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화 〉1-3. 위험한 우등생들 (2) (16/88)


  • 〈 16화 〉1-3. 위험한 우등생들 (2)

    에반 플루토는 난처했다. 수업이 끝난 금요일 오후인 지금, 학원의 주요 업무는 모두 종료되었고, 학생들과 교직원들 모두 주말을 보내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으니 고요와 평화를 만끽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난처했다.

    무엇이 그렇게 그를 난처하게 만드는가? 바로 어딘가 위험한 우등생들로부터  불온한 초대장이 그를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날 포섭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좋아.’


    ‘포섭이라니 우리 그런 어려운 말은 쓰지 말죠. 저희는 그저 저희의 입장을 잘 헤아려주고 목소리를 내줄 지도원이 간절히 필요한 학생들일 뿐이랍니다.’

    ‘그게 바로 포섭이라는 거다, 이 능구렁이 같은 아가씨야.’

    ‘그래도 좀 더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 아니지. 제게 좀 더 기대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이번 주 토요일. 토요일까지 답변이 없으면 거절 의사를 확고히 정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첫 번째 초대장은 아라한이라는 유학생에게서 왔다. 자신을 유학생회 동방 대표이자 곤룡회의 수장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루나칼립스 학원의 모든 동방인 유학생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구심점과 같은 존재였다.

    아라한은 지도원과 교직원들 중 대부분이 귀족 학생들의 눈치나 보고 있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귀족 학생들이 학원의 질서를 입맛대로 주도하는  막을 패가 필요해 에반에게 접근했다. 사실 학원의 질서는 어디까지나  번째, 혹은 세 번째, 어쩌면 그보다도 뒷 순위고, 진짜 목적은 유학생들의 권익과 입지 확대라 봐야겠지만.

    고등학생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수상하고 요염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 소녀는 자기 조직의 이득을 위해 에반에게 학생 대 지도원 이상의 친분을 제안해왔다.

    '손해 볼  없을 텐데요? 다른 학생들은 지도원 님을 언짢게 여기지만, 여기는 얼마든지 기쁘게 당신을 환영할 학생들이 잔뜩 있으니까요. 저희가 티 내기 부끄러워서 평소에는 표정을 이렇게 하지만, 사실 작은 성의로도 되게 좋아하거든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냐?'


    '글쎄요? 그건 어떨까요?'

    제안이라고 해봤자 그녀가 에반에게 기대하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른다. 자신들의 편에 서면 어떤 이익을 약속할지도 명확히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교묘하게 표정을 가리고 있다가 이따금씩 거둬진 부채 사이로 요사스러운 미소를 보여줄 뿐이었다.

    "대화를 끌어나가는 게 더할 나위 없이 동방의 방식이다. 어린 녀석이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려고 떠보기는. 하여간 그런 못된 건 누구한테서 배운 거야?"

    두 번째 초대장은 프릴 루에리아에게서 왔다. 이 작지만 당찬 여학생은 에반이 들려준 아민어 이야기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적극적으로 에스코트해가며 에반과 개인적으로 만날 시간을 기어이 따내는 그녀였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번 주말에 저를 위해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주말에 날 만나서 대체 뭐하려고? 꿀같은 휴일을 쪼개서 인건비도 안 나오는 1:1 보충 수업을 해달라 이거구나.'


    '앗! 아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이기적이여서 선생님 입장에서 생각하지를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아아 야, 네가 그렇게 나오면 어떡하니. 그냥 한번 궁시렁대본 건데 내가 쓰레기가 되어버리잖아.'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 말씀대로 사람의 수고를 공짜로 취하려는 건 나쁜 짓이에요. 계산은 철저히 해야죠. 그러니 여기 수업료 드릴게요.'

    '금색 지폐 12장....?!!'


    '루나칼립스 학원의 교수님들이 강의 한 시간당 받는 평균 수업료를 계산해보면 대략 그 정도 하더라고요. 부족하면 몇  더 얹어드릴까요?'

