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1-3. 위험한 우등생들 (9)
뒷골목 심층부에 모인 곤룡회는 카일을 비롯한 이리 일당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오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찾으러 가면 그만이다. 곤룡회와 이리들의 정면충돌은 판을 깔아놓은 설계자의 의도이기에 피할 수 없었다. 그 장소와 타이밍의 사소한 차이만 허용될 뿐.
이 소동에 간섭하여 이리들의 의도와는 자꾸 다르게 흘러가도록 판을 꼬아놓은 설계자는 곤룡회의 수장인 아라한이었다. 아라한은 수많은 곤룡회의 대원들과 하숙촌의 동방인들이 지키고 있는 곳에서 천의와 마주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리들이 지금 잔뜩 독이 올라 자신을 쳐죽일 각오로 오고 있음에도 아라한은 사뭇 무관심한 작태였다.
아라한이 검은 돌을 놓자 천의는 이미 수읽기를 다 해뒀는지 고민하지도 않고 흰돌을 뒀다.
"도통 늘지를 않으시네요. 전략은 매번 다르지만, 실수는 매번 같은 실수를 거듭하셔요. 그러니 시도는 다양하나 결말은 한결 같으십니다, 수장님."
천의가 흰돌을 두고는 단수에 몰렸던 검은 돌들을 모두 잡아냈다. 아라한이 반격을 꾀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이리들이 바로 근처까지 왔다.
"천의 양, 대답해주세요. 제가 지금 실수하고 있는 걸까요? 제가 끌어들인 이리들은 우리 곤룡회와 아무 관계가 없었어요. 그들이 루나칼립스 학원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더라도, 학원에 드리우는 음모의 그림자야 우린 외면해도 그만이죠. 지금 제가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제 말의 의도를 짚지 못하셨군요, 수장님."
천의는 사석(死石)을 바둑돌통에다 집어넣으며 말했다.
"어째서 수장님은 저와의 대국에서 늘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시는지 아십니까?"
천의는 아라한을 바라봤다. 온갖 방법으로 본심을 감추고 진심을 비트는 아라한과는 달리 천의는 자신의 표정을, 눈빛을, 의도를 가리는 법이 없었다. 천의의 곧은 시선은 아라한이 세워둔 교묘한 벽을 막힘 없이 뚫는 천적과도 같았다.
"돌을 집은 순간 수장님이 이겨야 하는 건 바로 접니다. 마주보고 있는 상대란 말이죠. 그런데 수장님께서는 저를 보시는 일이 없습니다. 항상 자기자신과의 싸움에만 빠져 계시지요."
천의가 검은 돌 하나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서 보란듯이 들어올렸다.
"자기자신을 의심하는 건 모든 싸움이 끝난 뒤 스스로를 돌아볼 때가 시기적으로 알맞지 않겠습니까? 수장님이 벌인 판을, 두신 수를 믿으십시오."
천의가 고개를 돌려 옆을 봤다. 이리들이 도착했다. 경계하는 분위기가 고조되며 사람들이 술렁였다.
"때가 됐습니다. 가실까요?"
천의와 아라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조금 전에 학원에서 아라한과 교전을 벌였던 마크, 피텔, 제이콥 이렇게 세 명의 이리들 외에도 또 다른 이리가 있었다. 흉터 뿐만이 아니라 풍기는 기운 부터가 음지 세계에서의 깊은 관록이 느껴지는 관상이었다. 즉, 위험한 인상이었다.
아라한이 다가오자 세 명의 이리들, 특히 마크가 바득바득 분통을 내며 격하게 아는척 해줬다.
"얼굴 기억해 두겠다고 했는데 참 빨리도 다시 보네? 그때 쏴죽이고 회를 떠놓지 못한 게 참 아쉬웠는데 이렇게 손수 기회를 마련해주고 말이야."
곤룡회와 하숙촌 동방인들은 이리들을 에워싸고서 위협태세를 무르지 않았다. 비록 머릿수 차이는 압도적이라고 하나 중견급 혹은 그에 준하는 이리들의 위험성은 결코 숫자로 찍어누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너 아까 나한테 뭐라고 했었지? 성능 좋은 마탄을 구비해오라고? 자, 여기 가져왔다 시발련아. 이번에는 잔재주 부려도 못 막을 거다. 어때? 피 새는 구멍 하나 더 생길 생각에 신나지?”
