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0화 〉1-4. 체스보드 (5) (30/88)


  • 〈 30화 〉1-4. 체스보드 (5)

    루나칼립스 학원 국제교류 학관. 곤룡회의 비밀스러운 공간 앞에 이질적인 손님 한 명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유리아 릴리스였다. 루나칼립스의 학생회장이라니 평소라면 이곳에 있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할 인물이였으나, 그런 그녀를 이곳으로 향하게 한 것은 곤룡회의 수장 아라한의 부름이였다.

    동방인 유학생회의 학관은 겉에서 봤을 때에는 그냥 평범한 건물이였다. 그러나 복도를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자 펼쳐지는 동양풍 인테리어의 향연이 마치 포탈을 잘못 넘어가는 바람에 동방땅에 불시착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유리아가 목재로 된 계단을 한 걸음씩 걸어 올라갔다. 그녀의 머리 위에 일렬로 쭉 늘어서 있는 종이 등불들이 그녀가 밑으로 지나갈 때 마다 차례차례 불을 밝혔다.

    이윽고 나온  복도에는 분재 화분들과 서예 작품들이 즐비해있었다. 동방의 문자를 읽을 줄 모르는 유리아였지만 힘있게 갈겨진 붓글씨에서 호연한 기개를 느낄 수 있었다. 공들여 다듬은 게 느껴지는 분재 화분들이 늘어선 복도는 작디 작은 정원이라 부르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짧은 감상을 마친 유리아는 복도 끝에 있는 방을 찾아가 미닫이문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유리아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방석에 걸터앉아 있는 아라한이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오시죠. 부상자의 몸이라 일어나서 영접하지 못하는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아무리 초대받은 몸이시지만 사생활 공간에 들어오실 때는 절차가 있지 않습니까?"

    "미안합니다. 종이로 된 미닫이문을 만져보는 건 처음이라 노크를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안 오더군요."

    유리아의 말에 아라한은 전혀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키득키득 웃었다. 평소에 늘 들고 다니면서 얼굴을 가리던 부채가 없어서 처음으로 웃느라 치켜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

    "그렇습니까? 먼저 오신 손님이랑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먼저 온 손님?"


    자신 외에도 이곳으로 초대를 받은 사람이 있다고? 유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

    아라한이 앉은 곳 맞은편에 익숙한 얼굴을 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자그만한 체구에,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앙증맞은 리본. 다소 자신감 없는 표정에 낯선 환경으로 움츠러들어 있는 자세.


    "루에리아 양?"

    "네...."

    프릴 루에리아가 방석에 앉아있었다. 좌식 문화는 익숙하지 않은 건지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  불편해보였다. 그녀는 저린 다리를 풀기 위해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며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루에리아 양이 이곳에 있다니 의아한 일이군요. 아라한 양은 순도 100% 아그루스 침략자가 싫으신 게 아니였습니까?"

    "맞습니다. 전 아그루스 침략자들이 싫어요. 그러나 방금 전까지 루에리아 양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그래서, 일단은 편견을 거두고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일단은."


    아라한은 일단은 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했다. 뭐 아라한이 프릴을 싫어하건 좋아하건 유리아에게는 아무런 상관 없는 이야기다. 유리아는 프릴의 옆쪽에 방석을 깔고 앉았다. 나란히 앉은 둘은 인사라던가 악수 같은 형식적인 의례 조차 하지 않고 말없이 어색하게 있었다. 더 어색해지지 않기 위해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시선 관리하는  곤욕이였다.

    천설당에서 싸늘한 분위기로 흩어졌었던  사람이 한 자리에 다시 모였다. 이렇게 모인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저번에 모였던 장소는 오염생물이 바글거리고 미친 이리가 날뛰는 곳이였으니 그걸 모여서 만났다고 부르기도 뭣했다. 물론 지금이라고 해서 분위기가 나아진 것은 아니다. 재잘재잘 수다 떨만한 사이도 아닌데 할 이야기가 있어서 모여 앉아 있는 건 생각 이상으로 어색하고 불편했다. 불편한 공기가 감돌고 있는 도중 가장 먼저 입을 연  아라한이였다.


    "릴리스 양, 듣기로는 당신이 기사단 주둔군을 찾아간 뒤로 유례없는 인사 이동과 징계 처분의 폭풍이 주둔군에게 몰아치고 있다더군요. 대체 무슨 압력을 행사하신 거죠?"


    "압력을 행사하다니요. 일개 학생일 뿐인 제겐 그런 힘이 없습니다. 전 그저 유감을 좀 표하고 왔을 뿐입니다."

    그걸 바로 압력 넣는다고 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유익하고 즐거운 반응을 기대할  없었기에 그냥 말을 목 밑으로 넣어두었다.

    그 뒤로는 다시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사람들이 모였는데도 주최자인 아라한이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자 유리아는 그 의중이 궁금했으나 먼저 침묵을 깨려고 하진 않았다. 그러나 주변을 조용히 살펴보던 유리아의 눈에 바늘이 꽂힌 아라한의 팔이 들어왔다. 잘 보니 왼쪽 소매를 걷어올린 아라한의 팔과 손등에는 가느다란 바늘이 여기저기 꽂혀있는 상태였다.

