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1-4. 체스보드 (6)
프릴은 유리아가 꺼낸 그 약을 알아보았다. 자세히 확인할 생각으로 약에 손을 뻗자 유리아가 그 손을 뿌리쳐 만류했다.
"손대지 마세요. 밀봉을 풀었다가는 미세한 분말이 호흡기로 들어가서 위험할 수 있습니다."
"으...읏?! 미안해요..."
프릴이 움츠러들자 유리아는 자신이 꽉 붙잡은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루에리아 양. 이 약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조금은요. 아그루스 국립대학의 라비나 도서관에서 이명과 관련된 연구서적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에서 간략하게 언급하던 게 기억나요."
"라비나 도서관이라... 참 마음에 안 드는 네이밍 센스인데?"
에반이 맥락과는 관계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루에리아 양. 당신이 알고 있는 걸 저희에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네!"
아라한이 부탁하자 프릴은 잠시 눈을 감고 곰곰히 생각하는 자세를 취했다. 책장에서 필요한 책을 찾는 양 기억을 더듬던 프릴은 생각이 정리가 다 되자 설명을 시작했다.
"아민 제국의 탐사에 있어서 가장 큰 난관은 1만 1천 미터라는 까마득한 수심도 있겠지만, 그런 지리적인 요소 외에도 이명 또한 지금 마법사들이 극복해야할 과제 중 하나에요. 이런 이명을 억제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 가운데 하나는 화학적 요법, 즉 이명 억제 효과가 있는 약을 개발해서 투약하는 것이죠. 뎀피돈은 그 연구의 산물 중 가장 성공 가능성에 근접한 약물로 평가 받아요."
"그 말만 들으면 유익한 약 같군요. 허나 유리아 양이 이토록 꼭꼭 숨기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겠죠?"
"...."
프릴은 불편한 표정으로 침묵하는 유리아의 눈치를 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명이라는 것은 우리의 핵심적인 신체기관인 마력 회랑, 그 중에서도 특히 뇌회랑에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회랑 순환장애에요. 그러니 이명을 치료하는 약물 역시 약효가 뇌로 향하는 향정신성 약물일 수 밖에 없죠. 게다가 약물 자체만으로도 마력을 띄우는 성질이 있어서 철저한 정제과정을 거쳐서 정량껏 투약하지 않으면 몸을 망가뜨려요."
"즉, 뇌에 특정한 마력이 작용하게끔 하는 약물이라는 뜻 아닙니까? 위험한 정도의 물건이 아니였군요."
"이렇게 신체적인 리스크가 크지만 이명 억제라는 효과는 혹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모든 아티팩트와 마법은 이명을 일으켜 술자의 회랑을 피로하게 만드는데, 그런 피로를 억제한다면 더 강한 마법을 시도할 수도, 더 오래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정작 뎀피돈 소지자 중 절대다수는 마법을 쓸 줄 모르는 일반인이에요. 그 이유인즉슨, 중독물질을 만들 때 뎀피돈을 베이스로 해서 섞으면 환각 작용의 유지 시간을 늘릴 수 있어서라네요. 이런 불순한 목적으로 거래가 성행하다보니 제국에서는 뎀피돈을 금지 약물로 지정했어요."
"쉽게 말해서 마약이라는 것이군요."
"....."
유리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제국에서 지정한 금지 약물이 왜 당신 품에 있는 거죠? 유리아 양."
"왜 있겠습니까? 복약을 위해 가지고 있었죠."
유리아는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그리고는 프릴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루에리아 양. 뎀피돈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혹시 기억하시나요?"
"그게 아마... 오랫동안 꾸준히 복용하게 될 경우 뇌회랑의 현저한 만성적 정체로 인해 감정이 둔해져서 강한 충격을 받지 않는 이상 감정의 변화를 잘 보이지 않는다. 불면증이 심해진다. 무기력해진다. 어.... 어?? 어라??"
"앞부분을 못 들으면 약물의 부작용이 아니라 유리아 양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군요. 아무래도 꽤나 오랫동한 꾸준히 복용하신 모양입니다."
아라한의 말투가 점점 공격성을 띄기 시작했다.
