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1-3. 위험한 우등생들 (3)
맑은 물을 쏟아놓은 것처럼 깨끗한 하늘이 끝없이 펼쳐지는 그런 화창한 날씨였다. 날이 덜 풀린 겨울의 끝자락이였지만 성질 급한 꽃봉오리는 못참고 피어날 것만 같은 봄스러운 풍경이 한창인 이곳은 누르워. 화창한 토요일날 집에만 박혀있기는 아까워 밖으로 나온 이들의 관심을 사로잡기 위해 거리마다 과자 단내가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르워라는 이름에 걸맞게 공기가 아주 달구나 달아. 내가 저번에 왔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였는데. 역시 주말이라 다른건가."
에반 플루토가 물엿을 입힌 콩알사과를 볼 안쪽에서 굴리며 말했다. 입안의 사탕을 어금니로 깨물어 으깨자 무기질적인 물엿의 단맛 너머로 생동감있는 과즙의 상쾌함이 흘러나왔다.
"너도 하나 먹어봐. 이 사과사탕 진짜 맛있다."
"필요 없습니다. 사탕이나 먹으려고 당신에게 시간을 내어달라 한 게 아닙니다."
"단 거 별로 안좋아하냐?"
"그런 건 아닙니다만....."
유리아는 주변을 힐끗힐끗 의식했다. 날씨좋은 주말, 번화한 상점가. 이 두 조합이라면 커플이 없으려 해도 없을 수가 없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온통 다정하게 팔짱을 낀 남녀가 입에 문 사탕 보다도 달달한 시간을 만끽하느라 바빴다.
"이래서는 저희 관계도 오해를 살 것 같잖습니까?"
"어얼씨구."
"....?!"
"뭔 그런 걸 의식하고 앉아있냐?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잘 따라오라고."
"쓸데없다니 어떻게 그렇게 하찮다는 듯이 반응할 수 있죠? 이쪽은 진지하게 우려하는 건데. 혹여나 이 모습을 다른 학생들이 봤다가는 어떤 소문이 돌지 모르는... 자, 잠깐, 멋대로 먼저 가버리지 마세요! 무시하시는 건가요?!"
에반은 유리아에게 대꾸도 하지 않고 갈길을 갔다. 무시당해서 빈정 상한 유리아가 하던 말을 멈추고 그 뒤를 쫓았다.
"에반 플루토 씨. 이제 슬슬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는 건지 알려주시죠?"
"아까도 말했잖아. 달다구리한 거 먹으러 간다고."
"여태 실컷 드시지 않았습니까?"
"아니지. 지금까지 사먹은 것들은 달짝지근한 거고, 우린 지금 달다구리한 걸 먹으러 가는 길이고."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제가 당신과 주말 약속을 잡은 건 이런 나들이나 하고 싶어서가 아니니까, 여기서 용건을 마치면 바로 학원으로 돌아가죠. 최대한 빨리 말입니다."
"유리아 넌 지금 즐겁지 않아? 한가한 주말, 쾌청한 날씨, 맛있는 과자. 이런 환경 속에서도 그렇게 인상 구기는 게 오히려 대단할 정도네."
유리아가 그 말을 듣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에반의 지적대로 이런 행복한 공간에서 혼자만의 어둠에 빠져있는 자신이 어리석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유리아는 도저히 이 풍경에 섞이지 못했다. 그들이 느끼고 있는 여유, 평안, 행복, 즐거움, 단맛. 그 모든 걸 공감할 수 있을 것만 같다가도 이내 그 자리에 자신을 이입하는 순간 감정이 무언가에 가로막히더니 순식간에 무기력함 속으로 곤두박질 쳐버린다.
마치 머릿속 어딘가에 잡음의 벽이 굳게 자리잡은 것처럼.
고개를 세차게 저어봐도 머릿속의 잡음이 떨어져 나가지는 않는다. 에반 플루토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저어대는 유리아를 보자 뭔가 수상한 것이 그녀에게 있음을 직감했으나 입밖으로 꺼내 화제를 삼는 것을 삼가기로 했다.
"전 조용하고 사람 없는 좁은 공간이 제일 좋습니다."