마크가 무허가로 개조된 마탄의 총구를 아라한에게 들이밀었다. 술렁이는 동방인들과 달리 아라한은 자신을 향하는 총구 앞에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마크, 멋대로 설치지 마라.”
“쳇!!”
카일의 한 마디에 마크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총구를 내렸다. 아무리 분노조절 안 되고 충동적인 성질의 소유자라도 조직의 지령을 손에 쥐고 있는 카일 앞에서는 성질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마크를 제지하고 다른 이리들도 대기시킨 카일이 아라한에게 말했다.
"너냐? 남의 비즈니스에 훼방을 놓은 것으로 모자라서, 조직원을 납치해 팔병신으로 만들어놓은 게?"
"그 비즈니스가 남의 학원에서 비밀리에 일어나고 있길래 추궁했을 뿐입니다. 조직원의 경우에는 먼저 남의 구역에서 물의를 빚었고, 도를 지나쳐서 응징했던 것이고요. 해명을 요구하는 건 이쪽이여야 마땅하다 봅니다만?"
"카일, 저 아가리를 당장 찢어놔야 해. 나 빡치는 꼴 보고 싶어?"
카일은 아라한을 흘깃 살펴본 것만으로 그녀가 이 모든 훼방의 주모자이자, 동방인 무리의 리더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부채로 하관을 가린 아라한의 얼굴에서 붉은 두 눈동자만이 강단 있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었다.
“무엇을 노리고 이런 일을 벌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넌 지금 세상물정을 덜 배워서 큰 실수하는 거다.”
"그럴지도 모를 일이죠. 그보다도 여기는 우두머리끼리 중요한 일 얘기를 나누기에는 장소가 적당치 못하군요. 보는 눈도 많고, 분위기도 영 어색하니. 안 그런가요?"
다른 이리들은 여기 두고 카일만 자리를 옮겨서 따로 대면하겠다는 의도였다. 마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되도 않는 소리 집어쳐! 우리가 뭐 하러 흩어져서 너희가 깔아놓은 무대 위로 움직여줘야 하는..."
"좋다. 안내해라."
"카일?!"
"거절하고 여기서 개싸움을 벌여봤자 우리가 건질 건 아무것도 없어. 영문도 모르는 싸움에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다. 이 자들의 수령과 이야기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혼자 적진으로 가려고? 몇 명이 대기 타고 있을지 모르는데?"
"왜 그러지? 설마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하나?"
"아니 그게 아니라... 하아! 말해 뭐해. 알아서 하라고."
"경고해 두는데 내 오더 없이 멋대로 날뛰지 마라. 일을 망치는 건 암피르 하나면 족하니까."
"알았다고 제길!"
카일은 마크를 비롯한 이리들을 남겨두고 아라한의 뒤를 따랐다. 그러는 동안 곤룡회의 전투원들과 하숙촌의 동방인들이 남은 이리들을 에워싸고 팽팽하게 신경전을 벌였다. 아라한을 따라 어디론가 향하는 카일의 양 옆에는 허설과 아선이 따라붙고 있었다.
허설은 감정 없는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언제든지 카일의 돌발행동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서 빈틈이 보이지 않았고, 아선은 카일의 약점을 탐색하는 건지 그를 힐긋 힐긋 살펴보면서 실실 웃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적을 바로 옆에 두고 있는 사람 치고는 비범한 기색이 보였다.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서 카일의 표정을 살펴볼 수 있었던 걸까? 아라한이 계속 걸으면서 넌지시 말했다.
"옆의 두 사람은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최소한의 호위는 붙여두고 싶어서요. 이 정도는 이해해 주시겠죠?"
"만약 이해할 수 없다면 어쩔 생각이지?"
"그건 미처 고려하지 못했네요. 만에 하나라도 호위 두 명 동행시키는 정도로 쫄리실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못했던 지라."
