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1-3. 위험한 우등생들 (10)
카그루. 그 이름은 '미치다, 광기에 사로잡히다' 라는 뜻의 아민어 동사 'kagru' 에서 유래했다. 12년 전 대륙을 비극으로 적신 안개전쟁 때 안개로 인해 뒤틀린 정령이 그 근원으로, 다른 생물체에 침식하여 변이를 일으켜 생태계에 간섭한다. 안개로 인한 오염이 복구불가 수준으로 심각한 '꿈꾸는 숲'에는 카그루의 숙주가 되어 흉폭해진 오염생물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카그루는 오염시킨 숙주를 단단한 외피로 뒤덮는데 연화와 경화를 유동적으로 반복하는 이 외피는 관절의 움직임을 전혀 방해하지 않을 만큼 유연한 동시에 총탄도 막을 만큼 견고하다. 뿐만 아니라 안개로 인한 오염으로 인해 탄생한 개체기 때문에 놀라울 정도의 마법저항력을 가지고 있다.
부정적인 여론을 무릅쓰고 카그루를 인위적으로 인체에 배양하여 아티팩트로 만든 결과물은 가공할 만한 것이였다. 한번 발동시키면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방어력과 마법저항력을 두루 갖춘 갑주가 사용자의 신체를 감쌀 뿐더러 마법사의 고질적인 약점인 신체 능력도 비약적으로 상승시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점이 없는 만능 아이템은 아니다. 카그루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정신 침식이 심각하다는 점이다. 본디 자연 상태의 카그루가 숙주의 공격성을 증폭시켜서 난폭하게 만드는 성질이 있던 만큼, 아티팩트 카그루 또한 사용자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고 호전성을 미친듯이 증폭시키는데, 문제는 이 상태가 지속되면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져 본능적인 폭력성에만 몸을 맡기게 되며, 결국은 뇌에까지 손상을 일으킨다. 무리하게 강화시켰던 마력 회랑과 신체에 극심한 후유증이 따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사용자를 신체나 정신이나 모두 철저히 망가뜨리는 이 무시무시한 아티팩트는 제작도 보유도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런 달콤한 유혹을 순순히 포기할 만큼 인간은 순진한 존재가 아니다. 지금도 암시장에서는 카그루 시술을 제공하는 병원을 찾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음지의 공방에서 연구와 업그레이드를 거듭하고 있다.
"엄청 징그러운 동충하초가 팔을 다 파먹은 거 같네요. 징그러워라."
"빤히 구경하고 있지 말고 전투에 만전을 기해라, 아선. 상대는 말 그대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다. 하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역겨워."
"남 일 같지가 않아서요?"
"입 다물고 집중해."
"넹..."
허설은 손도끼를 쥐고 카일을 막아섰다. 아티팩트 역장까지 단숨에 박살내는 허설의 도끼가 카일의 머리를 노리고 종축을 그렸다. 카일은 카그루로 뒤덮인 팔을 들어올려 도끼를 막았다. 캉!! 카그루는 질척질척해 보이는 살점과 같은 외견과 달리 어마어마하게 견고했다. 캉!! 쾅!! 허설이 수 차례 힘껏 도끼질을 하자 징그러운 살점이 튀겼다.
'카그루에 손상을 입히다니...'
방어에만 집중하던 카일이 공격할 틈을 파고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캉! 허설이 도끼로 카일의 주먹을 막아냈지만 카일은 물러나지 않고 계속해서 허설을 밀어붙이며 파고들었다. 정면에서 힘겨루기를 하자 카그루로 강화된 완력을 이기지 못하고 허설의 열세가 역력해졌다. 허설은 버티려 해도 점점 뒤로 밀려났다.
"언니가 힘으로 밀리는 걸 다 보네. 보통이 아니잖아 저 동충하초."
아선이 손짓하자 보랏빛 파문이 일렁이더니 허공에 인장을 몇 개 띄웠다. 허공에 나타난 인장들은 카일을 감싸고 떠있었다.
곡사검(曲蛇劍) : 교(咬). 강철과 같이 날카롭게, 그러나 굽이치는 뱀과 같이 유연하게. 보랏빛으로 물든 제로식 칼날이 꾸물꾸물 휘면서 파문을 따라 물결쳤다. 착시를 걸어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건지, 실제로 검이 뱀처럼 구부러지고 있는지는 베이고 난 다음에야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영식이로 이 흐름이 되려나. 암만 생각해도 무리긴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팟! 아선의 모습이 보라색 잔영을 남기고 사라졌다. 사라진 아선은 인장이 있는 곳에서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카일이 반격태세를 갖추려 했을 때는 이미 아선의 모습이 또 다시 사라지고 잔영만 아른거리고 있었다. 바로 뒤에 있는 인장을 타고 나타난 아선이 검을 휘두르자 보라색 궤적이 일렁거렸다.