"제가 알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백화 상회는 제약 사업에도 손을 대고 있다죠? 마법 지식과 첨단 기술을 필요로 하는 약을 만들 자본력이 있는 제약 회사, 이런 위험한 물건을 만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학생의 손에 까지 닿게 하고도 뒤탈이 나지 않는 제약 회사, 제국의 금지사항을 무시할 배짱이 있는 제약 회사. 그런 제약 회사가 백화 상회 외에 더 있을까요?"
아라한이 유리아를 압박했다.
"네. 이 약을 만든 곳도, 제게 조달해주는 곳도 다 백화 상회입니다."
"허..."
아라한이 깊게 탄식했다. 감정을 추스리기 위한 것인지 그녀는 탁상 한 귀퉁이의 통에서 침 한 자루를 더 꺼내더니 어깨와 목이 이어지는 곳에 꽂아놓았다.
"대륙 전역에 청부(清富)의 흰꽃을 피웠다는 백화 상회가 마약 밀매를 하고 있다니. 모두에게 동경받는 학생회장이 마약 소지자라니.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지켜야 할 도리를 져버리고도 당당하게 단상 위에 올라설 수 있는 겁니까? 당신히 평소에 줄기차게 제창하던 원칙과 질서는 어디로 간 것이죠?"
아라한은 진심으로 유리아에게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릴 역시 말을 잇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러는 가운데 유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를 변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도리를 져버렸다 해도 부정할 수 없고, 제 명예가 실추되어도 항변하지 못하겠죠."
"학원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모두는 아니고 일부 교직원과 이사장 라인의 몇몇 높으신 분들만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누가 알고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학원에서도 알고도 묵인했다고요?!"
"네. 애초에 제가 기숙사에서 유일하게 방을 혼자 쓰는 특혜를 받는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여러분은 매일 밤마다 룸메이트가 마약 주사를 정맥에 꽂는 걸 보고도 신경쓰지 않고 공부를 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전대미문이군요!! 아무리 경제적인 영향력이 어마어마한 집안의 후계자라고 해도 학원 전체가 마약 소지를 두둔해주다니!! 칭송 받는 배움터, 마법사 양성의 성지, 그 대단한 루나칼립스의 이름 뒤의 실체가 이런 것입니까?"
"이 학원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아그루스 제국과 고고학회가 얽혀있죠."
"뭐라고요?"
"!!!!"
아그루스 고고학회가 관여되어 있다는 말에 프릴은 머리 위에 느낌표가 솟아나는 듯 했다. 아라한 역시 믿기 어려운 반응인 건 매한가지였다.
"제국과 고고학회가 얽혀있다니, 그게 무슨 의미죠?"
의구심을 감추질 못하고 물어보는 프릴에게 유리아의 시선이 향했다.
"저번에 교실에서 저와 루에리아 양이 아민 제국에 대한 탐구는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반론을 주고 받았었죠. 기억하시나요?"
"네. 분명 제 공책의 녹사르 스케치를 보고는 호기심을 접는 게 좋을 거라는 식으로 말씀하셨죠."
"기억하시는군요. 그때 루에리아 양은 이명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는 지금도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랬었죠. 그 얘기는 갑자기 왜... 어? 아앗!!"
'이명 현상을 극복할 방법은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귀 기울여선 안 되는 음성을 듣고 미쳐버린 연구원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루에리아 양. 당신은 정말로 위험한 이명을 겪어본 적이 없습니다. 통제 가능한 범위 안의 이명만 겪어봤기에 그걸 '연구' 한다는 게 얼마나 정신나간 짓인지 모를 겁니다.'
프릴이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일련의 논리들과 기시감이 불현듯 앞뒤가 맞아 떨어진 듯했다. 두 눈이 번쩍 뜨인 프릴이 설마하는 얼굴로 유리아를 쳐다봤다. 유리아는 내려놓았던 뎀피돈을 다시 들어올렸다.
"이명 극복을 위한 연구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 제 악몽도 끝날 날이 밝아오지 않겠죠."
뎀피돈을 쥔 유리아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가있었다. 그녀는 치가 떨리는 얼굴로 자신의 약을 노려봤다. 그 표정을 본 아라한도 프릴이 깨달은 것을 알아차렸다.
"임상실험...?"
아라한의 말에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말을 덧붙였다.
