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화 〉1-4. 체스보드 (2) (27/88)



〈 27화 〉1-4. 체스보드 (2)

빡!!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카일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크윽?!”


카그루를 꺼낸 동안에는 공격성을 극대화시키는 대사 물질의 작용으로 고통을 쉽사리 느끼지 않게 되지만,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피해가 없다고 착각해서는  된다. 상대에게 몇 번의 가벼운 타격을 허용했을 뿐인데도 카일은 호흡이 흐트러질 정도로 충격이 몸에 누적된 것을 자각했다.

“날뛰더라도 생각을 좀 잘 하고 날뛰어야 오래 살어. 장비빨로 내구도 믿고 깝쳐봤자 입고 있는 게 튼튼한 거지, 너 자신이 튼튼한 게 아니거든.”


에반 플루토가 검은 코트의 매무새를 탁탁 가다듬으며 말했다. 카그루 같이 위험도 높은 연장을 휘두르는 이리를 상대하는 와중에 옷에 주름 구겨지지 않도록 신경 쓰는 여유를 과시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와서 한 대만 더 맞아보면 슬슬 이해가 갈 거야.”


카일은 신경질적으로 돌진하여 에반에게 주먹을 뻗었다. 에반은 카그루로 뒤덮인 주먹을 손으로 잡았다. 카일이 안간힘을 썼지만 그의 주먹은 조금도 에반에게 파고들지 못했고 도리어 뒤로 밀려났다. 카그루가 힘으로 밀릴 줄은 상상도 못한 카일이 에반과 거리를 벌리고 뒤로 물러났다.


“완력으로 카그루를 능가하는 개조는 없어. 대체 무슨 시술을 받은 거지? 넌 대체 뭐하는 놈이냐?”


“아까 말했잖아. 지금은 루나칼립스의 지도원이라고”


“하빠리 지도원 따위는 학교 마당에서 빗자루질이나 할 것이지, 뭐 하러 이런 곳까지 들쑤셔서 행패 부리나?”

“너 때문이잖아, 참나 어이가 없네. 나도 이 날씨 좋은 주말에 인건비도 안 나오는데 이런 곳에서 옷 배려놓기 싫어.”

스슥! 에반이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잔상도 안 남기고 사라졌다가 카일의 바로 눈앞에서 나타났다. 카그루의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도 반응할 틈이 없었다. 빠각! 에반의 무릎이 카일의 몸통을 찍었다.

“크악?!”


“어떻게 할래? 견적 안 나오면 그냥 유리아한테서 뺏었던 물건 돌려주고 꺼지는 쪽이 서로 편할 텐데.”


“누구를… 병신으로 아나?!”

꾸르륵 꾸륵꾸륵!! 카일의 팔을 감싸고 있던 카그루가 균사를 뻗어 카일의 온몸을 집어삼켰다. 카그루가 양 팔에 국한되지 않고 전신을 빈틈없이 뒤덮자 몸통에  둘, 다리 둘, 머리 하나 달렸다는 점을 제외하면 인간의 형상이 전혀 남지 않은 괴물만 남았다.


카그루를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전신에 걸쳐서 꺼내는 건 극도로 꺼려지는 사용법이다. 사람이 도구를 써야 정상인데, 도구가 사람을 휘두르게 되는 주객전도가 아티팩트나 유물의 영역에서는 비일비재한데, 그렇게 방심한 사용자를 집어삼키는 아티팩트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꼽히는 물건이 카그루다.


하지만 리스크를 크게 짊어진다면 그만큼 리턴도 크고 달콤해지는 법이다. 카그루의 신경과 완전히 동화되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완력과 육체능력이 온몸에 넘쳐흘렀다. 뇌수 곳곳에서 흘러 넘치는 공격성 자극 물질이 카일을 격앙시켰다. 카일은 지금이라면 자신을 가로막는 게 누구든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파악!! 카일의 몸에서 길고 뾰족한 갈퀴가 돋아났다. 카일은 자신의 발 밑에 꿈틀거리는 오염생물에 갈퀴를 꽂았다. 카그루가 내뿜는 공격성 자극 물질이 오염생물에게 주입되었다.

