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화 〉1-4. 체스보드 (3) (28/88)



〈 28화 〉1-4. 체스보드 (3)

즐거운 주말을 보낸 기사들은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을 정말 즐겁지 못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귀빈을 모셔서 이야기를 하는 응접실 안이 냉랭한 공기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냉기의 근원지는 유리아 릴리스. 대륙 전역의 경제 시장에서 절대적인 패권을 행사하는 백화 상회 회장의 무남독녀이자, 사실상 확정적인 차기 회장. 거기에다가 라쿠이르의 지역 경제를 부양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시리우스 재단 마법학원의 학생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다. 또한 이곳 라쿠이르 번에 주둔해 있는 제국군 기사단의 물자 공급을 쥐고 있는 후원자다.


스펙이 이러다 보니 평민들에겐 거만하고 게으르다고 욕먹는 주둔군 기사들도 기합이 잔뜩 들어간 자세로 깍듯이 유리아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허나 유리아는 최근에 있었던 학원 습격 사건에 기사단의 대응이 부실했던 탓에 몹시 심기가 불편한 기색이였다. 기사단 쪽에서 값비싼 홍차를 대접해왔지만 유리아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차가운 그녀의 시선 만으로 찻잔이 식어버릴 것만 같았다.

"백화 상회의 유리아 릴리스 씨. 오늘은 이렇게 바쁜 가운데 행차해 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비록 미진한 성의지만 불편한 점이 없으셨으면 좋겠군요."

라쿠이르 주둔군의 부단장이 생글생글 영업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유리아 쪽으로 밀었다.

"누가 보면 투숙업체인  알겠습니다. 기사면 기사의 임무에만 충실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유리아는 자신보다 나이 많은 부단장을 상대로 조금도 말을 가리지 않고 독설을 쏟았다. 하지만 부단장은 차마 건방지다며 화를 낼  없었다.


"그, 그래서 오늘은 어떤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유리아 릴리스 씨."


"긴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유리아의 눈이 흔들림 없는 시선을 부단장에게 고정시켰다. 수정구슬처럼 맑지만 묘한 마력과도 같은 카리스마를 담고 있는 그런 눈이였다.


"오늘부로 백화 상회는 라쿠이르 주둔군의 물자 후원 금액을 반으로 줄이겠습니다."


"뭐, 뭐, 뭣이?!!"

파격적인 선언에 뒷통수를 세게 맞은 부단장이 순간 존댓말을 쓰는 것도 잊고 소리쳤다. 이내 곧 헛기침을 하며 말을 골랐다.

"흠, 흠!! 유리아 릴리스 씨. 부디 결정을 재고할 것을 부탁 드립니다."

"아뇨. 몇 번을 생각한들  결정은 한결 같습니다. 물자 후원 금액을 반으로 삭감할 것이니 예산 행정에 차질이 없도록 회계를 재조정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그럼 전 용건을 마쳤으니 이만."

"자, 잠시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유리아 릴리스를 부단장이 애써 만류했다. 변명할 기회 한  정도는 허락해 달라는 그 몸짓에 유리아는 한숨을 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백화 상회 측에서 갑자기 이렇게 후원 금액을 반씩이나 삭감해버리면 저희가 아무리 조정한다 한들 예산 편성에 차질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백화 상회에서 군수 산업도 경영하고 있으니 군대는 자금 없이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기사의 임무 두 가지. 알고 계십니까? 뭐, 군단을 이끄는 부단장 씩이나 됐다면 당연히 알고 계시겠죠?"

"그, 그럼요! 물론이죠. 그.... 뭐였더라?"

"...."


두  짜리 복무신조 조차 외우지 못하는 자가 부단장이라니 경력을 인정받아 자리에 오른 거라면 있을  없는 일이다. 안타깝게도 주둔군 부단장 까지는 돈과 인맥으로 차지할  있는 자리인 모양이다. 유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첫째로 황제의 영광을 위해 싸우며, 둘째로 시민의 안녕을 수호한다."

"맞아, 바로 그겁니다!"