"흥. 영악한 년."
카일은 허설과 아선이 따라붙는 걸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흉터 하나 없이 맨들맨들한 애송이들이 상대라면 몇 명이 붙어도 상관 없다고 판단해서 아라한의 꾀에 순순히 응해줬다.
아라한이 카일을 데리고 들어간 건물은 버려진지 오래됐는지 폐허가 된 내부에 낡은 장의자들이 늘어서 있었다. 장의자들은 빛 바래고 먼지 쌓였어도 가지런한 대열을 지키고 있었다. 장의자들을 지나고 나면 도달하게 되는 넓은 공간에 단상이 놓여있고, 그 뒤로 거대하고 기괴한 조형물이 벽에 붙어있었다. 용도도 알 수 없고, 상징하는 바도 종잡을 수 없는, 그저 기괴하다는 표현만이 어울리는 조형물이었다. 건물의 벽 한쪽을 통째로 차지하는 그 거대한 크기가 형태의 기괴함을 한층 더 부각시켰다.
"허설 양, 이분에게 차를 내어주시겠어요?"
"아니, 필요 없다. 길게 말할 생각 없으니 묻는 말에 답해라."
노련한 이리인 카일의 살기를 바로 앞에서 직면하고도 아라한은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농염하게 비틀린 입꼬리를 감상할 수 있도록 허락된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촤르륵 펼쳐진 부채가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부채에 그려진 구불구불한 먹선은 분명 아가리를 벌리고 이빨을 드러낸 구렁이였다.
"유리아 릴리스와 무슨 관계지? 그녀를 돕는 이유는 무엇이고, 조직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지?"
"이 장소가 뭐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봐. 난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치는 건 질색이니까 구불구불 돌려말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이곳은 예배당으로 쓰이던 건물이예요. 아그루스 제국은 오직 황제에게만 충성해야한다는 논리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신앙을 불충죄로 간주해 엄벌하죠. 하지만 제국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무수한 민초(民草)들은 지금도 다양한 형태의 신을 만들어 섬기고 있고, 뒷골목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으레 교단 하나 둘 쯤이 세력을 키우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게 지금 내가 물어본 것과 무슨 상관이 있지? 묻는 말에나 답해. 유리아 릴리스와 무슨 관계지? 암피르 그 놈이 어디까지 불었어?"
"원래 이 뒷골목도 교단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어요. 여긴 그들이 거점으로 쓰던 예배당이고요. 약소 교단에 불과했지만 어떤 정통파 교단과 세력을 합치면서 다른 뒷골목으로 옮겨갔다던데. 저희와는 접점이 없어서 모르겠네요. 하지만 지금 이 뒷골목을 지배하는 저희 역시 제국의 눈으로 보면 교단과 별 다를 바는 없지 않을까요?"
"헛소리 집어쳐. 대체 넌 무엇을 노리고 감히 갈퀴날들의 조직을 도발하는 것이지? 고작 뒷골목 세력 가지고 이리 조직을 상대할 수 있을줄 알았나?"
"애초에 영적인 호기심은 인간의 본능이잖아요? 그 충족 방식에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선을 그을 수는 있어도 그 본능 그 자체를 금지한다는 게 가능이나 할까요? 핍박은 오히려 신념을 강하게 연단시키는 법이라는 걸 황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그 정도로 신이 두려웠던 걸까요?"
"한 번만 더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면 그때는 곧바로....!!"
카일이 아무리 살벌한 표정으로 노려봐도 아라한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고,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자기 할 말만 늘어놓았다. 슬슬 참을성에 한계를 느낀 카일이 언성을 높이면서 공격적으로 나오려 했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아라한은 어떤 은유적인 암시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종교에 대해 지리멸렬한 사고의 흐름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카일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라는 명료한 한 문장이면 충분히 아낄 수 있었을 카일의 귀중한 시간을 이 무의미한 대화로 낭비시킬 수 있었다.
길지는 않은 시간이지만 유리아가 안전을 확보하거나, 반격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조직의 인내심이 긁히는 등 카일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변수들이 끼어들 틈을 내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젖니도 다 안 빠진 애송이년이 이빨 터는 솜씨 하나는 대단하군. 마크의 충고대로 그 아가리를 진작 찢어뒀어야 했어!"