쿠르르릉!! 예배당에 삐져나와 먹이를 찾아 꼼지락거리던 오염생물 군집이 카그루의 자극 물질에 반응하여 더욱 활발하게 솟아올랐다. 활동성과 감각이 증폭된 오염생물들은 예배당 안의 아이들을 매섭게 노리고 뻗어 나왔다.

“으윽?! 이것들은 대체 다 뭐야?! 어째서 누르워 골목에 이렇게 큰 괴물찌꺼기들이?!”


시엘은 얼음벽을 파고들어오는 촉수들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상 냉기를 일으켰다가는 같이 있는 유리아 마저 저체온증이나 동상에 걸리게 될 것이고, 유리아 역시 노이즈를 일으키는 자신의 마법으로는 도움이 아니라 방해가 되기 때문에 손쓸 방도가 없었다.


시엘이 쌓아놓은 얼음 방벽 전체가 한껏 달아오른 오염생물들에게 휘감겨버렸다. 흥분한 촉수 다발들이 얼음 사이를 막무가내로 비집고 들어오면서 시엘과 유리아를 향해 입을 쩍쩍 벌렸다. 시엘이 냉기를 보충하지 못하자 얼음 방벽이 쩌적쩌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다른 곳의 오염생물들 역시 아라한과 프릴을 향해서 촉수 다발을 뻗었다. 하지만 카그루에 완전히 뒤덮인 카일은 같은 오염생물로 인식했는지 공격하지 않았고, 에반에게는 어째서인지 접근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끊어도, 끊어도 끝도 없이 새로 나오잖아!”

시엘이 고드름을 만들어서 얼음 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촉수 다발을 잘라내며 소리쳤다. 뒤에서 유리아가 말했다.

“오염생물은 식물과 비슷해요. 심장부가 있는 뿌리에 재생능력을 웃도는 손상을 입히거나, 양분을 차단해서 말라 죽게 하는 것만이 유효한 대처법입니다.”


“그럼 어떡하지? 뭘 해보려 해도 얼음 밖으로 나갔다가는 이 징그러운 것들이 간지럼 태우러 몰려들 텐데.”

해방된 우상의 난폭함이 절정에 달한 위기의 순간이었다.  정도로 고삐가 풀려 날뛰는 거대 오염생물은 기사단이 출동해야 진압될 정도의 위험요소다. 안전한 영지에 거처를 마련한 일반 시민이라면 이렇게 거대하고 흉포한 오염생물을 가까이서 접한다는 것은 상상도  수 없다.

“다들 최대한 고개를 낮게 숙여라. 그대로 잠시만 눈 꽉 감고 있어.”

카일 보다도 오염생물을 처리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한 에반이 아이들에게 말했다.

“네? 선생님,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됐으니까 빨리!”


아이들이 에반의 지시대로 최대한 몸을 낮추고 눈을 꽉 감았다. 에반은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눈 잘 감고 있겠지? 절대로 무슨 일이 벌어지나 봐서는  된다.”


에반은 아이들에게 시야를 확실히 차단할 것을 신신당부하고는 끼고 있던 검은 장갑을 꽉 당겨서 손에 딱 맞췄다.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손에 힘을 푼 에반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뜨자 그의 두 눈이 황금빛으로 옅은 안광을 발했다.


에반의 금안이 거대한 우상 조형물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저 우상이 예배당 가득 꿈틀거리고 있는 흉측한 살점들이 솟아나는 곳이자, 살점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심장이다. 에반이 멀찍이 떨어진 우상을 향해 손을 뻗자 검은 그림자들이 솟아났다.

에반이 불러내는 검은 그림자는 형체가 없어서 만지거나 막을  없으나 극도로 날카로워서 꿰뚫는 모든 이의 생명을 끊어버리는 불가해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에반이 가볍게 손짓하자 그림자들이 쐐기가 되어 우상이 있는 벽에 박혔다.


팍! 팍! 파팍! 거대한 조형물에 그림자 쐐기가 박히자 조형물을 감싸고 있던 살점들이 고통스러운 듯 움찔거리더니 거무튀튀하게 변색되며 말라비틀어져 갔다. 얼음 방벽을 파고들던 촉수들도, 다른 아이들을 노리던 오염생물들도 전부 시들시들하게 늘어져서 움직임을 멎었다. 머지않아서 예배당을 가득 채운 살덩이들이 전부 말라서 살짝만 충격을 줘도 파사삭 바스러지는 상태가 되었다.


