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화 〉1-3. 위험한 우등생들 (11) (25/88)



〈 25화 〉1-3. 위험한 우등생들 (11)

예배당에 찾아온 유리아는 아라한을 공격하려는 참이던 카일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이 무엇 때문에 저를 노리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건 저와 당신들 사이의 용건입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들은 관계 없으니 이만 보내주세요.”


“관계가 없다고? 정말로 관계가 없는  알고 있나?”

카일이 시선은 유리아에게로 손끝은 아라한에게로 향한 채 말했다.


“이  때문에 내 부하 하나가 죽었으니 더 이상 관계 없는 부외자라고 잘라 말할 수 없겠지.”


“사람을 죽였다고요…?”


유리아가 당혹스러워하며 아라한에게 사실이냐고 묻는듯한 눈빛을 보냈다. 아라한은 태연자약하게 눈웃음치며 카일의 성질을 긁었다.

“말은 확실하게 해두죠. 릴리스 양이 오해하잖습니까? 쓸모가 없어졌으니 지령 수행에 실패했다는 구실로 당신들이 직접 처분한 거잖아요? 저희는 그냥 팔  쪽만 잘랐을 뿐이라고요. 게다가 친절하게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던져두기까지 했는데.”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눈웃음까지 치며 입에 담는 작태에 유리아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릴리스 양? 왜 그런 표정을 하시나요? 처분 된 이리는 당신을 쫓던 쥐떼의 조종자였어요. 저희의 행동이 '본의 아니게' 당신을 도운 셈인데. 감사하는 표정이 아니네요?"

아라한은 '본의 아니게' 를 또박또박 강조해서 말하며 카일을 흘겨봤다. 능멸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인내심을 발휘해서 도발을 흘려 넘기기에는 이미 카그루 때문에 카일의 이성이 마모된 상태였다.

파팍!! 카일의 카그루에서 또 다시 살벌하게 날이 선 발톱이 솟아났다. 카일은 아라한을 향해 인정사정 없이 힘껏 발톱을 휘둘렀다. 어디선가 날쌔게 튀어나온 허설과 아선이 서로의 검을 X자로 교차하며 발톱을 막아냈다. 캉!! 단단하고 날카로운 것들이 세게 부딪히는 큰 소리가 났다. 아라한은 카일이 발톱을 휘두르는 동안에도 눈썹 까딱하는 정도의 미동 조차 안 하며 그 자리에 서서 히죽거렸다. 카일이 부들부들 이를 악물고 말했다.

"여유 있는  허세 부려봐야 니 계획은 이미 틀어졌어! 유리아를 빠져나가게 할 생각이었지? 나름 열심히 시간을 번 건 칭찬할만 하지만 어떡하냐? 유리아는 보기와는 달리 이렇게 마음 약한 구석이 있어서 혼자 내뺄 줄도 모르거든."


"말씀의 의미를 잘 모르겠군요. 유리아 양을 돕게  건 순전히 본의 아니게 얻어걸린 결과랍니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지껄이나?!"


"충고 하나 드릴까요? 흥분을 가라앉히는 게 좋아요. 너무 소란 피우면 냄새를 풍기게 되거든요."


쿠르르르! 예배당에 뿌리를 거의  내린 우상의 촉수가 꿈틀대는 움직임에 발밑의 바닥이 부자연스러운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교단이 걸어놓은 억제 술식 때문에 감각이 둔감해져 있지만, 자극을 포착하는 순간 오랜 공복을 채우고자 격렬하게 반응할 것이다.

"여기서 절 죽여봤자 릴리스 양을 화나게 할 뿐이겠죠? 더 성가셔질 각오가 되어있다면 그 발톱을 휘두르세요. 아니면 릴리스 양과 협의를 보시고요."


"계속 그렇게 실실 웃으면서 여유부릴 수 있을  아나? 조직이 유리아에게 볼일 없어지는 순간 바로 네 모가지 떨어지는 줄 알고 있어라."

카일은 팔을 감싸고 있는 카그루를 거뒀다. 그리고는 카그루 때문에 광기와 살기가 풀리지 않은 눈으로 유리아를 노려봤다.


"난 지금 기분이 몹시 더럽다. 이 시발 요괴같은  때문에 인내심이 바닥치기 직전이거든.  머리 좋은 아가씨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자리를 좀 비우게 해주시겠습까? 저에게도 대외비(對外秘)라는 게 있는데 이렇게 보는 눈이 많으면 곤란합니다."

"지금  상황이 이미 곤란하다고는 생각 안 하나?"