"왜 아민 제국 유적지에 가까이 가면 사람들이 미치는 걸까? 왜 유물을 어설프게 다루면 정신이 망가지는 걸까? 왜 마법에 오래 정진한 사람들은 인격 마저 변하는 걸까? 오랫동안 인류가 던져왔던 의문들이죠. 이에 대해서는 고대인들의 저주다, 밝혀지지 않은 주술이다 등등 여러 가설들이 난무했지만 제가 겪는 증상을 조사하다 보니 그 윤곽이 드러났습니다."
"유리아 양은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남들보다도 이명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아마 돌아가신 어머니의 체질을 물려받은 듯 합니다."
유리아는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약을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는 약을 다시 내려놓았다.
"남들의 몇 배는 더 예민하게 이명에 반응하는 체질 때문에 뎀피돈의 약효를 더 가시적으로 확인하기에는 저만한 실험체도 없죠. 아그루스 제국은 아민 제국으로 나아가길 원해요. 그러기 위해선 이명 극복은 필수 불가결적이죠. 그러니 이런 짓도 망설임 없이 저지르는 겁니다."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유리아였지만 지금 만큼은 짙은 분노의 색을 띄고 있었다.
"제국은 백화 상회가 뎀피돈을 제조하는 것을 묵인하고, 루나칼립스 학원은 뎀피돈을 복용한 제 마법의 양상을 틈틈히 관찰하여 고고학회에 보고하죠. 이렇게 모두가 이명에 대한 연구 데이터를 챙길 수 있으니 이익이네요. 딱 한 사람, 부작용으로 신음하는 실험체인 저를 제외하고 말이죠."
유리아가 잠시 이를 악 물더니 이윽고 공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이명으로 고통 받는 절 구하기 위한 아버지의 노력이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아버지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지만.... 모르겠습니다 이젠."
유리아가 말을 마치자 숙연한 공기가 방안을 맴돌았다. 유리아를 추궁하던 아라한도 내막을 알게 되자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몰랐고, 프릴 역시 이명에 대한 연구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비윤리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것 하나. 에반 플루토가 조용해도 너무도 조용하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는 역시 진지하게 경청해주는 것인가?
라고 생각했는데 아까만 해도 유리아의 앞에 있던 뎀피돈이 없어져있었다. 유리아, 프릴, 아라한이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에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음흠흠. 쩝쩝."
에반은 뎀피돈의 밀봉을 까서는 약물을 검지손가락으로 찍어서 혀끝에 대고 있었다. 혀 점막에 골고루 약이 퍼지도록 쩝쩝 소리까지 내면서 맛을 음미했다.
"다, 다, 당신... 지금... 뭐,뭐 하시는 겁니까?"
유리아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에반은 불량식품을 먹는 초등학생 마냥 태연한 얼굴로 약을 삼키고는 봉투의 밀봉을 다시 닫았다.
"이거. 암시장에 돌아다니는 오리지널이랑은 맛이 상당히 다르네."
"네? 그게 무슨 의미죠?"
한바탕 에반을 질책하려던 참이던 유리아가 그 말에 섬칫 놀라서 굳었다.
"내가 뎀피돈을 처음 보는 건 아냐. 오히려 지겨울 정도로 봤지. 여기 오기 전에 마약 브로커 잡는 일을 꽤 자주 했던지라 날려먹은 암시장이 한 둘이 아니거든. 그러다 보니 약이 진퉁인지, 짝퉁인지, 믹스인지도 맛만 보면 알 지경이 됐어."
"그럼 좀 전에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이죠? 오리지널이랑 맛이 다르다는 건 제가 가진 약이 진짜가 아니라는 뜻인가요?"
"아냐.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으려나? 내가 말한 오리지널이라는 말은 바꿔 말하면 프로토타입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네가 가진 그 뎀피돈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이것 저것 업그레이드를 거친 거야. 업그레이드를 위해 필요한 데이터는 좀 전에 네가 말한대로 이 학원에서만 나왔겠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한정판' 이라는 거다."
"한정판?"
"그래, 한정판. 수집가들이 침 질질 흘리고 달려들게 만드는 단어지. 여길 쳐들어온 그 모질이들이 굳이 약 한 봉다리 털겠다고 유리아를 노린 이유는 유리아가 가진 게 한정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겠지."
에반 플루토가 물휴지로 약을 찍었던 검지손가락을 닦고서는 박수를 한 번 짝하고 쳤다.
