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1-4. 체스보드 (8)
물거품이 피어오르자 물 속에 잠겨있던 알록달록한 고리들이 덩달아 튀어올랐다. 몇몇 고리들이 가라앉다가 뾰족한 바늘에 걸렸다.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물거품이 솟아나며 가라앉으려던 고리들을 다시 띄어올렸다. 그러나 각도와 완급을 잘못 조절해서 이미 뾰족한 바늘에 걸려있던 고리들까지 도로 빠져나왔다.
"햐 이거 쉽지 않아..."
에반 플루토는 자신의 숙소 침대에 쭉 뻗고 누워서 고리 걸기 장난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왼쪽 오른쪽에 달린 버튼으로 물 속의 고리를 밀어올려 바늘에 걸 수 있고, 모든 고리들을 각각의 색깔에 맞는 바늘에 걸면 이기는 놀이를 할 수 있는 장난감이였다.
누워서 고리 걸기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 에반을 침대 근처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라벤더 꽃잎을 띄어놓은 샘물 같은 벽안과 제국에서는 보기 드문 흑발이 이국적인 조합을 이루는 신비로운 인상의 여학생이었다.
"청문회는 잘 하고 왔냐?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에반이 시선은 여전히 고리 걸기 장난감에 향한채로 그 여학생에게 물었다. 유리아 릴리스는 대답을 하지 않고 말 없이 에반을 쳐다봤다. 사람이 왔으면 일어서서 제대로 상대하는 게 예의 아니냐고 따지기에는 지금의 그녀는 너무 피곤했다.
"나 지금 바쁘니까 용건만 짧게 얘기하고 끝내자고."
에반이 고리 걸기 장난감의 버튼을 꾹꾹 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 하고 싶다던 얘기가 뭐야?"
"우선 감사의 말부터 드려야겠죠."
"감사? 뭐를?"
"저를 구해준 거에 대해서죠. 당시의 상황은 현장에 있던 저와 아라한 양이 힘을 합쳐서 극복할만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당신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분명 저는 이 자리에 없었겠죠. 아라한 양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었을 테고요. 그 점에 대해 분명하게 감사의 뜻을 전해두고 싶습니다."
"뭐, 됐어. 지도원이니 NPC니 하는 입장을 떠나서 나는 그런 일은 지나치지 않아. 내가 너와 모르는 사이였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다. 오해는 하지 마라. 사람을 구하고 싶어서가 아니야. 별 시덥잖은 이유로 사람을 해치는 것들이 싫을 뿐이다."
"동기는 신경쓰지 않겠습니다. 결과만 두고 보면 당신에게 목숨을 빚졌으니 감사 드리는 겁니다."
"목숨을 빚졌다라... 총회장의 따님께서 이런 낡은 숙소 구석탱이의 못미더운 지도원에게 아주 큰 걸 빚지셨네. 청산도 환수도 빠르게 해결치는 게 백화 상회의 방식이지? 나한테 진 빚을 뭘 해서 어떻게 청산하려고?"
"....."
"마땅히 생각이 안 나면 내 방식대로 환수해가도 불만 없겠지?"
스윽. 고리 걸기 장난감에 집중하던 에반이 그 말을 하고서는 유리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에서는 평소에 학생들이나 교직원들 앞에서 보이던 익살스러움이나 의욕 없는 무기력함이 전혀 비쳐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학생을 앞에 세워두고 자신은 누워서 장난감이나 가지고 놀고 있는 못미더운 지도원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중견급 이리 한 둘 해치우는 것쯤이야 간단할 정도로 위험한 어른이라는 걸 유리아는 알고 있다.
"제게... 무얼 요구하실 생각이십니까?"
"요구하면 들어줄 거냐?"
"......일단 내용을 들어보겠습니다."
에반이 에효 하고 탄식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고리 걸기 장난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버튼을 뾱뾱 누르자 장난감의 물 속에서 거품이 보글보글 오르고 고리들이 튀어올랐다.
"표정 펴라, 그냥 질 나쁜 농담이니까. 앞으로는 사람 목숨 가지고 빚졌다는 말 하지마. 그저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운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네..."
"그건 이제 됐고, 감사 인사나 한 마디 하려고 굳이 둘이서만 보자고 한 건 아니잖아? 더 할 말 있지?"
"네. 그게.... 죄송합니다."
"또 뭐가?"
"그날 제과점에서 제가 보였던 태도는 부적절했습니다. 자기 기분에 휩쓸려 실례를 범한 점에 대해 사과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알았어. 받아줄게. 그래도 충분히 그럴만 했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딱히 기분 상하거나 그러진 않았어. 프릴 녀석도 이해했고.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런 거 가지고 빈정 상해서 뒤끝 부릴까봐? 설마 내가 그 정도로 유치하고 정신 연령 낮겠니? 으아니잇?! 이게 왜 빠지는 거야?! 사기 치지 말라고!"
뾱!뾱!뾱! 에반이 바늘에서 우르르 빠져나가 버린 고리들을 다시 집어넣기 위해 장난감의 버튼을 마구 연타했다.
"아무튼 인사치레는 이쯤 해두고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해."
