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화 〉1-4. 체스보드 (1) (26/88)



〈 26화 〉1-4. 체스보드 (1)
 




무너져내린 벽틈에서 기분 나쁘게 움찔거리는 살덩어리들이 스멀스멀 기어나와 주변을 감쌌다. 거의 모든 성소에 뿌리를 내린 우상은 성소를 오염시켜서 교단이 걸어둔 억제 술식을 스스로 풀어버렸다.


예배당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쿠르르르 건물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벽이나 천장이 떨어져나갈 때마다  틈에서 촉수나 손 같은 것들이 솟아났다. 이제는 발걸음을  때마다 물컹물컹한 살점이 밟혀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피텔이 이 처참한 광경을 보고 아연실색해서 중얼거렸다.


"이런 오염생물을 키울 생각을 한 미치광이 교단이나, 다시 풀어놓는  미친년이나 하여튼 뒷골목에 오래 있으면 다들 정신이 이상해지기 마련인가...?!"


"새삼스럽게 뭘 이 정도로 쫄고 있어? 카일은 오염생물을 아예 몸에다 심었는데. 멍때리지 말고 빨리 정리하자고."


마크는 어깨에 걸어둔 총기를 집어들고 총구를 전방으로 향했다. 공방에서 특수 제조되어 암시장의 개조를 거친 총기만 있다면 복잡한 주문을 외울 필요도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만으로 끔찍한 저주를 퍼부을 수 있다.

"총알 아껴. 울프하울에서 사온 거라 존나 비싸."


"너나 잘하라고. 누가 들으면 니가 사비 털어서 마련한 줄 알겠어."


마크는 궁시렁거리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평범한 총성과는 전혀 다른 거북한 소리와 함께 총구를 떠난 마탄이 진보랏빛 예광을 남겼다. 마탄은 유리아나 아라한에게 직격하지 않고 바닥에 꽂혔다. 마탄이 꽂힌 바닥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더니 마법진을 만들었다.


"엎드려요!"

불길한 흐름을 느낀 아라한이 위기를 직감하고 소리쳤다. 콰쾅!! 곧이어 우렁찬 폭발음과 함께 마탄이 남긴 마법진에서 검보랏빛 마력이 천장을 찍을 기세로 솟구쳐 올랐다. 정제되지 않았고, 절제하는 법도 없는 마력의 불꽃이 사방에 파편을 튀겼다.

탕! 타앙! 마크는 마탄을 몇 발 더 발사했다. 총성이 울리고  뒤에는 시간차를 두고 폭발음이 울리며 사나운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아라한이 부채를 펼쳐서 힘껏 휘두르자 우상의 푸른 안광에서 부정한 힘이 쇄도했다. 피잉!! 우상이 또 다시 파동을 내뿜자 파동이 지나는 곳의 풍경이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졌다. 뿌리가 성소에까지 닿아서 교단의 억제력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파동의 위력이 아까와는 비교할  없는 수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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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져 있었다.

파츠츠츳!! 유리아도 정신을 집중해서 자신의 마법을 있는 힘껏 방출했다. 자연계의 마력과 그 순환을 어긋나게 만드는 노이즈인 악성 이명이 유리아에게서 맹렬하게 용솟음쳤다.


강한 파동과 탁한 이명이 부딪히자 굉음과 함께 충격파가 일어났다. 충격파는 아라한도, 유리아도, 카일도, 마크와 피텔도 모두 날려버리고 예배당 전체를 뒤흔들었다. 쿠당탕!! 낡은 장의자들이 산산조각이 나며 여기저기 흩날렸고, 갈대처럼 한들거리던 촉수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꿈틀댔다.


폭풍이 한 차례 지나고 나자 바닥을 뒹굴던 마크가 다시금 일어나서 마탄을 조준했다.

"으윽...!!"