"지금까지 너희가 주고 받았던 대화를 듣다보니 뭔가 계속 걸리는 게 있었는데 방금 약을 맛 보니 그게 확실해졌다. 그래서 나도 생각을 좀 해봤지."
"거짓말 마세요. 당신이 생각이라는 걸 한다니."
"아 좀 들어봐!! 나도 한다면 하는 NPC라고! 게다가 이런 분야가 내 특기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말씀해주세요."
흠흠! 에반은 헛기침을 하고선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때 유리아를 찾느라 학원과 뒷골목을 들쑤시던 그 모질이 이리들 말인데. 걔들 야생 아니야."
에반이 말했지만 세 학생들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였다.
"뭐가 아니라고요?"
"야생이 아니라고. 목줄이 걸려있어. 독립적인 조직이 아니라 어느 높으신 누군가가 어용으로 길들인 사냥개라는 뜻이다. '지령' 이나 '오더' 같은 단어에 민감한 이리들은 대개 이런 부류의 조직이야. 이번에 쳐들어온 이리들의 경우에는 먹이를 주는 주인이 꽤 높은 사람인데다가 학원 쪽 인물과도 연결이 되어있다고 봐."
"합당한 분석이군요. 이상할 정도로 무방비하게 이리들의 출입을 허용한 학원, 특급 기밀인 뎀피돈에 대한 정보의 누설, 위원회를 급조해서 무마하려던 학원 측의 움직임. 일련의 정보들을 종합하면 학원 내부에도 권력형 범죄 세력과 내통하는 인물이 심어져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죠."
"그럴 리가 없어요! 뎀피돈에 대한 정보를 누설한 게 학원이 아니라 백화 상회쪽 인물일 가능성은요?"
프릴이 물었지만 에반은 고개를 저었다.
"알다시피 '그럴 리가 없어!' 보다도 더 확실하고 강한 부정이 '뭐하러 굳이?' 잖아. 백화 상회 내에서 유리아의 기밀을 알고 있을 정도면 유리아를 비롯한 회장 직계 라인, 그 중에서도 측근 중의 최측근인데 뭐하러 굳이 자기 라인의 기밀을 누설해서 자기 입지를 자기 손으로 뒤흔드는 짓거리를 하겠어? 정보의 대가로 무엇을 얻건 그것이 백화 상회의 코어 인사이드라는 입지보다도 큰 가치가 있을까?"
프릴은 아직 석연찮은 구석이 남아있는 표정이였다.
"혹여나 모종의 계기로 다른 라인에서 기밀을 입수하게 됐다면요?"
"이런 식으로 유리아에게 압박을 가해가며 활용할 이유가 없어. 백화 상회는 수십 개의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그룹들 밑에는 수십, 수백 개의 계열사들이 있지. 그런데 이렇게 많은 라인으로 밧줄처럼 엮어져 있는 백화 상회 중 한 라인이 회장 딸의 기밀 하나만 믿고 나머지 라인들을 상대로 내부 총질을 벌인다? 그것도 회장 직계 라인을 정면에서 저격하면서?"
"그런 엄두를 낼 만큼 백화 상회가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제가 회장의 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백화 상회는 뒷공작이나 폭로 정도로 타격을 입을만한 상회가 아닙니다."
"혹여나 저격질에 성공한들 분열 초래로 인한 경영 정체 및 인사 혼란 등의 막심한 손해는 고스란히 자기 몫으로 돌아올 텐데 뭐하러 굳이?"
에반이 어깨를 으쓱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승산도 없고, 리턴도 마이너스인데 리스크만 엄청난 짓을 뭐하러 굳이? 뭐가 아쉬워서?"
"자세히 생각할수록 뎀피돈의 기밀이 유출된 출처가 백화 상회일 가능성은 희박해지는군요. 그렇다면 용의 선상의 범위는 이곳 루나칼립스 학원으로 좁혀집니다."
"그럴 수가... 학생회장인 유리아 양 마저 위험에 처하게 할 정도라면 다른 학생들도 안심할 수 없겠네요."
프릴이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하자 에반이 거들었다.
"이 학원 학생들은 다들 뭔가 가진 거 있는 집안에서 온 애들이잖아? 학원의 목적이 무엇일 거 같아? 제국을 이끌 인재 양성? 신시대의 마법사 배양? 얼씨구. 대다수의 어른들은 그렇게 건전한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다 취해갈 것, 챙겨갈 것이 있어서 여기에 앉혀놓은 거야."
