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화 〉1-4. 체스보드 (4) (29/88)



〈 29화 〉1-4. 체스보드 (4)

새로운 한 주가 시작하는 월요일 오후에는 루나칼립스 학원의 중등부, 고등부 전교생이 대강당에 모여 조례를 한다. 늘 별다른 의미나 목적도 없이 형식적으로 해치우는 행사다 보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지겨워하며 미처 다 낫지 못한 월요병에 신음할 뿐인 시간이지만, 이번 만큼은 달랐다. 워낙에  안건이 있다 보니 학생들의 주목도가 확연히 올라가 있었다.

그런 루나칼립스 전교생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도 떨림 하나 없는 목소리로 조례의 진행을 맡고 있는 이는 당연히 학생회장 유리아 릴리스였다.


"지난 토요일 오후, 학원을 무단 출입한 침입자들은 매매와 유통이 금지된 위험 물품들을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는 독자적으로 개조한 소위 인간사냥 도구 역시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게다가 학생을 상대로 총기 발포까지 서슴지않은 것으로 밝혀져 충격과 경악을 더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현장에 있던 학생은 학원에서 갈고 닦은 지혜와 기지를 바탕으로 위기를 모면했으며, 부상을 입기는 하였으나 생명에 위험이 따를 정도는 아닙니다."

유리아는 익명성을 위해 현장에 있던 학생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소문이라는 건 엉덩이가 무겁지도 발이 느리지도 않다. 이미 중등부, 고등부 할 것 없이 학원의 모두가  피해 학생이 아라한임을 알고 있었다. 아라한은 지금  술렁거리는 학생들의 눈길이 집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요양을 명목으로 병가를 신청한 상태였다.

"한편 주동자로 추정되는 이는 라쿠이르 번을 벗어날 목적이였는지 소베로스 번으로 향하는 외곽에서 살해당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학원을 침입한 동기나 목적은.... 불명이며 수사 당국에 사건이 인계 되었으나, 이미 용의자들이 사망하거나 실종됐고, 발견된 시체들의 훼손 정도가 매우 심했기에 구체적인 조사는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유리아는 침입자들의 동기나 목적이 불명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잠시 말을 더듬었다. 달변가인 그녀가 발언을 잠시 더듬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였지만, 학생들은 종적을 감췄던 킬링 이터가 다시 나타나서 죽였다는 화제로 숙덕거리기 바빠 유리아가 말을 더듬건 말건 신경쓰지 않았다.

"제국군 기사단 라쿠이르 주둔군은 이 사태의 발단과 전개, 위기, 결말 중  어느 시점에도 병력을 출동시키지 않았습니다. 오늘 아침 저 유리아 릴리스는, 루나칼립스 학원의 학생위원회 회장으로서 여러분을 대표하여 주둔군에게 항의하였습니다. 주둔군은 사죄와 함께 시정을 약속한 상태입니다. 학생위원회 또한 이와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학원 내의 보안 체계의 개선을 교무부와 행정부에 강력히 품의하였으며, 앞으로도 학우 여러분의 안전한 배움터를 위해 각별히 힘쓸 것을 약속하는 바입니다. 이상입니다."

유리아가 경례를 하자 학생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를 보냈다. 박수를 치는 학생들 틈에서 간간히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유리아 님이야. 오늘도 우아하고 늠름하셔."


"이렇게 많은 시선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차분하실 수 있지? 나라면 절대 못해."

"오늘 아침에 기사단 주둔군에 다녀오셨다지? 유리아 언니가 직접 나섰으니 분명 기사단도 나몰라라 하지 못할 거야."

"정말 학생회장에 걸맞는 그릇이시지. 고학년 후보들도 다 꺾은 게 이해가 돼."