"더 곤란해진다면 무슨 짓을 해도 잃을 게 없겠죠."

유리아는 떨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본인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상대방의 약점을 붙잡고 승부를 거는 점이 아라한과 똑같았다. 카일은 이 상황을 이해할  없었다. 라쿠이르에 오기 전까지 수많은 지령을 이행하면서 숱한 주검을 밟고, 끊이지 않는 피냄새를 맡아왔다. 이제는 그가 살짝만 송곳니를 드러내도 잘난 척 하고 다니는 부자들이건, 허세가 본능인 귀족들이건, 주제 넘게 야망만 앞서는 이리들이건 모두 꼬리를 내린다.


그런데 이곳 라쿠이르는 다르다. 제복 입은 기사들도 두려워 하던 카일을 교복 차림의 어린 소녀들이 막아서고 있다. 떨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다.


'암만 여자애 하나 잡는 거라 해도 명색이 마법사인데 이리 하나랑 시궁쥐들로 잘 될까?'


'마법사? 흥. 어차피 온실 속에서 자란 철부지 아가씨다. 평생을 제멋대로 살아온 애송이니 좀만 겁먹어도 발 동동 구르면서 어떡해 어떡해만 연발하겠지. 이리까지도 필요 없어. 쥐새끼들 선에서도 간단한 일이다'

카일은 자신의 판단이 빗나갔음을 속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부하 이리들에게 소리쳤다.

"마크! 피텔! 너희는 나가 있어."


"뭐? 그냥 다 죽여버리고 물건만 챙기면 안 돼? 뒷일이야 엄청 성가셔지겠지만 우리는 모로 가도 지령만 수행하면..."

"참견은 필요 없으니 나가! 내가 알아서 해!"

"아 알았어! 후딱 끝내라고!"

마크와 피텔은 무기를 내리고 예배당 밖으로 향했다. 카일은 도도하게 서있는 아라한을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


"이 년은 못 나간다. 내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있으면 또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르니까, 여차하면 바로 아가리를 찢어놓게  옆에 둘 거다! 대외비니 뭐니 해도 이것 만큼은 타협해 줄 의향 없어!"

".....알겠습니다."

유리아는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지만 카일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아라한은 허설과 아선에게 말했다.


"두 사람도 이만 물러나도록 하세요."

"수장님, 제 입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부디 수장님 옆을 지키게 해주십시오."


"제가 허설 양을  미더워 할 리가 없잖아요? 잠시 물러나 있어줄래요?"

허설은 무표정한 얼굴 위로도 불안함이 훤히 보일 만큼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였고 아선도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마디 거들었다.

"그래도요 수장님. 저희 둘이 여기 있어야 수장님이 잡아먹힐 확률이 줄어들 텐데요."


"잡아먹힐... 확률?"

유리아가 아선의 말을 그냥 흘려듣지 못하고 표정이 굳었다. 유리아는 예배당을 휘감고 있는 역겨운 살점들이 자세히 보면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상황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분위기와 장소 세팅이였다. 허설과 아선이 나가고 나자 협박을 가장한 협상을 위한 어색하기 짝이 없는 삼자 회담이 시작됐다.


"귀하신 분들을 모셔놓고서 제대로 앉을 자리도 마련 못해 드려서 어떡하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자가 있긴 했는데 어쩌다보니 다 부숴 버렸네요."


"넌 좀 닥쳐."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아라한이 농을 던졌지만 카일의 매몰찬 반응만 돌아왔다.

"좋습니다. 저는 신경쓰지 말고 모쪼록 편히들 이야기 나누셔요. 그런데 너무 시간 끌지는 말았으면 해요. 뒷얘기는 땅밑에서 하게 될지도 모르거든요?"


아라한이 자신의 등 뒤에 있는 거대한 살덩어리 우상을 힐긋 보며 눈웃음쳤다. 굶주린 우상이 만족하려면 바쳐야  산제물은  명.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 사람도 세 명.

"유리아 릴리스. 용건만 단숨에 마치고 이 토나오는 곳에서 벗어나도록 하지."

카일은 아라한이 발언권이나 주도권을 가질 틈을 내주지 않기 위해 유리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가 뭐 때문에 널 노리는지 알고 있다고 했지?  물건을 가져와."


"....."


유리아는 아라한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가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리들이 유리아를 잡기 위해 시궁쥐까지 동원해서 뒷골목을 쏘다니던 목적인 '물건'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투명한 비닐 비슷한 재질로 밀봉 포장된 하얀 분말이였다. 가루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몸매 관리의 비결인 백화 상회 특제 단백질 보충제 같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물건이라면 이리들이 핏대를 세우고 노릴 리가 없었다.