"생명력 하나는 엄청 끈질긴 괴물딱지들을 이렇게 간단히...?"

"으으으윽...."


"유리아?! 왜 그래?!"

"소리가... 목소리가 울려...! 머리가 깨질 거 같아서...!"

유리아는 귀를 바짝 틀어막고 영문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괴롭게 신음했다. 식은땀이 목덜미를 적실 만큼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원인을 도통 알 수 없으니 시엘이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댔다.

"왜,  이러는 거지? 나 때문인가? 설마 내가 뭐 잘못했나?"


"아니.  때문이다."

에반이 금안을 거두며 시엘의 얼음 방벽을 걷어차서 무너뜨려 버렸다. 튼튼한 얼음이 산산조각 나면서 그 위에 잔뜩 엉긴 채 말라붙어있던 촉수들이 부스러기를 날렸다. 에반은 안에 있던 시엘에게 손짓했다.


"내가 원인이다. 예전 힘을 조금 꺼내서 쓰면서 이명이 일어났어. 살짝만 썼는데도  사달이 나네.  근처에 있으면 계속 저렇게 끙끙 앓을 테니까 어서 데리고 다른 애들이랑 함께 여기서 나가."


"싸움이라면 나도 도울 수 있어!"

"나가는 게 도와주는 거다. 곧 무너질 거라고."

"무너져? 뭐가?"


쿠르르르르!! 에반 대신 예배당 건물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벽, 지반, 천창  곳곳에 뿌리를 내렸던 오염생물이 시들어버리는 바람에 지지가 불안정해진 건물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댁은 어떡하려고?"

"왜? 내가 이런 데서 깔려죽을까봐 걱정 되나?"


"아니."

시엘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유리아의 한 쪽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고 그녀를 부축했다. 아라한이 와서 반대쪽 팔도 부축해줬다. 세 사람과 프릴은 함께 예배당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아이들이 모두 나가는 걸 확인한 에반이 카일 쪽을 돌아봤다. 그는 아이들을 상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온도차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카일에게 말했다.

"어른들끼리 비즈니스 이야기 하는 자리니까 애들은 빠져야지, 안 그래?"


"크르륵... 컥!!"


카그루에게 완전히 지배당해서 인간적 사고가 마취된 상태인 카일이 기괴한 나음(囉音)을 내며 몸을 비틀었다.

"크륵...!"

"비즈니스 이야기는 얼어죽을. 이거 사람 말이  통하겠는데."


파앗! 카일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에반을 향해 돌진했다. 과열된 카그루가 발휘하는 육체 능력은 가공할 만한 수준이었다. 총알 같은 속도로 주먹을 휘둘렀지만 에반은 가뿐하게 피했다.


스윽! 에반이 주먹을 쥐었다. 카일은 판금보다도 단단한 외피로 뒤덮인 양팔로 가드를 올렸다. 빡!! 에반이 주먹을 휘두르자 카그루 외피의 견고함이 무색하게 가드가 뚫리고 카일을 날려버렸다.


와장창! 카일이 조형물에 쳐박혔다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곧바로 몸을 날려 에반을 덮쳤다. 키잉! 카일의 양손에서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났다. 카일은 에반을 향해 인정사정 없이 발톱을 휘둘렀다.


"지금 내 앞에서 발톱을 들이미는 거냐?"

검은 그림자가 에반의 손을 감쌌다. 에반이 카일을 향해 햘퀴듯이 손을 휘두르자 예배당의 모든 어둠이 날을 세우고 휘몰아쳤다. 미지의 힘에 난도질당한 카일이 괴성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카아악!!"

에반은 카일의 목을 조르듯이 붙잡고는 움직이지 못하게 억눌렀다. 카일이 격분한 카그루의 힘을 빌려 마구 몸부림쳤지만 에반의 손은 요지부동이었다. 에반은 반대쪽 손으로 카일의 가슴팍에 있는 카그루를 붙잡고는 집어뜯어버렸다.

"크아아악!!"