"네. 어제 아라한 양의 집무실에 모였을 때 제안했던 동아리 창설 말입니다만... 에반 플루토 씨 당신이 참여해서 힘을 보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아 그러냐? 흐흠."
에반은 여전히 고리 걸기 장난감을 가지고 노느라 유리아를 신경 쓰지 않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유리아가 잠시 그를 지그시 보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반 플루토 씨. 아시겠지만 당신이 저에게 힘을 보태주시더라도 저는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보상이 없습니다. 사례금을 드렸다가는 청탁이고, 학생회의 재량으로 당신을 힘든 업무에서 제외시킨다면 월권이고, 백화 상회에 낙하산 탈 자리를 깔아둔다면 인사 비리죠. 원칙과 질서의 범위 내에서는 제가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리턴이 없습니다. 하지만... 무리한 요청이지만 저는 당신이 제게 힘을 보태주셨으면 합니다."
"나머지 두 녀석들이랑은 만나봤어?"
"나머지 둘이라면... 루에리아 양과 아라한 양이요?"
"그래. 그때 이후로 아직 따로 안 만나 본 거야?"
"네... 3일 동안 생각해 보겠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혼자 생각하게 내버려두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올 거면 오고 말 거면 말아라? 언제부터 백화 상회의 영업 전략이 이렇게 수동적이였나? 네가 아쉬운 입장이니까 네가 발품 팔아 찾아가서 설득하고 제안하고 딜하고 해야지."
"하지만 학생끼리 사적으로 거래를 담론하기에는..."
"또 원칙과 질서 얘기하려고? 너 그 포지션 고집하면서 탈 없이 임기 마치려면 줄타기도 할 줄 알아야 해. 교칙으로 그어놓은 선 안에서는 밑도 끝도 없이 과감해져야 한다고."
"잘 모르겠습니다..."
"뭐 그건 내가 이러쿵저러쿵 알려줘서 될 영역은 아니니 네가 차차 깨달아 나가야지. 아무튼, 프릴 녀석은 이번 총기 난사 사건이니 뒷골목 사태니 일련의 사건과 가장 관련이 없는 인물이야. 너도 알지? 그때 예배당에 있었다고 해서 엮기에는 연결 고리가 불충분하다고."
"네, 알고 있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프릴 입장에서는 너의 그 약에 대한 걸 함구하고 가던 길 마저 가도 그만이야. 도서관에서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책이나 보려는 녀석인데, 그 녀석이 너의 위험천만한 계획에 동참하고 싶어질 만큼 솔깃한 제안을 할만한 게 있어?"
"루에리아 양을 움직이게 하는 건 오직 호기심과 탐구열 뿐입니다. 제가 만드려는 동아리가 그런 호기심과 탐구열을 채워줄 수 있을까요?"
"나한테 '있을까요?' 하고 물어볼 게 아니야. 너의 계획을 위해서는 프릴 그 녀석이 꼭 필요해. 너와 네 계획에 동참해줄 팀의 누구보다 든든한 방패가 되어줄 테니까."
"방패라고요?"
아담한 체구에 그 자그만한 손으로 단어장을 꼭 쥐고 다니는 프릴의 모습은 든든한 방패와는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았다.
"프릴이라면 요새와 같이 든든한 방패지."
"방패라면 무엇을 막아낸다는 거죠?"
"뭘 막긴. 자나깨나 네 생각 뿐인 로제 녀석을 벌써 잊었어?"
"아아..."
"귀족은 귀족의 논리로 상대해야 해. 메세지 보다는 메신저에 집중하는 족속들이니까. 네가 열 마디를 해야 납득할까 말까 한 걸, 프릴은 헛기침 한 번으로 설득시킬 수 있다."
조금 전의 청문회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꼼꼼한 사전 준비를 바탕으로 유리아를 밀어붙이려던 로제는 참관석에서 프릴이 난입한 순간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오늘 네가 청문회에서 무슨 질문을 들었는지는 대강 예상이 가거든? 학원 내 범죄 사건과의 연관 관계 의혹, 아라한과의 사적 유착 의혹, 지도원을 상대로 면학과 무관한 사적 관계 형성 의혹... 뭐 이런 거 물어봤겠지. 내 말 맞지?"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명목상 동아리를 개설하고 비공식적인 활동을 하다 보면 오늘 청문회에서 부정했던 것들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될 거야. 그러니 로제 같은 녀석들에게 틈을 안 내주려면 네게는 프릴 그 녀석이 있어야 한다. 귀족은 귀족으로 막아야 해. 10 가지 달변과 100 가지 재주 보다도 단 한 명의 귀족이 귀족을 상대하는 데에 효과적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 했습니다."
"뭐 그런 거 말고도 귀족 협력자 하나 있으면 편해지는 게 한둘이 아니잖아? 자, 그럼 프릴은 꼭 영입하는 쪽으로 하고, 다음은 아라한으로 넘어가 보자."
