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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화 〉1-3. 위험한 우등생들 (7) (21/88)



〈 21화 〉1-3. 위험한 우등생들 (7)

"한심한 새끼들! 내가 보다가 답답해서 아티팩트까지 써가며 도와줬는데  잡아놓은 유리아를 홀라당 놓쳐? 그것도 엉뚱한 놈들이랑 치고 박고 쳐싸우느라? 그것도 심지어 졌어?!"

버려진 어느 폐건물에 마련된 시궁쥐들의 거점. 마크, 피텔과 한 패거리인 이리 암피르가 시궁쥐들을 질책했다. 시궁쥐들은 패싸움 때문에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그, 그치만!"

"그치만 뭐?!"

"먼저 밀가루 던지면서 시비를 걸었던  애새끼는 마법학원의 학생이었어. 마법사였다고!"

"무슨놈의 뒷골목에 마법사가 자꾸 쳐돌아다녀!"

"라쿠이르는 그런 곳이라고. 그것도 모르고 여길 왔어?"

"입닥쳐! 니들 대가리 수가 몇인데 떼거지로 풀어놔도 힐 신은 계집애 하나 못 잡아놓고 변명이 나와?!"

암피르가 버럭 성질을 부리며 물건을 막 집어던졌다.


"제기랄... 이러다 카일이 빡치겠는데. 좋지 않아, 좋지 않다고."

 되겠다 싶으면 내빼면 그만인 시궁쥐들과는 달리 이리들은 조직의 지령이라던가 음지 세계의 뒷사정에 복잡 긴밀하게 엮여있는 몸인지라 목표 달성에 예민하기로는 기사들보다도 더 하다.

"과정을 암만 좆박아 놨어도 어쨌거나 결과만 달성하면 되는 거다. 빨리 유리아 릴리스를 찾으러 가야해, 빨리."


암피르는 조급한 마음에 자신의 아티팩트로 수색용 까마귀들을 마구 만들어냈다. 조율자가  사람인데 소환수 숫자만 늘어난다면 그만큼 운용 효율은 떨어지기 마련인데 지금의 암피르는 그런 걸 생각할 정도로 침착한 상태가 아니였다.


"아까 전에 났던 싸움 때문에 우리쪽 애들도 꽤 떨어져나갔어... 남은 애들 중에도 다쳐서 상태 안 좋은 애들 많고."

시궁쥐가 타격을 입은 무리를 살펴보며 근심스럽게 말했으나 암피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건  문제가 아니야. 애초에 원래부터 어느 정도 숫자를 줄일 계획이였고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조직이 배급소도 아니고 너희 같은 떠중이 쥐새끼들 하나하나 전부 수당을 줘야할 이유는 없지."

"뭐?!"


"왜 그렇게 눈 크게 뜨고 노려보지? 입이 줄어들면 챙길 몫이 늘어나니 너희들도 잘된 일 아닌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이 바닥에서는 당연한 방식이잖아. 이렇게 되기 싫었으면 계약서에 싸인하기 전에 먼저 확실히 짚어두고 넘어가 뒀어야지."

"그랬다면 니들이 일방적으로 파토 내고 다른  알아봤을 거잖아."

"그것도  바닥에서는 당연한 방식 아니겠어? 어차피 아쉬운 건 급전이 필요한 니들인걸. 알잖아? 밑바닥 인생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 시발...."

시궁쥐들이 분한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리를 노려봤지만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싸워서 이길만한 상대도 아니겠거니와,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조직의 보복을 시궁쥐 무리가 감당할  있을 리 없었다.


"상황 파악  됐으면 빨리 정비 마치고 유리아 릴리스를 잡으러 갈 생각이나 해. 그래야 적어도 남은 인원들이라도 돈 챙길 거 아냐?"


암피르가 그렇게 말하며 유리아 수색을 재개하려고 서둘렀는데 그의 아티팩트에서 까마귀들이 이상한 움직임을 발견했다.

"이것들은 또 뭐야? 뭐가 이렇게 우르르 몰려오고 있어? 그것도... 바로 여기 코앞이잖아?"


우당탕! 폐건물의 문이 벌컥 열어젖혀지더니 부상 입은 시궁쥐 하나가 다른 동료를 부축하며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힘이 다한 시궁쥐는 결국 동료의 부축에도 풀썩 바닥에 늘어져 신음했다.