하지만 평범하고 일상적인 물건이 아니라면, 이리들이 관심 가질 만큼 위험한 물건이라면, 어째서 고등학생인 유리아의 옷섶 너머에서 나오는가?

"넘겨라."


카일이 유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리아는 쉽사리 물건을 넘기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보아하니 저 수수께끼의 물건에 걸린 보안은 유리아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백화 상회 전체에 비상이 걸릴만한 사항인듯 했다.


"빨리 넘겨라."


"백화 상회는 오늘 일을 가벼이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조직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당신들이 벌인 행패의 값을 빠짐없이 치르게  겁니다."


"맘대로 해. 그건 나중 일이지."


"저런. 백화 상회를 적으로 돌리다니 아무리 뒷세계 조직이라지만 갈퀴날들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겠네요."


"갈퀴날들...?"


"아차. 유리아 양은 이 사람들의 조직 이름을 몰랐었죠? 이거 또 골치 아프게 했네요. 이번에도 본의는 아니였어요, 알죠?"


"닥쳐."


"라쿠이르에 지부를 새로 개척하는 중이라 했는데 백화 상회같은 거대 기업의 경제 보복을 직격탄으로 맞았다가는  비즈니스가 돌아가겠어요?"

"암피르 새끼... 주둥이 가볍게 불어댔군."

아라한은 암피르에게서 캐냈던 조직의 정보를 유리아에게 흘려보냈다. 유리아에게 조직에 대한 정보가 너무 많이 노출되어 버렸으니  임무가 끝나고 나면 조직은 백화 상회의 압박과 공세에 대비하기 위해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카일은 일을 이렇게 번잡하게 만든 원흉인 아라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년이 내 조직원을 납치해서 고문하고 팔까지 잘랐어. 갈퀴날들은 조직원을 건드린 놈들에게 보복하지 않을 만큼 미적지근한 조직이 아니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겠지, 유리아 릴리스? 니가 저 년과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년이 어디서 불어터진 시체로 발견되더라도 네가 따질 일이 아니다. 알겠나?"

유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침묵으로 태도를 일관했다.


"자꾸 저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시네요. 당신의 부하가 먼저 제 부하를 다치게 했어요. 의도적으로 설치한 함정에 다리를 크게 다쳤죠."


"그러니까 신경 끄고 가던 길이나 마저 갔으면 처음부터 다칠 일도 없었잖아!"

"신경 끄라고요? 이 뒷골목은 저희 구역입니다. 남의 구역에서 여차하면 수사관이 들이닥칠 만큼 위험한 짓을 벌여놓고는, 거기에 남의 조직원을 다치게 해놓고서는 신경을 끄라는 말씀이십니까?  당신도 아까부터 조직의 논리를 거듭해서 들먹였으니, 저 역시 마찬가지로 같은 논리를 따르는 중이라는 사실은 부정 못하시겠죠?"

아라한은  마디도 지지 않고 카일에게 따졌다.


"저희 역시 조직원을 건드린 놈들에게 보복하지 않을 만큼 미적지근한 조직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나에게 무슨 보복을 하려고?"


"저희 구역에서 허가 없이 무기와 아티팩트를 사용한 것, 구역의 주민들과 싸움을 벌인 것 등등. 당신이 일으킨 물의에 대한 배상은 유리아 양과의 거래를 중개한 수수료 명목으로 받아야겠습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훼방이란 훼방은 다 놓고서 뭐? 중개?! 거기다가 수수료 명목으로 배상금을 받겠다고?!"


"배상금이 아닙니다. 돈으로 받겠다는 말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을 텐데요. 제가 고작  따위나 벌겠다고 이런 수고를 하는 거로 보이시나요?"

"그럼 원하는 게 뭐야?"

휘익! 아라한이 작고 검은 무언가를 카일에게 건네듯이 던졌다. 카일이 낚아채서 살펴보니 작고 납작하지만 가운데가 볼록하게 솟은 검은 돌이였다.


"바둑돌...?"


"왼손잡이시군요."

아라한이 날아오는 바둑돌을 무의식적으로 낚아챈 카일의 왼손을 지그시 보며 부채를 접었다. 부채를 거둔 그녀는 도발적인 표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당신의 왼팔을 잘라가겠습니다."


".....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당신의 부하도 오른팔을 잘리기 전에 그런 반응을 보였었죠."

"더 이상 정신빠진 개짓거리에 낭비할 시간이 없어. 유리아 릴리스! 어서 물건을 넘겨라!"