강철처럼 튼튼한 카그루가 뜯어져나갔다. 손상을 입은 카그루는 새살을 뿜어내 뜯겨진 부위를 보충하려 했지만 에반이 휘두른 발톱의 특수한 마력 때문에 재생 능력이 듣지 않았다. 결국 손상을 복구하지 못한 카그루가 벗겨지고 기절한 카일의 모습이 돌아왔다.

에반은 카일의 옷 주머니를 뒤져서 하얀 가루가 든 비닐을 꺼냈다.

"그 나이 먹고 한다는 짓이 학생 상대로 삥이나 뜯기냐? 어휴..."

에반은 카일이 유리아에게서 뺏었던 그 물건을 잘 챙기고 무너져가는 예배당 밖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기절한 카일이 이대로 무너진 건물에 깔려서 죽든 말든 에반에게는 아무런 상관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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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그렇게 날씨가 좋았다는  믿기지 않을 만큼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이였다. 무너진 예배당을 살아서 빠져나온 카일은 뒷골목에서 도망쳐서 외곽 어딘가에 버려진 창고를 거점 삼아 밤을 나기로 했다.


치익! 성냥에 불을 붙여서 낡은 랜턴에 불을 붙였다. 몸을 녹일 만한  찾으려 해도 이런 곳에서는 사치일듯 했다.

[그래서 결론은 약을 손에 넣지 못했다 이 말인가?]


통화장치 너머의 목소리가 물었다. 수화기를 쥔 카일이 낮게 신음하며 물음에 답했다.

"정확히는 손에 넣었는데 빼앗겼지. 아무튼 임무에 실패했다. 마크, 암피르, 피텔은 사망했고 제이콥은 어디로 혼자 내뺐는지 없어. 게다가 나 역시 부상이 심한 상황이다."

에반에게 호되게 당한 카일은 잘 움직여주지 않는 관절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무법자라 맷집은 그런대로 튼튼한지 그렇게 당했는데도 죽지 않고 외곽까지 도주하는데 성공했다.

[조직에게 무슨 수로 변명할 셈이지?]

"변명 같은 거 안해. 내가 실패했다는  분명한 사실이니까. 다만."

[다만?]


"조직 쪽에서도 지령의 검토가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인데."


[카일. 변명 같은 거 안한다던 놈이 벌써 나한테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거냐? 일을 망쳤으면 일단 죄송합니다 하고 대가리부터 박아야지 입 열자마자 지령을 탓해?]


"좀 들어라. 내 객관적인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조직에서도 잘 알고 있겠지? 그걸 고려해서 이번 일에 날 투입한 거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라쿠이르는 조직이나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한적한 시골이 아니야. 무료한 일상을 방해받는 순간 돌변하는 마법사들이 동네 곳곳에 숨어있어. 애송이들도 악독하고, 뒷골목에도 조직적인 지휘 체계를 갖춘 세력이 있지."


[지금까지 니가 해치워 온 다른 임무들은 안 그랬나? 카그루 씩이나 되는 장비를 가져가 놓고 뒷골목 애송이들에게 털려서 우는 소리 하는 걸 내가 들어야겠어?]


"내가 시궁쥐도 아니고 고작 뒷골목 애송이들 상대로 털렸을 거 같나?! 조직의 계산을 아득히 벗어난 변수가 하나 개입했어."


[학원 바깥의 인물인가? 기사단 주둔군 놈들은 태만하니까 제때에 너를 막으러 오지 않았을 터인데.]

"학원 바깥의 인물도 아니고, 기사단 놈들 역시 아니였다."

[그럼 달리 누가 있지? 학원측에는 이번에 새로 고용된 NPC 잡부 외에 아무도 없는데?]

"바로 그 놈에게 당했다."


[.....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게 아니겠지?]

"잘못 들은 게 아니다."

[그렇다면 그건 그거대로 안 좋은 소식인데.]


"그자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카일이였으나 제대로  답을 듣지는 못했다.

[깊이 조사할 가치는 없던 것으로 진작에 판명 났지. 인력 파견업체인 No Problem Company에서 단 셋 뿐이라는 S급 NPC라는데... 그래봐야 싸움을 좀  줄 아는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고.]

"웃기는 소리!!"

카일은 크게 소리치고도 몸통의 상처가 욱신거리는 것을 잊었다.


"그 싸움 좀   아는 심부름꾼이 털끝 하나 다치지도 않고 내 카그루를 박살내 버렸다고! 그것도 맨손으로 쥐어뜯어서!!"