"으으윽...!"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뒷골목 놈들이 또 싸움 걸러  건가?"

"그냥 거주민들이 아니야... 여기 뒷골목을 주무르는 구역의 주인들이다."


"계집애 하나 잡아가겠다는데 뭐 구경이라도 났나?! 온 동네 놈들이 번갈아가며 귀찮게 하기는!"


암피르가 짜증을 내며 아티팩트들을 챙겨서 나가자 시궁쥐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폐건물 밖으로 나와보니 여학생들로 구성된 동방인 무리가 시궁쥐들의 거점을 포위하고 있었다.

"니들은 뭐야?"

암피르가 위협하는 어조로 묻자 동방인 무리 사이에서 허설이 앞으로 나아와 암피르를 마주 보며 서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는 이곳의 규칙을 어기고,  우리 곤룡회의 수장을 겁박하였다. 원만하게 끝낼 생각은 없다. 너희가 가진 모든 무기를 들고 우리를 맞이해라."


허설이 단도직입적으로 선전포고를 했지만 암피르가 코웃음 치며 손을 뻗었다. 피잉! 그의 아티팩트가 발동되자 역장이 생겨나 곤룡회 대원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역장은 앞에서 그치지 않고 정육면체의 형태로 사방을 감싸서 곤룡회를 모두 가둬버렸다.

"바빠서 애들 놀아줄 시간 따위 없으니까  안에 얌전히 있어라."


암피르가 역장의 큐브 안에 갇혀버린 곤룡회를 두고 유리아를 잡으러 떠나려 했다. 허설은 자신이 주로 애용하는 한손 도끼를 곁에 있는 대원에게 잠시 맡기고는 무언가를 가져오라는 듯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곤룡회 대원 하나가 벌목형 양손 도끼를 허설에게 전해줬다.

도끼를 양손으로  허설이 호쾌한 동작으로 힘껏 후려찍자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역장이 박살났다. 역장은 마력의 연쇄작용으로 이루어진 것 치고는 상당한 물리적 내구도를 가지고 있지만, 일정 이상의 충격을 가해 그 연쇄작용을 어긋나게 하는 순간 곧바로 산산조각 나버린다.

"대체 어떻게 되먹은 힘이야...?! 동방인 애송이 주제에 무슨 시술을 받은 거지?"


암피르가 당혹감을 내비치며 중얼거렸다. 지켜보던 시궁쥐들이 경악한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역장 큐브를 박살낸 허설은 도끼를 내리며 한 마디 했다.


"아선."

몸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안절부절 하고 있던 아선이 허설의 한 마디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리쳤다.

"자, 언니들!! 가자아아!!"


아선이 목줄 풀린 투견 마냥 주체를 못하고 시궁쥐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시궁쥐들이 그녀를 에워싸고 흉기를 휘둘렀지만, 그녀가 사과 깎는 과일칼 한 자루를 휘두르며 난장판 피우자 애처로울 정도로 간단히 진형이 흐트러졌다.

이윽고 아선을 뒤따라 들이닥친 곤룡회 대원들이 인정사정 없이 목봉을 휘둘러 시궁쥐들을 공격했다. 흠씬 매타작 당하자 전의를 상실한 시궁쥐들이 하나둘씩 도망치기 시작했다.


"씨...!! 역시 라쿠이르로 오는 게 아니였어! 돈이고 자시고 난 이제 손절 친다!"


"이러다 개죽음 당하게 생겼어. 나도 뺄 거야!"


"다음부터 이딴 의뢰 받나 봐라!   받자고 마법사들 동네를 들쑤시라니 죽으라는 소리지!"

대놓고 통수를 쳐대니 신뢰할 수 없는 거래처, 페이에 비해 계산 외의 위험요소가 속출하는 의뢰, 눈앞에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고 판단한 시궁쥐들은 너나  것 없이 내빼느라 바빴고, 시궁쥐 무리가 와해되는 걸 눈치 챈 암피르가 재빨리 도망치기 위해 폐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 놈들의 통솔자가 도망친다!"

곤룡회 대원 하나가 암피르를 뒤쫓아서 폐건물 안으로 따라들어갔다. 그러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보인 것은  봐도 위험하게 생긴 깜짝 상자였다.