"릴리스 양, 이 자의 왼팔이 멀쩡하게 붙어있는 이상 절대로 거래를 성사시키게 두지 않을 거랍니다."

카일은 물건을 빨리 내놓으라고 독촉했고, 아라한은 넘기지 말 것을 요구하는 눈치였다. 유리아는 혼란스러웠다.


"애초에 이건 거래가 아니야! 성사시키고 자시고가 아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유리아의 것을 강탈하는 것일 뿐이라고!  패거리와의 뒷풀이는 나중에 확실히 해둘 테니, 지금은 나와 유리아 사이의 용건에  이상 끼어들지 마라!"

결국 폭발한 카일이 아라한에게 소리치고는 유리아의 손에서 물건을 휙 낚아채서 뺏었다. 목표를 달성한 카일은 물건을 안주머니에  챙겨넣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길! 5분도 안 되서 끝났을 일을 가지고 대체 얼마나 시간을 허비한 거야?!"


카일은 더 이상 볼일이 없어진 예배당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아라한이 지어보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본 순간 발걸음이  멈췄다. 촤락! 아라한은 다시 부채를 펼쳐서 미소를 가리고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 요구를 묵살하시려 하다니. 당신의 왼팔. 강제로 징수할 수밖에 없겠군요."


"뭐라고?"

파스슥. 카일이 왼손에 쥐고 있던 바둑돌이 바스라졌다. 카일이 손을 펼쳐 살펴보니 새카만 가루가 손에 찐득하게 묻어있었다. 평범한 바둑돌이 아니라 바둑돌 모양으로 뭉친 검은 가루에 특수한 코팅을 씌워놓은 것이었다. 코팅이 벗겨지자 나온 가루에서는 카일에게 익숙한 기묘한 냄새가 났다

"신경 자극 유도제...!"


파팟!! 푸슈슉!! 유도제의 냄새를 맡은 촉수들이 바닥을 뚫고 솟구쳐 나와 카일의 왼팔을 휘감았다. 그리고는 엄청난 힘으로 카일을 끌어당겼다.


"제길!!"


촉수들이 꽈악 조이자 뾰족한 이빨이 팔에 파고들면서 피가 났다. 카일이 저항해봤지만 결국 땅속으로 끌려들어갔다. 카일이 끌려들어간 바닥의 구멍에는 기분 나쁜 살덩이들만이 남아서 꿈틀대고 있었다.


"대체 저 괴물은 뭐죠...? 어떻게 이런 오염생물이 라쿠이르 한복판에...!"

"릴리스 양, 아직 엉뚱한 곳에 시선이 팔려서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저나 당신이나 이보다 더한 괴물을 상대해야 하니까요."


"더한 괴물...?"

푸샥!! 파바박!!! 카일이 땅속으로 끌려들어간 구멍에서 갈기갈기 찢긴 살점이 분수치듯 솟구쳤다. 뒤이어 엄청난 폭발과 함께 박살난 바닥의 벽돌이 기분 나쁘게 움찔거리는 살덩이들과 함께 흩뿌려졌다.

"다행히 릴리스 양의 중요한 물건이 오염생물의 밥이 되지는 않았네요."


아라한이 그렇게 말하고 뿌옇게 피어오른 흙먼지를 보며 빙긋 웃었다. 흙먼지를 거두고 모습을 다시 나타낸 카일은 카그루로 양 팔을 감싸고 있었다.


"과연 중견급 이리는 개인 무력도 남다르군요. 괴물의 목구멍에 넘어가서도 태연히 돌아오다니."

아라한이 부채를 만지작거리자 우상이 다시 눈을 떴다. 예배당과 성소 곳곳에 뿌리를 내려 힘을 흡수한 우상은 완전히 깨어나서 바닥과  곳곳에 촉수를 드리우고 있었다. 우상의 살점 뿌리가 파고들어 너덜너덜해진  한 쪽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벽 너머 공간은 시뻘건 고기벽이 꽉 채우고 꿈틀거리고 있어서 끔찍한 풍경을 하고 있었다. 지금 예배당의 벽과 바닥 전체가 벽돌을 걷어내면 속에는 저렇게 되있다는 뜻이다.

"어이, 방금 뭐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무슨 일이.... 이 씨발?! 이게  뭐야?! 뭐가 어떻게 되가는 거야?!"


폭발음을 듣고 안으로 들어온 마크와 피텔이 점액을 질질 흘리며 꿈틀거리고 있는 육벽을 보고 기겁을 해서 소리쳤다. 마크는 침착하게 마탄을 꺼내서 장전했고, 피텔도 정신을 차리고 무기를 집어들었다.