"둘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지키셨습니까?"


"....."

부단장은 유리아의 일갈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총기, 마탄, 아티팩트, 거기에 카그루 까지. 그런 살벌한 것들로 무장한 이리들이 학생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동안, 심지어 학원 한복판에서 총기 난사를 벌여도 학생들을 지켜줄 사람이 없던 그 시간 동안, 당신들은 대체 어디서 무얼하고 있었습니까? 당신들이 기사의 본분을 잊지 않고 황제의 영광이나 시민의 안녕을 생각했더라면 현장에 한 사람도 안 나타날 수가 있었을까요?"


"알고 계시겠지만 유리아 릴리스 씨께서 시궁쥐나 이리들에게 습격 당한 곳은 뒷골목입니다. 뒷골목은 제국의 치안 관리 역량이 상대적으로 잘 미치지 못하는 곳인지라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저희 기사들이 보고를 받고 시기적절하게 대응하기가 어렵습니다."


"전혀 설득력 없는 변명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렇다면 어째서 루나칼립스 학원 한복판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에는 대응하지 못했는지 설명이   뿐더러, 둘째로, 저희 학원의 동방인 유학생들이 이미 여기 직접 찾아와서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발뺌하실 걸 대비해서 증거 자료도 가져왔습니다만."

유리아가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올려놨다. 그것은 동방의 수행자들이 명상을 할때 쓰는 염주였다. 천의가 손에 걸고 다니던 염주인데 아라한이 유리아에게 잠시 빌려줬다. 염주에는 수행자의 과거의 번뇌와 직면할 수 있도록 기억을 그대로 재현해 보이는 술식이 깃들어 있는데, 이를 잘 응용하면 녹취 도구로도 사용할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늘어놓지 말고 어서 도와달라니깐!!]

염주에서 녹취된 아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때 사람을 구하기 위해 기사가 있는 거잖아!]

[아 정말 주말에 놀러도 못 가고 당직 서는 것만으로도 귀찮아 죽겠는데 왜 또 성가신 게 붙어선...]

움찔! 녹취된 기사의 발언을 들은 부단장이 뜨끔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그러는 동안에도 염주는 그날의 폭로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아무리 동방인이더라도 엄연히 루나칼립스 학원에 정식으로 입학한 학생이다. 지금 너희는 루나칼립스 학원 한복판에서 이리들이 학생을 공격하는 동안 수수방관한 꼴인데 나중에 책임질 자신 있다는 뜻인가?]

[누가 책임을 물을 건데? 같은 동방인? 뒷골목 하숙촌 식구들? 아니면 설마 느그 수장님 다쳤다고 학원에서 책임을 물을 거라 믿는 건 아니지?]

[우리야 처음부터 너희 모두의 관심 바깥이라 치지. 그러면 지금 백화 상회의 유리아 릴리스가 위험에 처했다는 건 알고 있나?]

[그게 뭔 소리야?]


[학원을 침범한 이리들이 노리던 목표는 유리아 릴리스였다. 수장님은 놈들을 막으려는 중이시고. 이쯤이면 우리를 도와줄 이유가 되었나?]


[그걸 우리더러 믿으라는 거냐? 니들이 유리아 릴리스랑 사이 나쁘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다고. 아무 이유나 가져다 붙이기는.]


[믿지 않는 거야 너희들 판단이지.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놓고 방관한 걸 책임질 자신이 정말로 있나?]

[그러니까 그 태도부터가 마음에 안든다니깐. 세상에 도움을 청하는데 그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어딨냐? 좀 공손하게 고개도 숙이면서 엉?]

[그래, 그래. 황제 폐하에게 충성하지도 않는 불충자들인 주제에 꼭 이렇게 필요할 때만 권리 타령한다니깐. 무릎 꿇고 황제께 충성! 외치고 공손하게 부탁하면 도와줄지도 모르는데?]

[뭐, 뭐라고..!! 니들 허설 선배에게 말 다했어?! 사람이 위험해 처했잖아.... 아무리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꼬와도 목숨은 구하고 보는 게 도리라는 거잖아...]