[자네가 농담을 하지 않는 성격인 건 나도 잘 알지.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걸 믿으라고 하는 말인지, 믿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럽군.]

"카그루 때문에 미쳐 날뛰느라 기억이 오락가락 하지만... 그놈이 쓰는 마법은 보통 마법이 아니였어. 하빠리 지도원 나부랭이가 가질만한 기량이 아니였단 말이다."

[그런 놈이 왜 학원의 말단 지도원 노릇하면서 마당이나 쓸고 있다는 거지?]

"내 말이 그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학원의 높은 윗선에서 무언가 꿍꿍이가 있어서 심어놨다고 생각할 수 밖에."


[그놈이 S급 NPC 중  명이라면 그 말인 즉, 동급의 실력자가 둘이나 더 있다는 말인데. 그럼 No Problem Company는 도대체 왜 그 정도로 강력한 인력들을 가지고도 단순한 잡심부름꾼으로 밖에 굴리지 못하는 거지?]

"지금 와서 느끼는 거지만  회사는 정말 수상한 게 한  가지가 아니다. 그저 그런 용역업체가 갑자기 거대한 세력으로 부상한 것도 그렇고, 아무리 뒷조사를 해도 출생지 조차 밝혀낼 수 없는 인부들이 꾸역꾸역 솟아나는 것도 그렇고, 오늘 만난 그 놈도 그렇고. 뭔가가 있어. 괜히 일그러진 별이 된  아니겠지. 조직에게 보고해. 앞으로 라쿠이르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학원의 그 지도원에 대해 더 정보를 캐내야 해."

[일단은 알겠다.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해두고 지금은 예정된 지점으로 복귀를 서둘러라.]

"서둘러봐야 날씨도 지랄이고, 길이 이 모양이니 해뜨기 전에는 도착 못 할.... 십새끼! 지 할말 다했다고 바로 끊었네."


덜컹! 그때 갑자기 창고의 문이 멋대로 열렸다. 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거칠게 들이쳤다.


"시발 또 뭐야?"

카일은 궁시렁거리면서 열린 창고 문을 다시 닫았다. 철컥! 문을 닫는 순간 램프에 붙여뒀던 불이 꺼지면서 창고가 어둠 속에 잠겼다.

"가지가지 하네 씹..."

카일은 성냥을 꺼내서 램프에 불을 다시 붙였다. 램프에 불을 밝혀 창고가 환해지자 어느 틈에 창고에 들어와 앉아있던 침입자의 모습이 보이게 됐다.


"뭐, 뭐야 너는?!!"

카일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나자빠지며 소리쳤다. 랜턴의 불빛에 비춰진 침입자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자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침입자의 실루엣은 머리 몸통 팔다리로 구성된 사람의 것이였으나 랜턴의 불빛이 비춰지면서 나타난 부분은 온통 카그루가 뒤덮고 있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카그루 처럼 붉은 색이 아니라 주변의 어둠 보다도  짙은 검은색이였다.

카일은 놀란 나머지 말 조차 제대로 나오질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앞에 나타난 의문의 카그루는 이리들 뿐만 아니라 제국군, 심지어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소 작은 체격에, 전신을 뒤덮은 칠흑의 카그루, 그 가운데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안광. 그 자의 이름은...


"킬링 이터(Killing Eater)?! 3년 전에 사라지지 않았나? 어째서 이런 곳에서 나타난 거지?!!"

킬링 이터가 숨을 내쉴  마다 검붉은 입김이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빽빽하게 쏠린 생체마력 때문에 진한 붉은색으로 충혈된 안광이 등뒤로 펼쳐진 어둠 속에서 불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야수의 둥지를 헤집는 자는 야수의 분노를 마주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지."


킬링 이터가 입을 열고 꺼낸 첫마디는 그것이였다. 킬링 이터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지극히 극소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듣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지극히 극소수지만, 낮고도 음울한 여자의 목소리였다는 소문이 사실이였다.

단기간에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카그루로 전신을 뒤덮고 있음에도 킬링 이터는 인간성이 온전히 유지되고 있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

난색을 감추지 못한 카일은 두 손을 고개 위로 들어 전의가 없음을 표했다.