    '더 얹긴 뭘 더 얹어 덮밥도 아니고.'


    '그러면 선생님의 본사 기준으로 책정한 S급 NPC 의뢰비로 지불하면 될까요?'

    프릴은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No Problem Company 파견 협약 안내서의 페이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너 말이야. 어린 학생이 이렇게 큰 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아니야.'

    '큰 돈이요??'

    '.......'


    '선생님?  그러세요?'

    '됐다. 도로 가져가라.'

    '어, 어라?! 어째서 수업료를... 아니 의뢰비를 돌려주시는 건가요?'


    '수업료건 의뢰비건 나는 돈 필요 없어. 그 돈으로 너나 예쁜 옷 사 입고 근사한 가게에서 덜 익은 소고기 썰어 먹으면서 주말을 보내라고.'


    '돈이 싫으시다면 어떻게 성의를 보여드리면 좋을까요?'

    '대체 왜 그렇게까지 나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하는 거니? 이해하질 못하겠네.'


    '역시 부담되시는 건가요? 죄송해요. 모처럼의 휴일을 자신에게 써달라고 부탁 들어도 당황스럽겠죠. 무리한 부탁해서 실례 많았어요. 주말 잘 쉬세요.'

    '아 알았어, 알았다고. 까짓  시간 좀 할애해서 어울려줄 테니까 그렇게 풀 죽지 말라고. 마음 약해지게시리.'

    '정말인가요!! 정말인 거죠?!'


    '그래 그래. 대신 이번  번만이다.'


    그렇게 프릴을 돌려보낸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번엔 의외의 인물로부터 초대장이 날아왔다. 바로 유리아 릴리스로부터. 축축하게 젖은 제복과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털레털레 기숙사로 돌아가던 에반을 유리아가 불러 세웠다.

    '에반 플루토 씨. 잠깐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니. 별로 안 괜찮을  같은데.'

    '당신이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습니다. 잠깐, 꼴이 말이 아니시군요. 어쩌다 이렇게 흠뻑 젖으셨죠? 어디 가서 학생에게 밉보였다가 물 속성 마법에 당하기라도 하셨는지요?'

    '그런  아니거든. 날 바보 취급하는 것도 적당히 해두라고.'

    '그럼 대체 우리 학원의 어디서 어떻게 하면 이렇게 젖을 수 있는 겁니까?'

    '분수대에 두  정도 뛰어들었다.'

    '어... 그쪽이  바보 취급 당할 것 같습니다만 넘어가죠. 그보다도 첫 번째야 실수로 빠질 수 있다고 쳐도, 어떻게 두 번씩이나 빠질  있는 거죠? 분수대에.'


    '실수 아니야. 발을 헛디뎌서 분수대에 풍덩 빠진다니 날 그렇게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엄연히  발로 일부러 뛰어든 거니까.'


    '더 이상한 거 아닌가요? 아무튼 분수대 얘기는 여기까지 하죠. 이런 영양가 없는 잡담을 하려고 당신을 찾아온 게 아닙니다.'

    '그거 안 됐네. 난 영양가 없는 잡담이 아니면 너와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은데.  됐으니까 용건이나 말해보라고.'

    ‘학생회 임원들에게 대략적인 보고는 전해 들었습니다. 기숙사에서 오르토스의 학생회와 루나칼립스의 전 학생회가 교섭했다는 것도, 구내식당에서 일어났던 소동에 대해서도. 그리고 유학생회가 당신에게 접근했다는 것까지도.'

    ‘내가 문제될 짓이라도 했나?’

    ‘아닙니다. 오히려 원칙대로 잘 해주셨습니다. 애초에 당신을 문제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이 어디까지나 지도원의 입장에서 내린 판단에 입각하여 조치를 취한 거라면 제가 입맛대로 관섭해서는 안 되겠죠.’