한 번에 너무 많은 힘을 방출한 유리아가 극심한 이명을 호소하며 풀썩 주저앉았다. 마탄이 장전된 총구가 무방비하게 그로기에 빠진 유리아를 조준했다.

철컥. 탕!!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아라한이 기류를 제어해 일으킨 돌풍이 마크를 덮쳤다. 그 바람에 총구의 방향이 크게 틀어져서 탄도가 엉뚱한 허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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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적을 남겼다.

"릴리스 양, 당신 제게 목숨 한 번 빚지신 겁니다."

아라한은 주저앉아 있는 유리아에게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유리아는 그런 아라한의 손을 덥썩 붙잡고는 확 끌어당겼다.

"으읏...?! 무슨...?"

갑작스런 유리아의 행동에 당황한 아라한의 몸통을 카일의 굵은 발톱이 뚫고 나왔다. 아무리 능글맞은 아라한이라 해도 자신의 몸을 관통한 발톱을 보면 평정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보기 드물게 그녀의 포커페이스가 깨져서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고통이나 그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라한은 자신의 몸이 흐릿하게 반투명해져서 뒤가 비쳐보이는 걸 발견했다.


유리아와 아라한이 물리적 형체가 없어져서 카일의 기습 공격을 흘려보냈다. 파츠츳! 두 사람의 형체가 신호 불안정한 화면처럼 지지직 소리를 내며 일렁거리더니  순간에 팟! 하고 사라졌다. 사라진 두 사람은 카일과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 그런데 긴급탈출을 위해 급하게 쓰고 본 마법이라 좌표를 제대로 못 찍었는지 살짝 높은 곳에서 나타났다. 거기다가 착지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는지 데굴데굴 굴렀다.


풀썩!! 유리아는 지끈거리는 머리와 욱씬거리는 몸을 끌고서 어떻게든 일어난  이번에는 자신이 아라한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이제 빚은 갚은 거겠죠?"


"변제가 참 빠르시군요."


"청산도 빠르게, 환수도 빠르게. 그게 백화 상회의 방식입니다."

유리아는 카일과 이리들을 노려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처음 예배당에 들어와서 카일을 저지할 때의 불안한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평소의 학생회장 유리아 릴리스 답게 결연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설욕을 청산하는 것도, 저 위험한 물건이 뒷세계로 넘어가기 전에 환수하는 것도 최대한 빨라야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백화의 방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잘 됐네요. 곤룡회의 방식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푸슈슉!! 두 사람이 딛고 있는 바닥에서 가시 돋친 촉수 다발이 솟구쳐올랐다. 유리아는 아라한과 함께 촉수나 이빨 달린 살덩이들을 피해다니면서 따졌다.

"이 정신 나간 짓도 곤룡회의 방식입니까? 신뢰도가 떨어지는군요."


철컥!! 마크는 다시금 마탄을 장전해서 목표를 조준했다. 그러는 동안 피텔은 오발 사격에 휘말리거나 카일의 동선을 방해하지 않도록 기다리고 있었지만, 보고만 있자니 지루해졌는지 마크에게 말을 걸었다.

"야, 나 같으면 낙진 술식 모듈이 아니라 백린 산탄 모듈을 사용했다. 대처가 까다롭잖아."


"새꺄 지금 집중하고 있으니까 훈수 두지 마. 그리고 백린 산탄은 이 시발아 저 꿈틀거리는 괴물덩어리들을 괜히 자극해서 뭐할 건데?"

"게다가 나 같으면 이렇게 한 자리에 죽치고 서서 사격하지는 않을 거다."

"아 좀 닥치라고!"

"그리고 말이야. 마탄은 역시 냄새가 톡 쏘지 않아?"

"뭐...?"