루나칼립스 학원의 학생들은 제국 내에서 극소수로 꼽히는 상류 계층에 속한다. 그러나 유리아는 그 상류 계층에서도 또 초상류에 속하는 존재다. 본디 루나칼립스의 카스트 피라미드에서 1위계는 귀족, 2위계는 호족, 3위계는 상급 기사의 자제들, 4위계는 상인의 자제들, 5위계는 평민 출신, 마지막이 유학생들이다.

유학생들이야 워낙에 루나칼립스 사회와 섞이길 거부하는 이들이니 논외로 하고, 평민 출신 입학생은 정말 몇 년에 한  꼴로 있을까 말까한 드문 경우니 사실상 상인의 딸인 유리아는 원래대로라면 루나칼립스 카스트의 최하위에 있는 셈이다.


상인의 자제들이 천대 받는 이유야 뻔하다. '평민이나 다를 바 없으면서 집에 돈 좀 있다고 맞먹으려 드는  건방지다' 라는 심보다. 그렇지만 유리아의 경우에는 집에  있는 정도가 일반적인 비교 우위와는  궤를 달리한다.

백화 상회. 건축, 차량, 도로, 철도, 제약, 금융, 군수, 무역. 하나만으로도 거대한 규모의 사업들을 여덟 개 씩이나 거느리는 공전절후의 괴수급 상회. 그 중에서도 도로와 철도 공사 산업을 독점하고 있기에 대륙 내의 유통로는 물론, 설국이나 동방과의 무역로 또한 꽉 쥐고 있어서 '모든 길은 왕도로 통하며 그 길은 백화 상회가 깔았다' 라던가 '대륙 어딜 가나 흰꽃이 피지 않는 곳은 없다' 라는 말이 속담 처럼 자리잡았을 정도이다.


귀족들이 아무리 떵떵 거려도 왕도와 멀리 떨어진 번으로 가면 귀족 이름을 아는 사람은 좀처럼 없다. 그러나 백화 상회의 이름을 모를 만한 이는 어느 번을 가도 찾을 수 없다. 영주의 목소리는 영지 밖을 못나가나 백화의 흰꽃은 대륙 어딜 가도 피어 있다.


이러니 귀족이건, 호족이건, 기사건 유리아를 얕볼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루나칼립스의 카스트를 뚫어버리고는 피라미드의 최정상에 군림했다. 민주적인 사고방식을 기대할  없는 귀족 출신 학생들을 꺾어내고 학생회를 장악했다.


모두가 올려본다. 모두가 동경한다. 모두가 인정한다. 그것이 루나칼립스에서의 유리아의 위치.


물론 '모두'라는 단어로 수식을 한다 해도 '예외'라는 단어가 언제나 따라붙는 법이다. 유리아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리는 학생이 하나 있었다.

"칫! 다들 신났기는. 침입자 놈들을 몸바쳐 막은 건 우리 수장님인데 대체 왜 이 골빈 것들은 유리아 릴리스에게 열광하는 거냐고?"

곤룡회의 일원인 아선이였다. 그녀의 양옆에는 천의와 허설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유리아 릴리스. 아무리 봐도 마음에 안 든단 말이죠."


아선이 심통맞은 표정으로 유리아를 응시하며 볼멘소리를 했다. 비단 아선만 그런 게 아니였다. 수장 아라한이 유리아를 도우려다 죽을 뻔 했기 때문에 곤룡회 전체가 유리아에게 아니꼬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아라한 역시 이를 예상했기 때문에 천의에게 자신이 요양 중인 동안 막나가는 이가 없도록 해달라고 부탁해두었다.

너무도 어려운 부탁이였다. 천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 천의의 심경을 알아주지 못하는 아선은 옆에서 쫑알쫑알 열불을 올렸다.


"선배님도 들으셨죠? 유리아가 말한 거. 뭐? 수장님이 학원에서 갈고 닦은 지혜와 기지를 바탕으로 위기를 모면했다고? 웃기지마! 흐름의 ㅎ도 모르는 것들이!!"

"아선 양. 기분은 이해하지만 성낸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 진정하죠."