    ‘그럼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야? 문제 삼으러 온 건 아니고, 그렇다고 칭찬하러 온 얼굴도 아닌데.’

    ‘아라한 양이 당신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유학생회가 나한테 접근한 건데 아라한 이름부터 나오네?'

    '그들은 아라한 양의 지시 없이는 움직이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아라한 양 역시 모습을 직접 드러내는 경우가 드뭅니다. 그녀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그냥 오목 한판 두다가 재미없는 이야기를 좀 했지. 친하게 지내고 싶다길래 철벽 좀 치고 그냥 나왔어.'

    '자세한 내막은 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지도원의 역할 이상의 호의나 부적절한 관계는 삼가주세요. 비단 아라한 양 뿐만이 아니라 누구를 상대로도요. 뭐, 제가 굳이 주의 주지 않아도  정도는 아실 분이시죠? S급 플루토 씨.'


    '말과는 달리 신뢰하는 눈빛이 전혀 아닌데. 내 처신은 걱정하지 마. 아무튼 그 얘기 하려고 불렀어?'

    '로제 양이나, 아라한 양이 저에 대한 얘기도 언급 했나요?'


    '응. 입만 열었다 하면 네 이름이 꼭 나왔지.'

    에반의 말을 들은 유리아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상황은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어. 너도 고생이 참 많겠다.'


    '제가 감당해야 할 부분입니다. 신경 써주신 건 감사합니다. 그들이 저에 대해 무슨 얘기를 했을지야 뻔히 예상이 갑니다만...'

    '다만?''

    '로제 양이 당신을 상대할 때는 이례적으로 소극적이라는 점과, 아라한 양이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점은 저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군요.'


    '나? 왜? 내가 걔들이랑 엮여서 네 일거리를 늘릴까봐?'


    '그거는 어디까지나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어쩌면 그보다도 뒷 순위 고민이고, 신경 쓰이는 점은 많습니다.'


    '뭐 이렇게 신경 쓰이는 게 많아? 그러고 끙끙 앓다가 주름 생기면 미모가 아깝잖아. 머리  식히면서 살라고.'


    '그러고 싶지만 좀처럼 잘 되지 않는군요. 딸기우유라도 하나 마시면 괜찮아지겠는데... 아, 아닙니다. 방금 한 말은 잊어주십시오.'


    '학생회에 참견하는 게 아니라면 내가 뭘 좀 거들어줄까?'

    '지금... 제게 친절하게 대하시는 겁니까?'

    '그건 또 무슨 반응이래... 네가 스트레스를 좀 덜 받아야 나도 편하지 않겠어?'


    '흐음... 그럼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이번 주말.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시겠습니까?'

    '잠시만 실례.'


    '어디 가시는 거죠?'


    '잠깐 분수대에 좀 뛰어들고 올게. 잠깐이면 돼, 금방 오니까.'


    '이상한 행동 하지 마시고 제대로 들어주세요.'


    '주말에 날 만나서 뭐하려고?'

    '이 학원에서 당신이 특별히 주의하거나 신경 써야 하는 점을 짚어드릴까 합니다. 원래는  안 해도 당신이 차차 적응하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금방 당신을 눈여겨보는 이들이 생겨날 줄은 예상 못 했습니다.'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만한 사안이였나?'

    '죄송합니다. 휴일인 만큼 오래 시간을 할애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알았어. 어차피 나도 이 학원에 대해서는 알아야 할  많았던 참이야.'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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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뭐가 도대체 그렇게 난처한가 했더만, 데이트 신청을 하루에 세  씩이나 받았다고 자기과시 하는 것이였군요."

    난처하다는 말만 연거푸 반복하며 소파 위를 뒹굴거리는 에반에게 사감 엘리아가 한소리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진심으로 난처하다고!"


    "난처한 건  번째로 쳐두고,  당신의 숙소로  가고 사감실에 와서 제가 일하는데 먼지 피우면서 방해나 하고 계신 겁니까?"