"그렇구나. 이런 인싸 냄새 진동하는 번화가를 선택한 내 최악의 센스를 탓해야겠군."
"어차피 저를 생각해서 장소를 고른 게 아니잖습니까. 그냥 단것이 땡겼을 뿐이였던 거 아닙니까?"
"어허허 거 참. 날 너무 잘 아네."
군것질거리를 탐하는 에반의 발걸음이 어느 작은 초콜렛 노점상 앞에서 멈췄다. 큼지막한 솥에 담긴 액상 초콜렛을 길다란 막대기로 저을 때 마다 묵직한 단내가 진동했다.
"없던 식욕도 생겨날 향이군요."
"달콤한 냄새가 나면 꼭 엘리아가 생각이 나더라."
"그거 프로포즈인가요?"
"어떻게 하면 이게 프로포즈가 되는 거냐?"
에반은 동전 몇 닢을 꺼내 가판대로 밀어넣었다.
"제일 잘 팔리는 거로."
상인은 살구만한 크기의 초코볼이 여덟알을 작은 상자에 담아서 에반에게 건냈다. 에반은 흡족하게 웃으며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옆에 서있는 유리아를 보았다.
"넌 안 살 거야?"
"무의미한 소비는 최대한 지양하는 주의입니다."
"무의미하다니. 너 지금 이렇게 정성스럽게 초콜렛을 젓는 아저씨의 수고의 의미를 무시하는 거구나?"
"반론할 가치도 없는 말장난이군요. 사고 싶은 걸 사셨으면 어서 가던 길을 서두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또 에반의 페이스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냉소적으로 받아친 유리아가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에반은 유리아가 향하고 있는 곳의 정반대 방향의 골목길로 향해 걸어나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버리고 가는 에반의 뒷모습을 유리아는 황당하다는 듯이 멈춰서서 쳐다봤다. 에반은 그런 유리아를 힐끗 보며 또 놀린다.
"뭐하니? 어디로 가는 중인지도 모르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앞장서서 가는 걸까?"
"...."
유리아가 빠른 걸음으로 에반에게 따라붙었다. 또 골탕먹어서 얼굴이 빨개진 유리아가 잽싸게 거리를 좁혀올 때마다 그녀의 구두굽이 바닥을 밟는 소리가 또각또각하고 울렸다.
"정말이지 당신이라는 사람은...."
"진정하고 이거나 같이 나눠먹자."
"사양하겠습니다."
"쳇, 딱딱하기는. 그럼 나 혼자 다 먹어버릴 거다."
"그러시던가요."
에반은 무심한 유리아를 두고 초코볼 하나를 꺼내서 보란듯이 입에 집어넣었다. 혀 위에서 몇 바퀴 굴린 것 만으로 진한 단물이 퍼져나갔다. 초콜렛 특유의 묵직한 단맛 사이로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이질적인 향기가 감춰져있었다.
"안에 뭐가 들어있나봐. 연유나 캐러멜 퍼지였으면 좋겠는데 그런 향은 아닌걸. 뭘 집어넣은 거지?"
에반은 어금니 사이로 초코볼을 끼워서는 그대로 깨물었다. 으깨진 초코볼 안에 감춰져있던 비밀의 크림이 정체를 밝히는 순간 코가 뻥 뚫릴 만큼 상쾌한 향기가 입안을 가득채우다 못해 목으로 넘어갔다. 그렇다, 민트였던 것이다.
"으엑 퉤퉤테퉷!! 민트초코잖아!! 퉤엣!!"
"그렇게 뱉으시면 어떡합니까?"
"그럼 날더러 민트초코를 삼키라는 거야? 넌 양치할 때 거품 다 삼키니?"
"그렇게 심하게 말할 것 까지는 없잖습니까. 그것도 방금까지 가게 아저씨의 수고의 의미를 무시하냐느니 뭐니 하신 분이. 그리고 민트초코도 누군가에게 있어서 취향에 맞는 음식일 지도 모르는데."
"민트는 색깔이지 음식이 아니야. 왜 사람들은 자꾸 그 영역의 경계를 허무려고 하는 걸까? 아아, 혹시 유리아 너 민트초코 좋아하니?"