"이런...!!"

바로 양 팔로 머리를 가리고 뒤돌아서 엄폐물 뒤로 몸을 날렸지만 설치형 폭발 함정이 터지면서 흩뿌려진 파편에 다리가 노출됐다.

"꺄아악!!"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디며 겉옷을 벗어서 다리를 지혈하려 했다. 하지만 다리에 박혀있는 파편 때문에 무턱대고 압박 지혈을 하기 어려워 보였다.

"흐윽..!"


다친 쪽의 발가락을 움직여봤는데 힘이 제대로 들어가는 감각이 들지 않는다. 혼자서 일어나 걷는 건 절대 무리였다.

"새파랗게 어린 계집년 주제에  방해하니까 이렇게 되는 거다."


함정을 설치하고 기다리던 암피르가 부상당한 곤룡회 대원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손에는 컴뱃 나이프가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원래 내 성질머리 같아서는 갈기갈기 포를 떠놨겠지만 아쉽게도 달리 할일이 있어서. 반대쪽 다리도 찢어놓은 다음 바로 목을 뚫어주지."


암피르가 그녀를 해치려 하는 그때 허설이 폐건물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뛰어들어왔다. 뒤따라 들어온 천의가 부상당한 곤룡회 대원을 발견하자 곧장 허설에게 말했다.


"저 이리를 견제해주세요. 저는 조속히 다친 아이의 응급처치를 시행하겠습니다."


"네, 천의 님."

천의가 부상당한 곤룡회 대원에게 달려가자 허설은 암피르가 천의에게 허튼 시도를 못하도록 그에게 달려들었다.

휙! 휙! 암피르가 컴뱃 나이프를 휘둘렀지만 허설은 민첩한 몸놀림과 예리한 반응속도로 공격을 모두 흘려냈다. 허설이 공격하려 하자 암피르는 아티팩트로 역장을 아주 밀도 있게 뭉쳐서 자신을 감싸는 보호막을 만들었다.


허설은 손바닥을 펼쳐서 암피르의 가슴팍을 밀치듯 내질렀다. 장풍과 발경을 결합한 일격인 쇄아(碎儿)였다. 아라한이 마크에게 썼던 것과 같은 기술이지만, 신체 능력이라면 곤룡회 제일인 무투파 허설의 쇄아는 그 위력이 궤를 달리했다.


콰앙! 그야말로 신장(神掌)이라 불러 마땅한 위력에 보호막이 뚫려버렸다. 물론 암피르 역시 그 충격을 온전히 막아낼 수 없었다.

"크악?!!"

공중에 붕 뜬 암피르가 낡은 잡동사니에 처박혔다. 허설은 숨을 헐떡이며 움찔거리는 암피르의 멱살을 잡아 끌어올린 뒤

빡! 주먹으로 턱을 돌려놔 기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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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얼마나 호되게 당했길래 아직도 깨어날 기미가 안 보이는 걸까?"

"어쩔 수 없지. 걸려도 하필이면 허설 선배 님에게 당했는걸."

"수조에 찬물 받아놨어. 자, 뿌려 봐"


촤악!! 차가운 물이 얼굴에 끼얹어졌다. 정신이 번쩍 든 암피르가 눈을 떠보니 그는 지금 어딘지 모를 건물의 지하로 추정되는 어둑어둑한 실내에 있었다.

"허억...?! 헉!"


거친 호흡을 진정시키고 주변 상황을 파악하려는데 몸이 움직여주질 않는다. 꼼짝도 할 수 없는 사지의 부자연스러움에 밑을 내려다보니 그는 의자에 앉은채 결박된 상태였다.


"헉...! 헉...! 끄윽!! 제기랄....!"

뭔가 밧줄을 끊을만한 도구가 필요하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암피르가 주변을 살펴봤다. 그리고 그는 마주쳤다.

"아아......"

그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시선들과.

"정신이 제대로 든 모양입니다."


암피르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어 깨웠던 곤룡회 여학생이 바가지를 수조에 띄워 놓으며 말했다. 그녀는 벽  쪽에 서있는 곤룡회 간부를 향해 물었다.

"이제 이 자를 어떻게 할까요, 허설 선배 님?"

