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1-3. 위험한 우등생들 (4)
화창한 주말의 햇살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루나칼립스의 교정은 아름다웠다. 매일 이 풍경 속에 살고 있음에도 평소에는 학업에 열중하느라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우연한 심경의 변화로 이곳을 학원이 아닌 하나의 풍경으로 바라보게 된 순간 학생들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설렘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지금 이 교정을 거닐고 있는 동방인 유학생 무리는 그런 신선한 설렘과 느긋한 주말을 만끽할 기분이 아니었는지, 다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선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동방인들이 모여 생활하는 하숙촌으로 돌아갔고, 아라한과 몇몇 유학생들은 루나칼립스 국제교류 학관의 기숙시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묵묵히 걸어나가는 아라한의 옆에서 유학생 하나가 볼멘소리를 했다.
"역시 그 지도원과 화친을 도모하지 않는 게 옳은 선택이였어요, 수장님. 그는 우리에게 어떤 유익함도 가져다 주지 않을 거라 봅니다."
"동의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그 아그루스 귀족과 건방진 학생회장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 게 염려스럽네요. 수장님께서 그 지도원에게 흥미를 표하시기가 무섭게 바로 그 둘이 접근해서 꼬리를 치니."
양 옆에서 의견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지만 아라한은 그저 부채를 만지작거리며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수장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어디 안 좋으신 데라도?"
"좀 전의 지도원의 태도가 역시 불쾌하신지요? 그게 아니면 유리아 릴리스의 발언이 신경 쓰이신다던가."
아라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바로 옆에서 던져오는 질문 조차 그녀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무언가 신경 쓰이는 게 있는지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섰다. 아라한이 멈추자 그녀 주변을 따라 걷던 곤룡회 학생들도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수장님? 무슨 일이시죠?"
"......"
아라한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서있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어서 짧게 한 마디 했다.
"불온한 흐름이 느껴집니다."
그녀의 한마디에 주변의 학생들이 난색을 표했다.
"불온한 흐름이라니. 수장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반드시 머지않아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곤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의 흐름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흐르던 바람이 갑자기 끊어지는 듯한 위화감과 같다고 할까요? 아무튼 지금 이 학원에는 있어서는 안 될 인물이 들어와 있는 게 확실합니다."
"그거야 또 오르토스의 천박한 수탉들이 기숙사로 숨어들어온 것이겠죠. 주말이면 흔히 있던 일이니까요."
"그것과는 전혀 다른 흐름입니다. 오르토스에서 온 외부인이 일으키는 흐름은 갈피를 못잡고 우왕좌왕하는 느낌이라면, 지금 이 흐름은 마치.... 교활한 들개가 어슬렁거리는 듯한 기분 나쁜 부류군요."
그렇게 말한 아라한이 뒤쪽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본 적 없는 성인 남성 셋이 걸어가고 있었다. 명문 사립학원인 루나칼립스의 교정과는 전혀 섞이지 않는 불량한 행색으로 보아 이곳의 교직원이나 지도원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누구지? 이 학원 제복은 아닌데. 당직 서는 교직원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뭐 고치러 온 설비공인가 보죠. 저 방향이라면 아마 기숙사에서 나오는 길일 텐데.”
“요즘 기숙사에서 유행한다던 그 집중력 향상 숙면 보조기인가 뭔가를 관리하러 온 직원일까요? 가끔 기숙사 드나드는 걸 봤습니다. 저들과는 달리 단정하게 차려입었지만.”
"그런데 행색이 너무 불량해 보이지 않습니까? 직원이 저렇게 하고 다니고도 회사로부터 경고 하나 안 받을까요? 회사 인상을 망칠 텐데."
"으음."