    "말이 좋아 숙소지 그냥 창고 비워놓은 거잖아. 여기 봐. 이렇게나 따뜻한 데다가, 좋은 향이 나고, 푹신한 소파도 있는걸. 너 어차피 퇴근하면 당직실로 가니까 그때는 내가 여길 쓰면 안 되나? 사감대리니까 그 정도는 괜찮지?"

    "안 괜찮습니다."

    "아아 좀 봐줘. 요번에 사준 로쿰을 생각해서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루나칼립스의 지도원을 사탕으로 포섭하려고 하는 겁니까?"

    "칫."

    에반은 쇼파에 발을 쭉 뻗고 누웠다. 여기서 이대로 잠들지 못한다는 게 그저 아쉬울 따름이라 일어나기 전까지는 최대한 등에 감기는 푹신함을 맛보기로 했다.


    "그보다도 당신 말대로 참 상황이 난처하긴 하군요. 하필 프릴, 유리아, 아라한 그 셋이 당신에게 흥미를 느끼고 움직였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제국 전체가 마법이라는 학문을 흠숭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다 같은 길을 걷는 마법사는 아닙니다. 아민 제국의 흔적을 최대한 뒤져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문명의 부흥을 꾀하는 <개척자>들이 있는가 하면, 분에 넘치는 힘을 손에 넣는 바람에 반복되는 비극 때문에 마법의 발전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침묵자>들이 있습니다. 재미난 건 이러한 대조적인 입장 차이는 어른들 뿐만이 아니라 학생들에게서도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현재 고등부 학생회장인 유리아 릴리스 양은 대표적인 침묵자입니다. 반면에 프릴 루에리아 양은 더할 나위 없는 개척자죠."

    "그래서 둘이 사이가 안 좋다고?"


    "다소 설명하기가 복잡합니다. 현재 유리아 양의 학생회장 지지율은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일부 귀족 아이들의 견제가 원인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원인은 개척자 성향을 가진 학생들의 비중이 대폭 늘어난 것이겠죠."

    "출신, 신분에 이어 이번에는 학문적 성향 파벌이라. 재밌게들 놀고 있잖아?"

    "개척자 성향의 증가에 따라 프릴 양을 학생회장으로 세우고자 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고, 학생회를 되찾고자 하는 귀족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이를 계속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유리아 양이나, 프릴 양이나 서로에게 악감정은 없지만 뭐랄까 마주치면 떨떠름해지는 관계가 되어버렸죠."

    "얼씨구. 그럼 그 아라한인가 뭔가 하는 애는?"


    "평화협정 체결 이후 동방 세계에서 파견한 유학생들이 루나칼립스에 오게 되었지만, 아그루스와 동방 양측의 적대 관계가 표면상으로나마 종식된 게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보니 아직은 그 역사의 앙금을 극복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하긴. 한두 명 죽고 끝난 전쟁이 아닌 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국이였던 낯선 영토에서 차별과 맞서기 위해 동방의 학생들은 놀라울 정도의 유대로 결속되어 있고, 그들의 충성을 한몸에 받고 있는 존재가 바로 아라한 양입니다."

    "그 정도로 지지를 넘어서 충성을 받는다는 건 그만큼 정통성이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겠지. 분명 여기 오기 전에 동방에서는 꽤나 요주의 인물이였다고 봐야겠는데."

    "어떻습니까? 당신과 함께 주말을 보내고 싶어하는 위험한 우등생들은 대략 이런 아이들입니다. 도움이 됐나요?"


    "그럼. 덕분에 더 구체적으로 난처해졌어. 알려줘서 고마워."

    "그래서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어떻게 할 거냐고?"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에반이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새파랗게 어린 것들이 엉?! 벌써부터 정치에 맛들려서 잘들 놀고있네! 그래봤자 애들은 애들이니까 NPC에게 맡겨두라고."

    에반 플루토는 근거도 없고 출처도 불분명한 자신감에 차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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