"아뇨. 민트차는 즐겨 마시지만 초콜렛과는 좀...."
에반 플루토가 아직 일곱개나 남은 초코볼을 유리아의 손에 억지로 쥐어줬다.
"너 이거 다 먹어."
"무슨?!! 왜 저한테 떠넘기시는 거죠?"
"떠넘기다니 단어 선택 거슬리네. 선물한 거야, 선물."
"필요 없습니다. 안 먹을 거니까 도로 가져가셔요."
유리아가 민트초코볼을 에반에게 돌려주려 했으나 그는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그렇게 누르워 길가 한복판에서 초콜렛을 서로 주려고 투덕대고 있는 두 남녀를 행인들이 이상하다는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의식한 유리아가 에반의 웃옷 주머니를 벌려서는 초코볼팩을 쳐넣어버렸다.
"본인이 산 거니까 본인이 끝까지 책임지셔야죠!"
"난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그게 뭐가 자랑이라고 그렇게 당당하게 소리치시는 겁니까?!"
"그치만.... 이걸 어떻게 하라고? 양치질 할 때 치약 대신 쓰자니 초콜렛이 잔뜩 있는걸."
"도저히 못 먹겠으면 그냥 버리시면 되잖습니까?"
"그러자니 아까워. 동전을 쓰레기로 만들다니 그건 연성에 실패한 연금술이잖아."
"정말 귀찮군요. 루에리아 양이나 엘리아 사감님께 선물하시던가요."
"안 돼. 먹다 만 걸 준다니. 게다가 민트초코 같은 걸 줬다가 상처 받으면 어떡해?"
"뭐라구요? 전 상처 받아도 상관 없는 겁니까?"
"내가 언제 그런 식으로 말했어?"
말문이 막힌 유리아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았다. 워낙에 말 섞을 상대가 적은 그녀였기에, 누군가와 이렇게 목소리를 높여가며 떠드는 것은 프릴 루에리아와의 토론을 제외하면 지극히 오랜만이다. 그런데 그 말상대가 하필 에반 플루토라니, 그것도 대단한 화제도 아닌 고작 민트초코볼 가지고 이렇게 까지 옥신각신 하다니. 유리아의 자존심이 구겨지는 소리는 아무래도 에반의 귀에 닿지 않는 모양이다.
"다 왔어. 이제 민트초코로 얼룩진 미각을 정화할 시간이야."
에반의 말에 유리아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곳은 입지가 좋다고는 도저히 말못할 후미진 골목 구석이였다.
"이런 곳에 있는 가게가 정말 믿을만한 건가요? 과자가게가 있을 만한 곳은 아닌 걸요. 보이는 거라곤 저기 저 설국식 국수가게 뿐이잖습니까."
"저거 국수가게 아니야. 과자가게야. 우리가 갈 곳이지."
의아함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유리아를 뒤로 하고 에반은 천설당의 미닫이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주인장, 나왔어."
에반이 머뭇거리는 유리아의 팔을 끌고 들어오며 그렇게 말했다. 넉살좋게 인사를 건내는 에반을 맞이하는 건 체격 좋은 근육질의 남성 점장이였다.
"여전히 존댓말은 아민 제국보다 깊은 곳에 쳐박아 놓았군요."
"뭐 그렇지. 그러니 이제와서 건지러 가기도 귀찮잖어. 그보다도 가게 디자인 좀 손보는 게 어때? 국수가게인 줄 알았대. 손님이 적은 이유가 다 있었어."
"그 말본새는 여전하시네요. 한대 때려드리고 싶지만 어여쁜 일행분을 봐서 참겠습니다."
"아냐 아냐 난 진지하게 조언하고 있는 거라고. 이참에 그냥 국수가게 하는 거 어때? 동방 애들 타깃으로 해서. 주인장이라면 국수도 잘할 거 같은데."
"실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어서 앉으시죠. 기다리고 계신 분이 있으니까요."
"기다리고 있는 사람? 아아...."
가게 안에는 먼저 도착한 프릴 루에리아가 테이블에 자리잡고 에반 플루토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하던 가게에 활기가 차는 걸 느낀 프릴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에반을 발견했다. 에반을 본 그녀의 표정이 밝아진 것도 잠시, 이내 에반 옆에 차가운 표정으로 서있는 유리아를 보자 프릴의 표정도 경직되었다.