허설은 기계인가, 아니면 인형인가 싶을 정도로 무감정한 얼굴로 암피르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은 이리인 암피르가 봐도 섬뜩할 지경이었다.

"처분은 수장님께서 정하실 겁니다. 대기하세요."


"네, 선배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이 열리더니 문틈으로 불빛이 들어왔다. 암피르는 눈부셔서 인상을 썼다. 철컥. 문이 닫히자 실내는 다시 어두워졌다. 암피르가 주변을 살펴보니 실내에 있던 곤룡회 학생들이 모두 방금 문을 열고 들어온 한 학생을 향해 바른 자세로 서서 고개를 꾸벅 숙여 경례했다.

"수장님."

경례를 한 허설이 곤룡회의 수장 아라한에게 다가갔다.


"저 자에게 부상을 입었던 대원은 무사히 의료 시설로 이송 됐습니다. 천의 님이 신속 적절하게 처치한 덕분에 다행히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사태는 면했다고 하지만, 복귀하려면 재활과 요양이 오래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수고했어요, 허설 양. 이제 저 자에게 차를 내어드리겠어요?”

허설은 가지고 있던 작은 통의 뚜껑을 땄다. 통 안에는 하얀 가루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에 암피르의 얼굴에 끼얹었던 찬물이 담긴 수조에 대고 통에 담긴 가루를 털어넣었다. 그러자 치이이익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물에서 부글부글 기포가 끓어올랐다.


기포가 잠잠하게 가라앉자 허설은 바가지로 수조의 용액을 떴다. 허설이 다가오자 암피르가 발버둥치며 소리쳤다.


"뭐하려는 거야!! 그, 그거... 방금 그거 물에다가 뭘 탄 거야?! 니들 이러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 으으으읍?!!!"

주변에 있던 곤룡회 학생들이 암피르의 턱과 머리를 붙잡고 고정시킨 뒤 코를 틀어 막아서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 허설은 바가지에 담긴 용액을 암피르의 입안에 들이부었다.

"으웁! 읍읍읍!! 우으읍!! 크헉?!! 쿨럭 쿨럭!!"


한바탕 물고문을 당했던 암피르가 기침을 하며 숨을 헐떡였다.


"시발... 나한테 뭘 먹인 거.... 우우우윽?!! 크헉!!"

위장으로 넘어간 용액이 반응을 일으키자 암피르가 거칠게 구토를 했다. 겉잡을 수 없이 토악질을 하는 암피르에게 허설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서 보낸 놈들이냐."


"크윽... 쿨럭! 니들 죽은 용들의 사회 놈들이지? 큭, 고작 뒷골목 패거리 놈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내가 속한 조직을 건드린 이상 니들은 절대로 그냥 넘어... 으읍?!!"

암피르가 협박했지만 허설이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다시 액체를 암피르에게 먹였다. 곤룡회 학생들이 암피르의 코를 막고 머리를 붙잡아서 억지로  마시게 했다.


"쿨럭! 쿨럭! 으으윽.... 우윽?! 우웩!!! 켁!! 커헉?! 끅끅...?!!"

액체를 한 번 더 마신 암피르는 얼마 안 되서 또 맹렬하게 구토했다. 온몸이 떨리고 위에서 극심한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심한 구토였다. 내용물을 다 토해내고도 모자라자 이제는 피까지 토하기 시작했다. 입과 코에서 줄줄 새어나온 피 때문에 얼굴이 온통 뻘겋고 끈적하게 물들어 질척거렸다.

허설은 수조에 담긴 액체를 다시 바가지 가득 떠담았다. 그러자 암피르가 신음하며 애원했다.

"그만... 그만... 말할 테니까..."

지금 이 상태로 저 액체를 또  바가지 들이마셨다가는 진짜로 죽을 거 같았다. 암피르가 말하겠다고 하자 허설은 바가지를 수조에다가 던졌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암피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디서 보낸 놈들이냐?"

"갈퀴날들.... 우린 갈퀴날들이다."


"갈퀴날들? 라쿠이르에 그런 조직이 있었나?"

"본거지는... 여기가 아니야. 하지만, 영업 사정이라는  있잖아 큭...! 여기에 새로 지부를 개척할 필요가 있었다. 쿨럭?!"