이리 셋이 앞 뒤로 무기를 들고 있고, 지금 서있는 곳은 폭주한 오염생물의 식탁 한복판. 절체절명의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라한은 부채 위로 드러난 눈으로 요사스러운 눈짓을 하고 있었고, 유리아 역시 침착하게 노이즈를 일으켜 마법을 사용할 태세를 갖췄다.

"재밌어지겠네요. 안 그런가요, 릴리스 양?"

"당신의 생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은 힘을 합쳐 이 위기를 넘기는 게 우선이겠죠. 저와 당신 둘이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둘이서라고요? 아뇨, 아직  사람이 남아있습니다. 제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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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는 건지 알려주는 정도는 괜찮잖아!"

"자꾸 시끄럽게 굴면 그냥 천설당에다가 던져버리고 갈 거다. 애초에 따라오라고  적도 없는데  성가시게 따라붙어서는."

뒷골목 심층부에 내려와 거닐고 있는 에반 플루토는 아까부터 귀찮게 쫑알거리는 은발의 소년에게 핀잔을 줬다. 눈처럼 새하얀 은발의 소년은 시궁쥐에게 쫓기던 유리아를 도와준 배달부 소년 시엘 밀리우스였다. 그는 마법학원의 학생이지만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누르워에서 배달부 알바를 했기 때문에 뒷골목의 지리에 빠삭하다고 자신 있게 앞장 섰지만, 심층부에서부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너 솔직히 말해서 여기 뒷골목 심층부까지 들어와 본 거는 처음이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쫄리면 가서 알바나 마저 해."

"유리아가 위험해 처했는데 배달이나 하고 있을 때야? 댁이 뜯어말린다고 해도 난 무조건 끝까지 따라갈 거야."


"내가 뭐하러 뜯어말려, 귀찮게시리. 혼자 설치다가 이상한 거에 물려서 죽지나 마라. 케어 안 해줄 거니까."

"칫! 말하는  하고는!"


"그나저나 넌 괜찮겠니, 프릴?"

에반은 거리를 살짝 두고 떨어져서 뒤따라오고 있는 프릴 루에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걸어가던 에반이 갑자기 멈추자 화들짝 놀란 프릴이 뒤로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네, 네?! 뭐가요...?"

"너까지 따라올 필요는 없잖아. 너같은 귀족 영애가 이런 뒷골목 깊은 곳에, 그것도 호위도 대동하지 않고 왔다는  알면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귀찮아질 텐데?"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프릴은 뒷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에반은 대답을 마저 들으려 하지 않고 마저 앞으로 나아갔다.

"됐다. 그냥 어디 가서 누가 물어보면 내가  말렸다고 말하지만 말아줘."

"네...!"


세 사람은 프릴이 수색 마법으로 찾아낸 지점으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그곳에는 수 많은 동방인들과 곤룡회 대원들이 어느 예배당 건물 앞에 모여있었다.

"자, 자 실례들 하겠습니다. 그냥 수상한 사람일 뿐이니까 너무 신경들 쓰지들 마시고."

에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불청객을 쳐다보는 시선들을 무시하고 인파를 뚫고 지나갔다. 동방인 무리를 지나서 나와보니 버려진 종교시설 건물이 있었고 갈퀴날들 소속 이리 제이콥이 마크와 피텔이 없는 동안 혼자서 문앞을 지키고 있었다.

"넌 뭐야?"


에반이 저벅저벅 다가오자 제이콥이 그를 막아섰다. 에반은 태연한 목소리로 예배당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안에 볼일이 있어서. 들어가려고."

"누구 마음대로? 꺼져."

"여기가 니들 사유지도 아니잖아? 뭔데 니들이 허락을 내리고 앉았어?"

"꺼지라고 했다."

제이콥이 컴뱃 나이프를 에반의 목밑에 가져다대고 위협했다.

"무서워서 얼어붙기라도 했나? 멀뚱히 서있지 말고 빨리 꺼지란 말이..."

텁! 에반이 제이콥의 관자놀이 양쪽을 손아귀로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의 머리로 예배당 문을 세게 찍어버렸다. 콰쾅!! 제이콥의 뒤통수로 들이받자 두터운 철문이 떨어져나갔다. 문이 열렸으니 볼일을 마친 제이콥의 머리통을 놓자 그는 이미 기절해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픽 쓰러져버렸다.

"들어가자. 싫으면 여기 있어도 상관 없고."


에반이 프릴과 시엘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두 사람은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의향이 없었다. 에반이 앞장서서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도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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