마탄을 쏘고 나면 화약을 태우는 초연 냄새 이외에도 고약한 냄새가 난다. 탄환에 마력을 입히기 위해 주술을 걸 때 사용되는 특수한 재료들이 화학 반응을 일으키면서 나는 냄새다. 마탄을 접할 일이 없는 일반인들은 맡아본 적이 없어서 모르고, 맡게 되더라도 주술에 대한 조예가 없으니 눈치채기 힘든 냄새지만, 오염생물의 감각 기관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파팍!! 푸슈슉!! 짙어진 마탄의 냄새를 포착한 촉수 다발이 마크의 주변에서 무더기로 솟구쳐 올라 그를 휘감았다.

"이 시발?!!"

흉측하고 거대한 유충 같은 오염생물이 마크를 휘감고 엄청난 힘으로 끌어당겼다.


"피텔! 이거 좀 어떻게 해봐!"

"기다려!"


피텔은 나이프를 꺼내서 마크를 휘감은 오염생물 몇 줄기를 끊었다. 그리고 땅속으로 끌려들어가던 마크를 힘껏 끌어당겨서 반쯤 빼냈다. 그러나 몇 놈을 끊어도 다시 새로운 놈들이 뻗어나와 마크를 놓치지 않으려고 휘감았다.


"총 줘봐! 총!"

피텔은 마크가 쥐고 있던 총을 오염생물로부터 건져냈다. 총을 챙긴 피텔이 탄환과 모듈을 살펴봤다.

"피텔! 그거 들여다보고 있을 때야?! 빨리 이 빌어먹을 괴물을 쏘라고! 실수로 나까지 다치게 하는 븅신짓 안 할 자신 있겠지?!"

"당연히 자신 있지! 어차피 안 쏠 거니까."

"뭐....?"

오염생물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손톱이 뒤집히도록 바닥을 붙잡고 매달려 있는 마크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피텔의 표정에서 익숙한 광경을 떠올렸다.

"이 시발... 너... 다시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너도 암피르를 쏴죽일  생각을 깊게 했었나? 이 바닥에서는 당연한 방식 아니겠어? 이리 짓 하루 이틀  것도 아니고 알 만큼 알잖아."


"이 개새끼가!! 멋대로 같은 조직원을 죽이고도 그냥 넘어갈  같아?!"

"내가  죽였잖아? 오염생물 때문에 일어난 사고일 뿐이야. 안 그래?"

팍! 피텔은 마크의 손을 짓밟고 걷어찼다. 손을 놓친 마크는 그대로 오염생물에게 칭칭 휘감겨서 땅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땅속을 가득채운 살덩어리 속으로 완전히 파묻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마크는 눈을 부릅뜨고 피텔을 노려봤다. 하지만 결국 우상의 첫 제물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텔은 개운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으로 이젠 자신의 것이 된 총을 만지작거렸다.

"자... 이제 재미 좀 볼까?"

피텔은 총구를 우상의 눈으로 향했다.  푸른 안광이 빛나는 조형물이 이 괴물의 심장부일 것이다. 피텔은 묵직한 저주를 새긴 탄을 총에다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콰쾅!! 조형물의 눈 사이에 적중한 마탄이 폭발을 일으키자 예배당 곳곳에 뻗어있는 살점과 촉수들이 마치 한몸처럼 일제히 움찔거렸다.


피이잉!! 손상을 입은 우상이 아라한의 조종 없이도 막대한 파동을 발산했다. 예배당 전체가 구겨진 페트병 마냥 찌그러지는  같은 환각이 들썩였고 곧 귀가 멀어버릴 만큼 황홀한 공명음과 함께 파동이 예배당 안의 모든 사람들의 정신을 잠시 집어삼켰다.


"으으윽!!"


파동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카그루의 악영향으로 정신이 침식되어가던 카일, 정신 작용계 마법과 악성 이명의 부작용에 항상 시달리는 유리아 두 사람이였다. 유리아는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먹이를 찾는 오염생물 군집이 쓰러진 유리아를 향해 스멀스멀 기어갔다.

"릴리스 양!"