"그래서. 네놈들의 영업 사정이 학원에 쳐들어 온 것과 무슨 상관이 있지?"


"나도 자세히는 몰라... 유리아 릴리스......"

"유리아 릴리스?"

"그 여자를 찾으면 도망치지 못하게 퇴로를 다 차단해두고 방해되는 건 전부 제거하라는 게 내가 받은 지령의 전부야... 난 위에서 내려온 지령대로만 했을 뿐이지 자세한 건 몰라, 정말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수장님?"


심문을 지켜보던 아라한은 말없이 암피르가 묶여있는 의자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곤룡회 학생들이 의자와 책상을 가져와서 암피르 맞은 편에 아라한의 자리를 준비해줬다. 아라한이 의자에 앉자 허설이 바둑판과 바둑알을 책상 위에 올려놨다.

암피르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침묵을 유지하던 아라한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위기를 좀 풀고 싶은데, 이야기 하면서 오목이라도 두죠. 바둑은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까요.”

"뭐, 뭐...?"

뚝! 곤룡회 학생들이 암피르의 손을 묶은 밧줄을 끊어서 풀어줬다.


“흑은 양보해 드리도록 하죠. 3-3, 4-4, 장목 모든 금수도 허용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사활이 걸려 있는 만큼 극적인 대국을 보여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

암피르는 검은 바둑돌이 든 항아리에서 바둑돌을 하나 집어들었다.  모습을 본 아라한이 말했다.


"오른손잡이시군요."


"뭐....?"


아라한은 바둑돌을 꺼내고 있는 암피르의 오른손을 보고 있었다.

"제가 이기면 당신의 오른팔을 끊어가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저를 이기신다면...."

아라한의 뒤에선 허설이 도끼와 망치 등의 연장을 늘어놓고 있었다.


"왼팔로 봐드리도록 하죠."

"....흐으..."

아라한의 두 적안에서 붉은 안광이 돌았다면 잘못 본 것일까? 그녀의 시선에 마치 독사가 온몸의 피부를 타고 기어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암피르의 호흡이 가빠르게 떨렸다. 그는 떨림이 진정되지 않는 손으로 간신히 첫 수를 뒀다. 아라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기다림도 없이 다음 수를 뒀다.

"당신의 조직이 유리아 릴리스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 겁니까?"

"그런... 사업적인 뒷배경은 몰라. 나는... 난 그냥 주어진 지령만 수행할 뿐이라고."


"그럼 당신과 함께 있던 동료들에 대해 묻죠. 그들도 당신과 같은 지령을 받았습니까?"


"나랑 같은 급인 애들은 그렇지만 카일은 아니야. 목표가 유리아 릴리스라는 점은 똑같지만 세부적인 지령에는 차이가 있겠지. 카일... 아마 카일이라면 조직이 유리아에게서 찾는 물건이 뭔지도 알고 있겠지."

"물건?"

"그래. 뭔지는 모르지만 대외적으로 기밀 등급이 엄청 높은 물건이라고 들었어. 그걸 찾으려고 학원에 쳐들어  거고, 학원에 숨겨놓질 않았으니 유리아 릴리스를 잡으러 다니는 거야."


"흐음. 그다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군요. 그러니 이쯤 해두도록 하겠습니다."


"뭐...?"


딱. 아라한이 수를 두자 흰돌 네 개가 일렬로 늘어섰다. 다음 수에 암피르가 어디를 막으려 한들 승부는 이미 정해졌다.


"적당껏 처리한 다음 주웠던 자리에 도로 버려두고 오세요."


"네, 수장님."

아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가자 곤룡회 학생들이 암피르를 붙잡고 바둑판 위에 그의 상반신을 처박아 고정시켰다.

"놔!! 이거 놔!! 말하라는대로 전부 말했잖아!!! 하지 마... 그만 둬!! 제발....."


허설이 도끼를 손에 쥐고 암피르를 향해 다가갔다. 곤룡회 학생 몇 명이 암피르의 오른팔을 붙잡아 쭉 뻗은채로 옴짝달싹 못하게 고정시켰다. 허설이 도끼를 든 손을 들어 올렸고,

철컥. 아라한이 나가고 난 문이 닫히면서 불빛이 사라진 방에 어둠이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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