평소 같았으면 루나칼립스 학원을 모욕하지 말라고 한 소리 했을 유리아지만, 자신이 겪은 게 있으니 그의 말이 설득력을 얻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유리아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유리아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인원으로 동아리를 개설하고 싶습니다."
다소 생뚱맞은 발언이였기에 일동이 잠시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동아리? 갑자기 무슨 동아리를?"
"이 조합으로 할 만한 부활동이 뭐가 있죠?"
"표면적인 활동은 나중에 차차 생각하도록 하죠."
"표면적인 활동? 그럼 실질적인 활동은 따로 있다는 의미인가요?"
잠자코 있던 아라한이 무언가 눈치 챈 표정을 지었다.
"유리아 양. 설마 함께 교직원 중 불온한 세력과 결탁하는 내부자를 찾아내자는 겁니까?"
"바로 그겁니다. 저희 셋은 각자 서있는 자리가 다릅니다. 저는 학생회에 소속되어 있고, 프릴 양은 많은 학생들과 두루 친하고, 아라한 양은 유학생이라 아그루스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다른 각도에서 모은 정보라면 분명 모였을 때 큰 도움이 되겠죠."
"혹여나 내통하는 자를 찾아냈다 하더라도 학생 신분으로 교직원을 상대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이죠? 축출해내기라도 할 생각이십니까?"
"아라한 양. 당신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던 이들에게 제가 뭐라고 말했죠? 이곳에서 한 목숨이라도 앗아갔다가는 제 모든 걸 동원해 응징하겠다고 했습니다. 그거 시선을 끌려고 던진 빈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전 학생회와 다를 게 없어지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활동은 원칙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게 할 것이고, 결과는 질서의 회복으로 귀결시킬 겁니다. 루에리아 양. 당신 역시 배움의 터전이 더럽혀지는 걸 용납할 수 없으시죠?"
"넷?! 아... 아, 저는... 그..."
에반은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느긋히 세 사람을 관람하고 있었다.
"이야, 문제 있는 선생을 솎아내기 위해 모이는 학생들이라니. 굉장하구먼. 나중에 크게 될 녀석들이야."
"남일 보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에반 플루토 씨. 당신도 빠지면 안 돼죠."
"뭐?! 난 왜?!!"
"몰라서 그러십니까? 동아리가 개설되려면 교사나 지도원 한 사람이 담당 고문을 맡아야합니다."
"아 싫어!! 듣기만 해도 귀찮잖아!! 내가 고문이라니 차라리 날 고문하라고!"
"에반 플루토 씨, 좀 전에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학생들의 안전을 보호하고, 학원을 위협하는 것들을 배제하는 것이 본인의 역할이라고. 그렇다면 당신이 오히려 주도적으로 행동하셔야 하지 않나요?"
"으...으... 월급 만큼만 일하게 해줘. 그런 거 한다고 수당 찍히는 것도 아니잖아."
"당신의 특기 분야잖아요. 모두에게 능력을 입증할 기회입니다."
"흠....."
에반은 제대로 된 대답을 선뜻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프릴과 아라한도 마찬가지였다.
"알겠습니다. 다소 갑작스러운 제안을 무리하게 밀어붙였군요. 그만큼 지금의 저에게는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드리겠습니다.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3일."
아라한이 말했다.
"3일 정도 시간을 주시죠. 요양을 하는 동안 진지하게 고민해보도록 하죠."
"루에리아 양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 저도 일단은 생각해볼게요."
"좋습니다. 3일 뒤 정확히 이 시간에 학생회실을 비워두고 기다리겠습니다. 뜻이 있으시다면 저를 찾아와주세요. 그걸로 괜찮겠습니까?"
"네."
"그러죠."
프릴과 아라한이 대답했다. 유리아의 시선이 에반에게로 향했다. 애써 시선을 회피하려던 에반의 귓가에 유리아의 목소리가 파고들어왔다.
"에반 플루토 씨. 당신은 어떻게 할 거죠?"
에반은 뒷통수를 벅벅 긁으며 궁시렁댔다.
"아아 참.... 여기서 혼자 싫다하면 내가 뭐가 되겠냐."
남들 다 yes라고 할 때 홀로 no라고 할 용기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귀찮다는 얼굴을 한 에반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