아라한이 유리아를 구하기 위해 다가갔다. 그러나 카일이 그녀의 앞에 나타나 막아섰다. 카일은 파동의 여파 때문에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그의 카그루는 아라한이 돌파하기에는 벅찬 위협이였다. 거기다가


철컥!! 피텔의 총구가 아라한을 향하고 있었다.

"까딱하기만 해도 바로 쏴버릴 거다. 거기 가만히 서서 니가 그렇게 돕고 싶었던 유리아 릴리스가 괴물밥이 되는 걸 지켜보도록 해. 재밌을 거라고?"

마크를 집어삼키고 피의 맛을 떠올린 오염생물 군집이 유리아도 집어삼키기 위해 꿈틀꿈틀 다가갔다. 유리아는 여전히 정신이 들지 않는 상태였다. 아라한은  자리에 꼼짝도 못하고 서서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 꾀를 내보려 했다.


덥썩! 참을성 없는 오염생물 하나가 유리아의 한쪽 다리를 휘감았다. 보다못한 아라한이 유리아를 향해 뛰쳐나갔고 그와 동시에 피텔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멈추세요!"

그때 아라한의 것도, 유리아의 것도 아닌 여자 목소리가 예배당 안에 울렸다. 피텔과 카일이 돌아보니 뒷골목 풍경에  어울리게 고급스럽고 기품 있는 옷차림을 한 순백의 여학생이 있었다. 프릴 루에리아였다.


"시엘 군, 유리아 양을 부탁해요."

"알았어!"

프릴의 뒤에서 또 다른 순백의 학생이 모습을 나타냈다. 시엘 밀리우스였다. 그는 계단을 타고 내려갈 시간도 아까워서 높은 난간 위에서 과감히 뛰어내렸다. 바닥에 꾸물거리고 있던 살덩어리들을 쿠션삼아 충격을 흡수한 시엘은 자신을 휘감으려는 촉수 다발들 틈을 굴러서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앞 뒤 양옆 살펴볼 겨를 없이 곧장 유리아를 향해 돌진했다.


"유리아!!"

시엘은 유리아를 감싸고 얼음벽을 만들어 주변을 감쌌다. 날카롭게 솟아난 얼음벽에 유리아를 노리던 오염생물들이 끊어졌다. 다른 오염생물들이 끈질기게 유리아를 노리고 얼음벽 틈을 파고들었지만 얼음벽이 내뿜는 냉기에 얼어붙었다.

"으읏..."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자 체온이 내려가는 걸 느낀 유리아가 정신이 되돌아왔다. 흐릿하던 초점이 서서히 맞춰지자 뿌옇던 시야가 천천히 맑아졌고, 그녀의 눈앞에 아른거리던 실루엣이 선명해졌다. 눈처럼 새하얀 머릿결과 얼음처럼 맑은 벽안이 인상적인 아리따운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 전에 뒷골목에서 자신을 도와줬던 그 밀가루를 든 소년이라는 걸 유리아는 알아봤다.

"당신...?"

"유리아, 괜찮아?!"


시엘의 품은 눈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차가웠다. 유리아는 자신의 체온이 식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앓는 소리를 내며 심호흡을 하니 날숨에서 하얗게 입김이 서렸다. 얼음  바깥에서는 피텔이 짜증을 내며 마탄을 장전하고 있었다.


"또 마법사야? 시팔 살면서 구경하기도 힘들다는 마법사가  좆만한 뒷골목에만 몇 명이 있는 거야?"

피텔은 마탄의 마력 냄새를 덮기 위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  모금을 코로 뿜고서는 총구를 얼음벽으로 향했다.

"멈추라고 했어요!"

프릴이 피텔에게 소리쳤다. 피텔은 총구를 내리고는 프릴 쪽을 돌아봤다. 그는 입에 문 담배를 잘근 씹으며 저음의 목소리를 냈다.