"멋대로 영역에 침범한 건 미안하네. 내 사과하지. 사정이 있어서 이곳에서 밤을 넘겨야 했던 것일 뿐, 당신의 성질을 건드릴 생각으로 들어온 건 아니니 부디 분노를 거두어 주지 않겠나? 날이 밝는 즉시 이곳에서 나갈 것이다. 약속하지."

카일이 보는 사람 낯설 정도로 신사적으로 말했으나 킬링 이터는 귀담아 들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내 성질을 건드릴 생각으로 내 둥지를 헤집어 놓은 게 아니라고? 뻔뻔스럽구나. 아직도 너와  패거리들이 무슨 짓을  건지 모르다니."

오히려 킬링 이터의 심기를 더욱 건드린 모양이다. 적의를 느낀 카일은 전투를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바로 자신의 카그루를 꺼내 온몸을 덮었다.


카일이 카그루의 발톱을 꺼내 킬링 이터를 향해 힘껏 휘둘렀다. 그러나 킬링 이터는 피하지도 막지도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캉!! 카일의 발톱이 킬링 이터의 외피를 힘껏 긁었지만 얕은 생채기만 남았고 오히려 카일의 발톱이 부러졌다.

쩌억! 킬링 이터의 한쪽 팔이 네 갈래로 갈라지며 쭈욱 늘어났다. 늘어난 팔은 카일을 속박했다. 카일이 발버둥쳤지만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킬링 이터의 반대쪽 팔이 뾰족한 창으로 변했다.


푸욱!! 에반에게 뜯어져서 카그루가 덮이지 않은 가슴팍에 킬링 이터의 창이 깊게 파고들었다. 푹! 킬링 이터는 피에 젖은 자신의 창을 뽑은 뒤 카일을 바닥에 내려놨다.


"영양가는 형편 없어 보이는군."

"살...려..."


"3년이라. 그래. 긴 굶주림이였지. 그런데 오랜 단식을 깬 첫 식사가 이렇게 초라한 밥상이라니."


킬링 이터는 카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카일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다시 눈꺼풀을 들어올릴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킬링 이터는 절명한 카일의 카그루를 붙잡아서는 뜯어내었다. 판금 갑옷 보다도 단단한 카그루지만 숙주의 심장과 뇌가 정지하자 영양분을 얻지 못해 연화되었고, 버섯의 질감이랑 비슷할 정도로 물렁물렁해졌다.


한 웅큼 뜯겨나온 카그루에 듬성듬성 카일의 피부와 살점이 엉겨붙어 있었다. 킬링 이터는 그것들을 털어 걷어내고서는 카일의 카그루를 입에 우겨넣었다.

영양가라던가 식사라는 단어 선택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였다.

"어이, 거기! 누구냐?!!"

덜컹! 킬링 이터가 한창 카그루를 뜯어먹고 있는데 창고의 문이 열리더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고 주인으로 추정되는 우비 차림의 노인이 램프를 들고 서있었다.


"남의 건물에 멋대로 들어와서 뭐하는 거야? 썩 나가지 못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가까이서 램프 불빛을 비추니 형상만 사람의 것이였던 그것은 검은 카그루였다. 게다가 잘 보니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아니, 무언가를 먹고 있는  아니라 누군가를 먹고 있었다. 노인은 군데 군데 뜯겨나가서 손상이 매우 심한 시체의 부릅 뜬 두 눈과 마주쳤다.


"흐이익?!! 키, 키, 킬링 이터?!"

노인은 기겁을 해서 뒤로 자빠졌다. 당장 줄행랑을 쳐야하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몸이 움직여주질 않았다. 킬링 이터의 붉은 안광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노인과 마주쳤다.


"사, 살려줘... 제발...!!"

킬링 이터는  노인에게 흥미 없다는 듯이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카일의 시체에서 카그루를 마저 뜯기 시작했다.

"말해 두겠는데."

킬링 이터의 낮은 목소리가 노인의 귀에 들려왔다. 노인은  다음에 나올 말에 온 신경이 기울었다.


"난 식사를 방해받는 걸 싫어한다."

그 말이 의미하는 건 명백했다. 너무나도 잘 이해한 노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을 취했다.


"으아아아!!"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고를 나가서 비바람 몰아치는 어둠속으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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