다른 곤룡회 학생들 사이에서 확연히 눈에 띌 정도로 성숙한 외모를 한 어느 학생이 잠자코 다른 학생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아라한의 옆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그녀의 용모는 곤룡회 상서열자에 걸맞게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그녀는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아라한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장님. 제가 비록 수장님처럼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뛰어난 안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저 자들이 떳떳한 용건으로 학원에 들어온 게 아니라는 것 쯤은 알 수 있습니다. 엮이기 전에 못 본 척하고 자리를 뜨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충고 고마워요, 천의 양. 그리고 미안해요. 부디 당신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아라한은 아라한은 부채를 살짝 펼쳐서 얼굴을 살짝 가리고는 출구 쪽을 향하고 있는 수상한 삼인조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아라한이 세 명의 불한당에게 다가가려 하자 천의가 부드러움과 단호함이 공존하는 목소리로 다시금 충고했다.
"수장님. 아무리 이곳이 명문 학원이라 하더라도 제국의 한 부분인 이상 '이리' 같은 악질적인 존재들로부터 안전한 성역일 수는 없습니다. 고작 시궁쥐 수준의 행실 나쁜 불량배 정도라면 저렇게 당당하게 학원을 활보할 담력은 없을 테지요. 엮이지 않는 게 좋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당장은 엮이지 않는 게 좋겠죠. 네, 지금 당장은..."
천의는 자신을 돌아보는 아라한의 눈빛을 읽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말려봤자 소용없고, 말릴 권한도 없었기에 천의는 잠자코 수긍하며 몇 마디 덧붙였다.
"이미 마음속에 결정이 나있다면 그 결정을 믿으십시오. 믿기 위해서는 수를 멀리 읽으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행동이 굼떠져서는 안 됩니다. 늘 말씀 드리는 건데, 수장님께서는 신중함과 담대함을 겸비하고 계시지만 항상 그 둘이 엇박을 내서 걸음이 꼬입니다. 뒷일은 저희가 봐드릴 테니 믿으신다면 저지르십시오."
"유념해 두도록 하죠."
천의와 이야기를 마친 아라한은 허설이 있는 쪽도 돌아봤다. 아까부터 쭈욱 아무 말 없이 잠자코 듣고 있던 허설은 아라한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는 수상한 삼인조가 더 멀어지기 전에 그들을 불러세웠다.
"거기 당신들!"
허설이 부르자 세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아라한은 표정을 감추기 위한 부채를 가볍게 살랑이며 말을 붙였다.
"못 보던 분들이군요. 지도원이나 교직원은 아닌 것 같은데... 실례지만 어떤 용무로 찾아오셨는지요?"
"신경 끄고 갈길들 마저 가."
"무단침입 자수로 알고 거수자 신고를 하면 되겠습니까?"
"아이 씹... 넌 뭔데?!"
"야 야, 진정해라."
셋 중에 한 사람이 신경질적으로 나오자 나머지 두 사람이 일단 진정시키고는 아라한과 대면했다.
"아, 미안. 얘가 원래 좀 성격이 지랄맞은데 오늘은 또 일정이 펑크나게 생겨서 날카롭게 굴었네."
"일정이라고요?"
"그래, 일정. 우린 그냥 학생 한 명 만나러 왔다."
"이 주말에요? 누구를요?"
아라한이 쏘아보자 두 남자는 잠시 서로 사인을 주고받았다. 일단 의심의 눈초리를 풀어야겠다고 판단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 학생 중에 유리아 릴리스라고 있지?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 만나러 왔는데 연락도 안 닿는 걸 보니 기숙사에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혹시 지금쯤 어디로 갔을지 아는 사람 없니? 대충 짐작으로라도 좋으니까."
"알려드리지 못할 건 없지만."
"없지만?"
"적어도 당신들이 유리아 양과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아야지 저희도 알려줄 수 있겠죠? 안 그러면 그녀를 곤란하게 할 테니까요."
"그치 그치. 맞는 말이야. 야, 우리가 유리아랑 무슨 사이지?"
"그걸 왜 나한테 쳐물어보고 있냐 이 돌탱아!"
남자는 자신의 파트너를 한바탕 질책하고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아라한에게 생긋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유리아네 집안이 좀 사업을 크게 하는 거 알고 있지? 우리는 그 상회의 관계자들이야."
"상회의 관계자 분들이 학생 신분인 유리아 양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거죠?"