팍!! 반사적으로 공격을 막아냈지만 아선은 여기서 나타났다가 저기로 사라지기를 빠르게 반복하며 카일의 허를 찔렀다. 아선을 신경쓰면 허설이 파고들고, 허설을 막으면 아선이 뒤를 친다. 보통 상대였다면 속수무책이였겠지만, 카일은 카그루의 극도로 예민한 감각과 반사신경으로 빈틈을 최소한으로 했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카일이 아선의 움직임을 읽고 가까이에 있는 어느 인장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 인장을 타고 모습을 나타낸 아선이 부랴부랴 검을 휘둘러 방어했지만 카그루의 강한 힘에 튕겨져 날아갔다.
"으앗!!"
아선이 저만치 날아가서 데굴데굴 굴렀다. 허설이 카일을 향해 다시 도끼를 휘둘렀다. 카일은 이번에는 공격을 막지 않고 팔을 힘껏 휘둘러 맞받아쳤다. 쾅!! 묵직한 충돌음과 함께 허설이 놓쳐버린 도끼가 빙글빙글 돌다가 벽에 박혔다.
빡!! 카일의 반대쪽 주먹이 복부에 정확히 꽂혔다. 명치는 가까스로 피해갔지만 그럼에도 묵직한 유효타였다.
"크윽...!!!"
허설의 미간이 고통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녀는 움츠러들지 않고 두 다리에 힘을 팍 실어서 자세를 고정시킨 뒤, 숨을 흡 참고 이를 악물어 데미지를 이겨내고 반격으로 하이킥을 날렸다. 빠각! 카일이 팔을 들어올려 발차기를 막아냈다. 그대로 그녀의 발목을 한손으로 움켜잡고는 한 바퀴 돌려서 집어던져버렸다.
와장창! 카일이 내던진 허설이 장의자를 무너뜨리며 나뒹굴었다.
슥! 옅은 피냄새가 나자 카일이 반응해서 돌아봤다. 제단 앞에 선 아라한이 단검으로 자신의 손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극도로 호전적이고 흉포한 카그루는 약간의 피냄새에도 쉽게 흥분한다. 그리고 카그루의 흥분은 사용자의 정신에 가해지는 부담을 더욱 가중시킨다.
카일이 카그루로 뒤덮인 주먹에 힘을 주자 카그루가 움찔거렸다. 아라한은 자신의 손에 낸 상처의 피를 제단 위의 성배에 흘렸다. 피의 맛을 본 제단이 깨어나자 담쟁이 덩굴처럼 스물스물 뻗어나온 정체불명의 살점이 벽 한면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조형물을 뒤덮기 시작했다. 조형물을 완전히 뒤덮은 살점들은 피부가 되어 조형물을 감쌌다.
"오염생물계 아티팩트...?"
"교단이 자기들만의 의식을 위해 사용하던 물건이예요. 무슨 의식을 행했는지는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어째서인지 저도 작동시킬 수 있더군요."
아라한의 등 뒤에 있던 형체 불분명한 조형물은 사실 거대한 인조 생물의 뼈대였다. 그 뼈대가 흉측한 살점을 뒤집어쓰자 비로소 괴물의 용모가 뚜렷해졌다. 벽에 붙박혀서 스스로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뿌리를 내려 예배당 건물을 파고들었다.
"한 번 깨어난 이상 굶주림을 충분히 채워주지 못한다면 깨운 사람이 대가를 치르게 되죠."
"굶주림? 대가?"
"흠... 오래 굶었더니 꽤나 시장한 모양입니다. 보아하니 세 명은 집어삼켜야 다시 잠들겠는 걸요?"
"이 건물에는 지금 네 명 뿐인데?"
"겁나시나요? 살아나갈 가능성을 높이고 싶으시다면 바깥에 있는 동료들을 불러들이셔도 상관 없습니다. 물론 저희쪽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 들어오지 말라고 미리 지시해뒀고요."
성배에 피를 흘려 제단을 깨운 아라한이 붉게 젖은 손을 꽉 쥐었다. 피 보다도 붉은 두 눈동자가 카일을 향하고 있었다.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 쓴 요호사사(妖狐邪蛇). 누구라도 그녀의 적안을 보면 그런 감상이 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제대로 미친 년이군."
"글쎄요. 적어도 저는 이걸 제 팔에다 심어두지는 않았는 걸요."
파앗! 카일은 민첩하게 몸을 날려 아라한을 덮치려 했다. 그녀를 호위해야 할 허설과 아선은 이미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어서 늦기 전에 카일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라한이 호위 병력 없으면 무방비하다고 생각했다면 그녀를 너무 우습게 본 것이다.
아라한이 부채를 휘둘렀다. 피잉!! 시뻘건 살갗에 뒤덮인 거대한 우상이 눈을 뜨자 보랏빛 안광이 나타났고, 우상의 심장에서 뿜어져나온 파동이 예배당 전체를 뒤흔들었다. 파동에 밀쳐진 카일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크윽...!!"