천의가 아선에게 자중할 것을 요청했으나 소용 없었다.


"그리고 또! 선배도 들으셨죠? 침입자들의 목적이나 동기는 불명이라고 말할 때 말을 살짝 더듬은 거요! 분명히 말하다 말고 목소리를 절었어요!  귀는 못 속여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그때 예배당에서 유리아 릴리스는 이리들이 침입한 용건이 자기한테 있고 자기는 그 용건을 알고 있다고 말했잖아요! 근데 지금은 사람들 앞에서 그 용건이 뭔지 공개적으로 떳떳히 밝히지 못한다라... 역시 유리아 릴리스에게는 뭔가 뒤가 구린 게 있어요!"

"아선 양. 잠시 눈을 감고 명상이라도 하는  권해드리죠."

"으으으 말하다 보니 열이  뻗치네요! 수장님이 아프신데 역시 이렇게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순 없어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리아 릴리스의 추한 비밀을 파헤쳐내서 모두에게 폭로할 거..... 끄야악얏?!!"

참다못한 허설이 아선의 허벅지 안쪽 말랑하고 약한 부분을 손끝으로 꽈악 꼬집었다. 아선의 비명이 박수 갈채 소리 틈에 묻혔다. 아선이 천의를 향해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천의는 외면하고 허설이 계속해서 아선을 '훈육' 하도록 내버려뒀다.


"잠깐! 아직 조례를 종료하지 말아주세요!"


박수소리가 멎어가는 타이밍에 앙칼진 목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학생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집중됐다. 목소리의 주인인 로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중의 이목을 끌어낸 로제는 도도하고도 고상한 자세로 서서, 짙은 와인빛 광택이 인상적인 적안을 유리아에게로 향했다.


유리아의 벽안과 로제의 적안이 서로를 쏘아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보는 이들의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이 자리잡았다.

"또 로제 언니에요. 로제 언니는 왜 이렇게 유리아 언니하고 사이가 나쁠까요?"


"무리도 아니지. 로제는 저번 학생회의 부회장이였지만, 유리아가 회장으로 당선되자 부회장 재선 출마를 포기하고 사퇴 했잖아. 재선 선거는 찬반 투표인 데다가, 지지도는 충분하니까 나가기만 하면 부회장 재임은 확정인 셈이였는데."

"귀족인데 평민인 회장 밑에서 부회장 하는 건 죽어도 싫다는 건가요?"

"그것도 물론 있겠지만, 임기중에 휴학한 선대 학생회장... 그 '폭군' 이 이끄는 학생회를 되찾으려는 게 가장 큰 이유겠지."

학생들은 유리아와 로제 사이에 감히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숨죽여 양상을 지켜봤다.

"학생회의 사건 정리 및 입장 표명에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추가 해명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말씀하십시오."


"학생위원회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보안 체계의 개선을 교무부와 행정부에 강력히 품의하였으며, 안전을 위해 각별히 힘쓸 것을 약속하겠다' 라고 표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의가 있으십니까?"


"정말로 학생회에서 학원의 안전을 위해 힘쓸 생각이라면 교무부, 행정부에 '품의' 같은 거나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학원의 안전을 위해 힘쓸 거라면 말 그대로 힘을 써야죠, 힘을. 학생회는 교직원들에게 품의하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래서는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맞습니까? 명령을 해야 하나요, 아니면 책임자 교직원들을 좌천시켜야 할까요? 로제 양, 우리는 모두가 배움을 위해  자리에  학생들입니다. 단순히 강한 마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큰힘에 걸맞은 도량을 갖춘 지도자로 성장하는 것이 루나칼립스 학원의 목적이자 이념이죠. 이곳에서 함께 청춘을 무르익히는 동안 우리는 신분의 고저를 막론하고 사회의 일원을 존중하는 미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니 학생 신분과 무관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짝짝짝! 유리아가 발언을 마치자 몇몇 학생들이 지지의 의미로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로제는 아직 할말이 남아있었다.