"어허. 그건 비즈니스 이야기라 외부 발설 금지라고."
아라한은 못마땅한 얼굴로 두 남자를 번갈아봤다.
"알겠습니다. 그럼 두분 다 유리아 양과 아는 사이인 게 확실한 거죠?"
"그럼 당연하지~!"
"좋습니다. 그러면 두 분의 이름을 가르쳐주시겠습니까? 제가 유리아 양에게 무슨 무슨 이름의 상회 관계자 둘이 비즈니스 관련 면담을 위해 찾고 있다고 전달해드릴 테니까요."
두 남자의 표정이 슬슬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럴 순 없지~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수고를 늘려선 쓰나? 그냥 위치만 알려주면 우리가 가볼께."
"그래, 그래. 뭣허러 여러번 왔다 갔다 해?"
아라한은 손에 쥔 부채로 입을 살짝 가렸다. 그리고 두 눈에 힘을 실어 눈앞의 남자들을 째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고 그래?"
"유리아 양의 방에는 찾아가 봤습니까?"
"그럴 수가 있나? 여자기숙사에 막 드나들기는 좀... 그렇지?"
"그럼 그럼. 여기 아가씨들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잖아."
"그렇다면 당신 주머니에 숨겨진 그건 대체 무엇이죠? 설마 당신이 입던 거라고 말씀하시진 않으시겠죠?"
"그게 무슨..."
아라한의 말에 남자 하나가 자신의 파트너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부드러운 원단의 감촉이 느껴졌다. 꺼내보니 여성용 속옷이였다.
"넌 씨발 그 와중에 이걸 챙겨서 나온 거냐?"
"아니 빈손으로 나오기도 그렇잖아."
"어휴 이 병신변태모질이새끼!"
아라한 뿐만이 아니라 곤룡회 일당 전체의 시선이 경직되었다. 눈 앞의 삼인조에 대한 의심이 확증을 갖췄기 때문이다. 두 '침입자'들도 더 이상 둘러대봤자 의미 없다는 걸 알았는지 웃음기가 사라지고 살벌한 표정을 보였다.
"이 영악한 년이 처음부터 우릴 가지고 놀았네?"
"이제야 어울리는 말투를 찾으셨군요. 당신들. 유리아 양을 찾는 목적이 뭐죠?"
"아까도 말했잖아. 비즈니스 얘기라 말 못한다고. 남의 장사 밑천에 그렇게 관심 가지다가 코 베이는 거 모르나?"
"상회의 관계자라는 말, 거짓말이잖습니까?"
"아니. 비즈니스적으로 용건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다. 다만 우리가 유리아하고 아는 사이라는 게 거짓말이지."
아라한은 장사꾼들의 자세한 내막 따위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대로라면 유리아가 위험해질 것 같다는 것이다.
솔직한 심경으로 아라한은 유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건방지고,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독설을 하는 점이야 자신도 마찬가지니 넘어갈 수 있다지만, 성격 이전에 유리아는 제국인 학생들을 단결시키는 역할에 충실한 학생회장이다. 그 점은 곤룡회를 이끄는 아라한에게 껄끄럽지 않을 수가 없다.
아라한은 좀전에 누르워에서 자신의 말을 맞받아치던 유리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차가운 표정. 역시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라한은....
"허설 양."
"말씀하십시오. 듣고 있습니다."
"모두를 데리고 기사단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대원들을 모아서 유리아 릴리스를 찾으세요.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간다면... 그때는 우리의 방식대로 처리하시길."
"그 동안 수장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당연히 저들을 상대하고 있어야죠."
"저는 수장님 곁을 지키겠습니다. 대원들을 이끄는 건 천의 님께 맡겨도 됩니다."
"허설 양. 당신의 본분을 잊지 마세요. 시간이 아까우니 어서."
"그렇지만 전..."
"허설 양."
".....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부디 무사하시길."
허설과 천의를 비롯한 곤룡회 대원들은 아라한을 두고 떠났다. 침입자들은 그들을 뒤쫓지 않고 혼자 남은 아라한을 죽일 기세로 노려봤다.