"귀족 아가씨가 이런 뒷골목 구석탱이까지는 무슨 일로 행차하셨대? 비싼 구두 신겨놨더니 뒷골목에서 오염생물이나 밟고 다니는 거 느그 부모님도 알고는 계시나?"


"제 학우들에게 손대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아요."


"용납? 하아..."


피텔이 짜증스럽게 한숨을 푹 쉬자 뿌연 담배 연기가 쏟아져 나왔다.


"어이, 좆만한 흰둥이 아가씨. 용납 못하면 니가 뭘 어떻게 할래?"

피텔의 말에 프릴이 굳은 표정으로 서서 그를 노려봤다.

"왜? 우리도 엎드려서 빌빌 길 줄 알았나? 하기야 세상이 다 니껀 줄 알고 살아왔지?"


"당신이 귀족과 영주들에게 어떤 불만이 있는지는 관심 없어요. 신분에 상관 없이 저들은 저와 같은 학원에서 함께 공부하는 학우들이예요. 제 학우들에게 손대지 마세요. 경고했어요."


"경고? 푸하하!!"


피텔은  자그만한 소녀의 당찬 기백에 경의를 표하는 대신 배를 잡고  차례 웃음을 터뜨렸다.

"이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야, 내 눈을 좀 봐. 그리고 여길 좀 둘러봐. 여기도 니가 자라온 온실 속과 똑같아 보이냐?"

피텔은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총을 어깨에 걸고 저벅저벅 프릴에게 다가갔다. 프릴은 뒷걸음질 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피텔과 맞섰다. 우드득! 피텔이 주먹 관절에서 뚜둑 소리를 내며 프릴과 거리를 좁혔다. 이윽고 그는 프릴이 남자를 상대할 때 유지하는 거리를 침범해 넘어왔다.


그렇게 프릴의 금남 영역에 첫 발을  딛는 순간 프릴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너무 순식간이라 어디로 사라졌나 둘러보려 고개를 돌려보니 자신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꽁초가 바로 눈앞에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정면을 본 피텔은 깨달았다. 프릴의 모습이 사라진 게 아니라 자신이 천장을 보고 뻗었던 것임을.

"크윽...?!!"

몸을 일으키자 그제서야 욱신욱신 통증이 밀려왔다. 대체 어느 틈에 뭐에 당한 건지 깨닫지도 못했다.


"이 시건방진 년이...!!"


피텔이 성질돋친 목소리로 욕설을 뱉으며 일어나자 프릴이 검지를 치켜세워 피텔을 가리켰다. 파팍!! 자리에서  일어난 참인 피텔이 다시 찌그러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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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꾸라졌다.

"크윽!!"


마력을 역학적 에너지로 전환해서 벡터를 부여하는 것은 아주 단순명료한 결과를 초래하지만, 그 단순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가지가 넘는 이론과 백 가지에 달하는 술식들을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 살짝의 흐트러짐만으로도 결과가 틀어질  있고, 결과가 틀어졌다가는 프릴의 가느다란 검지가 부러지는 정도로 끝난다면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프릴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녀의 두 눈동자는 별이 비쳐보이는 호수와 같이 맑고도 빛나는 힘을 품고 있었다.


"이 시발...!! 죽여버릴 거야!"


피텔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총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곧장 프릴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암만 빡쳤어도 걔는 안 쏘는  좋을 거다. 그 녀석에게 총질하는 순간 니네들 조직 전체가 폭탄 맞는 거야."


"또 누구야!!"

어디선가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피텔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검은 옷차림에, 심드렁해 보이는 표정의 남자가 저벅저벅 예배당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피텔은 총구를 돌려서 그 남자를 조준했다.

"넌 뭐야?!"

피텔이 물었지만 그 남자는 눈길도 주지않고 흉물스럽게 생긴 촉수에게 작은 초코볼 하나를 집어던졌다. 촉수는 초코볼에 반응하지 않았다.