울먹거리는 아선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유리아는 녹음 재생을 중단하고 부단장을 노려봤다.

"이거는...!!"

부단장은 무슨 변명을 짜내야 할지 머리가 안 돌아가는 눈치였다. 기사들에게 무시당할 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아라한이 곤룡회 대원들에게 기사단 주둔지를 찾아가서 구조 요청을 하도록 지시한 것은 이를 위함이다. '몰라서 그랬다' 라는 변명의 여지를 사전에 철저히 제거해둔 것이다. 이런 아라한의 포석을 유리아 역시 놓치지 않고 이어받아서 기사단을 압박했다.

"이 증거 자료가 조작된 거라고 우기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최대한 추하게 밑바닥을 드러낼수록 기사단에 대한 제 조치가 타당성을 얻을 테니까요."

"저, 저희 쪽이 보고를 받을 때 차질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차질은 복무신조도 모르는 당신 같은 낙하산이 부단장 완장을 달고 있다는 게 차질이죠."


"뭣...?!!"


"차질 말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좀 전에 백화상회의 후원 금액이 빠지면 예산 편성에 차질을 면치 못할 거라 말씀하셨죠?"

"그렇습니다!"


"시민의 세금을 뜯어먹고, 상회의 후원금 까지 빨아먹는데 정작 이리가 버젓이 활개를 치는 동안  명도 출동을 못할 지경이라면, 그건 예산 행정에 심히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이래뵈도 상인의 딸이라 계산 머리는 쓸만하고 장부도 볼  압니다만, 예산 장부를 검토해봐도 되겠습니까?"

"가능할 리가 없죠, 하하! 아무리 큰손 후원자인 유리아 릴리스 씨라도 일반인이 군용 예산안을 열람하는  가능할 리가 없잖습니까?"


"네. 잘 됐네요.  응접실이 번들번들 거리는 꼴을 보니 돈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 대강 그림이 그려지는데, 구체적으로 그 참상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게 차라리 다행입니다."

유리아가 호화로운 인테리어의 응접실을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소파부터 테이블, 찻잎과 찻잔과 각종 다기, 괘종시계,  여기저기에 걸려진 그림들. 하나 하나가 고급스러운 자태를 과시하고 있었다. 주둔지에 이렇게 금칠해놓은 응접실이 대체 왜 필요한가 이해할  없었지만, 거기까지 생각해봐야 스트레스만  뿐이였다.

"예산이 모자라다는 변명을 하실 꺼면 저를 이런 방에 앉혀놓질 마셨어야죠. 명품으로 도배를 해놓은 방에서 비싼 차를 대접하면서 '저희는 돈이 없습니다' 라는 말씀을 하시면 설득을 하고자 하는 성의 조차 느껴지지 않습니다."

"트, 특별히 신경 쓴 겁니다. 이번만 무리해서 특별히!!"

"당신들이 특별히 신경 쓸  시민의 안전 뿐입니다. 기사들이 무리해서라도 모든 시민의 안전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황제의 영광은 저절로 따라 붙는 것이고요. 이런 쓸데없는 데에 기울일 신경을 제대로  데에 썼다면 저희 학원의 유학생이 그렇게 크게 다치지는 않았겠죠."


"그 학생은 뒷골목의 동방인이지 않습니까? 동방인은 아그루스 제국의 시민이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 충성하지 않는 불충자들이라고요."


"그렇군요."

유리아가 그제서야 자신의 앞에 있는 찻잔에 시선을 보냈다.

"무시하려고 해도 도무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향이 좋군요. 훌륭한 찻잎을 쓴 모양입니다."

유리아가 홍차에 관심을 보이자 부단장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물론이죠! 동방의 1등급 찻잎만을 사용했습니다. 동방의 장인이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만들기 때문에 수량이 워낙 한정적이다 보니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쉽사리 맛볼 수 없는 물건이죠."


"그렇습니까? 흥미롭군요."


"지금 딱 적당히 식었으니 어서 드시죠."

"아뇨. 차가 흥미로운  아닙니다."