"너. 정말 유리아가 어딨는지 알기는 하는 거냐? 더 이상 시간 낭비 시키지 마라."
남자가 인상을 험악하게 썼다. 아라한은 겁먹은 기색을 보이지 않고 그저 자신의 품에서 종이 쪽지 하나를 꺼내보였다. 에반이 써준 그 쪽지였다. 누르워에 있는 천설당의 위치부터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모두 쓰여있다. 그때의 분위기로 미루어보아 유리아가 아직도 천설당에서 오손도손 과자나 먹고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건 이 쪽지 정도면 구체적인 위치를 특정하기는 충분하다.
"유리아 양은 지금 데이트 중입니다. 공교롭게도 약속시간이랑 장소가 적힌 쪽지를 제가 가지고 있지요."
"처음부터 그걸 꺼냈으면 될 것을 바쁜 사람 똥개훈련 시키고 있어. 빨리 내놔라."
"드릴 리가 없잖습니까?"
"뭐??"
열받은 기색이 역력한 남자와는 대조적으로 무표정을 지키고 있는 아라한이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래? 좋아. 내가 이럴 때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데에는 도가 튼 협상가를 한 분 모셔왔지."
침입자 중 하나가 등에 매고 있던 연장 가방에서 길쭉한 무언가를 꺼냈다. 총기였다. 탄약을 넣고 장전하기까지 일말의 망설임도 지체도 없었다.
"자, 이분은 샷선생 이라고 해. 목청이 크고 언변에 능하시지. 어때? 인사할래? 곱게 쪽지 내놓을래?"
장전이 된 총의 총구를 아라한에게 향했으나 그녀는 여전히 눈썹 하나 움찔하지 않고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이래도 겁 안 먹어? 독한 년이네. 총 처음 보냐? 이거 맞으면 가오가 쏙 들어가게 아프다?"
"주머니 속의 속옷도 눈치 채는 와당에 그런 살벌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걸 예상 못했겠습니까? 아무튼 전 당신의 거래에 응할 생각이 없습니다. 헛짓거리 그만 하시고 그냥 자수하시죠?"
"너.... 내가 못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지금 지껄인 거 다시 한 번 씨부려봐."
"헛짓거리 그만 하시고 곱게 자수하시...."
탕!!! 교정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린 총성 소리에 한적하게 쉬고 있던 새떼가 놀라 우르르 날아올랐다. 홧김에 방아쇠를 당긴 남자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이를 악 물었다.
"곤란하군요. 생각 이상으로 질 나쁜 사람들인 걸요."
본래대로였으면 아라한의 머리를 관통해야 했을 탄환은 그녀의 입을 살포시 가리고 있는 부채의 앞에서 멈춰 있었다. 아라한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밑으로 떨어지지도 못한 채 공중에 떠 있는 탄환 끝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그러자 그제서야 잃어버린 중력을 되찾은 듯이 탄환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져버렸다.
"앞으로만 나아올 뿐인 금속 만큼 다루기 단순한 흐름이 있을까요?"
"암여우 같은 년이!!"
열받을대로 열받은 남자는 아라한을 향해 총을 마구 난사했다. 그러나 몇 발을 쏜다한들 재래식 총기로는 아라한이 왜곡시켜놓은 기류의 장막을 뚫을 수 없었다.
"다음 번에는 좀 성능이 좋은 마탄을 구비해 오셔야겠군요."
탄환이 다 떨어져서 방아쇠를 아무리 당겨도 빈 탄창이 돌아가는 소리만 났다. 남자는 쓸모없는 총을 내던지고는 다른 걸 꺼냈다. 쿠크리 타입의 컴뱃 나이프였다.
"피텔! 제이콥! 너희도 칼 꺼내!!"
"마크, 진정해. 애초에 우리는 유리아 때문에 온 거지 얘 한테는 볼일 없잖아? 일단 지령대로 유리아부터 찾는 게 어때?"
"이 년을 그대로 두면 계속 훼방놓을 텐데 칼빵 쑤셔놓고 가야지!"