"아뇨, 저는 루나칼립스 학원의 목적이나 이념에 반목하지 않습니다. 존중의 미덕을 강조하는 현 학생회의 관점 또한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요구하는 것은 학생 신분과 무관한 권력 행사가 결코 아닙니다. 안전을 보장받으며 학원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 학생들의 분명한 권리 아닙니까? 그리고 그런 정당한 권리를 보장 받으며 면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학원측의 기본적인 책임 아닙니까?"


"맞습니다.  말씀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 한  봅시다. 거수자의 침입을 간단히 허용한 것으로 모자라서 학원 한복판에서 총기 난사까지 일어났어요. 여러분  사안의 무게가 아직 실감이 나지 않으십니까?  일은 존중과 품의 같은 미지근한 대응으로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지극히 당연한 권리가 이토록 심각하게 침해 당했는데, 우리를 대표하여 적극적으로 학원의 보안 실태를 문책해야 할 학생회가 점잖은 몇 마디로 넘어가도 됩니까?"


"그래 맞아! 예전 학생회였으면 진작에 관련 교직원이나 담당자들을 쳐냈을 거야."


"말이 좋아서 존중이지 유리아는 교무부나 행정부에 큰소리 낼 타이틀이 못 되잖아."

"지금의 학생회에는 귀족이 너무 없어서 교무부도 행정부도 예전에 비해 학생회 눈치를 많이 안 보고 예산을 돌리는 건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학생회에서 추진하던 기숙사 증축 공사가 실패로 돌아간 거잖아요?"

"이번 일도 교직원들이 적당히 죄송하다고  마디 사과만 하고, 앞으로 신경 쓰겠다고 어물쩡 넘어간다면 진지하게 학생회를 탓해야 할  같은데."

로제를 구심점으로 뭉치는 귀족 학생들과 전 학생회의 임원들이 로제에게 박수를 보내며 찬동했고, 그 밖에도 각자의 합리적인 이유로 유리아의 학생회를 지지하지 않는 학생들이 목소리를 보탰다. 유리아를 지지하던 학생들 사이에서도 로제의 의견 또한 타당하다는 여론이 우세해졌다. 학생들은 유리아가 이제 어떻게 답변할지 귀를 기울였다.


"발언이 끝나셨다면 이제 답변 드리겠습니다. 우선 루나칼립스 학원 내에서의 총기 난사라는 미증유의 사태 때문에 학생회의 향후 대처에 대해 염려하시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학생회는 점잖은 몇 마디로 미지근하게 대응하고 넘어갈 의향 따위 일절 없습니다."

"말로는 의향이 없다고 하더라도 행동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숨겨지지 않습니다.  학생회의 역량 부족은 지금  시점에도 이미 드러났습니다."


로제의 공격적인 발언에 학생들이 술렁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죠?!"


"설마 학생회더러 주말에도 쉬지 말고 보안 체계를 상시 점검해야 했다고 말하려는 건가요?"

"유리아나 학생회도 엄연히 이번 일의 피해자인데 어째서 책임소지자로 몰아가는 거야?  학생회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로 밖에 안 보이는데."

"다들 정숙해주십시오."

유리아가 술렁거리는 회중들을 조용히 시키고 다시 로제를 쳐다봤다.


"발언을 마저 이어가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현 학생회의 역량 부족은 지금 이 시점에도 이미 드러났습니다. 단적인 예로 현 학생회는 우리를 대표하여 기사단에게 항의하였으며, 사죄와 함께 시정을 약속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죄와 시정 의지가 우리에게 와닿은 것이 지금까지 단 하나라도 있었습니까? 그 자리에 있던 이가 만약 선대 학생회장이었다면 기사단이 어떻게 나왔을까요? 지금쯤 병사부터 장교에 지휘관까지 학원에 일렬로 엎드려서 목숨 구걸 하고 있었을 겁니다."