"어째서 루에리아 양이 여기에 있는 거죠?"
"있을 수도 있지 쟤는 과자도 못 먹나?"
"그럼 우연히 마주친 것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내가 불렀어."
유리아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반은 유리아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며 프릴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안녕 프릴. 오래 기다렸니?"
"아뇨!! 저, 그러니까.... 30분 밖에 안기다렸어요."
"허허허 오래 기다렸구나. 늦어서 미안."
에반이 프릴이 있는 테이블에 앉으려 하자 프릴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옆테이블로 옮겨앉아 거리를 유지했다. 유리아는 프릴이 앉은 테이블에 앉았지만 프릴과 마주보고 앉지 않도록 옆으로 땡겨앉았다. 에반이랑 같은 테이블에 앉긴 싫고, 그렇다고 프릴과 마주보고 앉는 건 좀 그렇다는 심보였다. 결국 생판 남 보다도 어색한 3자 회담이 완성되었다.
"야, 다들 이렇게 섭섭하게 굴거야? 세 명이서 4인용 테이블 두 개 차지하는 건 또 뭔 상황이야? 기왕 주말에 날 잡아서 모였으면 좀 살갑게 옹기종기 모여앉으면 좋잖아."
에반이 자신이 앉은 테이블을 두 소녀가 앉은 테이블 쪽으로 밀어서 붙이자 유리아가 테이블을 당겨서 떼어놓았고, 프릴은 의자를 옆으로 옮겨서 에반과 거리를 벌렸다. 에반 플루토는 순간 혈압이 발근 올라서 관자놀이가 일어설려 했으나 참았다.
"그러고 보니 너희 둘은 같은 반이잖아? 동급생끼리 친하게 지내는 게 어때?"
"에반 플루토 씨, 저희는 초등부가 아닙니다. 고등부 씩이나 됐으면 누구와 친하게 지내고, 누구와 소원하게 지낼지 정도는 알아서 정하고 싶습니다."
유리아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고, 프릴은 침묵했다. 화기애애와는 거리가 먼 분위기에 당황한 점장이 조심스럽게 메뉴판을 올려놓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자, 자 됐으니까 일단 뭐부터 좀 먹자! 달다구리한 걸 먹으면 기분이 좀 풀리고 원만한 대화가 가능할...."
턱!! 에반이 허둥대며 메뉴판을 펼쳤지만 유리아가 가로채서는 덮어버렸다.
"나들이 나오려고 당신을 부른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씀 드렸죠? 시간 약속까지 잡은 걸 보니 처음부터 프릴 양도 만날 생각이였던 모양이군요?"
"딱히 한 번에 한 명만 봐야하는 이유는 없잖아?"
"루에리아 양이 듣는 앞에서 할만한 얘깃거리는 아니라는 점 정도야 아실 분이 이러십니까? 안 그래도 듣는 귀 없는 자리가 필요해서 학원 밖에서 얘기하는 건 꺼려졌는데. 무엇보다도 이렇게 하실 생각이셨으면 저희 둘에게 사전에 공지를 하고 의견을 물어봐 주셨어야죠."
"어 음... 그게 말이야. 두 명이 아니야."
유리아와 프릴의 얼굴에 물음표가 번져나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설마 또 오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어."
"뭡니까 그 모호한 대답은? 온다면 대체 누가 오는...."
미닫이문이 열리자 문에 달려있는 종이 딸랑거리며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소리를 냈다. 가게로 들어온 사람은 한명이 아니였다. 수많은 일행을 대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넓지는 않은 가게가 순식간에 북적였다.
"아라한 양?"
부채로 입을 가리고 있었지만 눈만 봐도 언짢아보이는 아라한이 에반과 프릴, 유리아를 힐끗 힐끗 번갈아보았다. 옆에 있던 다른 학생이 의자를 끌어서 아라한에게 앉도록 권했으나 그녀는 사양하는 손짓을 보냈다.
"제 호의에 이렇게 무성의하게 답하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였고..... 또 마지막이기를 바라야겠군요."