    "침을 둘 줄 아시는 겁니까?"

    유리아가 그렇게 묻자 지금껏 아무런 말을 하지 않던 아라한이 느긋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 바늘을 꽂아두면 회복에 도움이 되는 겁니까?"


    "동방의 의학은 단순히 바늘을 꽂는 게 아닙니다. 기맥의 흐름을 짚어 막아야할 흐름은 막고, 정체된 흐름은 뚫는 것이죠."


    "몸 안의 흐름이라면... 마력 회랑을 일컫는 건가요?"


    "다릅니다. 제국이 진리를 탐구하는 방식은 지극히 해부학적이여서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이론과 자료로 정립하려 하죠. 그래서 세상을 이루는 무수한 미지를 마력과 회랑이라는  단어에 끼워맞춰 이해하려 합니다."

    "이름 붙이자면 '해부학적 제국'. 아까도 나눴던 이야기지만 다시 들어도 재미있는 이론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지금까지 제국의 학계를 제국 바깥의 눈으로 분석하고 평가한 이론은 없었잖아요?"

    옆에서 프릴이 추임새를 넣으며 거들었다. 그러나 유리아는 그다지 관심 없어 보이는 눈치였다.

    "인간의 관점에 세상을 맞추는 제국과 달리, 동방의 방식은 세상의 섭리에 인간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방에서 말하는 '흐름' 입니다."


    "결국 제국의 마법사도, 동방의 수행자도 세상의 비밀을 파헤치는 존재라는 점은 똑같아요. 방식도 가치관도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같은 근원에서 힘을 얻는다는  신기하지 않나요?"

    "그럴지도요."


    "세상은 신묘한 섭리를 따라 멈추는 일 없이 흐르고, 인간의 생로병사 역시 이러한 만상의 흐름에서 벗어나질 않습니다. 오장과 육부, 심리와 정신 모두가 우주의 섭리와 닮아 있어서 저마다의 역할이 있으며, 그 기능이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상생하며 상극하는 법. 그 흐름을 바늘 몇 개 만으로도 조율하는 것이 바로 이 침술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해하셨습니까?"


    "대강은요. 훌륭하군요."


    유리아가 영혼 없는 목소리로 건조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릴리스 양은 루에리아 양에게 리액션에 대해 배워야겠군요."

    "저요??!"

    "무튼 아라한 양. 당신의 확고한 세계관은 아주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그루스 제국이라는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자라온 저와 루에리아 양은 쉽사리 그 이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

    프릴의 손을 보니 손바닥과 엄지손가락이 이어지는 도톰한 살이 있는 부분에 침 서너개가 놓아져 있었다. 유리아가 뭐하자는 거냐는 시선으로 쏘아보니 프릴이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집중력 향상에 좋다고 해서...."

    "....."


    "루에리아 양은 맥을 짚어보니 참 맑고 깨끗한 기혈이 흐르고 있어요. 그렇기에 원소에 대한 깊은 이해를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루에리아 양, 말씀 드렸듯이 세상은 음과 양으로 이분됩니다. 이해하기 쉽게 풀어 말씀드리자면, 세상의 모든 밝은 것은 반드시 그림자를 갖기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가지 일념에 집중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일으키는 법이니 사고와 행동을 한 가지에만 집약시키지 마시고, 마음과 욕심이 향하는 방향을 분산시켜야 맥을 상하게 하는 것을 면할 것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허....."


    손바닥의 침을 빼주는 아라한을 보며 눈빛을 빛내고 있는 프릴 때문에 유리아는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유리아는 프릴이 나중에 이상한 사이비 같은 데에 홀라당 넘어가진 않을까 속으로 걱정이 되었다.


    "아라한 양. 안 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는데, 설마 그게 침술에 대한 설명은 아니겠죠?"


    "물론 아니죠. 초대 받은 이들이 전원 모이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원 모이면? 더 올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겁니까?"

    "네. 늦게 도착하는 걸 참 좋아하는 분이시죠."


    "설마..."

    "당신의 속내는 저도 읽을 길이 없지만, 아마 그 설마가 맞을 겁니다. 마침 도착했군요."


    뚜벅뚜벅하는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드르륵 소리와 함께 미닫이문이 열렸다. 세상의 무게를 혼자 다 어깨에 짊어지고 퇴근하는 중년 아저씨 같은 표정을 한 에반 플루토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마자 한숨을 꺼질 듯이 쉬었다.

    "어휴, 망할 교무부 놈들. 어떻게든 덤터기 씌우려고 발악하기는. 됐다, 그냥 내가 똥밟은 셈 치고 말지."


    "숙녀들을 앞에 두고 들어오자마자 하시는 말씀이 참 저속하다는 생각이 안 드시나요?"


    유리아는 늘상 그랬던 것처럼 에반의 말투를 지적했다. 에반은 이제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라한은 유리아가 왔을 때와 완전 똑같은 멘트로 그런 에반을 맞이했다.


    "어서오시죠. 요양 중인 몸이라 일어서서 영접하지 못하는 무례를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그건 그거고, 초대 받은 몸이더라도 사생활 공간에 들어오기 전엔 필수 절차가 있지 않습니까?"