"아... 그 폭군이였다면 진작에 말단 기사랑 병사 몇 명이 형장에 매달렸겠지."


"지도원이나 행정 주무관도 몇 명 사라졌을 걸?"

"어쩌면 지금 학생회장이 그 폭군이 아니라 유리아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폭군이랑 비교할 것도 없어요. 총기 난사가 벌어진 곳이 여기가 아니라 오르토스였다면, 그래서 오르토스 학생회장 이스민이 움직였더라면... 한동안 여기저기서 피바람이 불어서 잠잠할 날이 없었겠죠."


여론이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자 로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유리아는 전혀 동요하거나 분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한결같이 차가운 무표정을 지키며 마이크를 들었다.

"답변해도 되겠습니까?"

유리아는 조례를 위해 한 자리에 모여있는 루나칼립스의 모든 학생들을 스윽 훑듯이 살펴봤다. 잠깐의 침묵으로 말을 고르고 난 유리아가 로제의 발언에 대한 답변을 시작했다.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만... 어째서인지 전 학생회는 선대 학생회장의 '폭군' 이라는 별명을 부끄러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즐기고 있더군요."

유리아의 말에 로제를 비롯한 귀족 파벌의 학생들 표정이 굳었다.

"전 학생회는 '군림형' 학생회였습니다. 선대 학생회장은 폭군이라는 그 이명에 걸맞게 막강한 권위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힘이 학생들에게도 장점과 이점으로 작용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점은 결코 부정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독주하던  학생회는 제동 능력을 잃고 선을 넘었습니다.  결과... 전 학생회는 실패했습니다."


"뭐?!"

유리아의 발언에 로제를 비롯한 전 학생회 임원 출신 학생들과 귀족 학생들이 격한 반응을 보였고, 다른 학생들도 덩달아 웅성거렸다.


"정숙해 주십시오!"


유리아는 학생들이 과열되지 않게 정숙시켰다.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가라앉자 로제  학생들이 바로 치고 들어왔다.

"우리가 실패했다고?! 그 발언 책임질 수 있어?!"

"선대 학생회장이 재선 투표  얼마나 압도적인 비율로 찬성표를 받았는지 기억 못하는 겁니까?!"

"그 선대 학생회장이 어쩌다 중도 휴학을 하고 학원에서 물러났는지는 기억 하시는지요?"


"윽....?!"


유리아의 반문에 그들은 급소를 찔린듯이 말을 잇지 못하고 씩씩거리기만 했다.


"군림형 학생회는 실패했습니다. 같은 노선을 걷고 있는 오르토스의 학생회 역시 병폐를 드러내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학생 여러분들이 저를  자리에 세워주신 게 제가 이미 실패한  노선을 더 열화시켜 답습하게 하기 위함일까요? 아닙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제가 지금 서있는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마지막에 '차라리'  시작하는 부분 외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네요."


"지금의 학생회가 추구하는 방향은 군림형 학생회가 아니라 '관료형' 학생회입니다. 원칙과 질서만이 학생회를 움직이게  것이고, 그 원칙과 질서는 신분과 출신에 지배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설(饒舌). 그럴싸한 말로 껍데기만 번듯하게 꾸미고 있지만 실속은 비어 있습니다."


"제가 아까부터 '할 것입니다' , '하겠습니다' 만 말해서 그렇게 느끼시는  같으니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무엇을 실제로 했는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선 이번 일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 교무부와 지도원들이 구성한 비상대책 위원회 및 진상규명 위원회의 해산 조치를 시리우스 이사장께 요청했고, 이 요청은 수리 되었습니다."


"뭐라구요?! 긴급 위원회들을 해산시켜 버렸다고요?"

유리아의 발언에 로제는 물론이고 학생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로제는 예상치 못한 유리아의 변화구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겉으로 티내지 않고 따졌다.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급히 소집된 위원회들을 해산 시키다니! 무슨 생각으로 그런 전횡(專橫)을 벌이는 거죠?"