"꼬맹이들이 훼방 놓아봤자 라쿠이르에 갈만한 곳이 얼마나 있겠어? 곧 있으면 암피르랑 시궁쥐들이 유리아를 찾아낼 거야. 빨리 합류해서 유리아 잡고 물건 터는 게 우선이야."
"그, 그래! 여기서 자꾸 감정적으로 휘둘려서 시간 끌면 딱 저 년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거라니깐?"
"넌 시발 닥쳐!! 이게 다 니가 팬티 훔쳐와서 이렇게 꼬인 건데 왜 이제와서 침착한 척 하고 지랄이야?! 빨리 칼 꺼내!!!"
이미 이성을 잃은 동료를 설득하는 건 무리였다. 결국 다른 침입자들도 컴뱃 나이프를 꺼냈다.
"다 큰 어른 셋이서 한다는 게 학생에게 칼부림이라니.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난 너보다 어린 것들도 수도 없이 죽여왔어."
"세상에나. 기억해 뒀다가 진술할 때 꼭 얘기해야 겠군요."
"죽여버릴 거야."
마크는 칼을 들고 아라한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총이 안 먹히는데 칼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기류의 흐름을 제어하던 아라한이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다.
"으읏?!!"
위험한 흐름을 직감하고 몸을 뒤로 빼자 아슬아슬하게 칼날이 스쳤다. 다치진 않았지만 분명 기류를 왜곡해 몸을 감싸고 있었는데 칼에 베인 옷자락이 벌어졌다.
"미꾸라지 같은 년이...."
아라한은 그제서야 그들이 들고 있는 칼이 단순한 금속 날붙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전류가 흐르는 칼날이 강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진동을 일으켜서 상처의 절단면을 엄청 거칠게 만들어 재생 속도를 늦추는 칼이지. 원래는 재생력이 뛰어난 적이나 슬라임을 사냥하는 용도지만 사람한테도 못쓸 거 있겠어? 특히나 너같이 성가신 마법사 유충을 상대로 말이야."
아라한은 칼날에 베여 찢어진 옷자락을 보았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 대해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또 한번 일격이 쇄도해왔다.
남자가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자 전류가 흐르는 궤적이 허공을 갈랐다. 저 궤적 중 하나라도 몸을 지나면 치명상을 입는다. 잽싼 몸놀림으로 참격을 피하긴 했지만 상대는 한 명이 아니였다. 또 다른 괴한이 아라한의 후방에 포지션을 잡고 서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앞뒤로 오는 공세에 대응해야 한다.
"........"
'이럴 때 선배님이였으면 어떻게 대응하셨을까?'
위기에 봉착하자 아라한의 머릿속에 그런 질문이 떠올랐다. 적어도 그 선배라면 지금의 자신처럼 공포를 억누르려고 센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답했다. 아무튼 없는 사람을 떠올려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지금은 자신의 경험과 지혜만으로 상황을 타개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이, 아가씨. 무서워서 속으로 엄마 찾는 소리가 여까지 다 들린다고. 지금이라도 유리아의 위치를 까발린다면 살려줄게 어때?"
"정보를 얻으면 절 죽일 셈인거 다 알고 있습니다."
"쳇. 명문 학원 다닌다더니 머리는 좀 굴러가네."
"하류 악당의 뻔한 공식 아닙니까?"
빠직!! 침입자들이 쥔 칼에서 살벌한 스파크가 튀어올랐다. 살의와 불온함으로 흐드러진 공기의 흐름에 아라한의 머리가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합을 맞춰 동시에 뛰어오른 두 남자의 칼끝이 아라한의 앞뒤에서 들이닥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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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 플루토가 자신만만하게 추천한 천설당이라는 과자가게는 누르워의 뒷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가게에서 나온 유리아 릴리스는 바로 큰길로 나가지 않고, 인적 드문 누르워의 뒷골목을 홀로 거닐었다. 혹여나 돌아가는 길에 아라한과 곤룡회 일당하고 마주쳤다가는 불편한 상황이 벌어질 게 뻔했기 때문에 거리를 벌릴 겸, 머리 좀 식힐 겸 뒷골목 산책을 했다.