아라한은 종이 쪽지를 하나 꺼내서 에반에게 보란듯이 펼쳐 흔들었다. 내용은 간략했다. 생각이 있으면 누르워에 있는 천설당이라는 가게를 찾아오라는 게 전부였다.
"아선 양에게 당신이 보내는 답장이라고 전달 받았는데, 이런 쪽지 한 장만 덜렁 적어 놓으셨더군요."
"그래도 온 걸 보니 생각이 있나보네? 근데 난 분명히 혼자 오라고 썼던 거 같은데 아직 아그루스 글자를 제대로 못 읽나봐?"
"무례하다!! 감히....!"
허리춤에 꽂힌 칼을 뽑으려는 학생을 아라한이 저지했다. 딱딱한 표정을 부채로 감춘 아라한, 칼을 차고 있는 수많은 학생들, 당황한 프릴, 고개를 젓는 유리아, 심각한 표정의 가게 주인.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심각해지자 에반의 안색도 구겨졌다.
"아라한 양. 당신이 모습을 드러내다니 참 드문 일이군요. 학생 위원회 총회합 때도 매번 직접 참여하지 않고 허설 양을 대리로 세우시던 분이 어떤 심경의 변화로 이런 곳까지 행차하셨을까요?"
유리아가 아라한과 시선을 마주보지 않은 상태로 말했다. 그야말로 한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어라? 릴리스 양이야말로 교직원과 다정한 주말을 보내며 청춘을 즐길 줄 아시는 분이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는데 말이죠."
"제 어머니의 고향도 동방 땅이였습니다만, 그곳에는 남의 장사터에서 이렇게 몹쓸 장난감을 들고 설치는 관습이 없습니다."
유리아가 허리춤에 단검을 찬 곤룡회 학생들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질타하자 아라한도 맞받아쳤다.
"말씀을 섭섭하게 하시네요 유리아 양. 몹쓸 물건을 들고 남의 땅에서 설치는 건 저희가 아니라 제국인 침략자들의 특기 아닌가요? 아아, 유리아 양은 반쪽짜리 혼혈이니까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어렵겠군요. 여기선 순도 100% 제국인 침략자에게 물어봐야 좋겠죠, 프릴 루에리아 양?"
프릴은 아라한의 도발에 대답하지 않고 무표정, 무반응, 무감정으로 대응했다.
"돌겠네 이거..."
에반은 또 다시 난색을 표했다. 이들의 관계가 영 좋지 않다는 건 엘리아에게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게 그냥 동급생일 뿐인 열몇 살 짜리 여자애들이 이렇게까지 살벌하게 기싸움을 할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아니 니들은 새파랗게 어린 것들이 무슨 원수를 졌다고 그렇게 으르렁거려?"
"나이는 상관 없습니다. 견원지간이라는 동방의 옛말 들어보셨는지요? 저희는 태어날 때 부터 개와 원숭이 처럼 전혀 다르게 태어났고 필연적으로 갈등을 피할 수 없는 입장일 뿐입니다."
"말은 잘한다. 아무튼 칼차고 온 꼬락서니를 보니 손님으로 온 건 아닌 거 같은데, 주인장한테 민폐니까 과자 안 사먹을거면 썩 나가도록 해."
"그러죠. 저희라고 뭐 오붓하게 마주 앉아서 다과회를 즐길 의향은 없으니까요. 어디 그 과자가 무사히 목으로 넘어가겠습니까?"
아라한이 손짓하며 뒤돌아서자 수많은 곤룡회의 여학생들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곤룡회 무리가 가게밖으로 나가자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유리아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는 문쪽으로 걸어나갔다.
"넌 어디가?"
"본인이 방금 말씀 하셨잖습니까? 민폐 끼치지 말고 과자 먹을 생각 없으면 썩 나가라고."
"네가 나가면 어쩌자는 거야?"
"저에게 묻지 마시고, 루에리아 양과 의논하시죠.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시길."
유리아가 차갑게 잘라말하고서는 가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가게 문이 닫히자 요란스럽게 짤랑거리는 종소리가 잠시 메아리치더니 이내 정적만이 가게 안에 남았다. 조용한 가게 안에 둘이 남겨진 에반과 프릴은 뻘쭘하게 앉아서는 어색한 시선을 교환했다.