아라한의 의도를 파악한 카일이 이 무의미한 취조를 끝내고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그가 한 발짝 떼는 순간 옆에서 날아온 허설의 주먹이 그의 옆구리에 직격으로 꽂혔다. 빡!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소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살벌한 타격음과 함께 카일의 몸이 날아갔다. 우당탕 와장창! 날아간 카일이 늘어서 있는 장의자들을 줄줄이 박살내며 벽에 쳐박혔다.
"우와~!"
아선이 줄박살 나버린 장의자들을 향해 물개박수를 치며 감탄사를 뱉었다.
"역시 허설 언니야. 정말 인정사정 없으시네요."
"긴장 풀지 마라, 온다."
쾅! 무너진 잔해더미를 박차고 튀어나온 카일이 컴뱃 나이프를 들고 쇄도했다. 카일은 중견급 이리답게 그렇게 큰 충격을 입고도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맨몸의 운동신경으로는 나올 수 없는 비범한 스피드로 날아든 카일이 아선을 덮쳤다. 아선은 카일의 컴뱃 나이프를 과일칼로 받아치는 패기를 선보였다.
캉!! 한 번 합을 주고받은 순간 과일칼은 가느다란 나뭇가지처럼 부러졌다. 일단 물러나며 카일과 거리를 벌린 아선이 손잡이만 덩그러니 남은 자신의 칼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우와 이게 뭐야? 손목이 시큰시큰 울리네. 허설 언니, 저 칼... 전류가 흐르면서 진동을 일으키고 있어요. 최대한 상처를 지저분하게 만드는 타입이네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알았다. 참고하도록 하지. 너도 네 앞가림에 주의해라."
허설은 무기를 잃은 아선에게 새 검을 던져줬다. 표준형 외날 한손검인 제로식(零式)이었다. 제국의 강철, 동방의 검술, 아선의 기교가 한곳에 어우러지자 보라색 파문(波紋)이 일어났다.
"영식아 오랜만! 누나 보고 싶었어?"
제로식 검을 쥔 아선이 일으킨 파문이 주변을 자색으로 물들였다. 제대로 된 무기를 쥐고, 상대할 보람이 있는 적과 맞서니 이보다 즐거울 수 없었다. 아선은 자신의 수장 아라한이 카일과 왜 싸우는 건지 전혀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유나 명분 따위는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껏 날뛰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을 수 있다면 아무렴 뭐든 좋을 뿐이었다.
아선이 앞뒤 양 옆 살펴볼 거 없이 곧장 카일을 향해 돌진했다. 캉! 아선의 검과 카일의 나이프가 부딪치자 불꽃이 튀겼다. 카일이 빠른 손놀림으로 나이프를 휘둘러 아선을 노렸지만, 아선 역시 물러서지 않고 공격을 흘리거나 받아 쳤다.
지잉! 카일의 컴뱃 나이프는 전류와 진동을 이용한 위력 보강이 특징인 갈퀴날들의 주무기 중에서도 훨씬 더 위협적인 출력과 절삭력을 자랑하는 물건이다. 하지만 아선과 합을 맞대는 순간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진동을 흘려 보내는 건가…’
아선이 일으키는 자색의 파문은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진동도 전류도 결국은 힘의 흐름. 기계적이고 단순한 흐름에 간섭하는 것은 곤룡회에게 있어서 간단한 일이다.
캉!! 아선이 거리를 좁히고 파고들어 왔다. 허를 찌르려 한 카일의 반격을 아선은 춤추는 듯한 발놀림으로 피하고 근처의 장의자를 밟아 디디며 뛰어올랐다. 무의식적으로 카일의 시선이 아선을 쫓아 위를 본 그 순간, 허설이 성난 들소와 같이 맹진해 눈앞까지 들이닥쳤다. 허설을 피하려 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아선에게 빈틈을 내어주게 됐다.