'나들이 나오려고 당신을 부른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씀 드렸죠? 민폐 끼치지 말고 과자 먹을 생각 없으면 썩 나가라고 본인이 방금 말씀 하셨잖습니까?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시길.'
이쪽은 에반이 걱정이 되서 제대로 대화를 하고 싶었던 건데, 진지하게 임하지 않고 애들 취급이나 하다니. 그 태도는 지금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쌀쌀맞게 자리를 박차고 나올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에반에게도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을 텐데 적어도 그의 계획을 좀 더 지켜본 다음 시비를 따져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파토를 낸 건 에반에게도, 프릴에게도 적절한 행동이 아니었다.
반성하다 보니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유리아는 지금껏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던 적이 없었는데, 에반이 학원에 온 이후로 언성이 올라가는 때가 부쩍 늘어난 기분이다. 역시 에반이 특이한 사람이라는 건 확실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신경 썼으니 이제 더 이상 그와 엮이지 않는 게 좋으려나.
"....."
유리아는 골목에 서있는 어느 행인을 힐끗 봤다. 뒤집어 쓴 모자하며, 라쿠이르의 늦겨울과는 맞지 않는 행색하며, 분명 뒷골목을 거닐면서 몇 번이고 봤던 인상착의임에 틀림없었다. 세 번째 넘어서 마주친 순간부터는 기분탓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유리아는 걸음을 확 틀어서 다른 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미행의 그림자는 여전히 그녀의 뒤를 밟고 있었다. 우연히 같은 길을 가는 행인이었다는 가능성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었다. 유리아의 발걸음이 좀 더 빨라졌다.
가장 밝은 빛을 받는 곳의 그림자가 가장 어둡듯이, 제국에서 가장 낙후된 곳은 도시화 개발이 닿지 않은 외곽이 아니라 도심 번화가의 주변이다. 명문 마법학원은 아그루스 제국 각지의 상류층 청소년들을 라쿠이르로 이끌었고, 이들이 흘리는 낙수를 주워 먹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다 보니 번화가 주변에는 무질서하고 슬럼한 뒷골목이 형성됐다.
이런 환경이라면 흔히 '시궁쥐' 라고 불리는 불량한 범죄자들이 꼬이기에 최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라쿠이르의 시궁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마법학원의 학생들을 물지 않는다. 학생들이 흘리는 걸 주워 먹으며 사는 쥐들인 만큼, 마법학원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밥벌이를 잃을 게 뻔한 데다가, 최악의 경우에는 수사관들이 출동해서 소굴 전체가 박멸당하기 마련이니까.
유리아는 공사를 마치기도 전에 버려진 어느 폐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미행의 그림자도 유리아가 들어간 폐건물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휙! 그가 손짓하자 수상한 사람이 두 명 더 나타났다.
스윽! 세 사람 중 한 명이 손바닥 크기만한 푸주칼을 꺼내고 문 앞에 서자 동료들이 주의를 줬다.
"야, 조심해라. 까딱 실수로 죽여버렸다가는 골치 아프다."
"알고 있다고. 그치만 상대는 마법을 쓸 줄 안단 말이야."
"여자애 상대로 쫄았냐? 쪽팔린 줄 알아야지."
"닥쳐, 먼저 진입할 테니까 잘 따라오기나 해."
푸주칼을 든 시궁쥐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폐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덥썩!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덮쳐온 의문의 손아귀가 시궁쥐의 관자놀이를 꽉 쥐었다.
"뭐, 뭐야?!"
어딘가에 숨어있을 줄 알았던 유리아는 문 바로 뒤에 서서 대기하고 있다가, 시궁쥐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손을 뻗어서 기습했다. 유리아의 손아귀가 한 시궁쥐의 관자놀이를 붙잡자 극렬한 노이즈가 시궁쥐의 머릿속을 파고들어와 의식을 마구 헤집었다.
"크아아아악?!!"
