생체 샘플을 다수 확보해서 분석 의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수사팀에서 도저히 사인이 규명되지 않는다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다 고려해봐도 생명 활동 중단과 인과 관계가 설명이 안 된다며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마법에 당하기라도 한 것 같다는데…”
“아니 과학수사를 맡겨놨더니 그게 뭔 인문학적 헛소리야? 사람 은유적으로 빡치게 하네.”
"죄송합니다, 이런 적은 저도 처음이라...!"
"니가 죄송할 일이냐? 됐으니까 오염생물은 넘어가자."
호로록. 고참 수사관이 커피를 홀짝였다.
"그 인간은 언제쯤 도착한데?"
"치안관 님은 아직 라쿠이르에 입경하지 않으셨습니다. 연락 수단이 있는데 필요하십니까?"
"줘봐."
수사관은 자그만한 접이식 손거울을 건넸다. 특정 인물과의 장거리 통신을 위한 마도구였다. 거울을 펼친 고참 수사관이 신호가 잡히는 걸 확인했다. 거울을 귀에다 가져다 대니 쾌활하게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참 수사관은 거울 너머의 목소리와 교신을 시작했다.
"접니다. 지시대로 자료는 다 모아놨습니다. 네, 네. 샘플 대조 결과 일치합니다. 다만 문제가 한 가지.... 네? 뭐라고요? 하아! 제 이름은 자넷이 아니라 쟈네트라고 몇 번을 말씀 드립니까? 제가 당신 밑에서 일한 연차가 장교로 쳤으면 대령은 달았을 텐데 몇 달 얼굴 못 봤다고 그새 또 까먹으셨어요?"
고참 수사관이 거울로 교신 중인 자신의 상관에게 언성을 높이며 면박을 줬다.
"됐고요, 지금 어디쯤 오셨어요? 예...?! 그롬에서 출발하신 분이 왜 아직도 우므나티아인데요? 심야 열차를 탔다고요? 하아... 그럼 오늘 안에는 라쿠이르에 못 오시는 거잖아요? 아뇨, 됐어요 뭘 서두르셔요. 서두르신다고 뭐 열차가 빨라지기라도 합니까. 천천히 오셔요. 아주 천-천히. 아예 안 오신다면 더 좋고요. 선물은 무슨 선물이에요? 됐으니까 딴길로 새지 말고 곧장 오기나 하셔요."
부하 수사관들이 통신중인 고참의 눈치를 보며 새 커피를 슬쩍 그녀의 잔에 따라줬다.
"아무튼 도착하시는대로 이쪽 수사 당국에 와주셔요. 아 참, 그리고 전에 말씀 드렸던 그 과자가게 많은 번화가의 뒷골목과 관련된 일입니다만... 역시 그 동방인들도 움직인 정황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죠."
통신을 마친 고참 수사관 쟈네트가 거울을 덮고 부하들을 봤다.
"그 동방인들 자료는?"
"여기 학원 측에서 제공한 유학생 프로필을 스크랩해서 준비해 뒀습니다."
쟈네트는 부하가 건넨 자료를 넘겨서 살펴봤다.
"예전 누르워 뒷골목은 검은 진리 교단의 관리하에 있었지만, 지금은 루나칼립스 학원의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동방인 무리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들과 교단의 접점은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만, 현장에서 발견된 오염생물은 교단의 술식을 통해서만 불러낼 수 있습니다."
"누가 누가 더 미친 또라이인가 경쟁이라도 하나? 트로피에 오염생물 담아서?"
"여기 이 여학생이 동방인 무리의 지도자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부하가 서류를 몇 장 넘기자 아라한의 학생 등록 프로필이 나왔다. 자네트는 빨간색 볼펜을 집어들고 아라한의 사진에 동그라미를 쳤다.
"얘 신병을 확보한다. 영장은 치안관 님이 나중에 떼주신다고 했으니 절차 걱정하지 말고. 잡아다 털어보면 뭔가 나오겠지."
"알겠습니다."
수사관들이 고개를 꾸벅이고 물러났다. 자네트는 자신이 현장에 나갈 때 주로 소지하는 제압봉을 집어들었다. 접촉 부위의 운동량을 왜곡시키는 힘을 가진 아티팩트였다. 어떤 이리라도 자네트가 휘두른 제압봉에 한대라도 맞는 순간 반성할 기미를 보이게 된다.
한 방에 죽지 않았다는 전제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