"네??"


"황제 폐하께 충성하지도 않는 불충자들의 차를 비싼  주고 좋다고 마시는 당신에게 흥미를 느낀 겁니다."


유리아의 비위를 맞추려고 생글생글 웃어보이던 부단장의 표정이 굳었다.

"저 역시 동방에서 온 유학생들이 달갑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신 말대로 황제 폐하께 충성하지 않고 '신'이라는 존재를 섬기는 데다가 '흐름'이라는 이해 못할 관념을 아그루스에서 정립한 마법이론 보다도 중요시 여기는 별난 집단입니다. 게다가 아그루스와는 문화도 가치관도 너무 다르다보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돌발 행동을 늘상 저지릅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래도 말입니다."

유리아가 부단장을 노려보았다. 그 나이대의 소녀에게서 나올  있을 법한 시선이 아니였다. 마탄과 같이 피사체를 궤뚫을 것만 같은 힘 있는 시선이였다. 순간 부단장이 그 시선에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말입니다. 사람이 위험에 처한 것 아닙니까? 아무리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불충자고 눈에 거슬려도 목숨은 구하고 보는 게 기사도라는 거잖습니까?"


부단장은 뭐라  말이 없었다. 유리아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부단장은 그런 유리아를 필사적으로 설득하려 했다. 부드러운 설득이 통하지 않자 부단장은 날을 세워보기로 했다.


"기다려 보십쇼. 이대로 후원금을 삭감한다면 우리 주둔군은 앞으로도 정말 중요한 순간에 전투에 임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가겠죠. 후원금을 갑작스럽게 삭감한 백화 상회의 이미지 역시 타격을 입을 테고요."

그러나 유리아는 부단장의 도발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거 같은데. 주둔군에게 물자를 후원하는 건 그것이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의무라서가 아닙니다. 백화 상회의 호의가 계속되다 보니 권리로 굳은 양 착각하시는 거 같군요. 백화 상회 역시 당신들의 기사도에게 거는 기대가 있으니 후원을 해온 겁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그런 기대를 철저히 저버렸죠. 실망을 시켰으면 대가가 따르는 건 당연한  아니겠습니까?"


말을 마친 유리아는 응접실에서 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부단장이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그놈들은 짐승들이야!! 동방 것들은  유인원 보다는 낫고 인간에는 못 미치는 그런 미개한 짐승들이라고! 네 말대로 기사라면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목숨을 구하고 봐야겠지. 하지만 그 년도, 신고를 하러온 년들도 다 사람 취급 받을 자격이 없는 것들이였단 말이다! 그런 것들을 위해 무기를 들고 뒷골목을 들쑤시는 수고를 해야 한다니, 그런 건 시민들 역시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할 걸?!!"

유리아는 문고리를 손으로 꼭 잡은 채로  말을 듣고 있었다. 부단장이 말을 마치자 유리아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아직도 분이  풀려서 씩씩 거리고 있는 부단장을 보며 유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게 당신의 본심입니까?"

부단장은 유리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의 어머니가 동방인이라는 건 아십니까?"


"아아앗....??!!"

씩씩거리던 부단장의 숨이 뚝 멎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몰랐던 모양이군요. 네, 방금 말했던 대로입니다. 제 어머니는 유인원 보다는 낫고 인간에는 못미치는 미개한 짐승입니다. 그리고  역시 절반은 어제 이곳을 찾아온 그 사람 취급 받을 자격 없는 자들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죠."


"자, 잠시만, 잠시만  얘기를 들어주십시오. 그건... 그런 뜻이 아니라..."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후원 금액을 절반 삭감하겠다는 건 경솔한 판단이였습니다."


"뭐라고?"


유리아가 차가운 시선으로 부단장을 노려보았다.


"4분의 1로 삭감하겠습니다."


"뭐?!!! 잠깐!!!!"

"제 어머니와 제 학우들을 모욕하고도 가볍게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유리아는 부단장이 무어라 말하건 그의 변명을 들을 의향이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응접실을 나가선 문을 닫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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