장의자를 도움닫기 해서 뛰어오른 아선이 카일의 머리를 겨누고 검을 내리쳤다. 캉!! 아선의 공격을 받아 친 순간 몸통의 방어가 비었다. 그리고 허설은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빡! 허설의 주먹이 카일에게 작렬했다. 충격에 뒤로 밀려난 카일에게 따라붙어서는 돌려차기로 후속타도 적중시켰다. 연속으로 공격을 허용해 버렸지만 카일은 그대로 쓰러지지 않고 바닥을 박차며 몸을 일으켰다. 허설은 카일에게 자세를 다시 갈무리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빠직! 카일이 나이프로 허설을 내려찍었다. 전차마냥 일직선으로 달려들던 허설은 피하지 않고 팔을 들어올려 칼을 맨몸으로 막았다. 콰지직!! 진동을 일으키며 전류를 뿜는 큼직한 칼날을 맨살로 막아내자 허설의 팔에서 피가 튀겼지만 허설은 아랑곳 않고 카일을 밀어붙였다.
보통 사람 몸이었으면 진작에 팔이 떨어져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허설의 팔은 마치 갑주로 감싼 것같이 튼튼해서 칼날이 쉽사리 파고들지 못했다. 상처 부위가 칼날의 진동에 따라 피를 흩뿌리고 있어도 허설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버티고 섰다.
‘과연 암피르의 말대로 어디서 수상한 시술을 받았군. 그야말로 괴력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힘겨루기에서 밀린 카일이 뒷걸음질을 치는데 방어에 신경쓸 겨를이 없어진 틈을 아선이 파고 들었다. 아선이 검을 휘두르자 짙은 보랏빛으로 요동치는 파동이 카일을 뚫고 지나갔다. 아선의 공격이 적중하자 흐트러진 카일을 허설이 다시금 걷어찼다. 빠각! 허공에 붕 떴던 카일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카일은 몸을 일으켜서 먼지를 털었다.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허설에게 맞은 곳 보다도 자존심 쪽에 더 큰 데미지를 받은 것 같았다.
"뭔지는 몰라도 엄청 튼튼하네요. 허설 언니에게 네 대나 얻어맞고도 일어설 수 있다니."
"이리는 성가신 상대다. 가벼운 장난으로 여기지 말아라, 아선."
애송이들 상대로는 몸풀기도 안 될 거라는 카일의 예상과는 달리 허설과 아선의 합공은 실로 위협적으로 그를 매섭게 몰아붙였다.
우직하지만 묵직하게 치고 들어오는 허설과, 익살맞은듯 해도 치밀한 기교가 갖춰진 아선은 서로가 서로의 빈틈을 상쇄하며 강점을 극대화시키는 전술을 구사했다. 둘의 성향이 상극임에도 함께 숱한 싸움에서 합을 맞춰왔음에 틀림없었다.
새파랗게 어린 계집애들을 상대로 본격적인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점이 그의 자존심에 흠집을 냈지만, 그런 자존심 보다도 지령 수행이 우선이었다.
"허설 언니? 저거..."
카일의 목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한 무언가가 그의 양 팔을 좀먹어 들어갔다. 균사 같기도 하고 촉수 같기도 한 그것은 형태가 매우 흉측하게 뒤틀려 있었지만, 심박에 맞춰 꿈틀거리는 걸 보아 모종의 유기생물체임은 확실했다. 카일의 몸을 토양삼아 뿌리를 내린 그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그의 양 팔을 감쌌다. 꿈틀꿈틀 거리기를 반복한 사이 살점이 되어 형태를 안정시켰다.
"언니 저거 분명히 오염생물 맞죠? 설마 오염생물을 몸에다 이식하는 시술이라도 받은 건가요?"
"미쳤군. 제국인들은 제정신이 아닌 건가...!"
오염생물을 꺼내 양팔을 감싸 강화한 카일이 잠시 괴로운듯 숨을 고르고 묵직한 날숨을 뱉자 시뻘건 입김이 쏟아져 나왔다. 한층 더 매서운 살기를 두른 눈빛으로 아라한을 노려봤다.
저 교활한 뱀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리라. 카일이 뛰어들었고 허설과 아선이 다시금 그를 향해 돌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