"역시 오염생물도 민트초코는  먹는구나."

"넌 뭐냐고 이 새끼야!!"


"초면부터 이 새끼 박는 건 무슨 말싸가지냐? 됐고, 너 이거 먹을래? 흥분을 좀 가라앉히는데 도움이 될 거야."

남자는 마탄을 겨누고 있는 피텔에게 민트초코볼을 내밀었다. 피텔은 장단맞춰 주지 않고 가차없이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탕!! 총구를 떠난 마탄이 눈부실 정도로 짙은 보랏빛 예광을 뿜었다. 텁! 그러나 남자는 날아오는 총알을, 그것도 마탄을 손으로 잡았다.


"뭣...?!"

그는 손에  마탄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아드득! 까드득!! 탄환을 씹는 소리에 피텔도 프릴도 할말을 잃은 기색이었다.

"어설프고 조악한 주술이 걸린 맛이다. 그래도 민트초코 보다야 먹을만 하지. 삼키기는 싫다는 점은 매한가지지만."

퉷! 그는 찌그러진 탄환을 뱉었다. 그리고는 피텔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NPC 에반 플루토다. 지금은 루나칼립스 학원의 지도원이니까 여기 있는 학생들  내가 책임지고 데려가야겠어. 이의 없지?"


"이의 없기는 개뿔이...!!"


피텔은 숨겨둔 검을 꺼내 에반의 목을 기습적으로 노렸지만 에반이 검을 쥔 피텔의 손목을  붙잡자 꼼짝을  수 없었다. 퍽!! 에반이 무릎으로 피텔의 복부를 찍었다.


"크악?!"


에반은 움츠러든 피텔의 머리를 붙잡고 바닥에 쳐박아버렸다. 와지끈!! 바닥이 충격에 무너지면서 밑에 있던 살덩이들이 줄기를 뻗어 피텔을 휘감았다. 순식간에 양팔과 다리를 묶여서 손쓸 방도가 없어졌다. 피텔은 에반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날 여기서 꺼내! 지도원이라는 작자가 학생들 보는 눈앞에서 사람을 죽이고도 멀쩡히 넘어갈 수 있겠어?!"

그러나 에반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내가 안 죽였잖아? 오염생물 때문에 일어난 사고일 뿐이야.  그래?"

"이 시발...?!!"


피텔은 그대로 오염생물에게 칭칭 휘감겨서 땅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부질없이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치는 피텔 위로 에반이 남은 민트초코볼들을 뿌렸다.


"가는 길 상쾌하시라고 선심 좀 썼다. 역시 난 친절해."


피텔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에반은 난간을 훌쩍 넘어서 카일이 있는 아래쪽으로 뛰어내렸다. 그의 검은 코트깃이 날개처럼 촤락 휘날렸다. 가뿐하게 착지한 에반이 카일에게 다가갔다.

"니가 우리 학원 애들 괴롭혔냐?"


"괴롭혔냐고? 유치한 단어 선택이군. 나는 그저 여기 있는 유리아 릴리스에게 비즈니스가 있었을 뿐인...."


퍼억! 쿠당탕!! 눈깜짝할 사이에 카일 앞에 나타난 에반이 걷어차자 카일이 저만치 날아가서 장의자 잔해더미에 처박혔다. 에반은 쓰러진 카일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크윽...?!!"

"안 아프지? 이건 그저 비즈니스일 뿐이니까. 그렇지? 루나칼립스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S급 출장 비즈니스. 니가 단어 선택한 거니까 불만 없을 거야, 안 그래?"

쿵!! 잔해더미를 해치고 일어난 카일이 양 손의 주먹에 힘을 꽉 쥐었다. 움찔! 꾸득꾸득!! 그의 양 팔을 감싼 카그루가 꿈틀거리면서 더욱 짙은 색으로 변했다. 출력을 강화시킨 카일이 에반을 향해 거칠게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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