    "아, 그거. 이런 종이로 풀칠해놓은 문은 노크할 수 없지. 밖에서 안쪽으로 '누구누구 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게 동방식 노크였었지."


    "알고 계시군요. 그런데 그렇게 잘 알고 계시는 분이 왜 그냥 들어오신 것이죠?"

    "까먹었다."

    "모르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겠죠. 하지만 이번엔 혼자 있던 것도 아니니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어이구 참 감사합니다. 근데 초대받은 손님의 매너 운운하기에는 초대장 보내신  센스도  꽝인데? 좌식 문화는 접해본 적 없는 아그루스 제국 아가씨들을 의자도 없이 바닥에 앉히다니."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동방의 문화를 접해보겠어요?"


    "이러고 접해서는 동방 문화에 좋은 인상을 남기겠어?"

    에반은 방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리아가 프릴과 에반 중간에 앉아있음에도 신경 쓰이는지 프릴은 꼼지락 꼼지락 옆으로 몸을 옮겨 앉았다.


    "일단은 늦어서 미안하다. 비상 상황일 때 대체 어디서 뭘하고 있었냐면서 교무부에서 얼마나 까대던지 원. 게다가 뒤늦게 제압 했으면서 왜 잡아두지 않고 내버려둬서 도망치게 했냐고 성화더라."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을 물리친 건 선생님이시잖아요? 교무부의 문책은 부당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야. 한 소리 들어서 짜증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 잘못 맞아. 그도 그럴  계약서에 나와 있는 내 임무는 비상 상황 발생  학생들을 보호하고 학원에 위해를 가하는 것들을 배제시키는 것이라고. 근데 난 어디서 뭐하고 있었냐? 누르워에서 팥빙수나 먹고 있었잖아. 명백히 내 근무태만이야. 자, 잠깐만 니들  이렇게 놀란 얼굴을 하는 건데?! 뭐 못볼 거라도 봤어?"


    "에반 플루토 씨... 당신... 설마 자신이 맡은 일이 뭔지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게 대체 무슨 질문이야?!!"

    "그런 반성하는 태도를 취할 줄 아시는 분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왜 상상 못하는 건데?!"

    "근무태만이 나쁜 거라고 알고 계셨을 줄이야."

    "엉?! 모른다는 전제?!"


    에반은 다시금 이 학원 내에서 자신의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현주소를 실감했다. 그나마 에반과 말을 섞으려 하는 유일한 셋에게도 이미지가 이 모양이면 나머지 불특정 절대다수의 학생들은 어떨지 생각하기도 싫었다.

    "뭐 아무튼 저희들이 그날 무사히 돌아올  있었던 건 지도원  덕분이잖아요. 이르건 늦건 역할을 달성하신 거라 봐도 되겠죠."


    "맞아요. 게다가 누르워에 계셨던 것도 주말에 시간을 내어달라는 저희의 부탁을 들어주시기 위해서였잖아요?"


    "감싸주는 건 고마운데, 내가 '다  잘못이오' 하고 뒤집어쓰지 않으면 교무부 놈들이 엉뚱한 교직원이나 지도원 짚어내서 책임을 씌우려 할 거다. 걔들은 그럴 놈들이야. 그런 의미에서 유리아가 그놈들 위원회를  엎어버린  정말 잘한 거야. 아 됐으니까 이런 짜증나는 얘기는 여기까지 하자."


    "네. 이야기를 정리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그래. 그때 과자가게에서 그렇게 서로 쌀쌀맞게 굴고 쫑냈던 녀석들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길래 이렇게 알아서들 모여 앉았는지 나도 궁금하네."


    "우선 다들 쪽지를 받았으면 알겠지만 하지 않고선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을 하고 아라한은 고개를 들어 유리아를 지그시 응시했다. 아라한이 늘 쥐고 다니던 부채를 서랍에 넣어두고 자신의 표정을 가리지 않은 데에는 '서로 아무것도 숨기지 말자' 라는 의도가 은연 중에 담겨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절 구하러 누르워 뒷골목의 버려진 종교 시설에 왔다는  외에도 또 하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시죠?"


    "....."

    유리아가 말을 잃었다. 주변을 둘러봐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다들 복잡한 심경이 표정으로 드러나 있었다. 한 사람, 심드렁하게 앉아 귀를 후비고 있는 에반을 제외하고.

    "다른 학생들은 몰라도  자리의 저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리들이 학원에 침입한 목적이 릴리스 양에게 있다는 사실을 "


    유리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역시 예상했던 내용이지만 막상 바로 앞으로 닥쳐오니 긴장감을 떨칠 수 없었다.


    "당신을 돕기 위해 이리들과 싸우는 위험을 무릅썼던 이들에게 제대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릴리스 양."


    "....."

    유리아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비닐 안에 들어 있는 희고 고운 가루약이였다. 유리아는 약을 사람들의 시선이 잘 보이는 곳에 내려놓았다. 찬찬히 살펴본 프릴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는 새하얗게 질렸다. 프릴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설마.... 뎀피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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