쿠당탕! 와장창!! 시궁쥐가 목청껏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쓰러지며 낡은 잡동사니 위를 나뒹굴었다. 그는 무너진 자재 위에 드러누운 채 지끈거리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고 괴로워했다.
"미, 미친...! 무슨 짓을!!"
나머지 두 시궁쥐들도 황급히 흉기를 꺼내들었지만 유리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섰다.
"당신들. 제가 누구인 줄은 알고 이런 짓을 벌이시는 겁니까?"
"유리아 릴리스 맞지? 백화 상회의 회장 딸. 다 알고 온 거야. 그리고 네가 어느 잘나신 집안의 딸내미인지는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어."
"역시 외부에서 온 시궁쥐들인 게 확실하군요. 이곳의 쥐들은 물면 안 되는 것을 분간할 줄 압니다. 다른 곳에서 왔거나, 아니면 우므나티아를 빠져나온 청소부일 수도..."
"닥쳐! 이젠 하다못해 아가리에서 젖내도 안 가신 어린 년한테까지 시궁쥐 소리를 들어야 해?! 좆만한 년이 어따 대고 쥐새끼니 청소부니 지껄여?!"
"더할 나위 없이 시궁쥐다운 울음소리군요. 하지만 이곳의 쥐가 되고 싶었으면 이곳의 규칙을 먼저 알아뒀어야 했습니다."
"이 씨팔년이 자꾸...!!!"
유리아가 손짓하자 그녀의 손에서 다시 한 번 불길한 노이즈가 파밧 튀어올랐다. 시궁쥐들이 유리아를 공격하기 위해 흉기를 쥐고 달려들려 했는데... 덥썩! 유리아에게 기습 당해서 쓰러져 있던 시궁쥐가 자신의 동료의 다리를 꽉 붙잡았다.
"뭐해 시발! 이거 놔!"
동료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그 시궁쥐의 눈은 초점이 탁하게 풀려있었다. 그는 동료의 바짓자락에 매달리고서는 무어라 중얼거리며 바들바들 떨었다.
"목소리... 이 목소리 좀 어떻게 좀 안 들리게 좀 해줘 좀!! 목소리가...!"
"무슨 목소리가 들린다는 거야?! 지랄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
"이거 너무 시끄러워... 제발 좀 조용히 좀 해줘!! 시끄럽단 말이야!!"
스륵! 어딘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그 시궁쥐는 바닥에 떨어뜨렸던 자신의 푸주칼을 다시 집어들더니
푸욱!!
"크아아악?! 이 미친 새끼가?!!"
자신의 동료의 다리를 푹 찍어버렸다. 다리를 찔린 그 시궁쥐도 뒤엉켜 쓰러졌고, 정신이 나가버린 시궁쥐는 계속해서 동료를 공격하려 했다.
"이 새끼 왜 이러는 거야?! 빨리 어떻게 해봐!"
유리아의 공격에 당한 시궁쥐는 악성 이명에 집어삼켜져 혼미해진 의식에 동료를 공격했고, 나머지 시궁쥐들도 그런 동료를 어떻게든 붙잡느라 엎치락 뒤치락 정신이 없었다. 유리아는 혼비백산이 된 셋을 내버려두고 폐건물 밖으로 나왔다.
폐건물 밖으로 나와 뒷골목을 빠져나가려던 유리아는 곧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상한 시선들을 눈치챘다. 수가 꽤 많았다.
단순히 멋모르는 뜨내기 시궁쥐들이 상대를 잘못 고르고 귀중품을 갈취하려 덤빈 건 줄 알았는데, 지금 잘 생각해보니 그들은 그녀가 백화 상회의 유리아 릴리스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럼에도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라쿠이르의 시궁쥐들은 아무리 겁도 없이 뒷골목을 혼자 돌아다니고 있다 하더라도 마법학원의 학생 만큼은 건드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유리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 시선들은 대체 무엇인가?
한번에 이 많은 시궁쥐들이 외부에서 유입되었다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라쿠이르의 뒷골목에 새로운 규칙이 생겨난 건가?
유리아는 자신을 노리는 위협들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그들을 따돌리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