"선생님은 저와 반장과 아라한 양이 친해지길 바랬던 건가요?"
"친해지기 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얼굴 보자마자 분위기 싸해지지는 않았으면 했지. 솔직히 아직 어린애들인데 어른들에게 물려받은 앙금 때문에 미움을 안고 가는 건 참 슬픈 일이잖냐?"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역시.... 아직은 서로에게 시간이 좀 필요할 거 같아요. 우리는 모두 어른들에게 너무 많은 걸 물려받아 왔고, 이런 대물림은 오랜 세대에 걸쳐서 이어져 내려 왔으니까요."
에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프릴은 억지로 대화를 끌어나가는 대신 유리아가 덮어두었던 메뉴판을 테이블 위로 꺼내올렸다.
"긴장을 좀 했더니 단게 먹고 싶네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 끝내주는 걸 추천해줄게. 저 녀석들도 맛보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다음에 모였을 때는 좀 더 화기애애하기를 바라는 수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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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칼립스 학원의 기숙사는 토요일 낮 시간대가 되면 사생들의 부재로 한산해진다. 금요일 저녁에 시종들의 마차를 타고 부모님이 계신 본가로 귀가하거나, 라쿠이르에 마련한 사택 별장으로 가느라 대다수의 사생들이 빠지기 때문이다.
기숙사에 남은 몇몇 학생들도 평일에 아껴둔 잠을 푹 자다가 이쯤 되면 잠에서 깨어나서는 허기를 채울 겸 누르워나 은행나무 사거리 같은 곳으로 외출을 나선다.
그런 보는 눈이 가장 적을 시간대에 기숙사를 방문한 수상한 불청객들이 있었다.
"찾았냐?"
"없어."
"씨벌 거 꼭꼭도 숨겨놨네."
초대받은 손님일 리는 없는 남자 둘이 무언가를 찾으려고 방을 샅샅이 뒤적거린 바람에 유리아 릴리스의 방이 너저분하게 어지럽혀져 있었다. 하지만 찾는 물건이 도통 보이지 않아 욕설을 내뱉던 그때 남자의 목걸이에서 텔레파시가 걸려왔다.
[니들 뭐하냐? 사감이 눈치채기 전에 잽싸게 '물건'을 찾아서 나오라고.]
"아니 누군 여기서 놀고 있나? 물건이 안 보이니까 못 나오지."
[좆만한 방 안에 숨길데가 있어봤자 얼마나 있다고 못 찾아서 그러고 있어?]
"아 꼬우면 니가 와서 찾으시던가."
[침대 매트릭스라던가, 화장실 환풍구 뒤라던가, 책장 옷장 뒤까지 다 봤냐?]
"안 봤겠냐? 우리가 그리 좆밥들로 보이셨수? 시벌 볼 건 다 봤어. 역시 그년이 방에 안 두고 다 챙겨서 나갔나봐."
[준비성 좋네. 누구랑은 달리 똘똘하잖아. 역시 그 여자애를 찾으러 가는 수밖에 없군. 됐으니까 이제 거기서 나와.]
"가는 길에 얘꺼 빤스 하나 챙겨줄까?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지랄하지 말고 빨리 나와라.]
"알았어. 거 선심 쓴다는데도 뭐라 하네. 이제 어떻게 할겨?"
[암피르에게 오더 넣어. 이미 지령을 내려뒀으니 오더 들어오면 바로 쥐새끼들을 풀어놓을 거다.]
"암만 여자애 하나 잡는 거라 해도 명색이 마법사인데 이리 하나랑 시궁쥐들로 잘 될까?"
[마법사? 흥. 어차피 온실 속에서 자란 철부지 아가씨다. 평생을 제멋대로 살아온 애송이니 좀만 겁먹어도 발 동동 구르면서 어떡해 어떡해만 연발하겠지. 이리까지도 필요 없어. 쥐새끼들 선에서도 간단한 일이다.]
"그럼 암피르에게 연락 때려서 쥐들 싹 풀어놓는다?"
수상한 불청객들이 엉망진창이 된 유리아의 방을 뒤로 한채 기숙사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