"학생회장으로써 위원회 활동 보고서의 열람을 몇 차례 요구했지만 위원회 측은 제게 문서 열람 요구 권한이 없다며 거절 했습니다."

"선대 학생회장이였다면 감히 거절할 생각을 했을까요?"


"그래서 저는 제 방식대로 했습니다. 긴급 소집된 위원회의 관할 부처를 교무부에서 학생권익 복지부로 변동할 것을 검토해 달라고 품의하였고, 심사 결과 제가 근거로 제시한 자료들의 타당성이 인정되어 품의안이 통과 됐습니다. 학생권익 복지부가 긴급 위원회를 관할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학생위원회 총회장인 저는 긴급 위원회의 모든 문서를 열람할 권한을 얻었습니다."

"관할 부서를 옮겼다니?! 아직 월요일 오후인데 어느 사이에 처리한 거지?"


"문서 열람 결과 어땠을 거 같습니까? 예상했지만 긴급 위원회는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기 위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면밀하게 토의하는 장이 아니었습니다. 문책의 대상을 정하기 위해, 그러니까 덤터기 씌우고 꼬리 자르기 위해 잔꾀를 부리는 모임이었습니다. 만일 이 위원회가 자기들끼리 손발을 맞추고 입을 맞추도록 내버려뒀다면 적당히 꼬리 자르고, 그럴싸하게 그려진 내사종결 보고를 올렸겠죠. 그랬다면 조금 전에 지적한 '미지근한 대응' 으로 끝났을 겁니다. 그래서 전부 해산시켰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학원의 정당한 원칙을 따르며 이뤄졌고, 학원의 질서를 지키기 위함이였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관련 문서들을 전부 학생광장의 게시판에 붙여두겠습니다."

"그런...!"

폭군의 추진력이 중장비와 같이 강력하고 거침없다면, 유리아의 행동력은 신속하고도 치밀했다. 사건이 벌어진 건 토요일인데 불과 월요일 오후 전까지 부서의 위치를 옮기면서까지 위원회 감사 권한을 쥐어내고, 감사 결과 실체가 드러난 위원회들을 해산시켰다. 이 무시무시한 행동력에 아무리 로제라도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누군가의 눈에는 제가 점잖은 소리나  마디 하고 넘어가는 미지근하고 목소리 작은 학생회장으로 보이겠지만, 저와 학생회는 지금도 행동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비록 그 행동의 방식이 이전 학생회와 다르지만, 그것이 현 학생회의 역량 부족을 지적할 근거는 아닙니다. 말했듯이 원칙과 질서만이 학생회를 움직이게 할 것이고, 그 원칙과 질서는 신분과 출신에 지배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저희의 결정이 도리어 학원을 혼란스럽게 한다면 그때 저희의 무능함을 규탄하십시오. 이상입니다.  해명이 필요한 부분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성의를 담은 답변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 로제가 자리에 앉자 학생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를 유리아에게 보냈다. 자리에 앉은 로제 역시 떫떠름한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유학생회의 자리에서 아선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히야~ 유리아 릴리스 제법인데요? 로제 말대로 정말 요설이 따로 없어요. 이거 보아하니 유리아 릴리스를 상대로 정정당당한 방법으로는 견적이 안 나와요. 선동과 날조로 승부를 봐야하는데 무슨 추문이 좋을... 끄아아악?!!"

또 허튼 소리를 늘어놓는 아선의 허벅지를 허설이 꽉 꼬집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의 존재 조차 의식하지 않고 단상에서 내려온 유리아 릴리스는 무거운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쪽지를 보았다.

'안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가 있으니 방과후에 유학생회의 집무실을 찾아오십시오.'


내용은 그게 전부였다. 고백인지 도전장인지 모를 이 쪽지를 보낸 이는 아라한이였다. 안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 화제가 무엇일지는 너무도 분명했기에 유리아는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걸어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