"솔직히 저는 그녀가 어째서 위험을 무릅쓰고 저를 도와준 건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설마 네가 좋아서 그랬겠어? 그게 아니면 갑자기 착한 일이 하고 싶어졌다던가? 그게 아니지. 얻을 게 있으니 판을 벌이고 베팅을 한 거 아니겠어? 뭐 확실히 그 녀석이 여러 사람 목숨 베팅해 놓고 다소 과감한 모험수를 던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녀석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그래서 그녀가 무엇을 얻었다는 거죠?"
"네 비밀을 알았지. 학생회장의 절대로 말 못할 비밀, 그리고 이 학원에 얽힌 제국의 뒷사정. 충분히 기대에 미칠 만큼 후한 정보를 얻었잖아?"
"아라한 양이 그걸 노리고 이리들에게 싸움을 걸었다고요?"
"학원 안을 버젓이 어슬렁거리는 이리를 발견한 시점에서 그 녀석에게는 촉이 온 거야. 저 이리들을 치면 학생 아니면 지도원 중 누군가의 그림자를 들여다 볼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이리와 맞선다는 위험을 감수했고, 그 결과 너의 그림자를 들여다 보게 됐어. 무서운 녀석이야, 안 그래?"
"....."
"이렇게 된 이상 너 자신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한 그 녀석을 네 것으로 해야만 한다. 좋건 싫건 다른 선택은 없어. 사실 그거와 별개로 한을 포섭한다면 얻게 되는 게 많다는 거 역시 부정 못 할 사실이지. 곤룡회는 유용한 전력이니까."
"그렇죠...."
"찜찜한 표정이구나. 이해해. 한이나 곤룡회는 네가 지키고 싶어하는 원칙과 질서에 연연하지 않겠지. 한이 너에게 가담한다 하더라도 그 뒤로 신경써야 할 일이 많겠지."
"그녀가 제 계획에 가담할까요?"
"명분이 있어야지. 한은 학원이 어떻게 되건 말건 신경 쓸 이유가 없어. 곤룡회가 우선이니까. 그러니 널 도와주는 게 결과적으로 곤룡회에게 이득이 된다는 걸 증명해야만 한다."
"제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죠?"
"반대로 생각해보자. 곤룡회 녀석들이 얻고 싶어하는 것이 뭐라고 생각해?"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도무지 파악할 수 없습니다."
"안전. 안전이다."
"안전이요...?"
"그래. 안전. 어린 나이에 증오하는 적들의 터전 한복판에 던져진 그 불안감. 헤아려지지 않을 만큼 머나먼 곳에 떨어진 고향땅, 가족품. 뒷골목에 똘똘 뭉친 그들의 유대에는 안전한 터전과 가족에 대한 욕구가 기저에 있다."
"생각도 못했어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너 나한테 말했잖아. 여기 있는 애들 모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직 고등학생일 뿐이라고. 분명 열심히 아닌 척 하던 약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있을 거라고. 그건 동방 애들도 마찬가지야."
"그 말이 맞네요. 그러면 제가 어떻게 그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까요?"
"너는 중등부니, 초등부니? 내가 이 정도로 알려줬으면 답을 내리는 것 정도는 스스로 해야지."
"아, 아... 네..."
유리아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려운 문제였는지 고민이 깊어보였다. 에반은 장난감 속 고리들을 촤라락 바늘에 걸으며 말했다.
"설득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마냥 무리는 아니라고. 일단 내가 참여할 거라고 전달해두면 두 사람 다 영입하기 수월해질 거다. 그도 그럴 게 프릴도, 한도 둘 다 나에게 흥미를 보이고 있으니까. 프릴은 내가 가진 아민에 관한 지식에 관심이 있고, 한은 나를 통해 곤룡회 식구들의 안전과 입지를 확보하려 하니까."
에반의 말을 들은 유리아의 눈에 번뜩하고 초점이 들어왔다.
"에반 플루토 씨? 당신, 제게 힘을 보태주실 건가요?"
"생각 없었으면 처음부터 이렇게 주절주절 떠들지도 않았지. 그리고 네가 부탁했잖아? 너희를 외면하지 말고 지켜봐 달라고."
"....."
"아아 어색해지니까 그런 얼굴로 말 없이 쳐다보지 말라고. 다 됐으면 이제 나가 봐. 약속한 기한까지는 이틀 남았으니 서두를 게 많잖아?"
"네..."
유리아는 에반에게 꾸벅 인사하고 뒤돌아서 그의 숙소에서 나가려 했다. 그런 유리아의 뒷모습에 대고 에반이 한 마디 했다.
"거기 냉장고 열어보면 선물 하나 넣어뒀다. 챙겨 가."
"네?"
유리아가 에반의 말을 듣고 숙소 한 구석의 작은 냉장고를 열어보니 매점에서 파는 딸기우유 하나가 안에 있었다.
"이거..."
"너 그거 마시고 싶다며? 동방 애들이 쓸어담아서 재고가 남아나질 않더라. 그래도 내가 수급처를 하나 알아뒀지."
유리아는 냉장고에서 딸기우유를 꺼냈다.
"감사히 받을게요. 오늘은 여러모로 고마웠습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심경은 이해하지만 무리 하지는 마. 가봐."
꾸벅. 유리아는 에반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