쓰러질 때의 탄성을 반동삼아 재빠르게 일어났지만, 머리가 지끈지끈 울리고 눈의 초점이 자꾸 어긋났다. 아라한이 부채를 한 번 더 휘두르자 다시금 우상에서 파동이 일어났다. 피잉!! 파동이 예배당을 휩쓸자 우상의 끔찍한 외견에 안 어울리게 청아하고 깨끗한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너... 그 공격은 너의 부하들에게도 피해가 가는데도 상관 없다 이거냐?"
"저희는 요령이 있어서 이런 흐름은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괜찮아요. 여기에 있는 이들은 모두 저를 위해 죽고자 여기까지 따라왔는 걸요."
허설과 아선은 예배당에 뿌리내린 오염생물이 발밑에서 먹이를 찾아 꿈틀거리고 있는데도, 우상이 일으키는 부정한 힘의 파동을 맞으면서도 아라한을 호위하기 위해 무기를 쥐고 있었다. 큰 돈을 벌어들일 비즈니스도, 거역할 수 없는 조직의 지령도 없는데 대체 아라한의 어떤 점 때문에 이렇게 목숨까지 걸고 충성하는가? 카일은 그게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보다도 당신이 지금 저희들 걱정해주실 때인가요?"
지끈거리는 두통이 또 다시 카일을 덮쳤다. 카그루는 사용자의 육체를 연료로 삼고, 정신에 매연을 버린다고 할 수 있다. 극도의 정신적 피폐가 부작용이기 때문에 정신계 공격에 특히나 취약하다. 카그루를 처음 봤음에도 아라한은 그 점을 짚어내서 우상을 깨워 정신 파동을 일으켰다.
"영악한 년...!!"
카일은 위태로운 상황임에도 카그루를 거두지 않고 오히려 출력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꾸르륵 꾸륵. 카그루의 양 팔을 감싼 카그루에서 돌기가 솟더니 색이 더 짙게 변했다.
고문해서 정보를 토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은 접고 그냥 단숨에 숨통을 끊어버리기로 했다. 꾀를 부릴 틈을 조금이라도 더 줬다가는 정말로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
파앗! 카그루의 출력을 올리자 신체능력도 더 상승했다. 부채를 휘두를 틈도 주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라서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아라한의 바로 앞까지 들이닥쳤다.
푸슉!! 과열된 카그루가 우상의 후각에 포착됐는지 앙상한 손처럼 생긴 촉수 몇 줄기가 바닥에서 솟구쳐서 카일을 휘감으려 했다.
"꺼져!!"
카일의 오른손 카그루에서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났다. 카일이 발톱을 힘껏 휘둘러 자신을 가로막는 촉수들을 절단했다. 발톱에 찢겨나간 살점이 튀기면서 역한 냄새를 풍겼다.
"지금 당장 갈기갈기 찢어서 저 괴물의 먹이로 던져주지!"
카일의 발톱에 찐득한 체액과 살점이 엉겨있었다. 카일은 카그루 때문에 처음의 냉정함과 침착함을 완전히 잃고 폭력성만 남은 상태였다. 저벅저벅. 카일이 아라한을 죽이러 다가가는 동안에도 아라한은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그 자신감은 뭐지? 아직도 개수작 부릴 게 남아있나?"
"수작 부릴 게 남아있냐고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나요. 남아있는 게 아니라... 이제 제대로 시작하는 건데."
"뭐?"
덜컹! 예배당의 문이 열리고 마크와 피텔이 누군가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벽 한 쪽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살점덩어리 우상을 보고 흠칫했다. 카그루를 꺼낸 카일과 엉망이 된 예배당 내부를 보니 한창 치열한 접전을 벌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카일. 유리아 릴리스가 왔어."
마크와 피텔이 옆으로 비켜서자 그곳에는 유리아 릴리스가 서있었다. 뒷골목에서 도망치지 않고 카일이 남긴 까마귀들을 뒤쫓다가 아라한이 깨운 우상의 파동을 감지하고 찾아온 것이었다.
항상 차분한 무표정을 유지하던 유리아의 얼굴에는 불안함과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유리아는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카일에게 말했다.
"무관한 사람을 해치지 마세요. 이곳에서 한 목숨이라도 앗아갔다가는 제 모든 것을 동원해서 응징할 겁니다."
온갖 살상용 마도구로 무장한 이리 둘이 양 옆에 서있는데 무기도, 아티팩트도 없이 혼자인 유리아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 모습에 피텔이 낄낄 웃어댔다.
"어허, 이걸 우리를 나쁜 놈들로 몰아가네. 저년이랑 저년 떨거지들이 먼저 시비 걸었다고? 그리고 말이야. 돈도 많은 아가씨인데 속옷은 좀 화려한 걸로 입으라고 응?"
그는 좀 전에 챙겨온 유리아의 속옷을 주머니에서 꺼내서 그녀에게 집어던졌다. 다분히 모욕적인 도발이였지만 유리아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용건은 저에게 있지 않습니까? 이제 이 사람들은 보내주시죠."
"용건이라. 이 동방인들이 대체 무슨 의리로 너를 감싸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꽤나 애먹게 만들었다고."
"저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냐? 그러면 죽여버려도 상관 없는 거겠지?"
"잠깐!!"
유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